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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1] 김일성 주석의 항일운동 역사

박영준 기자 | 기사입력 2022/04/05 [15:36]

[기획연재1] 김일성 주석의 항일운동 역사

박영준 기자 | 입력 : 2022/04/05 [15:36]

북한은 올해 1월 조선노동당 제8기 제6차 중앙위원회 정치국 회의에서 김일성 주석 탄생 110돌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탄생 80돌을 “승리와 영광의 대축전”으로 “성대히 경축”하겠다고 하였다. 통일의 상대방인 북한이 국가 차원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계기에 대해 우리도 학술적으로 자세히 연구하는 게 통일을 앞당기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에 자주시보와 주권연구소는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한 기획연재를 10회에 걸쳐 준비하였다.


 

▲ 1943년 10월 5일 야전 훈련 후 촬영한 국제연합군 대원 사진. 제1열 오른쪽 두 번째가 김일성 주석, 그 오른쪽으로 시린스키 부여단장, 왼쪽으로 주보중 여단장, 왕일지, 이조린, 바탈린.  

 

1. 김일성 주석의 항일운동 역사

 

“생산도 학습도 생활도 항일유격대 식으로!”

 

북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호 중 하나다. 이 같은 구호에서 볼 수 있듯이 항일운동의 역사는 북한 주민들 생활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대다수 주민의 삶 속에 항일운동이라는 역사가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북한의 정치, 경제체제의 뿌리 역시 항일운동 역사에 있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북한 사회의 뿌리 - 김일성 주석의 항일운동 역사 

 

실제 항일운동의 혁명전통은 북한의 지도이념 가운데 하나다. 북한 정치는 노동당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노동당은 1961년 9월 4차 당대회에서 당규약 개정을 하며 당 지도이념에 ‘항일무장투쟁의 혁명전통’을 추가했다. (국립통일연구원, 『2022 북한이해』, 2022.) 북한이라는 국가를 운영하는 지도이념 중 하나가 항일무장투쟁이라는 것이다. 4차 당대회를 전후해 북한에서는 항일운동 참가자들의 회상기 학습이 대대적으로 진행되었다고 한다. 

 

일본의 역사학자인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는 ‘유격대국가론’을 제시하며 김일성 시대의 북한 체제를 분석하기도 했다. 김일성 주석의 항일유격대 활동이 북한 체제의 근간을 이루며, 항일유격대의 특성이 북한 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루키 교수는 김정일 시대를 ‘정규군국가’라는 새로운 모델로 제시하기도 했다.)

 

따라서 김일성 주석의 항일운동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북한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순히 북한의 정치제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북한 사람들의 삶이나 인식 자체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김일성 주석의 항일운동 역사는 일종의 금기어였다. 강만길 교수의 “김일성 전 북한주석의 항일 빨치산운동도 독립운동으로 봐야 한다”라는 발언이 사회적 논쟁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김일성 주석의 항일운동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현재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정치적 판단과 구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설령 겉으로 이해한다고 해도 그 정치적 무게감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 ‘정치적 무게감’을 이해하지 못하면 올바른 대북정책도 수립할 수 없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019년 10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쳐 백마를 타고 백두산에 올랐다. 그 이후 북한은 주변 환경의 변화보다는 자체의 힘을 중심으로 한 정면 돌파를 강조하고 있다. 또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견실하고 유능한 정치가로 되려면 백두산 대학을 나와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그 후 2019년 12월부터 1년 동안 8만 4,000여 명이 백두산 혁명전적지를 답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당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정치적 결단이 지닌 무게와 북한 주민들의 마음을 알려면 북한에서 김일성 주석의 항일운동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꼭 알아야 한다.  

 

북한에서 말하는 김일성 주석의 항일운동  

 

먼저 북한에서 말하는 김일성 주석의 항일운동 역사를 간략히 살펴보자. 

 

김일성 주석은 1926년 중국 지린성 화전현(현 화뎬시)의 화성의숙에 입학하였고, 당시 민족주의 계열 독립운동의 현실과 투쟁 방법에 회의를 느껴 공산주의가 조선을 해방할 수 있는 진정한 길이라고 판단하게 된다. 그 뒤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하려는 청년과 학생을 결집해 1926년 가을 반일민족해방투쟁을 목적으로 혁명조직인 타도제국주의동맹을 결성한다. (통일부 국립통일교육원, 『북한지식사전』, 2021.)

 

타도제국주의동맹 아래 묶인 조직들이 많아지고 광범한 청년 학생들 속에서 반일 기운이 높아지자 김일성 주석은 더 많은 청년 학생들을 조직하기 위해 타도제국주의동맹을 개편하여 1927년 여름 대중적 성격을 가진 반제청년동맹을 만든다. (위키백과 ‘반제청년동맹’ 항목) 이와 더불어 핵심 성원들로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공청)이 결성된다. 

 

이어 1930년 6월 30일~7월 2일까지 카륜회의(공청 및 반제청년동맹 지도간부회의)가 열린다. 이 회의에서 김일성 주석은 항일혁명의 노선과 전략전술을 수립하며 조직적인 무장투쟁의 기치 아래 전체 조선인들이 떨쳐나서야 조국광복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회의에서 김일성 주석은 기존의 반일운동은 사대주의 사상에 물든 상층부 몇몇이 말공부, 싸움질만 하면서 대중과 괴리되어 있다고 비판하고, 혁명 승리를 위해서는 인민대중 속에 들어가 그들을 조직 동원해야 하며 조선혁명은 어디까지나 조선인 자체의 힘으로 자주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선언한다. (「북한 창건과정에서 나타난 6가지 내용」, NK투데이, 2022.2.11.)

 

이러한 노선을 바탕으로 1930년 7월 6일 고유수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첫 무장조직인 조선혁명군이 결성되고, 1931년 12월 19일 명월구회의에서 김일성 주석은 유격전의 형식을 기본으로 하여 무장투쟁을 조직 전개할 데 대한 전략적 방침을 제시하며 반일인민유격대 창건 방침을 밝혔다. 이에 따라 1932년 4월 25일 중국 동북의 지린성 안투현 사오샤허 무주툰 토기점골 등판에서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고, 이후 군사적 지휘 및 관리체계와 후방보장체계를 개편하여 1934년 3월에 반일인민유격대를 조선인민혁명군으로 전환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선인민혁명군’ 항목)

 

1936년 5월에는 전민항쟁을 위한 반일민족통일전선 조직인 ‘조국광복회’가 만들어진다. 당시 김일성 주석은 인민전선론에 기반하여 “전민족의 계급·성별·지위·당파·연령·종교 등의 차별을 불문하고 백의동포는 일치단결 궐기하여 구적(寇敵) 일본놈들과 싸워 조국을 광복시킬 것”이라고 선언했다. (위키백과 ‘조국광복회’ 항목) 조국광복회 조직망은 여러 가지 명칭을 사용하면서 백두산 근거지를 중심으로 국내 전국 각지뿐만 아니라 만주의 넓은 지역에까지 세력을 확대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국광복회’ 항목)

 

1937년 보천보 전투 등 활발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던 조선인민혁명군은 1940년 8월 일제 패망을 예상하며 최후대결전과 전민항쟁을 준비하자는 측면에서 소부대활동으로 행동 방침을 변경하게 되고,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는 소련 극동지방으로 이동해 1942년 동북항일연군과 소련군 부대들과 함께 국제홍군특별독립 88여단(이하 88여단)을 꾸리게 된다. (강만길, 『20세기 우리역사』, 창작과비평사, 1999. 136~146쪽.) 

 

88여단은 4개의 대대와 독립통신대대, 독립보병대대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김일성 주석이 대대장을 맡은 1대대는 항일연군 1로군의 조선인 대원이 기본성원이었다. 88여단은 소련-만주 국경 지역 정찰, 만주 지역에서 소규모 빨치산 부대 창설, 주민들 사이에서 비밀 조직 건설 등의 임무를 맡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소련극동전선군제팔팔독립보병여단’ 항목)

 

1945년 8월 9일 88여단은 일본과의 전쟁을 개시했다. 북한은 88여단에 조선인민혁명군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소련군과 조선인들이 함께 전쟁을 수행했다고 보고 있다.

 

8월 9일 소련군의 전면적 공격작전에 앞서 조선인민혁명군은 먼저 국경지대의 일본군 요충지를 기습했다. 8월 8일 밤 조선인민혁명군은 경흥요새의 토리와 훈춘현 남별리, 동흥진을 습격하여 일본군을 혼란시킴으로써 최후진공의 유리한 조건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재화, 『한국근현대민족해방운동사-항일무장투쟁사편』, 백산서당, 457쪽; 「북한은 광복을 ‘쟁취한 것’으로 본다? ⑥」, NK투데이, 2021.3.5. 재인용)

 

조선인민혁명군은 국내에 파견되어 활동하고 있던 소부대와 조국광복회 조직들과 합세하여 일제의 저항을 분쇄하기도 했다. 일례로 일본이 남쪽으로 퇴각하면서 흥남화학공장을 불태워 없애려고 할 때 조선인 노동자들이 이를 저지하기 위해 4시간여에 걸쳐 투쟁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데이비드 콩드, 최지연 역, 『한국전쟁, 또하나의 시각 (상)』, 사계절출판사, 16쪽; NK투데이 앞의 글 재인용)

 

김일성 주석의 항일운동은 가짜인가

 

김일성 주석의 항일운동을 논할 때 항상 따라다니는 것이 소위 ‘가짜설’이다. 항일운동을 한 ‘김일성’은 북한 지도자인 김일성 주석이 아니라 다른 ‘김일성’이란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여전히 보수언론을 통해 재생산되고 있는데, 일례로 보수언론 뉴데일리는 2018년 11월 서옥식의 칼럼을 통해 ‘진짜 김일성’은 1937년 11월 13일 일만군(日滿軍)과 교전 끝에 전사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인터넷 공간에도 이런 ‘가짜설’은 널리 퍼져있다. 

 

하지만 현재 우리 학계에서는 대체로 “김일성 주석이 항일운동을 한 것은 사실이다”라고 인정하고 있다. ‘가짜설’은 터무니없다는 것이다. 

 

당장 통일부의 ‘북한정보포털’에서 김일성 주석에 관한 내용을 보면 1936년 5월 조국광복회 조직, 1937년 6월 함남 보천보 습격, 함남 중평리 습격, 1942년 8월 동북항일연군교도여단 1교도영 영장으로 활동 등 항일운동의 이력이 소개되어 있다. 

 

한홍구 교수는 1937년 11월에 ‘진짜 김일성’이 사망했다는 주장에 대해,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인용하는 것으로 『만주국군』에 ‘김일성’을 사살했다는 대목이 있는데 이 책을 조금 더 넘겨보면 전에 사살한 사람은 김 씨 성을 가진 유격대 지도자일 뿐 ‘김일성’은 건재하다는 기록이 나온다고 반박하고 있다. 자신들이 원하는 대목만 골라다가 썼다는 것이다. (한홍구, 『대한민국사2』, 한겨레출판, 2003.)

 

‘가짜설’을 주장하는 이들이 근거로 제시하는 것 중 또 다른 것은 중국의 어떤 문헌에도 ‘김일성’이라는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와다 하루키 교수는 “1991년이란 해는 중국공산당이 마침내 역사가들에게 김일성의 만주 지역 활동에 대해 실명을 들어 객관적으로 기술해도 좋다고 인정한 해”라며 “그때까지는 박물관에선 김일성은 이름을 숨기고 반드시 xxx로 표기하고 있었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와다 하루키 교수는 1991년에 나온 『동북항일연군사료』와 저우바오중(주보중:周保中)의 일기 『동북항일유격일기』에서 김일성 주석의 이름은 완전히 실명으로 기록돼 있고, 본인이 입수한 1935년에 코민테른에 제출된 동부 만주 당 지도자 위증민의 보고에는 “김일성, 고려인, 1931년 입당, 용감 적극, 중국어를 할 수 있음. 유격대원 출신이다. 민생단이라는 진술이 대단히 많다. 대원들 가운데서 말하기를 좋아하고, 대원 사이에서 신뢰와 존경을 받으며, 구국군(救國軍) 사이에서도 신뢰와 존경을 받는다”라는 대목이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와다 하루키 저, 한승동 역, 「‘김일성 가짜설’은 가짜였다」, 한겨레, 2007.1.25.)

 

‘가짜설’이 유포된 이유 

 

그렇다면 왜 이러한 ‘가짜설’이 유포되게 되었을까? 

 

한홍구 교수는 『대한민국사2』(한겨레출판, 2003.)에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첫째, ‘가짜설’이 유포된 것은 김일성 주석의 나이와 관계되어 있다. 

 

‘가짜설’의 시작은 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 14일 평양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김일성 장군 환영대회’에서였다. 당시 ‘김일성 장군’은 각종 도술을 부리는 항일 영웅으로 칭송받고 있었는데, 군중 앞에 나타난 ‘김일성 장군’은 백발이 성성한 노장군이 아니라 뒷머리를 바짝 치켜 깎은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홍구 교수에 따르면 이때부터 ‘가짜설’이 급격하게 번져나갔다. 

 

둘째, 친일행각을 한 자들과 반공이데올로기와 관련이 있다. 

 

해방 후 ‘가짜설’을 주장하던 사람들은 친일파나 일제의 고등계 형사 출신, 우익단체의 간부들이 대부분이었다. 일례로 문헌상으로 가장 먼저 ‘가짜설’을 주장했던 김종범과 김동운은 각각 친일세력을 기반으로 한 한민당의 간부와 만주의 봉천 일본영사관 소속 고등계 형사 출신이었다. 이들은 분단상황에서 북측의 김일성 주석이 일제 강점기 막바지에 항일 영웅으로 존경을 받은 ‘김일성 장군’이라면 곤란한 위치에 있을 만한 사람들이다. 

 

분단 이후에는 북한과의 체제경쟁과 반공이데올로기, 친일 부역 이력이 있는 군부 지도층의 정당성 확보를 위한 명분으로 ‘가짜설’이 유포되었다. 한국군의 주류는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이었고, 5.16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친일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북한과 정통성 경쟁을 하고 있던 상황에서 북측의 지도자가 항일운동을 했던 ‘김일성 장군’이라면 안그래도 부족한 남측의 정당성은 심대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들고 나온 것이 ‘가짜설’인 것이다. 

 

그러나 ‘가짜설’은 처음부터 친일 부역자들이 스스로의 정당성을 찾기 위해 유포한 것으로 오래갈 수 없는 것이었다.  

 

실제로 김일성 주석의 항일운동 이야기를 다룬 다양한 문헌이 존재한다.

 

와다 하루키 교수의 저서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에 따르면 일본군의 명령에 따라 김일성 부대에 잠입한 밀정 지순옥은 “이 부대가 사기왕성하고 단결력이 있는 것은 군지휘 김일성이 맹렬한 민족적 공산주의 사상을 가졌고, 또 완건과 통솔의 묘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부 파괴에는 김일성을 재기불능하게 만드는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긴요하다”라고 보고하고 있다. (임기상,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진짜인가 가짜인가?」, 노컷뉴스, 2015.9.9.)

 

만주지역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했던, “2백만 조선족의 정신적 지주”라고 평가되는 이민 여사는 동북항일연군 지휘부(2군 3사 사장)로 김일성 주석을 소개하고 있다. (정희상, 「항일 투쟁 빛나는 조선족 ‘대모’」, 시사저널, 1995.11.2.) 

 

이민 여사는 실제 1940년대 소련에서 김일성 주석과 함께 생활하기도 했다. 이민 여사는 당시를 회고하며 김일성 주석이 한참 선배인 최용건이나 김책을 제치고 대표로 떠오른 데 대해 “김일성이 1937년 보천보 전투를 통해 국내에 이름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었고, 성격이 활달해 리더십이 있기도 했지만, 결정적인 것은 독립된 부대를 오래 거느리고 있어서 직계 조선인 부하가 가장 많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원섭, 「항일무장투쟁시기의 김일성 빨치산부대」, 『신동아』, 2006.11.30.)

 

김일성 주석을 ‘유명인’으로 만들어 준 보천보 전투

 

김일성 주석의 항일운동에서 가장 유명하고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일화는 보천보 전투라 할 수 있다. 김병관 동아일보 회장은 1998년 10월 방북 당시 김일성 주석의 보천보 전투를 담은 1937년 동아일보 신문 원판을 순금으로 제작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통일부에서 발간한 『북한지식사전』(통일부 국립통일교육원, 2021.)에서는 보천보 전투를 아래와 같이 소개하고 있다. 

 

“(김일성 부대는) 1937년 6월 4일 밤, 약 100명의 유격대 병력을 이끌고 함경남도 보천보 지역으로 진출해 경찰주재소를 습격하고, 퇴각하던 중에 혜산에서 경찰부대와 전투를 벌였다. (중략) 전투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파장은 매우 컸는데, 동아일보가 1937년 6월 5일 두 차례에 걸쳐 이 사건에 대한 호외를 발행했을 정도로 관심이 많았다.” 

 

통일부 소개처럼 보천보 전투는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파장은 매우 컸는”데 그 이유는 김일성 부대가 보천보 전투에서 추구한 효과 때문이었다. 

 

193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조선 독립의 꿈은 사그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일제 통치 기간이 길어지고 만주까지 진출한 일제의 힘은 강대해 보였고, 독립운동을 했던 수많은 인사들도 점차 친일로 변절했다. 당시 전 민중이 들고일어나야 독립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던 김일성 주석은 독립의 꿈을 잃어가고 있던 조선인들의 패배주의를 극복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국내에서 총성을 울리고 항일운동 세력이 살아있으며, 일제도 타도할 수 있음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일제의 문헌자료에도 김일성 부대가 추구한 것이 “항일연군의 위력을 조선민중에게 주지시키고 혁명화를 도모”하기 위한 것이라고 적고 있다. (한홍구, 앞의 책)

 

여운형 선생이 당시 보천보 소식을 듣고 그 현장을 보기 위해 한달음에 달려갔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한홍구 교수에 따르면 보천보 전투 이후 조선인들의 삶에 많은 변화가 나타났는데, 보천보에서 멀지 않은 곳이 고향인 최인환 박사는 아이들이 가위바위보를 해서 이긴 쪽이 김일성 장군이 되고 지는 쪽이 일본군이 되는 놀이를 했다고 회고하고 있다. 또 보천보 전투 당시 혼비백산해 머리를 쳐 박고 숨던 일본 순사를 빗댄 ‘순사돼지 꿀꿀’이란 노래가 갑산 지방에 널리 퍼졌다고 한다. (한홍구, 앞의 책)

 

김일성 부대는 보천보 전투 후 반격하는 일제와의 전투들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는데 그 중 간삼봉 전투가 유명하다. 이 전투는 김일성 부대와 동북항일연군 2군 4사, 1군 2사 연합부대가 중국 지린성 창바이현 간삼봉 일대에서 일본군과 만주군 국경 연합부대를 무찌른 전투다. 

 

간삼봉 전투는 보천보 전투의 설욕을 만회하기 위해 일제가 조선군 주둔 최정예 함흥 74연대로 항일유격대 토벌에 나서면서 시작된다. 1937년 6월 29일 일제는 압록강을 건너 장백현 간삼봉을 침입한다. 이를 탐지한 동북항일연군 연합부대 500여 명은 간삼봉 일대의 유리한 지형을 선점하고 주요 진지에 매복하여 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6월 30일 8시 경부터 시작된 전투는 저녁에야 끝날 정도로 치열하였다. 이 전투에서 동북항일연군은 일본군과 만주국 군경을 대거 섬멸하였다. 김일성 부대는 그 후에도 남만주 일대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지속하여 일제에 큰 손실을 입혔다. (장세윤, 「1930년대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51』, 독립기념관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북한 사회를 이해하는 출발점 

 

“김일성 장군은 솔방울로 폭탄을 만든다.” 

 

신화에서 나올법한 위와 같은 말을 근거로 김일성 주석의 항일운동은 날조된 거짓이라고, 혹은 심하게 왜곡·과장된 것이라고 치부해 버려도 되는 것일까? 그보다는 왜 이런 ‘신화’가 나타났는지, 그리고 북한 사람들은 위와 같은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알기 위한 노력이 더 필요할 것이다.  

 

당시 만주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하던 조선인들은 거의 맨손으로 일제와 싸우고 있었다. 총기도 일제로부터 빼앗아야 했고, 그 과정에서 숱한 목숨을 잃어야 했다. 그런 와중에 조선인들은 대중의 창의력과 굳은 의지로 연길폭탄이라고 부르는 작탄을 만들어 냈다. 이런 사실이 “김일성 장군은 솔방울로 폭탄을 만든다”는 말로 이어진 것이다. 이러한 연길폭탄을 만들어 낸 자력갱생의 정신은 지금도 북한 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주요한 정신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다.  

 

“김일성 장군은 축지법을 쓴다”는 이야기 역시 일정한 사실에 근거를 둔 것이다. 1939년 5월 함경북도 무산 지구에 진출한 김일성 부대는 압록강을 건너 일제가 닦아놓은 갑산-무산 사이의 경비도로를 100여 리 가량 백주대낮에 행군하여 두만강 연안의 무포로 진출하였다. 일제는 항일운동 세력들이 감히 자신들이 닦아놓은 경비도로를 행군해 가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하고 산악지대에 포위망을 쳤는데 김일성 부대가 갑자기 무포에 나타난 것이다. (한홍구, 앞의 책)

 

북한 주민들은 자신들의 정통성과 역사적 뿌리를 김일성 주석의 항일운동 역사에서 찾고 있다. 북한 사회, 북한 사람들을 이해하는 출발점을 김일성 주석의 항일운동 역사를 제대로 아는 것으로 삼아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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