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민주·통일을 염원하며 자신의 한 생을 바쳤던 신혜원 작가.
신혜원 작가는 암 투병 중 지난 3월 22일, 44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했다.
많은 이들은 신혜원 작가의 삶은 조국과 민중, 조직과 동지를 위해 헌신해 온 삶이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신혜원 작가와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을 통해 그의 삶을 다시 한번 더 되돌아본다. (편집자 주)
유정숙 가극단미래 대표는 신혜원 작가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유정숙 대표와 신혜원 작가의 인연은 학생운동 시절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2000년에 처음 만났어요. 그리고 2001년 신혜원 작가가 홍익대 총여학생회장일 때 제가 전국여대생대표자협의회(전여대협) 간부라 같이 활동했어요. 당시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활동을 함께 했었죠. 그리고 학생운동 이후 전 가극단미래에서 신혜원 작가는 그림공장에서 활동해 다시 만나게 되었고 민들레 활동까지 인연이 계속되었죠.”
유정숙 대표는 신혜원 작가와 함께 작업한 기억을 구체적으로 되살렸다.
“신혜원 작가는 가극단미래와 많은 일을 함께했어요. 공연 포스터와 홍보물을 만드는 일, 무대 배경과 조형물 작업, 마당사업, 극단 단원들의 명함을 만드는 일까지 미술 역량이 필요한 일은 무엇이든 함께 했죠. 스치듯 제안한 사업에 대해서도 함께 하기 위해 바쁜 일정을 미리 조율하려고 노력했어요.”
신혜원 작가는 일본군성노예 문제 해결을 위해 많은 힘을 쏟았다고 한다. 위안부 할머니 미술치료도 했으며 할머니들을 그린 ‘들꽃의 노래’라는 판화집도 만들었다.
유정숙 대표는 이에 대해 “‘들꽃의 노래’를 만들 때 저는 극단 일에 전념하느라 힘을 보태지 못하고 있었죠. 신혜원 작가는 2014년 첫 전시회에 저를 사회자로 불러주었어요. 그리고 2015년 다음 전시회에는 공연을 해달라고 제안했어요. 빚진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던 저에게 공연으로 함께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이죠. ‘숨,쉼-함께 살아 숨 쉬는 여인들에게 드리는 노래’를 낭송극으로 짧게 공연을 했어요. 그리고 2017년 ‘평화가 춤춘다, 통일이다’(고향이 평양인데 가지 못하는 길원옥 할머니의 이야기. 윤미향 의원 씀)라는 시노래극을 만드는 데까지로 이어졌어요. 그 후 이 시노래극은 2017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8월 14일)에 재탄생했어요”라고 돌아봤다.
유정숙 대표는 2018년 12월 ‘김정은 국무 위원장 환영 창작 예술제-통일이 옵니다’를 했을 당시 신혜원 작가의 활동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신혜원 작가는 당시에 예술제 포스터 그리고 무대 작업, 조형물 제작으로 상당히 바빴다고 한다. 그런데도 유정숙 대표가 쓴 동시에 그림을 다 그려주는 작업까지 했다고 한다.
유정숙 대표는 신혜원 작가에 대해 “말은 많이 하지는 않았어도 말 한마디마다 울림이 컸어요. 특히 ‘앞으로도 동지들이 더 찾고 싶은 그런 동지가 되기 위해 노력하겠다’라고 말 한 적이 있어요. 이 말에는 신혜원 작가가 동지들에게 필요한 사람, 동지들이 찾는 사람으로 살겠다는 푯대를 세우고 그렇게 되기 위해 한없이 노력해야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신혜원 작가는 동지들이 조직이기에 조직적 요구뿐 아니라 동지들의 많은 부탁을 그냥 넘기는 법 없이 언제나 함께하고 싶어했던 거 같아요”라고 회고했다.
유정숙 대표는 신혜원 작가의 ‘재봉질’을 가장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2017년 여름이에요 그때 통일대행진단에서 반미시화전을 준비하고 있었어요. 신혜원 작가는 반미시화전을 어떻게 하면 기동성이 좋으면서도 돋보이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미술 활동을 하는 선배들과 상의해 큰 바구니에 천으로 인쇄하여 씌우는 방법을 생각했대요. 그런데 신혜원 작가가 재봉질을 처음 하는 것이 문제였죠. 재봉틀을 구해 재봉질을 하는데 바느질이 제대로 안 되는 상황이었어요. 당시 저는 공연 때문에 포항에 있어서 구체적으로 도울 상황이 못 되었죠. 그런데 얼마나 급하고 꼭 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했으면 포항에서 공연 준비하는 저에게까지 사진을 보내면서 재봉질에 대해 물어봤을까요. 근데 제가 당장 도와줄 수 없는 상황이라서 다음날 도와주겠다고 했더니 오늘 중으로 완성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수선집을 가서 문제의 원인을 찾아 한고비를 넘겼죠. 드디어 재봉질이 되나 싶었는데, 또 실이 너무 풀려서 한참을 씨름했나 봐요. 그런데 신혜원 작가는 어찌어찌해 방법을 찾아서 결국 재봉질을 했죠. 나중에 예쁘게 박힌 모양을 찍어 보내주었어요. 아마도 그날 신혜원 작가는 밤을 새며 재봉질을 완료했을 거예요. 이렇게 반드시 해내야 한다는 마음을 갖고 있었고 다른 사람의 마음도 모아내는 사람이었어요.”
마지막으로 유정숙 대표는 신혜원 작가의 ‘자신을 앞세우지 않고 집단의 요구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을 배우고 싶다고 강조했다.
신혜원 작가는 어떤 꿈을 꾸고 있었을까?
신혜원 작가는 2018년 유정숙 대표에게 “일생에 꼭 하고 싶은 작품은 사람들을 울릴 수 있는 그런 작품을 하고 싶다는 것이 저의 소망입니다. 제가 국가보안법으로 인한 개인사가 있잖아요. 그 내용을 그림책으로 꼭 하고 싶은데 이게 흡족할 만큼 잘 안 나와서 몇 년째 붙들고 있는데 잘 안 됩니다. 국가보안법, 국가권력이 개인을 억누르는 폭력성과 부당함 이런 것들을 밑에 깔고 보여주고 싶은데, 드러나는 감정은 그리움, 사랑? 이런 것들이 드러나게 하고 싶은데 이걸 하는 게 쉽지가 않아요. 그리고 베란다항해가 한국 미술계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가들과 미술 단체가 되는 것이 목표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신혜원을 기억하며] 마지막 편은 장재희 베란다항해 작가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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