민족의 큰 명절인 한가위 연휴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바이러스 때문에 멀리 갈 수는 없지만 조촐하게나마 식구들과 명절 기분을 내보려고 저도 장을 보고 식단을 짜느라 나름 분주합니다.
내가 피해야 한다는 이유로 붉은 육류를 좀처럼 사들이지 않는 편이지만, 그래도 손님을 치르다 보면 육류 없는 상차림은 곤란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상의 허전함은 물론이거니와 채우는데 드는 공력이나 가격도 육고기 반찬을 배제한 잔칫상이 더 들게 마련입니다. 여름 태풍이 휩쓴 이후 과일, 채소 가격은 엄두가 안 날 만큼 올랐습니다.
명절 첫날 옆집 사는 시가 식구들과 저녁을 같이 할 예정이라 돼지고기와 닭고기를 마련합니다. 불가피한 외식이 아니곤 백미 밥을 안 먹은 지 오래지만, 송편도 추석 기분에 빠질 수 없으니 좀 마련해야 합니다. 돼지고기는 수육을 하고 닭은 볶음을 하려고 합니다. 지난 명절엔 고기 대신 두부를 넣은 전을 만들어봤으나, 이번에는 전이나 부침은 일절 제외해 보기로 합니다. 동물성 기름을 제한한다면서 고온으로 튀기거나 부친 요리를 내놓는 것은 오히려 가족의 건강에 더 나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닐까 싶어서입니다.
우리 명절의 주된 요리가 전이고 명절 노동의 가장 중심이 다종다양한 전 부치기지만, 현대인에게 기름 범벅인 전은 그야말로 독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신석기 시대 이후 대체로 그래왔듯 평소 통곡물과 과채 위주의 식사를 하며 살아온 사람이라면 1년에 몇 번 쯤 중요한 날, 기름기 꽤나 도는 음식을 먹어주는 것이 필요할지 몰라도, 하루에 한 번 이상 육류를 먹고 적어도 달걀부침이나 치킨과 맥주를 거의 매일 접하는 사람이라면, 명절이라고 더 챙겨 먹을 필요가 없는 음식들입니다.
추석 차례상에 오르는 음식 중 현대인의 몸과 마음에 두루 양식이 되는 음식은 햇곡식과 햇과실이지요. 사실 그것에 감사하기 위해 부족국가 시절부터 우리는 이 계절을 택해 하늘과 조상들께 감사의 예를 차려왔고 말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햇곡식과 햇과일은 비싸고 귀해졌고 그나마 카놀라유 같은 식용유는 저렴해져서 명절 때든 아닐 때든 펑펑 써도 될 정도로 흔해졌다는 것입니다. 조상님 입장에선 입맛이 쓴 일입니다.
그리고 술.
명절이든 아니든 사람이 모여 앉으면 술이 빠질 수 없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지겹게 공부하기 싫어하던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술맛을 본 뒤로 계속 그랬습니다. 강제구금 상태거나 임신, 출산이라는 불가항력의 상황만 아니라면, 술자리에서 양이나 속도 시간 등 그 어느 것에도 처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반쯤은 강제적이지만 반쯤은 자발적인 지난 1년 몇 개월의 시간 동안 식도락의 정점에 있는 술 생각이 적었을 리 만무하겠지요.
두 차례 장기단식을 끝마치고 한참 생채식 수련 중일 때 지도해주시던 선생님께 ‘선생님, 술은 언제 먹을 수 있나요?’라고 여쭤봤다가 ‘죽으려면 뭔 짓을 못 하겠나?’라는 일갈을 들었습니다. 그랬던 것이 얼마 전에는 좀 긍정적인 답을 들었습니다. ‘좋은 술을 담가서 한 잔씩 먹게’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좋은 술’이란 것이 무엇인가. 그때 부터는 그게 또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한 잔씩’이라니, 이건 정말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술을 담그면 적어도 한 항아리는 담글 텐데 뉘라서 그 앞에서 자제하겠는가 말이지요. 천하의 금욕주의자 서경덕 선생도 못 할 일이 아닐까 싶어서 선생님으로부터 윤허를 받고도 아직 ‘좋은 술을 담그는 경지’를 시도해 보지는 못했습니다.
최근에는 틈틈이 소설 동의보감과 의서 동의보감을 뒤적거리고 있는데, 거기에도 술을 이용한 치료 내용이 상당히 나옵니다.
서양에서는 술이란 것이 신들의 음료로 신화 속 빠지지 않는 소재이지만 동양에서 술은 민간의 비방에 한몫을 합니다. 효능을 무엇으로 봤으며 그것을 접한 사람들의 계산이 어디에 닿아있는가에 따라 기능과 진화가 달라집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술은 향락의 필수품목입니다. 술은 자율신경계 부교감신경에 작용하여 모세혈관을 확장하고 몸을 따뜻하게 하고 긴장을 완화합니다. 이 정도까지 작용하게 하면 추위와 긴장에 특효약이 될 텐데, 그다음은 자율신경계 파괴의 극치까지 내달리는 과정이 기다리기도 합니다. 동양의 술뿐 아니라 서양의 술도 이 정도의 효과를 보기 위해 종종 이용되곤 합니다. 영화나 소설에서 위스키나 럼주, 코냑 등을 체온 유지를 위해 마시는 장면을 흔히 보셨을 것입니다.
그에 비해 동양의 술은 훨씬 다양한 재료를 다양한 의학적 목표하에 만들어 왔습니다. 술에 약재를 더 해 그 약재의 약효를 최대한 용출시켜서 이른바 물약을 만든 것이지요. 술을 한잔했을 때 일어나는 모세혈관 확장 혈액순환 체온상승 등 기본적인 효력 덕분에 약효를 온몸에 확산시키는 것에도 유리하다고 해서 동의보감에는 환약의 경우 더운술 한 모금으로 넘기라는 처방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지난해 남편은 모 단체 주점에선가 개성인삼주를 받아와 책장에 두고 매일 한 모금씩 약으로 들었습니다. 저는 22년 전 인삼주를 한 병 마시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빨갛게 된 채 바닥이 승천하는 듯한 경험을 한 일이 있습니다.
우슬이라는 풀이 관절에 좋다고 하여, 지방에 갔을 때 담근 우슬주를 선물 받아 일행과 새벽 네 시까지 그 술을 다 풀어 먹은 결과 다음 날 관절 상태는 태풍의 복판이었던 경험도 있습니다.
남편이 추석 연휴 부모님께 대접한다고 진도 홍주를 구했던데, 홍주에는 지초라는 약초가 들어있습니다. 지초는 예로부터 상처, 화상 치료 등 연고제로도 활용되었고 지초로 빚은 술은 신경통, 위장병, 설사, 변비, 복통, 체중조절, 식중독 등에 효과가 있으며, 특히 술을 조금씩 오래 복용하면 정력이 세어지고, 요통, 어혈 등을 치료할 수 있다고 합니다. 북이나 중국에서는 지초를 이용한 항암제 등도 개발 중이라는 글도 심심치 않게 보입니다.
다만, 산삼 못지않은 지초의 약효를 보려면 홍주 역시 약으로 딱 한 잔씩 들어야 합니다. 과연 연휴 내내 하루 한 잔이라는 극강의 자제력을 보일 수 있을까요?
허준 선생은 ‘동의보감’에서 “술은 석 잔을 넘기지 말라”며 “술은 오곡의 진액으로 사람을 이롭게도 하지만 상하게도 하며 오래 마시면 힘줄이 늘어지고 수명이 단축된다”라고 기록하셨습니다.
또한 술은 “약 기운을 잘 퍼지게 하고 온갖 사기(邪氣)와 독한 기운을 없애고, 혈맥을 통하게 하고 장과 위를 튼튼하게 하며 피부를 윤택하게 한다. 근심을 없애고 성내게 하며 말을 잘하게 하고 기분을 좋게 한다. 그러나 술을 오랫동안 마시면 정신이 상하고 수명에 지장이 있다”라고도 하셨습니다.
약이지만 독인 술. 석 잔 이상은 마시지 말라는 술. 세상을 쉬워 보이게도 하지만 지옥으로도 만드는 술.
그 지키고도 싶고 무너뜨리고도 싶은 묘한 경계 때문에 저는 아직 ‘좋은 술 담그기’에 도전하지 못하고 파도 앞에서처럼 이러고 있습니다.
‘술아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부디, 약이 되고 힘이 되는 명절 연휴 보내시기를. <저작권자 ⓒ 자주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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