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23일 엄수된 ‘고 신혜원 동지 추모의 밤’ 결의글과 추도사입니다.
이혜진 민들레 대표 결의글
혜원이가 우리 곁에 없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고작 1년 남짓한 투병생활이었는데 혜원이가 우리 곁을 이렇게 빨리 떠날 거란 상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동지들께 정말 미안합니다. 민들레가 혜원이를 끝내 지켜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혜원이를 아끼는 가족들에게도 정말 미안합니다. 혜원이의 마지막 가는 길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면목없습니다.
하루 종일 죄책감과 원망 사이에서 싸웠습니다. 내가 더 잘 했으면 혜원이가 이렇게 가지 않았을 거라는 자책, 마지막 순간 아침 일찍 병원만 갔어도 혜원이가 외롭게 가지 않았을 거라는 자책, 그러다 또 누군가 대상을 찾지 못한 원망으로 마구 화가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문득 신혜원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혜원이는 치료 내내 한 번도 일희일비 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묵묵히 원칙적으로 치료에 임했습니다. 나중에 걷기 힘들어지고, 먹기 힘들어졌어도, 단 한 번도 좌절의 말이나 원망의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저 담담히 견디고 묵묵히 웃었습니다. 한 달 내에 일어나자, 걷자, 집에 가자, 하면 느리게 웃었습니다.
나에게 그런 혜원이의 마음이 있는가 돌아봅니다. 괴로워도 슬프고 외로워도 동지들 믿고 한 길을 꿋꿋이 갔던 어리석으리만치 타협없는 한 생을 살았던 혜원이의 마음이 나에게 있는가.
거세게 동요하는 마음, 슬퍼서 주저앉고 싶은 마음을 붙잡고 혜원이를 떠올립니다.
운동이 가장 어려웠던 순간에도, 조직이 가장 어려웠던 순간에도, 포기를 몰랐던 신혜원. 무서운 원칙으로 선배들을 부끄럽게 하던 신혜원을 오늘 정말 너무너무 닮고 싶습니다.
말을 아끼고 실천으로 말했던 신혜원, 수많은 작품으로 말했던 신혜원. 동지들에겐 기댈 어깨와 미소를 주고 삶으로 원칙을 보여줬던 신혜원을 너무 닮고 싶습니다.
왜 우리는 누군가를 잃고서야 누군가의 위대함을 깨닫게 되는 걸까요 왜 이렇게 우리는 어리석고 바보같을까요..
하루 종일 페이스북을 가득 채우는 혜원이의 미담 앞에 자꾸 주저앉고 울고 싶은 마음을 다잡아 봅니다. 신혜원처럼 우직하게 살고 싶습니다. 제2의 신혜원 제3의 신혜원이 나오는 민들레. 실천의 강자, 부드럽지만 강한 사람, 타협없는 예술투사들이 가득한 민들레가 되겠다고..
오늘, 신혜원동지 앞에서 맹세합니다.
윤미향 의원 추도사
신혜원 동지가 하늘로 갔다는 소식을 듣고 세상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왜 하느님은 이렇게 착한 사람들을 빨리 당신 곁으로 데려 가시느냐고 항변했습니다. 우리도 질기고 끈질기고 건강하게 살아남아 그 날을 죽어서가 아니라 살아서 누리고 싶다고, 그게 이리도 힘든 일이냐고 따져 물었습니다.
희망의 등불 하나를 놓친 심정입니다. 함께 하고픈 일들이 아직 너무나 많은데, 이제 어찌할꼬... 제 자신을 탓하며 지난 시간들을 후회했습니다.
참담했습니다. 그리고 참 미안했습니다. 아픈지 알고 있었어도 그의 미소에 속고 있었나 봅니다. 그 자리에 더 오래 제가 찾아갈 때까지 기다려 줄 줄 알았습니다. 말 안해도 알겠지, 설명하지 않아도 알겠지, 그렇게 제 자신에게 주문 걸며 님 곁에서 떨어져 있었습니다.
너무나 미안합니다. 어려운 시간 함께 해주지 못해서, 함께 안아주지 못해서, 따뜻한 밥 같이 못 먹어서, 너무나 미안합니다.
부끄럽지만 오늘 나는 그대가 떠나는 길에 내 눈물 한 방울 더하여 먼 길 가시는 길 조금이라도 덜 거칠기를 바라며... 여기 이 소중한 동지들과 함께 그대의 죽음을 넘어 함께 잡은 손 앞으로도 놓지 않을 것임을 약속하기 위해 여기 이 자리에 섰습니다.
님이 살아온 길은 짧은, 너무나 억울하게 짧은 인생이었지만 돌아보니 님이 걸어 온 길은 참 길었더이다. 희망으로, 기쁨으로 해 낸 일이었지만 너무나 험난하였더이다.
얼마나 아팠을지, 그 아픔을 아프다고 소리도 내지 않고 떠났을 그대가 참 아파서 떠나는 그 길조차도 얇게 웃는 미소 지으며 가고 있는 듯합니다.
몸둥아리에 병을 만들어 낼지 알면서도 감옥 가는 길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길에서 시커먼 먼지비 맞기를 피하지 않았고, 차가운 길바닥에 눕기를 어려워하지 않았더이다.
가슴에 혹이 생기는지도 모르고 그 녀석이 좋아할 차가운 거리에서 억울한 역사 곁에 함께 서 있었더이다.
그 길이 이 땅의 민중과 함께 하는 일이라면, 세월호 노랑리본이 되고, 우리민족 자주를 세우고, 통일을 위한 길에, 베트남의 미국전쟁에서 한국군과 미군에 의해 인권을 짓밟힌 희생자들을 위한 길에, 재일조선학교 아이들과 함께 하는 길에, 몸으로 그림으로 삶을 살아냈더이다.
그대는 묵묵히 세상을 바꾸는 조용한 혁명가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벗이기도 했습니다. 할머니들의 삶과 뜻을 작품으로 널리 알렸고, 할머니들의 미술 치료 선생님이 되어 길원옥 할머니, 김복동 할머니의 곁에서 오랜 시간 머물렀습니다. 이름없이 잊혀져 갈 할머니들의 삶을 들풀로, 들꽃으로 노래했습니다.
그대가 남긴 판화작품이, 그대가 남긴 들풀같은 발자취가 오래도록 우리 곁에 머물 것입니다.
그가 못다한 그 노래를 이제 살아있는 우리가 마저 불러야겠지요. 님이 간 그 곳에서 할머니들이 따뜻하게 등 토닥여 주실 것입니다. 너그럽고 담담한 미소로, 늘 우리 곁에 있어 주었던 따뜻함을 기억하겠습니다. 길고 깊었던 고통의 시간을 뒤로 하고, 그 곳에서 편안한 안식을 누리기를 기원합니다.
장재희 베란다항해 작가 추도사
사랑하는 혜원언니. 언니가 너무나도 예뻐하고 애지중지하던 베란다항해 식구들이에요.
어제 우리 작업실이 있던 홍대를 지나가다 문득 언니가 그림 모임을 제안했던 날이 생각났습니다. 그때 우리는 몇 번 보지 못한 사이였는데 언니는 구구절절한 제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면서 “재희는 그림을 그리면 행복할 거야” 라고 이야기를 했었죠. 그날 저는 조용히 제 이야기를 들어주던 언니랑 같이 그림을 그리면 행복할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신림동에 있던 제 자취방의 베란다에서 우리는 베란다항해를 시작했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향한 그림’, 그게 베란다항해의 기치였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그저 붓과 펜을 가지고 때로는 거대한 미제를 향해, 때로는 여전히 득실거리는 이 땅의 적폐 세력들을 향해 덤볐습니다. 또 그렇게 같이 싸워나가는 우리 동지들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그렇게 삼 년간 우리는 실천에도 함께하고 수차례 전시도 열며 투쟁의 선봉에서 싸워 나갔습니다. 때로는 버거웠고 떄로는 서로를 미워하기도 했지만 그 속에서 서로 깨지고 깨우치며 우리는 사랑을 알아갔습니다. 너무나도 뜨겁게 살던 시간이었고, 그 모든 건 철없던 후배 동지들을 믿고 기다려준 언니가 있어서 가능했던 일이에요. 누군가를 잃고 나서야 그제야 그 소중함을 깨닫는 다는 말, 그 말이 저희의 이야기가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습니다. 언니 저는 아직 언니가 옆에서 제 이야기를 듣고 계신것만 같아요. 어딘가에 앉아서 저를 바라보며 사랑하는 눈빛으로 저희를 보고 계실 것만 같아요.
신림동에서 집에서 나가기 힘들다는 저의 집까지 찾아와 아이처럼 방방뛰며 제 이야기만 하는 저와 올랐던 뒷산. 돌고 내려오니 한참을 제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우리 언니.
어느 날도 또 괜히 아파져서 못나가겠다고 했는데 집까지 찾아와 드러누운 제게 “재희 괜찮니”라면서 묻더니 한참을 밖에 나갔다 돌아와 죽을 건네주던 언니. 바빠서 못 챙겨준 우리 엄마아빠가 건네준 것 같았던 언니의 죽은 계속 가슴 언저리에 남아 제가 힘들고 아플 때마다 혼자 떠먹던 그릇이었습니다. 그게 너무나도 넓고 커서 항상 옆에 있을 줄만 알아서 그렇게 두고두고 먹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언니. 언니가 어떻게 우리 곁에 없을 수가 있을까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 우리 민족이 자주롭게 사는 세상. 가진 게 없다는 이유로 착취와 설움 당하지 않는 평등한 세상. 그런 세상을 오래오래 함께 만들어 나갈 거라 믿었는데 혜원언니와 더는 함께 해갈 수 없다는 게 아직도 실감이 나지가 않아요.
언니가 괜찮다고 하면 정말 괜찮았고 세상에서 제일 멋있는 사람이 되었는데 언니가 아픈 기간 제가 해준게 너무 없어서 해줄 수 있는게 자꾸만 떠올랐어서 언니 저는 너무나도 마음이 아픕니다.
하지만 슬퍼서 주저앉지는 않겠습니다. 칠흑 같았던 마음에 빛이 되어주고 햇살이 되어준 언니가 뿌린 홀씨가 이제 더 크게 자라나 마침내 통일된 세상을 만들어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이야기하더라구요. 언니는 참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고. 언니가 웃어주고 들어준 만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겠습니다. 웃음이 꽃 피어나는 자주로운 이 땅을 만들어나가겠습니다. 조용하던 언니가 매번 뜨겁게 바라던 세상을 만들어가겠습니다.
너무나도 사랑하고 존경했던 우리 언니. 통일된 세상에서 우리 부디 웃으며 만나요. 언니 그때는 우리가 온몸과 마음을 다해 꼭 안아볼게요. 그날엔 언니 이야기만 들을게요. 약속할게요.
너무나도 사랑하는 우리 언니, 그때까지, 안녕히.
김은진 국민주권연대 공동대표 추도사
가슴이 미어집니다... 또 한 사람, 동지를 떠나 보냅니다. 한 동지를 보내고, 3년상 치르듯 힘든 시간을 보내는 사이 또 한 동지를 떠나보내고, 이제는 더 이상 떠나보내지 말고 건강하자고 빌고 또 빌었는데 그 맘 아랑곳없이 또 한 동지가 떠났습니다.
늘 기복이 없이 조용한 성품이라 활짝 웃는 걸 본 기억도 몇 번 없는데... 병중에도 어쩌다 만나면 살며시 웃으며 괜찮다고 말해서 스스로 세뇌하듯 괜찮을 거라고 안도했는데 이렇게 떠나보냅니다.
어제 하루 종일 SNS에 올라오는 추모의 글을 읽었습니다. 수십명이 글을 올리고 더 놀라운 것은 연령대도 20대에서 60대까지 다양했다는 겁니다. 그 모든 분들이 개인적으로 추억하는 것들을 올렸는데 그 글만으로도 신혜원동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눈에 선하게 다가왔습니다. 그에 비하면 저와의 인연은 부끄럽기까지 했습니다. 언제 마주 앉아 다정하게 이야기해 본 적도 없고 밥 한 끼, 술 한 잔 느긋하게 나눠본 적도 없습니다. 어제는 대체 나란 사람은 뭐하는 사람인가 곱씹느라 보냈습니다. 그나마 다행입니다. 생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노래가사처럼 잠깐을 만나도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 사람을 알 기회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삶에서 자주 민주 통일을 단 한 순간도 잊지 않았던 사람, 삶에서 그 길을 함께 하는 동지들에게 모든 것을 내주는 것을 단 한 순간도 주저하지 않았던 사람, 바로 신혜원 동지였습니다.
이제 그가 그리는 그림을 더 이상 볼 수 없겠지요. 하지만 그의 그림을 늘 기억하겠습니다. 그가 그림으로 말하고 싶었던 자주민주통일세상을 향한 신념을 늘 기억하겠습니다. 그리고 그가 바랐던 그 길. 남은 우리가 더 굳세게 뚜벅뚜벅 걸어가겠습니다.
혜원아! 잘 가렴. 늘 우리를 지켜 봐주렴.
이기범 서울대학생진보연합 회원 추도사
2017년 가을, 한반도에 드리워진 전쟁위기 속에서 전쟁을 막고 한반도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정의로운 대학생과 청년들이 모였습니다. 방미 트럼프 탄핵 청년원정단에서 저는 신혜원 동지를 처음 만났습니다.
계획했던 미국행이 좌절되고 저희 실천단은 세종대왕상 옆에서 긴 농성을 진행했습니다. 신혜원 동지는 농성을 시작하는 날부터 실천단의 마지막 순간까지 항상 붓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신혜원 동지는 함께하는 모든 동지들의 얼굴들을, 그리고 우리가 마주한 엄혹한 정세를 도화지에 그려냈습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작품을 만들 적에도 그 자리에서 꿈쩍 않은 채 그림을 완성하곤 하셨습니다. 야외라서 바람도 많이 불고 집중도 잘 되지 않는 열악한 조건이었지만 혜원 동지는 한 번도 환경 탓을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그리고 있는 한 폭의 그림이 전쟁을 막아내고 평화를 안아올 수 있다면, 혜원 동지에게 그런 조건 따위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완성한 혜원 동지의 그림은 백 마디 말보다 더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조국과 민족을 감동시키는 최고의 그림들이었습니다.
그때의 저는 지금보다 더 철없고 이상한 말도 많이하던 특이한 놈이었습니다. 동지들의 흠보다 장점을 더 크게 보셨던 혜원 동지는 항상 그런 저를 지긋이 바라보시면서 하는 말이 재미있다고 웃으시곤 하셨습니다. 또 혜원 동지는 나이가 한참 어린 저와 대학생 동지들을 정말 많이 챙겨주셨습니다. 당시에 집안문제로 힘들어하던 저에게 누나가 겪으셨던 일화들을 얘기해주시며 걱정하지 말라고 격려도 해주시고 힘도 정말 많이 주셨습니다. 말이 별로 없고 어려워하는 동지들 곁에는 항상 혜원 동지가 있었습니다. 먼저 다가가서 어려운 건 없는지, 마음을 헤아려주고 보듬어준 건 신혜원 동지였습니다. 혜원 동지는 이후로도 저를 만날 때마다 요즘 집안문제는 괜찮은지 항상 물어봐주셨습니다. 요새는 괜찮아졌다고 얘기를 하면 저보다 더 기뻐하시며 너무 잘됐다고 말씀하시던 누나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훤합니다. 동지 한명 한명을 정말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던 동지였습니다. 항상 동지들의 말을 경청하고, 진정한 동지애가 뭔지 보여주었던 선배였습니다.
학생 민들레 동지들을 정말 예뻐해 주시고 사랑해주셨던 혜원 동지! 처음 들어오는 신입 홀씨들에게 사랑을 담아 인터뷰해주시던 혜원 동지! 깊게 바라보아야만 알 수 있는 동지들의 장점을 찾아내 신심을 북돋아주고, 항상 그림 한 편을 선물로 주셨던 신혜원 동지. 우리 대학생 동지들을 향한 크나큰 사랑을 저희는 모두 느끼고 있었습니다. 혜원 동지와 민들레라는 집단에서 함께할 수 있어서 너무 행복했습니다.
신혜원동지가 우리 곁을 떠났다는 것이 지금도 믿기지 않습니다. 지금이라도 '안녕-' 하면서 저희를 맞아주실 것 같은데, 힘찬 붓질을 펼치며 투쟁할 것 같은데.. 혜원 동지의 그림을 더 보지 못한다는 게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이런 저희들은 4월 7일 서울시장 보궐 선거를 앞두고 있습니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정말 중요한 선거입니다. 저희 대학생들은 혜원 동지가 한평생 그토록 바라던 자주, 민주, 통일을 가로막는 적폐후보가 당선되지 않도록 뜨겁게 적폐청산 투쟁에 나서겠습니다. 국민들이 바라는 수준 높은 문예작품으로, 뜨거운 투쟁으로 국민 여러분들을 위해 가장 낮은 곳에서 복무하겠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저작권자 ⓒ 자주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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