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산하에] 미국, 조선을 침략하다 1. 불태워진 제너럴셔먼호

구산하 | 기사입력 2022/06/30 [18:52]

[이 산하에] 미국, 조선을 침략하다 1. 불태워진 제너럴셔먼호

구산하 | 입력 : 2022/06/30 [18:52]

미국을 빼놓고 한국 사회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단호하게 말하건대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한미관계를 나라 대 나라의 단순한 외교 관계로만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2차 세계 대전 이후 자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만들고 싶었던 미국의 야욕이 가장 노골적으로, 집중적으로 펼쳐진 곳이 한반도이기 때문이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조선 땅에 군정을 실시해 친일파들을 부활시킨 것도 미국이고, 멀쩡한 한반도 허리에 분단선을 그은 것도 미국이며 전쟁 기간 내내 무고한 민간인을 집단 학살한 것도 미국이다. 한마디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와 지배 권력은 철저히 미국의 의도와 적극적 개입 아래 탄생했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는데 다음 단추가 바르게 끼워질 리 만무하다. 한국에 대한 미국의 개입은 정치, 사회, 경제, 문화에 걸쳐 전방위적으로 이뤄졌으며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이런 불평등하고 종속적인 한미관계에 대해 누군가는 ‘보이지 않는 식민지’라 비판할 정도다. 

 

이 ‘보이지 않는 식민지’는 검은 머리 미국인들에 의해 안 받침 되어왔다. 미국에 의해 구원받은 이들이 미국에 얼마나 충성할지는 불 보듯 뻔한 일 아닌가. 그들은 분단이라는 민족의 아픔을 자기 권력의 기반으로 삼고 미국을 위해 ‘죽도록’ 싸웠다. 그것이 자신들의 살길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이 불평등한 한미관계가 미국과 검은 머리 미국인들에는 살판을 열어줬을지 몰라도 우리 민족, 우리 국민에게는 죽을 판, 고통과 비극 그 자체였다. 그 죽을 판을 뒤집고 인간답게 살고자 싸워온 것이 이 땅의 역사다. 금기시되고 불온시 되어온 역사, 그것을 활짝 열어야만 오늘날 한국 사회를 바로 이해하고 더 나은 내일로 나아갈 수 있다. 더 나은 내일 만드는 데 보탬이 되고자 ‘이 산하에’ 연재를 시작한다. 

 


 

침략하지 않으면 우호적으로 대하다

 

이 역사의 첫 장은 침략과 저항으로 시작된다. 우리나라와 미국의 본격적인 첫 만남은 조선 후기로 볼 수 있다. 당시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 개척의 칼바람이 동아시아에 불어닥치기 시작했고 조선도 예외는 아니었다. 통상 수교라는 말로 포장된 침략의 움직임이 본격화됐고 조선은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그렇다고 서양에 대해 적대적이거나 비우호적으로 대한 것은 아니다. 서양 세력이 침략 의도가 없을 시에는 낯선 사람을 잘 대접한다는 전통적 원칙, ‘유원지의’에 따라 예를 다해 우호적으로 대했다. 미국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은 1855년 강원도 통천에 표류한 미국 포경선 투브라더즈호의 선원들과 1866년 평안도 철산에 표류한 미국 상선 서프라이즈호 선원들을 안전하게 구조해주었으며 그들이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청나라까지 호송해주기도 했다. 이양선의 잦은 침몰로 긴장이 고조되고 있음에도 상대에 대한 불필요한 어떤 폭력도 행사하지 않았다. 아침이 빛나는 나라 조선은 그 누구보다 평화를 사랑하는 나라였다.

 

그러나 1866년 여름은 달랐다. 대동강에 거센 불길이 올랐다.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불태워진 것이다. 24명의 선원 중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분노한 평양 군민은 도망치는 선원들을 놓치지 않고 처단했다. 무슨 일일까? 불과 몇 개월 전만 하더라도 너그러웠던 조선의 입장이 갑자기 달라지기라도 한 걸까?

 

 

오만한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

 

문제는 제너럴셔먼호에 있었다. 미국인 프레스톤이 소유한 제너럴셔먼호는 본래에 유람선이었으나 중국 텐진항에 기항했을 때 영국 무역회사와의 계약을 맺고 무역선으로 변모했다. 상당한 규모의 무장을 갖춘 그들이 향한 곳은 조선이었다. 제너럴셔먼호는 청나라 상인의 안내를 받아 백령도와 돗섬을 거쳐 8월 16일, 평안도 용강현 근처에 도착했다. 이양선이 출몰했다는 보고를 들은 평안 병사(병마절도사) 이용강은 관리를 보내 사정을 알아보게 했다. 곧바로 무력 대응을 하지 않고 대화를 시도한 것이다. 그러나 제너럴셔먼호는 자신의 검은 속내를 전혀 감출 생각이 없다는 듯 오만한 태도를 보였다. 그들은 조선 땅에 보물이 많은지, 성곽이 있는지 등을 묻는가 하면, 병인박해 당시 서양인들이 사망한 것을 문제 삼으며 평양에 가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한발 나아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조선의 지도, 조총을 비롯한 무기들을 확인시켰는데 이것은 사실상 겁박이나 다름없었다.

 

8월 17일, 제너럴셔먼호가 평양을 향해 이동함에 따라 조선은 다시 관리를 파견한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조선은 “먼바다에 와서 정박한다면 혹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당신들은 남의 나라 앞바다에까지 넘어 들어왔다. 우리나라에서는 본래부터 국법(國法)으로 금지되어 있는 만큼 앞으로 전진해갈 수 없다”라고 단호하게 이야기했지만, 제너럴셔먼호는 “누가 감히 우리를 막겠는가? 우리는 곧바로 가려고 한다. 만약 서풍을 만나면 바람을 따라 곧 떠나겠다”라며 막무가내의 태도를 보였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고종 3년 7월 15일 기록)

 

당시 조선 관리가 선원들의 이름이나 조선 내 교역 대상 등 기본적인 정보를 확인하고자 했지만 이에 대해서도 무시로 일관할 뿐이었다. 게다가 배에는 대포와 총, 환도 등 무기가 즐비했고 선원들도 무장한 상태로 있었다. 자기 신원도 제대로 밝히지 않고 각종 무장을 갖추고 멋대로 구는 제너럴셔먼호에 조선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인내를 발휘했다. 이들이 곧 출발하겠다며 쇠고기와 달걀, 채소 등 식량을 요구하자 이를 마련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제너럴셔먼호는 두 차례에 걸친 조선의 정중한 경고를 가볍게 무시하고 대동강 상류를 향해 계속해서 올라갔다. 그것이 제명을 재촉하는 길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그들의 거침없는 행보는 평양 인근에 도착해서도 계속되었다. 조선 사람들을 대상으로 국법으로 금지된 포교 활동을 벌이는 한편 통상 수교 의사가 없음을 재차 밝히는 조선 관리에게 프랑스의 배가 한양에 이미 가 있다며 협박을 가했다. 동시에 황주에서 얻은 식량이 떨어졌다며 또다시 쌀과 고기, 달걀 등을 요구해왔다. 이들 중 일부는 따로 배를 띄워 수심을 측정하기도 했다. 무뢰배가 따로 없었다.

 

 

침략자에 대한 답

 

결국 참을 만큼 참은 조선의 분노를 터뜨리는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평범한 무역선인 척하던 제너럴셔먼호가 평양순영의 중군 이현익을 나포, 억류한 것이다. 같이 있던 두 명의 군인은 물에 던져져 살해당했다. 제너럴셔먼호의 승원 중 일부가 만경대 한사정 쪽으로 제멋대로 올라가자 이를 뒤쫓아가다 생긴 일이었다. 남의 땅을 침범하며 떠나지도 않고 온갖 협박을 해대더니 급기야는 우리 군인을 납치하고 죽이다니!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조선 측은 밤새도록 석방을 요구했으나 돌아온 것은 쌀 1천 석과 금, 은, 인삼 등을 몸값으로 내놓으라는 날강도 같은 답뿐이었다. 그러고는 대포와 조총을 마구잡이로 쏘아대며 황강정(평양 대동강 근처)에 정박했다. 무력 시위였다.

 

평양 군민의 가슴에서 불이 일기 시작했다. 선원 중 일부가 수심을 측정하기 위해 모습을 드러내자 강가에 몰려든 백성들은 우리 중군을 돌려보내 달라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그들이 요구를 거절하자 분노에 찬 평양 군민이 돌팔매질하기 시작했다. 장교와 나졸도 화살과 총을 동원해 공격했다. 군과 민이 하나의 마음으로 뭉쳐 싸움에 나선 것이다. 제너럴셔먼호는 예상치 못한 저항에 당황했다. 자신들을 상대로 ‘감히’ 맞서 싸울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한 것이다. 이후 퇴직한 장교 박춘권이 제너럴셔먼호에 올라 억류되어 있던 우리 중군을 구출해왔다.

 

만약에 여기서 그쳤더라면 제너럴셔먼호가 불태워지는 일까지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약탈자의 본색은 쉬이 사그라드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대포와 총을 앞세워 상선을 약탈했고, 이 과정에서 무고한 7명의 조선인이 사망하고 5명이 다쳤다. 각종 신식 무기로 무장한 그들이 보기에 조선이라는 나라와 조선인들은 미개하고 우습게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간과하고 있었다. 여러 차례의 도발에도 그들을 정중히 대한 것은 ‘선심’이었다는 것을.

 

분명해졌다. 이제 제너럴셔먼호는 침략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분노는 걷잡을 수 없는 적개심이 되었다. 조선인들은 선심을 살인과 약탈로 갚은 침략자를 용서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조선 정부의 승인이 떨어지자 평안 감사 박규수를 필두로 제너럴셔먼호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목표는 섬멸, 모조리 무찔러 없애는 것이었다.

 

 

승리, 조선의 기개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며 제너럴셔먼호에서도 사망자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객관 조건만 놓고 보면 서양식 대포와 각종 무기를 가지고 있는 제너럴셔먼호를 상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선체도 단단해 타격을 주기 쉽지 않았다. 게다가 조선군은 제대로 된 근대식 무기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싸움의 승리를 결정하는 것은 무기가 아니다. 전략과 전술, 그리고 싸우는 사람들의 정신이다. 평양 군민은 무력의 열세를 극복하기 위한 방책으로 화공 작전을 선택했다. 작은 배에 불을 붙여 셔먼호에 접근시켜 옮겨붙게 하는 방식이었다. 화공 작전은 두 차례의 시도 끝에 성공했다. 불을 피하려던 제너럴셔먼호가 모래톱에 좌초되고 이내 불이 옮겨붙었다. 평양 군민은 일제히 뛰어들어 공격에 나섰다. 

 

아무리 뛰어난 전략과 전술이 있어도 그것을 행동에 옮길 사람이 없다면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평양 군민은 목숨을 아끼지 않고 침략자에 맞서 용맹하게 싸웠다. 당시 박규수가 남긴 기록을 보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을 제압하고 이기는 방책으로는 화공 전술보다 더 좋은 것이 없으므로 일제히 불을 질러서 그 불길이 저들의 배에 번져가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쪽 사람들인 토마스와 조능봉(趙凌奉)이 뱃머리로 뛰어나와 비로소 목숨을 살려달라고 청하므로 즉시 사로잡아 묶어서 강안으로 데려왔습니다. 이것을 본 군민(軍民)들이 울분을 참지 못해 일제히 모여들어 그들을 때려죽였으며 그 나머지 사람들도 남김없이 죽여버렸습니다. 그제야 온 성안의 소요가 비로소 진정될 수 있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고종 3년 7월 27일 기록)

 

평양 군민의 기개가 하늘을 찔렀다. 자신이 나고 자란 이 땅에 대한 사랑, 그것을 짓밟으려 드는 외세에 대한 분노,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희생정신, 그 앞에 제너럴셔먼호는 철저히 무릎 꿇을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은 서양 세력의 침략적 본질을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한편으로는 군민이 힘을 합쳐 끝까지 싸우면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는 시간이 되었다. 

 

오만방자하게 굴던 제너럴셔먼호는 끝내 이 땅 사람들의 손에 불태워지고 모조리 죽임을 당했다. 미국의 처절한 패배로 끝난 우리 민족과 미국의 첫 만남이 의미심장하다. 조선 민중의 용감한 기개로 완전한 승리를 거둔 첫 대결이었다. 미국의 패권이 급격하게 몰락하고 있는 오늘날, 한국과 미국이 유지해온 불평등한 관계의 끝은 어떨 것인가.

 

물론 미국은 그냥 물러서지 않았다. 이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를 명분으로 새로운 침략을 시도했으니, 그 유명한 신미양요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 편에 이어서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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