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사는 삶, 영생. 우리 곁에 없는 사람일지라도 그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 마음에서 영원히 함께 한다. 그것이 영생이다.
추모 모임은 추모의 묵념과 추모 영상 상영으로 시작했다. 故 신혜원 작가 생전의 활동과 육성이 담긴 영상은 故 신혜원 작가가 이 자리에 함께 있는 듯 포근하게 만들어줬다.
민들레 회원은 ‘신혜원 4대 정신과 민들레 신혜원상’에 대해 발표했다.
발표자는 “지금 우리가 이렇게 비통한 상황이더라도 신혜원 동지가 우리 동지들 품속에서 영생의 삶을 살게 해야 한다. 그게 우리의 몫”이라며 신혜원 4대 정신은 ▲신념의 강자 ▲투철한 조직관 ▲왕성한 실천력 ▲높은 실력이라고 하였다.
발표자는 “신혜원 동지는 병중에도 사상학습을 중단하지 않았다. 투병 생활의 가장 큰 힘과 원동력도 여기에 있었다. 다른 동지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원칙적인 투병 생활을 하게 한 힘이었다. 조국과 민중을 위한 신혜원 동지의 더없이 충실한 마음을 우리가 따라 배워야겠다”라며 신혜원 4대 정신의 첫 번째로 ‘신념의 강자’를 뽑았다.
이어서 발표자는 “조직이 하자는 것은 조금도 물러나지 않는 동지였다. 신혜원 동지는 풍욕을 하루 6번, 매일 빼먹지 않고 조직이 요구한 대로 하였다. 풍욕을 한번 하는 것이 50m를 전력 질주하는 정도의 체력이 소모된다고 하는데 신혜원 동지는 한 번도 빼먹지 않았다. 아프기 전 활동을 할 때도 사색과 고민을 깊이 하며 조직의 요구대로 실현하려고 했던 것을 모두 알 것이다. 이것이 신혜원 동지를 전진하게 하는데 큰 동력이 되지 않았을까 한다”라며 신혜원 4대 정신의 두 번째로 ‘투철한 조직관’을 뽑았다.
발표자는 신혜원 4대 정신으로 ‘왕성한 실천력’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발표자는 “왕성한 실천은 작품으로 대표된다. 많은 동지의 추모, 회고 글도 그림과 연관된 것이 많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거리든 작업실이든 가리지 않고 실천을 했던 동지였다. 실천할 때를 돌아보면 조건과 환경이 좋았던 적이 없었다. 작업실이 갖춰지고, 시간이 넉넉하고, 재료가 다 있고, 재정이 충분하기보다는 거리·길바닥일 때가 더 많았고, 노상에 탁자 하나 깔아놓고 할 때가 더 많았고, 예산이 턱없이 부족해서 자기 돈을 들일 때가 더 많았고, 시간이 없어 밤을 새울 때가 비일비재했다. 그래도 실천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창작하고 창작했던 동지였다”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발표자는 “홍대 미대를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크로키 수업, 불화 수업 등 자기 실력을 높이기 위해 중단없는 노력을 했다. 신혜원 작가는 실력을 쌓는 과정에서 요구가 어떻게 되는지, 새롭게 접한 어떤 것이라도 우리 실천에 어떻게 부합되는지 끊임없이 노력했다”라며 신혜원 4대 정신의 마지막으로 ‘높은 실력’을 뽑았다.
발표가 끝난 후 민들레 회원들은 미리 준비한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故 신혜원 작가의 작품’을 소개하고, 그리고 故 신혜원 작가와의 인연, ‘신혜원과의 약속’을 얘기하며 故 신혜원 작가의 삶을 본받아 가겠다는 결의를 밝혔다.
“신혜원 작가는 한마디로 ‘결사관철’이다. 신혜원 작가는 조직에서 요구되는 바를 한 번도 흐트러짐 없이 질이 낮지 않게 조직이 요구하는 그 높이, 그 이상으로 제때 맞춰 해냈다. 민중이 좋아하는 그 높이로 해내는 그 힘이 놀라웠고, 그것을 따라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신혜원 작가는 한마디로 ‘치유자’이다. 신혜원 작가가 동지들의 아픔, 세상의 아픔을 묵묵히 보듬어 준 것 같다. 다시 생각해보니 신혜원 작가가 어머니 조국의 충실한 일꾼이라 그 품을 닮아 동지와 세상을 보듬어줬겠구나 싶다.”
“신혜원 동지는 한마디로 ‘민들레’다. 신혜원 동지가 가정환경도 좋았고 미술로 이름 높은 학교도 나왔는데 마음만 고쳐먹었으면 편하게 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신혜원 작가는 화려한 꽃이 아니라 민중들 곁에 있는 민중의 꽃, 민들레가 되었다. 참 쉽지 않은 일인데 그 점이 놀랍고, 그 점을 따라 배워야겠다.”
“신혜원 작가를 그림으로 그리면서 작가가 꽃 같다고 생각했다. 큰 존재감이 있는 게 아니라 작고 미미하게 있는 것 같은데 신혜원 작가만의 은은한 아름다움을 퍼뜨렸다. 신혜원 작가의 작품을 다시 보았는데, 꽃을 너무 예쁘게 잘 그렸다. 신혜원 작가가 즐거워하며 그릴 수 있는 것은 꽃 그림이 아니었을까 한다. 매번 투쟁의 현장에서 투쟁을 그렸는데, 자신의 만족보다는 깨끗한 양심과 내일의 승리를 선택한 게 아닌가 한다.”
“신혜원 작가의 묵묵함을 배우고 싶다. 묵묵히 창작하고 묵묵히 실천하는 그런 모습을 따라 배우고 싶다. 신혜원 작가를 살아 있게 하려면 내가 신혜원이 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묵묵히 살아가겠다.”
“이 작품 밑에는 ‘똑바로 보자 내 자신 깊은 곳까지도 눈 돌리지 말고’라고 쓰여 있다. 작품처럼 신혜원 작가는 자신 마음의 가장 깊은 곳까지 보면서 엄격했던 것이 아닐까 한다.”
“신혜원 작가의 눈빛에는 강렬한 열망이 담겨 있다. 열망을 실현하기 위해서 참 많은 노력을 했다. 잘난 척하지 않았고, 좌절하지도 않았다. 끝까지 정진하는 모습이었다.”
“신혜원 작가에 대한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굉장히 가까웠던 동지였는데 왜 생각이 안 들었을까 고민하면서는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늘 곁에 있는 사람으로 느껴서 그랬던 것 같다.”
“신혜원 작가는 작업 욕심이 많았고, 작품으로 복무하고자 하는 마음이 가득했다. 신혜원 작가는 내가 이 길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 길에는 신혜원 작가가 항상 있을 거로 생각한다.”
“신혜원의 그려주는 인터뷰를 할 때 신혜원 작가의 질문은 형식적인 질문이 아니라 말을 끌어내는 질문이었다. 소식지에 글을 실으려고 하는 질문이 아니라 ‘정말 나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구나’하는 생각이 물씬 들어서 어느 순간 다 터놓고 얘기하게 되고 더 많이 얘기하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신혜원 동지는 활동하면서 한 번도 이탈이 없었고, 한 치도 어긋남이 없었고, 흐트러짐이 없었고, 주저함이 없었고, 동요가 없었고, 끝까지 함께 했던 동지였다. 생전에는 이것을 다 알지 못했다. 신혜원 동지의 이런 깨끗한 마음을 배우고 싶다.”
“신혜원 작가는 일을 하면 책임 있게 하는 일꾼이었다. 일은 일을 만들어 신혜원 작가는 참 많은 일을 하였지만, 책임성과 끈기가 ‘우보천리’라는 말처럼 우직하게도 많은 것을 이루어낸 근간이 되었다.”
“신혜원 작가는 늘 들어주고, 늘 기억했던 사람이었다. 어쩌다 전화 통화를 하더라도 예전에 했던 얘기를 꼭 물어봤다.”
이야기의 마지막으로 故 신혜원 작가와 함께했던 평생동지 조준규 작가의 이야기를 들었다.
조준규 작가는 “동지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내가 곁에서 보던 신혜원 작가와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내가 신혜원 작가를 제대로 못 봤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 자신에게 원망스럽기도 하다”라며 “오늘부터 내가 추모를 할 수 있는 시간이 된 것 같다. 장례 기간에는 정신이 없었고, 이후에는 현실감이 없어 그냥 슬펐고 회피를 하려고 했던 시간이었다. 오늘부터 더 많은 동지와 신혜원 작가를 그리고 기리면서 함께 하겠다”라고 마음을 밝혔다.
故 신혜원 작가에 대한 회고를 통해 신혜원 작가를 따라 배우겠다는 동지애로 가득 차고 미소를 띠기도 하고, 눈물을 흘리며 진행된 추모 모임은 故 신혜원 작가와 함께 민들레에서 활동했던 노래패 후배가 창작한 추모곡 ‘아픔 없는 그곳에서’를 함께 들으며 마무리했다.
민들레는 이후 신혜원 작가의 추모 사업으로 온라인 추모관 개설 등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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