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벽예감 489] 북산 이깔나무숲에 울려퍼진 함성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 기사입력 2022/04/25 [07:58]

[개벽예감 489] 북산 이깔나무숲에 울려퍼진 함성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 입력 : 2022/04/25 [07:58]

<차례>

 

1. 특별한 작별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2. 회의에서 채택된 유격전식 인민전쟁전략

3. 유격전식 인민전쟁을 준비하는 투쟁

4. 이깔나무숲에 울려퍼진 함성

 

 

1. 특별한 작별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첫 시작은 김일성이 떼라. 무슨 일이나 표본이 있고 시범이 있는 법이 아니냐.> 동무들은 이런 말로 나와의 작별인사를 대신하였다.”

 

위의 인용문은 김일성 주석이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2권에 서술한 문장이다. 조선로동당출판사가 1992년부터 1998년까지 기간에 펴낸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는 총8권인데, 어린 시절부터 1945년 해방 직후까지 김일성 주석의 항일혁명투쟁 전 과정을 상세히 수록한 책이다. 2021년 4월 서울에 있는 도서출판 민족사랑방이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총8권을 출판했다.  

 

누구나 직감할 수 있는 것처럼, 위의 인용문은 특별한 작별인사였다. 평범한 작별인사가 아니라 특별한 작별인사라고 하는 까닭은, 중국 동만주 각지에서 활동하는 항일혁명투사들이 1931년 12월 16일부터 10일 동안 동만주 연길현 명월구에서 진행된 회의를 마치고 헤어지면서 김일성 주석과 나눈 작별인사였기 때문이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었지만, 그날 김일성 주석과 항일혁명투사들이 나눈 특별한 작별인사는 항일혁명운동에서 질적 변화를 일으킨 신호탄이었다. 

 

1931년 12월 16일부터 10일 동안 동만주 연길현 명월구에서 진행된 회의는 ‘동만특위 당 및 공청 간부회의’였다. ‘동만특위’라는 말은 동만주특별위원회라는 뜻인데, 동만특위는 중국공산당 동만주지역조직이다. ‘공청’이라는 말은 공산주의청년단이라는 뜻인데, 공청은 중국공산당 산하 청년조직이다. 

 

중국측 역사자료에 의하면, 중국공산당은 1927년 10월 중국 료녕성 심양에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를 조직했고, 곧이어 중국공산당 동변도특별위원회를 조직했는데, 동변도특별위원회를 동만특위라고 불렀다. 동변도라는 말은 만주의 중심도시 심양을 기준으로 삼았을 때, 동쪽 변방에 있는 섬을 뜻하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동변도를 간도라 불렀다. 그러므로 동만주, 동변도, 간도는 같은 지역을 일컫는 지명들이다. 동만주는 두만강 북쪽에 펼쳐진 광활한 땅이다. 

 

만주 전역을 총괄하는 만주성위원회를 료녕성 심양에 둔 중국공산당이 동만주에 특별위원회를 내온 까닭은, 당시 항일혁명운동이 가장 강력하게 전개된 동만주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일제식민지시기 수많은 조선인들이 일제의 식민통치와 지주계급의 착취에서 벗어나기 위해 동만주로 집단이주했다. 그래서 동만주는 조선인 항일운동의 중심지로 되었다. 일제는 동만주 각지로 확대되는 조선인 항일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800~900명의 대대급 ‘토벌대’인 ‘간도특설대’를 내몰았는데, 악독한 ‘간도특설대’는 1938년부터 1945년까지 미쳐 날뛰면서 항일혁명투사들과 무고한 인민들을 대량학살하는 극악한 만행을 저질렀다. ‘간도특설대’에서 일제의 앞잡이로 날뛰었던 조선인 반민족범죄자는 150여 명이었는데, 그들 가운데는 한국군 창군의 공로자로 추대되어 사후에 국립현충원에 안장된 백선엽(합참의장), 신현준(해병대사령관), 김석범(해병대사령관), 송석하(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김백일(제1군단장), 김홍준(남조선국방경비대)이 있다. 

 

‘동만특위 당 및 공청 간부회의’는 동만주 연길현 명월구에서 진행된 것으로 하여 조선에서는 명월구회의라고 부른다. 당시 중국의 행정구역은 성, 현, 구, 촌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를테면 길림성 연길현 명월구 마촌이라는 식으로 구역화된 것이다. 회의명칭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명월구회의는 동만주 각 현들에 조직된 중국공산당 동만특위 조직대표들이 참석한 회의였다. 김일성 주석의 회고록에 따르면, 항일혁명투사 40여 명이 명월구회의에 참석했는데, 예비회의를 진행한 다음 10일 동안 본회의를 진행했다고 한다. 명월구회의에는 동만주에서 활동하는 조선인 항일혁명투사들과 중국인 항일혁명투사들이 함께 참석했다. 

 

명월구회의가 열렸던 1932년 12월 당시 중국공산당 동만특위 서기는 중국인 항일혁명투사 동장영(1907~1934)이었다. 서기라는 직책은 당조직 책임자를 뜻한다. 동장영은 1925년부터 1928년까지 일본에서 유학하였고, 중국공산당 하남성위원회 서기, 대련시위원회 서기로 일하다가 동만특위 서기로 임명받고 1931년 11월 동만주 연변으로 갔다. 그는 1934년 3월 21일 동만주 왕청현 동광진 묘구촌에서 벌어진 ‘토벌대’와의 조우전에서 전사했다. 오늘날 왕청현에는 동장영렬사릉원과 동장영기념관이 있다. 이런 사실을 보면, 그가 중국의 항일혁명렬사들 가운데서 손꼽히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세계혁명운동을 지도하고 있었던 국제당(Communist International, Comintern, 존속기간 1919~1943)은 한 나라에 혁명적 당이 하나만 존재해야 한다는 ‘일국일당주의’를 채택하였는데, 그에 따라 1930년 3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이 해산되었고, 1931년 10월 조선공산당 일본총국이 해산되었다. 그렇게 되어 만주와 일본에서 활동하던 조선인 혁명가들은 중국공산당 또는 일본공산당에 각각 입당해야 했다. 하지만 조선인 혁명가들 가운데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이 일국일당주의 원칙에 따라 해산되기 이전에도 그들을 외면하고 중국공산당에 입당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왜냐하면, 당시 일제의 탄압과 당내파쟁으로 와해위기에 빠진 조선공산당에 아무런 기대와 희망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김일성 주석의 회고록에 따르면, 명월구회의에서 동장영 서기가 “동만에서 오래동안 투쟁해왔고 경험도 많이 축적한 조선 동지들이 중요한 발언을 하여 달라고 거듭 요청”하는 바람에 김일성 주석은 “중국말과 조선말을 엇바꾸어가며 선동적인 연설을 하였다”고 한다. 김일성 주석은 중국말을 유창하게 하였으므로, 이중언어로 연설한 것이다. 명월구회의에 관한 역사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1) 당시 조선인 항일혁명투사들과 중국인 항일혁명투사들은 같은 언어로 의사소통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따로 모여 자기 나라말로 별도회의를 진행한 다음, 이중언어로 진행된 전체회의에서 최종적으로 합의, 의결하는 절차를 밟았다. 

 

2) 조선인 항일혁명투사들과 중국인 항일혁명투사들이 참석한 전체회의에서 김일성 주석은 조선인 항일혁명투사들이 진행한 별도회의에서 토의된 내용을 가지고 이중언어로 연설하였다.

 

조선의 역사문헌에는 김일성 주석의 명월구회의 연설이 ‘일제를 반대하는 무장투쟁을 조직전개할 데 대하여 - 연길현 명월구에서 진행된 당 및 공청 간부회의에서 한 연설’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었다. 연설제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명월구회의에 참석한 항일혁명투사들은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위한 전략방침과 전술문제를 토의, 결정하였던 것이다. 김일성 주석은 명월구회의 연설에서 반일인민유격대를 조직하는 문제, 유격근거지를 창설하는 문제, 무장투쟁의 대중적 지반을 구축하는 문제, 조중인민의 반일통일전선을 형성하는 문제, 당조직사업과 공청사업을 강화하는 문제에 대해 언급하였다.   

 

김일성 주석의 회고록에 따르면, 명월구회의는 “항일무장투쟁의 시초를 열어놓은 회의이며 우리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과 공산주의운동에서 새로운 전환을 가져온 력사적인 회의였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항일혁명운동은 명월구회의를 전환점으로 하여 항일무장투쟁으로 한층 더 높은 단계로 발전된 것이다.   

 

주목되는 것은, 김일성 주석이 “나는 회의에서 거론된 문제들을 골자로 하여 무장대오조직과 무장투쟁에 대한 우리의 구상을 두고 중국말과 조선말을 엇바꾸어가며 선동적인 연설을 하였다”고 회고록에 서술하였다는 사실이다. 인용문에 나오는, 여러 문제들을 거론한 회의는 조선인 항일혁명투사들이 우리말로 진행한 별도회의를 뜻한다. 조선인 항일혁명투사들은 별도회의에서 “무장대오조직과 무장투쟁에 대한 구상을” 토의했는데, 김일성 주석은 그 구상을 가지고 전체회의에서 이중언어로 연설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무장대오조직과 무장투쟁에 대한 구상”이 김일성 주석의 전략구상이라는 사실이다. 그렇게 해석하는 근거는, 명월구회의가 개최되기 2년 전인 1930년 6월 30일 동만주 장춘현 카륜에서 진행된 공청 및 반제청년동맹 지도간부회의에서 김일성 주석이 ‘조선혁명의 진로’라는 제목으로 보고를 했는데, 그 보고에서 항일무장투쟁의 필요성과 전략구상을 이미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김일성 주석은 카륜회의 보고에서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무장투쟁을 전개하는 것은 식민지민족해방운동발전의 합법칙적 요구”라고 지적하고, “공청과 반제청년동맹을 비롯한 혁명조직을 통하여 교양육성되고 단련된 청년공산주의자들로써 혁명적 무장조직인 조선혁명군을 결성하여야” 한다고 언명하였다. 김일성 주석이 카륜회의에서 제시한 전략구상에 따라, 1930년 7월 6일 길림성 이통현 고유수에 있는 삼광학교 운동장에서 조선혁명군이 결성되었다. 조선혁명군은 항일무장투쟁 준비단계에 조직된 소규모 반군사조직이다. 이처럼 김일성 주석은 명월구회의 이전부터 항일무장투쟁에 필요한 사상이론적 준비를 갖추고, 실천경험을 쌓고 있었으므로, 항일무장투쟁에 관한 전략구상을 제시하면서 명월구회의를 이끌었던 것이다.  

 

회고록에 따르면, 명월구회의에서 김일성 주석은 “국가가 없는 우리나라의 실정에서 정규전으로 일제와 대항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므로, “변화무쌍한 유격전이야말로 우리가 선택해야 할 기본무장투쟁형식”이라고 지적하고, 비록 “(우리가) 지금은 남의 나라땅에서 곁방살이를 하는 적수공권의 청년들”이지만, “인민을 믿고 항일전쟁을 시작하려고 결심하였다”고 한다. 또한 김일성 주석은 “인민이 국가이고, 인민이 후방이며, 인민이 정규군”이라고 강조하면서, “우리가 벌리게 될 유격전은 인민전쟁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언명하였다. 

 

 

2. 회의에서 채택된 유격전식 인민전쟁전략

 

명월구회의에서 주목되는 것은, 항일무장투쟁을 유격전식 인민전쟁(people's war)으로 정식화하였다는 사실이다. 명월구회의 이전에도 우익민족주의계렬의 무장조직들이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지만, 그것은 유격전식 인민전쟁이 아니었다. 1910년대와 1920년대에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우익민족주의계렬의 무장조직들을 통칭하여 조선독립군이라고 불렀다. 조선독립군은 인민과 유리된 상태에서 유격전을 전개하였기 때문에, 인민들로부터 외면을 받으며 차츰 약화되더니, 결국 1933년 말에 와해되고 말았다. 

 

김일성 주석이 제시한 유격전식 인민전쟁전략구상에 따라 명월구회의에서는 다음과 같은 실행방침이 채택되었다.

 

- 처음에는 소규모 유격대를 조직하고, 점차 그것을 대부대로 강화발전시켜 인민혁명군을 창건한다.  

- 군중토대가 튼튼하고, 물질적 보장조건도 마련되어 있고, 지형도 유리한 동만주 산간지대에 유격근거지를 창설한다.

- 일제의 통치가 미치지 못하는 해방지구형태를 기본으로 하여 유격근거지를 창설한다. 

 

김일성 주석의 회고록에 따르면, “중국 동지들도 그 구상에 전적인 지지를 표명”하였으며, “유격전쟁의 형식문제, 유격대조직문제, 유격근거지문제를 비롯하여 어느 문제에서나 그들은 우리와 의견을 같이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되어 “바로 이 회의(명월구회의 - 옮긴이)에서 유격전의 방향을 규정해주는 전략과 전술적 원칙의 골자가 마련되였으며, 그것을 기초로 하여 비상히 풍부하고 변화무쌍한 무장투쟁의 전법들이 창조되였다”고 한다. 

 

명월구회의가 열리기 3개월 전인 1931년 9월 18일 일제는 만주사변을 도발했다. 만주사변은 일제가 만주를 점령하여 중국대륙을 침략하기 위한 병참기지로 만들려는 무력침공이었다. 일제가 중국을 침략한 것으로 하여 우리 민족의 항일혁명운동에 새로운 정세가 조성되었다. 만주사변으로 조성된 새로운 정세는 무력침공에 미쳐 날뛰는 일제를 타도하려면 반드시 무장투쟁을 벌여야 한다는 필요성을 제기했다. 명월구회의가 진행된 때로부터 불과 한 달밖에 지나지 않은 1932년 1월 말 일제는 만주 전역을 무력으로 점령했고, 같은 해 3월에는 괴뢰국인 만주국을 만들었다. 중일전쟁은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할 때가지 15년 동안 지속되었다. 그처럼 급격히 변화되는 정세 속에서 항일혁명투사들은 유격대식 인민전쟁의 길을 간고분투의 혁명정신으로 개척하며 한 걸음씩 전진해야 했다. 유격대식 인민전쟁전략을 채택한 명월구회의를 끝마치는 순간, 회의참석자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혁명가>와 <인터나쇼날>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김일성 주석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 노래는 “사랑하는 조국과 혁명 앞에 드리는 선서”였다고 한다. 

  

명월구회의를 끝마친 참가자들은 김일성 주석과 특별한 작별인사를 나누고 각자 자기 활동지역으로 떠나갔으나, 김일성 주석과 동장영 서기는 회의장에 남았다. 동만주 조선인 항일혁명운동의 대표자 김일성 주석과 동만특위 책임자 동장영 서기는 진지한 담화를 나누었다. 김일성 주석의 회고록에는 “명월구회의가 끝난 다음 나는 백바위 밑에서 동장영과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서술되었다. 회고록에 담화내용이 수록되었다. 동영장 서기는 김일성 주석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동만에서 혁명투쟁의 주력군은 조선 사람들입니다. 조선족 주민들에 의거해야 유격전쟁은 승리를 보장할 수 있습니다. 일본이 아무리 리간질을 해도 두 나라 공산주의자들은 민족적 편견을 막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특위는 앞으로 조선 동지들과의 사업에 특별한 주의를 돌리려고 하는데 많은 방조를 바랍니다. 나는 김일성 동지를 믿겠습니다.”

 

중국공산당 동만특위는 조선인 당원이 90% 정도에 이르러 압도적인 다수의 지위를 차지했다. 또한 앞으로 조직될 반일유격대들에도 조선인이 중국인보다 압도적으로 많이 입대할 것이라는 점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런 조건에서 동만특위 책임자가 동만주 조선인 항일혁명운동의 대표자에게 방조를 요청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동장영 서기가 중국공산당 동만특위 서기로 임명되어 연변에 간 때는 1931년 11월이었고, 명월구회의가 소집된 때는 1931년 12월 중순이었으므로, 명월구회의는 그가 동만특위 서기로 임명된 때로부터 불과 한 달 만에 열렸다. 김일성 주석의 회고록에 따르면, 동영장 서기는 동만특위 책임자로 임명되어 룡정에 나타나마자 밀정들에게 걸려들어 룡정경찰서 구류장에 갇혔는데, 고 씨 성을 가진, 보배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사람이 룡정경찰서에 들어가서 경찰들을 구슬려놓은 덕택에 동영장 서기는 곧바로 풀려나 명월구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사정을 보면, 당시 동장영 서기는 동만주 항일혁명운동의 내부사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명월구회의에 참석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 조건에서 동만특위 책임자가 동만주 조선인 항일혁명운동의 대표자에게 방조를 요청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회고록에 따르면, 김일성 주석은 동영장 서기의 방조요청을 “뜨겁게” 받아들이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두 민족 간의 단결에 대해서는 우리도 특별한 관심을 돌리고 있으니 마음을 놓으십시오. 조중 인민들 사이에 생긴 일시적인 불신은 유격전쟁의 총성이 다 제거해버리게 될 것입니다.” 김일성 주석은 회고록에서 “그 후 나와 동영장은 이날을 자주 회상하였다”고 썼다.  

 

 

3. 유격전식 인민전쟁을 준비하는 투쟁

 

명월구회의 이후 동만주 각지에서는 유격전식 인민전쟁을 준비하는 투쟁이 활발히 벌어졌다. 당시 항일혁명조직에는 유격전을 수행할 유능한 지휘관들과 훈련된 전투원들도 없었고, 유격전에 필요한 총과 탄약, 식량과 군복도 없었다. 항일혁명조직이 믿어야 할 신뢰대상은 인민밖에 없었다. 그래서 항일혁명투사들은 인민 속에 들어가 유격전준비사업에 착수했는데, 가장 선차적으로, 가장 중시한 것은 ‘사람’이었다. 유격전에 참가할 전투원을 모집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고 중요했다. 회고록에서 김일성 주석은 당시 유격대초모사업을 다음과 같이 추진했다고 썼다. 

 

- 적위대, 소년선봉대, 소년탐험대를 비롯한 반군사조직들의 훈련을 강화하고 대렬을 확대하였다.

- 두만강 연안의 여러 지역에서 항일운동에 참가한 동지들이 안도현으로 집결했다.

- 정치군사적으로 준비된 청년들이 안도현으로 집결했다. 

- 추수투쟁과 춘황투쟁에서 단련되고 검열을 받은 청년들을 선발하여 안도현으로 집결시켰다. 

 

김일성 주석은 명월구회의를 마치고 안도현에 돌아가서 “아버지가 어머니한테 맡겼던 두 자루의 권총을 땅속에서 파냈다”고 한다. 회고록에 따르면, 김일성 주석은 동지들과 만나 그 두 자루의 권총을 쳐들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자, 이것이 우리 아버지가 나에게 물려준 유산이다. 아버지는 의병도 아니고 독립군도 아니었지만, 세상을 떠나시는 날까지 이 총을 가지고 있었다. 왜? 무장투쟁이야말로 나라의 독립을 이룩할 수 있는 최고의 투쟁형태라고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총적인 지향은 무장투쟁을 하자는 것이였다. 나는 이 두 자루의 권총을 물려받을 때 아버지가 지향했던 것을 내가 대신하여 실현시키고야 말리라는 결심을 굳게 다지였다. 이제는 때가 되였다. 이 두 자루를 밑천으로 삼아 독립행군을 시작해보자. 지금은 이 두 자루가 전부이지만, 이것이 새끼를 치고 또 쳐서 200자루, 2,000자루, 2만자루로 될 날을 생각해보라. 총 2,000자루만 있으면 능히 나라를 해방할 수 있다. 밑천이 있으니 이것을 자꾸 굴려 2,000자루, 2만자루가 되게 하자!” 

 

항일혁명투사들은 유격대초모사업과 함께 무기로획투쟁도 벌였다. 그들은 일제관동군, 일만경찰, 친일지주, 반동관료배들을 습격하여 총과 탄약을 빼앗는 무기로획투쟁을 결사적으로 벌였다. 무기로획투쟁에 나선 많은 동지들이 적들과의 전투에서 희생되었다. 

 

항일혁명투사들은 유격대초모사업, 무기로획투쟁과 함께 무기제작투쟁도 벌였다. 김일성 주석의 회고록에 따르면, 화룡현 수리바위굴병기창, 왕청현 남구병기창, 연길현 주가골병기창 등에서 칼, 창, ‘비지깨권총’, 소리폭탄, 고추폭탄, 연길폭탄을 자체로 만들어냈다고 한다. 

 

항일혁명투사들은 무장투쟁의 대중적 지반을 축성하는 정치조직사업에도 전력했다. 무장투쟁의 대중적 지반을 축성하려면 인민들 속에 깊이 들어가 오랜 기간 동안 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생사고락을 나누어야 했다. 김일성 주석의 회고록에 따르면, “한 마을을 혁명화하는 과정에 여러 명의 혁명가들이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었고, 때로는 사람들로부터 참기 어려운 수모와 불신을 당하면서도 자기가 혁명가라는 것을 밝히지 못하고 그것을 고스란히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 피나는 투쟁과 노력에 의하여 동만주 안도현, 연길현, 왕청현, 화룡현, 훈춘현에서 10~20명의 인원으로 유격대소조들이 속속 조직되었다. 유격대소조들은 무기를 확보하고, 전투경험을 축적하고, 무장대오를 확대하다가 대규모 무장대오를 조직하는 식으로 반일유격대 창건사업을 추진했다. 안도현에서 활동하는 항일혁명투사들은 김일성 주석의 직접적인 지도를 받으면서 조선인 별동대를 조직했는데, 별동대 참가자들은 거의 모두 학생출신들과 농민출신들이었다. 김일성 주석은 조선인 별동대를 확대하고 재편성하는 식으로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했다. 반일인민유격대는 중대를 기본전투단위로 하여 조직되었다.

 

결사적인 창건준비투쟁을 벌인 끝에 마침내 군사훈련이 시작되었다. 군사훈련은 안도현 소사하 무주촌 토기점골 등판에서 진행되었다. 소사하 부녀회원들이 매일같이 점심밥을 담은 함지를 머리에 이고 토기점골 등판으로 올라왔다. 소사하 부녀회원들은 가둑나무물을 들인 녹색천을 가지고 재봉틀을 돌려 군복과 군모를 만들었다. 

 

1932년 4월 하순 안도현에서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기 위한 최종회의가 진행되었다. 회고록에 따르면, 회의참가자들은 김일성 주석을 반일인민유격대 대장 겸 정치위원으로 선거하였다고 한다. 

 

 

4. 이깔나무숲에 울려퍼진 함성

 

1932년 4월 25일, 마침내 그날이 왔다. 토기점골 등판에 울창하게 자란 이깔나무들이 아침햇살을 받아 설레고 있었다. 역사문헌에 나오는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골이라는 지명을 오늘의 행정구역에서 찾아보면 연변조선족자치주 안도현 소사하향 무주촌이다. 안도현 소사하향에 북산이 있다. 그 산에 토기점골이라는 지명이 남아있는 것을 보면, 옛날 북산 골짜기에 토기 굽는 터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고 이용섭 역사연구가와 고 이창기 기자는 2015년 10월 토기점골 등판을 답사한 기행문을 2015년 12월 19일 <자주시보>에 남겼는데, 기행문에 따르면, 토기점골 등판은 북산 정상에 있고, 무주촌에서 토기점골 등판으로 오르는 길은 꽤 멀고 가파른데, 산에는 이깔나무숲이 울창하다고 했다. 두 답사자는 마을주민들이 토기점골 등판에 세운 기념비 앞으로 다가갔다. 기념비에는 “김일성 동지께서 1932년 4월 25일 이곳에서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시였다. 안도현 소사하향 무주촌. 1992년 8월 25일”이라는 우리말 문장과 중국어 번역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김일성 주석의 회고록은 지금으로부터 90년 전, 토기점골 등판에서 진행된 반일인민유격대 창건식 현장을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다. 유격대 군복을 입고 총을 멘 유격대원들이 구분대 단위로 이깔나무숲 등판에 정렬하였다. 소사하 주민들과 흥륭촌 주민들이 반일인민유격대 창건식을 축하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그날 창건된 반일인민유격대 유격대원은 100여 명이었다. 김일성 주석은 회고록을 집필하면서 60년 전 반일인민유격대 창건식에 참가한 유격대원 100여 명 중에서 19명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들의 이름을 회고록에 남겼다.  

 

조선혁명군 출신 - 차광수 

황포군관학교 출신 - 박훈 

소사하 출신 - 김일룡, 조덕화, 조명화, 리명수, 곰보라는 별명으로 불린 대원  

흥륭촌 출신 - 김철(김철희), 김봉구, 리영배, 곽 씨 성을 가진 대원 

삼인방 출신 - 리봉구, 방인현 

연길현 출신 - 박명손, 안태범 

남만주 출신 - 한창훈

조선 국내 출신 - 김종환, 리학용, 김동진 

 

김일성 유격대 대장은 반일인민유격대 창건식에서 “이 날을 보지 못하고 희생된 동지들과 고인들을 토기점골 등판에 모두 불러오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가슴에 차넘치는 격정을 터뜨려 연설을 시작하였다.” 역사문헌에 따르면, 김일성 유격대 대장은 창건식 연설을 다음과 같은 말로 끝맺었다고 한다. 

 

“모두다 조국광복의 력사적 위업을 이룩하기 위하여 혁명의 붉은 기치를 더욱 높이 추켜들고 일제를 반대하는 무장투쟁을 힘차게 벌려나갑시다.”

 

창건식 연설을 마친 김일성 유격대 대장이 “반일인민유격대의 창건을 선포하자 대원들은 목청껏 만세를 부르고 인민들은 열렬한 박수갈채를 보내였다.” 뜨거운 함성이 이깔나무 숲을 지나 멀리 울려퍼졌다. 

 

그로부터 엿새가 지난 1932년 5월 1일은 세계로동절이었다. 김일성 유격대 대장이 지휘하는 반일인민유격대는 붉은 기를 앞세우고 나팔을 불고 북을 두드리면서 북산을 내려와 안도현으로 행군했다. 휘날리는 붉은 기폭에는 ‘반일인민유격대’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들은 안도현 성에 입성하여 열병행진을 하였다. 유격대 지휘관으로 임명된 김일룡이 열병행진 중에 혁명가를 선창하면, 모든 대원들이 따라불렀다. 안도현 주민들만이 아니라 그 지역에 있는 중국인 반일부대 장병들도 거리에 나와 반일인민유격대에 환영인사와 축하박수를 보냈다.  

 

반일인민유격대가 안도현 성에서 열병행진을 마치고 토기점골로 돌아왔을 때, 차광수와 김일룡이 마을로 달려가 김일성 유격대 대장의 어머니 강반석 여사를 모셔왔다. 김일성 유격대 대장은 토기점골 이깔나무숲에서 강반석 여사와 상봉하던 장면을 회고록에 수록할 때, “병고에 시달린 얼굴, 미간에 생긴 주름살, 머리의 흰 오리, 그러나 어머니의 눈은 고요히 웃고 있었다”고 썼다. 당시 강반석 여사는 지병을 앓으면서도 소사하 부녀회원들을 이끌고 반일인민유격대 창건에 필요한 군복과 식량을 마련하는 원군사업에 힘썼다. 회고록에 따르면, 강반석 여사는 유격대원 리영배에게 다가가 그의 총과 탄띠, 오각별을 말없이 어루만졌다고 한다. 또한 회고록에 따르면, 강반석 여사는 유격대원들인 김철, 조덕화, 김일룡, 방인현, 차광수가 어깨에 메고 있는 총을 두 손으로 쓸어보고, 그들의 어깨를 만져보다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정말 장하구나. 우리 군대가 생겼으니 이제는 됐다. 왜놈들을 치고 나라를 꼭 찾아야 한다!”

 

이 글의 첫머리에 서술한 것처럼, 1931년 12월 중순 명월구회의에 참가한 조선인 항일혁명투사들과 중국인 항일혁명투사들은 반일유격대창건사업을 김일성 주석이 가장 먼저 시범적으로 실행하여 반일유격대의 표본을 만들어주기 바란다는 특별한 작별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김일성 주석은 그때부터 4개월 동안 정력적으로 활동하여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였다. 1932년 4월 25일 동만주 안도현에서 첫 반일유격대가 창건되었다는 소식은 만주 전역의 항일혁명조직들 속에 삽시에 퍼져나갔다. 그렇게 되어 1932년 5월부터 만주 각지에서 서로 다른 명칭을 가진 반일유격대들이 속속 창건되었다.

 

동만주 각지에서 창건된 반일유격대 

- 1932년 4월 안도현 반일인민유격대 창건 (대장 김일성)

- 1932년 9월 연길현 반일유격대 창건 (대장 박동근)

- 1932년 11월 왕청현 반일유격대 창건 (대장 량성룡)

- 1932년 11월 훈춘현 항일유격대총대 창건 (대장 공헌조)

- 1932년 12월 화룡현 반일유격중대 창건 (대장 김세)

 

 

남만주 각지에서 창건된 반일유격대

- 1932년 5월 류하현 반일유격대 창건 (대장 인수의)

- 1932년 6월 반석공농반일의용군 창건 (대장 장진국)

- 1932년 11월 남만유격대 창건 (대장 맹걸민)

- 1932년 12월 해룡유격대 창건 (대장 왕인수)

- 1933년 봄 농민유격대 창건 (대장 리환민)

 

북만주 각지에서 창건된 반일유격대

- 1932년 10월 탕원 반일유격대 창건 (대장 박복신)

- 1933년 3월 밀산 반일유격대 창건 (대장 장보산)

- 1933년 4월 요하로농의용군 창건 (대장 최용건)

- 1933년 10월 주하 반일유격대 창건 (대장 조상지)

- 1934년 2월 수령 반일동맹군 창건 

- 1934년 5월 녕안 반일유격대 창건 (대장 백정전)

 

역사자료에 의하면, 1932년 당시 동만주 각지에 조직된 반일유격대 총병력은 약 360명이었는데, 대원의 약 95% 이상이 조선인이고, 지휘관도 거의 모두 조선인이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동만주 반일유격대는 사실상 조선인 반일유격대였다. 조선인 반일유격대들이 통합, 증편되어 1934년에 대규모 전투부대로 조직되었으니, 그것이 조선인민혁명군이다. 

 

2022년 4월 25일은 반일인민유격대가 창건된 때로부터 90주년이 되는 날이다. 조선에서는 해마다 4월 25일을 조선인민혁명군 창건일로 기념하고 있다. 창건 90주년을 맞이한 올해는 더 성대하게 기념할 것으로 생각된다. 

 

90년 전 밀림의 병기창에서 톱과 망치를 가지고 만든 원시적인 무기를 들고 항일유격전을 시작했던 항일혁명투사들의 후손은 오늘 미국의 전쟁도발위협을 제압하는 막강한 핵억제력을 보유하였다. 반일인민유격대의 ‘비지깨권총’은 조선인민군의 극초음속미사일로 전변되었고, 반일인민유격대의 ‘연길폭탄’은 조선인민군의 열핵탄두로 전변되었다. 90년 전 반일인민유격대는 꿈도 꾸지 못할,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질적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그처럼 엄청난 질적 변화가 일어난 90년 동안 변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 인민군대의 사명과 임무를 수행하려는 그들의 사상과 의지다. 반일인민유격대, 조선인민혁명군, 조선인민군으로 이어진 군건설역사에서 인민이라는 두 글자는 언제나 그들의 사상정신적 중심에 자리잡고 있었다. 지난 날의 반일인민유격대와 조선인민혁명군도 인민군대고, 오늘의 조선인민군도 인민군대다. 인민군대의 사명과 임무를 수행하려는 사상과 의지, 바로 이것이 장장 90년에 이르는 그들의 군건설역사에서 엄청난 질적 변화를 일으킨 원동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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