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는 지금] 북·러 친선관계 시작은 언제부터...

이인선 통신원 | 기사입력 2021/05/07 [19:02]

[러시아는 지금] 북·러 친선관계 시작은 언제부터...

이인선 통신원 | 입력 : 2021/05/07 [19:02]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2019년 4월 25일 블라디보스토크 극동연방 대학에서 북·러 정상회담을 진행했다.

 

푸틴 대통령은 대북 제재와 미국, 비핵화 문제 등에 대해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열린 대화를 나눴다며 한반도 비핵화를 위해선 북의 체제를 보장해야 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북을 경유하는 가스관 등 남·북·러 3각 협력도 꾸준히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북 외무성은 2021년 4월 25일 정상회담 2주년을 맞아 담화를 내고 북·러 친선관계가 양국 정상의 깊은 관심 속에 더욱 높은 단계로 발전할 것이라고 밝혔다.

 

임천일 북 외무성 러시아 담당 부상은 담화에서 전략적이며 전통적인 북·러 친선관계를 새로운 높이에서 새 세기의 요구에 맞게 강화 발전시켜 나가려는 것이 북의 확고부동한 입장이라고 언급했다. 임 부상은 북·러 정상회담 이후 지난 2년에 대해 유동적인 국제 정세와 예견치 못한 세계적인 보건 위기로 인해 많은 시련과 도전에 부닥쳤지만 정치·경제·문화를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 상호 연계하고 협력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양국이 어떤 외부적 도전과 난관에도 끄떡하지 않고 두 나라 국민의 이익에 맞게 보다 높은 발전단계를 향해 끊임없이 전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북과 러시아의 관계는 어떻게 돈독해진 것일까? 이번 글부터 세 번에 걸쳐 북·러관계를 살펴보겠다. 

 

▲ 홍범도 장군이 1922년 레닌의 초청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레닌으로부터 받은 선물 권총을 차고 있는 모습.   

 

1. 조선 독립운동가들과 소련

 

북·러관계를 이해하자면 일제 강점기 시절 김일성 주석의 항일무장투쟁부터 살펴봐야 한다. 이에 앞서 1920년~30년 무렵의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을 먼저 살펴보겠다. 

 

조선의 많은 독립운동가는 1920년대 무렵부터 새롭게 떠오르는 사회주의 국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소련)’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 이념을 받아들였다.

 

노동자, 농민의 정권이 수립된 소련은 문자 그대로 이상향이었다. 당시는 국민을 억압하고 착취하던 이들이 사라진 사회가 지구상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전 인류가 감탄사를 내뱉었던 시기였다.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이 피를 흘리더라도 소련을 보호하고 고수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도 이러한 이유로 추정해볼 수 있다. 

 

조선의 독립운동가들 가운데 3.1 운동 이후 소련에 들어가서 무장활동을 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들은 당시 소련의 붉은 군대(적군, 볼셰비키)와 러시아 극동지방에서 소련을 지키기 위해 많은 피를 흘렸다. 그 과정에 홍범도 장군도 적지 않은 공로를 세웠으며 레닌도 만났다.

 

일제는 1920년대 초에도 반혁명파인 하얀 군대(백군, 멘셰비키)를 지원하며 극동지방에 대한 무장간섭을 일삼았다. 이에 극동의 공산당 조직은 연해주에서 활동하고 있던 홍범도 장군에게 원조를 요청했다. 독립군 상층부의 일부 인물들은 조선 사람이 제 발등의 불도 끄지 못하면서 남을 위해 피를 흘리는 것은 머저리 짓이라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홍범도 장군은 왜놈을 치는 군대는 다 우리 편이라고 하면서 붉은 군대를 피로써 도와주었다.

 

홍범도 장군과 수많은 조선 사람이 관여한 전투들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이만 전투가 있다. 이만은 현재 러시아 달네레첸스크 지역으로 당시 소련 사람들은 이만 전투에서 희생된 전사자들을 위해 추모비를 세웠다.

 

홍범도 장군은 부하들에게 소련은 세상에서 처음으로 무산자들의 공화국을 세운 나라이다, 그러니 우리가 도와주고 또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하나의 사실만 보더라도 우리는 조선 사람과 소련 사람 사이에 맺어진 공동투쟁의 유대가 오래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참고 영상 : https://youtu.be/okQXLClEU6s)

 

일제는 훈춘 출신의 친일적인 조선 청년들로 국경감시 중대를 조직해 소련·만주국 경계선에서 소련 사람들과 싸우게 했다. 일제는 이러한 공작으로 소련 사람들이 조선 사람들을 증오하게 만들었다. 소련 정부는 이러한 상황의 격화로 생길 문제를 우려해 불가피하게 1930년대 중엽 극동에 살던 조선 사람들을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집단 이주시켰다.

 

많은 조선의 독립운동가는 이 소식을 듣고 망국민의 설움을 뼈에 사무치게 느꼈다. 그렇지만 이들 모두 문제의 본질을 알았기에 일제를 몰아내기 위한 소련과의 협력을 이어갔다. 김일성 주석의 항일무장투쟁 부대도 소련과 협력하는 부대 중 하나였다.

 

2. 김일성 주석과 소련

 

1930년대 조선의 항일부대와 중국의 항일부대가 합세한 항일무장 세력은 일제의 식민통치에 적지 않은 부담을 주었다. 하지만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본군의 토벌 작전이 한층 강화되며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소련은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30년대 말~1940년대 초 독일과의 전쟁에 집중하기 위해 일본과의 충돌을 피하고자 했다. 이에 소련은 김일성 주석의 항일무장 세력을 비롯한 반일운동 세력에 소련 극동지방으로 들어 올 것을 제안했다. 소련 역시 반일 전선을 유지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소련과 조·중 항일부대 간의 이해관계는 일치했다고 볼 수 있다.

 

김일성 주석은 1940년 11월 국제당의 초청을 받아 국제당이 소집한 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소·만 국경을 넘어 소련 영내 하바롭스크로 갔다. 국제당이 조선 사람들을 초청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당시 국제당 지도부가 김일성 주석의 항일무장 세력을 중시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일제의 관헌기록은 국제당이 1939년 말 김일성 주석에게 연락원을 보낸 사실을 기록해놓기도 했다.

 

“강덕6년(1939년) 10월 11일 김일성비(匪)가 화룡현 삼도구 서북쪽 침봉밀림 속에 있을 때 공비(共匪)와 같은 복장을 하고 권총을 휴대한 러시아인 8명이 조선인 통역 두 사람과 함께 김일성을 찾아와서 중요 담화를 했다. 그때 중요간부 이외에는 누구도 곁에 접근시키지 않고 약 10일간 머물러 있은 다음 김일성비단(匪團) 가운데서 허약자 12명을 데리고 떠나간 사실이 있다. 그 러시아인은 소련에서 연락원으로 온 사람들이라 하며(…) 상세한 것은 명확지 않으나 직접 소련에서 중요한 사명을 띠고 연락을 온 것으로 보인다.” (기우치 다다오 훈춘영사의 보고, 1940년 7월 26일)

 

김일성 주석은 당시 소련·중국 동료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국제연합군에서 함께 활동한 한 소련인은 “군사업무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으며 명석하고 근면했다”라고 회고했고 소련군 지도부도 “모범적이며 뛰어난 부하 통솔력을 보였다”라고 평가했다. 중국의 항일부대 지휘관인 저우바오중(주보중)도 “가장 훌륭한 군사 간부이며 중국 공산당의 한인 동지 중에 가장 우수”하다고 소련에 소개했다. 후일 국제연합군이 편입된 제25군 정치사령관 레베데프 소장도 “상당히 유능하고 박력 있는 지휘관처럼 보였으며 매우 쾌활한 성격이어서 인상적”이었다고 회고했다.

 

국제연합군은 1941년 6월 중순 조·중 항일부대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 조·중·소 연합군이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1944년 각 도 경찰부장에게 보낸 서류에서도 “현재 소련의 영도 하에 만주에 대한 책모(어떤 일을 꾸미고 이루어 나가는 교묘한 생각)를 행하고 있는 조선공산당의 요소는 구 제1·제2·제3로 군의 나머지 세력으로서 그 중심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은 김일성이다. (…) 김일성은 소련 붉은 군대의 직속 산하에 있는 오케안스카야 야영소 계통 군사 책임자의 지위에 있다”라고 언급한 것을 보면 김일성 주석의 항일무장 세력이 소련과의 연대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김일성 주석은 1945년 여름 소련군 총참모부가 소집한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소련 인사들을 만났다고 한다. 그때 즈다노프 소련공산장 중앙위원회 제2서기는 스탈린 서기장을 통해 김일성 주석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조선의 항일무장투쟁을 격찬했다고 한다. 즈다노프 제2서기는 스탈린 서기장의 위임에 따라 김일성 주석을 비롯한 사람들을 만났다고 한다. 

 

소련은 1945년 8월 8일 일제에 선전포고하고 전쟁에 돌입했다. 이와 동시에 김일성 주석이 앞선 회의에서 제안한 항공육전대 전법에 기초한 작전계획에 따라 국제연합군은 일제와의 최후의 싸움에 일제히 돌입했다.

 

해방 후 모스크바 3상 회의에 따라 38도선 이북에 들어선 소련군정은 일제 잔재 청산과 조선인 자치권 인정을 기본 정책으로 삼았다. 이에 따라 모든 지역 정부 기관과 사업장에 조선인이 자치적으로 운영하는 인민위원회가 결성되었다.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는 1946년 2월 출범했다.

 

소련은 자신들의 역할을 국가 건설을 주도하기보다는 지원하는 수준으로 제한하였다. 행정기관, 산업시설, 교육기관 등 모든 분야를 통제하고 있던 일본인들이 사라지면서 전문인력에 심각한 공백이 생겼다. 소련은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을 북에 파견해 북의 건국 사업을 도왔으며 조선 학생들의 유학도 받아들였다.

 

조선민주주인민공화국은 1948년 9월 9일 수립되었고 곧바로 10월 12일 소련과 국교를 맺었다. 12월에는 소련군도 철수했다.

 

▲ 해방 이후 북의 모습  

 

3. 항일과 반제로 끈끈한 북·소 관계

 

북이 소련과 끈끈한 정을 이야기할 때 1934년 겨울 소련의 비행기가 연습 도중 광풍에 휘말려 만주의 호림 땅에 떨어졌을 때 벌어진 비행사 구출 작전의 일화를 소개한다.

 

당시 박광선 항일유격대원은 호림으로부터 몇십 리 떨어진 곳에서 우양부대라고 부르는 중국의 항일부대와 연락 사업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소련 비행기가 우수리강변에 떨어지는 것을 발견한 박광선 대원은 연락소로 뛰어가 전우들에게 소련 비행사를 구하자고 호소했다. 일본군은 소련 비행사를 사로잡으려고 밀려오는 상황이었다.

 

유격대원들은 기관총과 소구경포까지 쏘아대는 100여 명의 적과 결사전을 벌였다. 중국의 우양부대의 대원들도 싸움에 합세했고 끝내 소련 비행사를 구출해낼 수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소련 비행사의 건강을 회복시키기 위해 정성을 다했고 비행사는 이들의 호위를 받으며 무사히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두 나라의 끈끈한 정은 해방 이후에도 이어졌다.

 

김일성 주석은 1946년 3월 1일 3.1운동 27주년 기념행사장에서 반공 세력의 폭탄테러를 당했다. 당시 평양에서 근무하던 노비첸코 소련군 소위가 수류탄을 몸으로 덮어 참사를 막을 수 있었다. 노비첸코는 외투 안에 있던 책이 충격을 막아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이후 노비첸코는 북·소 우호의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다.

 

노비첸코는 퇴원 후 러시아로 돌아가 평범한 농민으로 살았다. 김일성 주석이 1984년 소련을 방문하면서 그를 찾아 감격적인 만남을 가졌으며 그와 의형제를 맺었다. 그는 외국인 최초로 북의 노력영웅 칭호를 받았고 아파트와 각종 선물도 받았다. 북과 소련은 노비첸코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 <영원한 전우>를 공동 제작했다. 

 

▲ 김일성 주석과 노비첸코   

 

두 나라는 동지적 관계를 이어나가며 서로를 존중하고 있다. 그 출발점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일화를 소개한다.

 

즈다노프 제2서기가 김일성 주석에게 해방 후 건국을 위해 어떠한 지원이 필요한지 물었을 때 김일성 주석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고 한다.

 

“소련이 독일과 4년 동안이나 전쟁을 했고 앞으로 또 일본과도 큰 전쟁을 치러야 하겠는데 무슨 힘으로 우리를 도와주겠는가. 도와준다면 물론 고맙겠지만 우리는 될수록 자체의 힘으로 나라를 일떠세우려고 한다. 힘들더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장래를 위해서 좋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는 역대로 사대주의가 망국의 근원으로 존재해왔다. 새 조국을 건설할 때는 사대주의로 인한 폐해가 절대로 없게 하자는 것이 우리의 결심이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우리나라에 대한 소련의 정치적 지지이다. 소련이 앞으로 국제무대에서 우리를 적극적으로 지지해주고 조선 문제가 조선 인민의 이익과 의사에 맞게 해결되도록 힘써주기 바란다.”

 

스탈린 서기장과 안토노프 소련군 참모총장은 1945년 9월 20일 소련 극동사령관에게 비밀훈령을 보냈다. 그 내용은 ‘▲북 영토 내에 소비에트나 소비에트 정권의 다른 기관을 수립하거나 소비에트제도를 도입하지 말 것 ▲반일적인 민주주의 정당 단체의 광범한 동맹에 기초하여 북의 부르주아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는데 협조할 것 ▲반일적인 민주적 제 단체 및 정당의 조직을 방해하지 말 것이며 그 작업을 도와줄 것’ 등 북의 독자적인 국가 창건에 개입하지 말라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해방 후 5개월간 일부 소련군이 38선 이북에서 약탈행위를 벌이는 문제가 발생했다. 스탈린 서기장은 이 문제의 심각성을 느끼고 1946년 1월 “북조선 인민들을 괴롭히는 군인들을 붙잡아 즉시 총살하라”라는 비밀훈령을 내렸고 실제로 여러 군인이 총살되었다. 장교들은 계급을 박탈당하고 본국에 소환돼 군사재판을 받기도 했다.

 

김일성 주석은 소련의 지원을 최소화하고 조선 사람들과 소비에트도, 부르주아 민주주의도 아닌 ‘인민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했다. 소련은 이 결정을 존중하며 북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북·러관계는 서로가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을 때 무장을 들고 피로써 도와준 것에서 출발했다. 두 나라는 항일과 반제라는 큰 틀 안에서 단순한 협력을 넘어서 동지적 관계로 발전했다. 

노스코리아대단해~ 21/05/08 [00:12] 수정 삭제
  국가간정상회담하면상대국수도가일반적인데세계최강국중하나인러시아지도자를 변방으로불러내서정상회담하는노스코리아외교력인지보이지않는힘인지대단하다~고구려의기상을보는거같아기분은좋구만 ....
당파싸움 21/05/08 [10:55] 수정 삭제
  남한만 미국우방으로 있는게 아니라 북한도 살려면 주변국과 친선관계을 맺어야 한다
북두 21/05/08 [12:08] 수정 삭제
  조선은 세계의 중심국이 되려면 단군과 홍익인간을 나라의 중심기조로 해야 한다. 원래 고대조선도 단군중심국가였다. 그리고 국기도 세계의 중심국이 될만한 상징으로 바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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