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내년은 간토(關東)학살 100주기이다.
1923년 9월 1일 토요일 11시 58분, 도쿄(東京)와 요코하마(橫浜)를 중심으로 간토 일대에서 진도 7의 대규모 지진이 발생했다.
불행하게도 취사를 위해 불을 많이 사용하는 점심 무렵이어서, 대형 화재로 번져 9월 3일 아침까지 간토 일대는 화염에 휩싸였다. 10만 5,000여 명의 사망자와 행방불명자가 발생했으며, 69만 호에 이르는 가옥이 파괴되는 엄청난 재앙이었다.
학살의 배경, 조선인과 일본의 사회주의자들 그리고 아나키스트들의 연대
20세기는 혁명의 시대였다.
서유럽 선진자본주의 국가에서 사회주의혁명이 일어나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혁명은 러시아에서 일어났다. 러시아는 1917년 3월, 11월 혁명에 성공해 차르 체제를 붕괴시켰고 볼셰비키는 권력 장악에 마침내 성공하였으며 레닌은 인민위원평의회 의장으로 선출됐다. 레닌은 코민테른을 창설하고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을 고양하고 촉진했다.
혁명의 열풍은 일본의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을 발전시켰다.
1919년 3.1운동 이후 일본에서는 조선인 노동자 운동이 급속히 발전했다.
일본인과 조선인 사회주의자는 교류를 시작했고, 1922년 도쿄에서 열린 5.1절 노동자 행사에는 조선인도 소수지만 참가했다. 그리고 1923년 노동절 준비모임은 식민지 해방을 구호로 채택했다. 하지만 일본 경시청이 불허하여 공개적으로 내걸지는 못하였고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은 바로 검거당해 대회장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조선인과 일본의 사회주의들 그리고 아나키스트들의 연대는 일본 관헌, 특히 경시청의 주목을 받았다.
이런 정세 속에 간토대지진이 일어난 9월 1일 밤, 일본 경시청은 사회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들을 유언비어의 진원지로 지목하고, 폭동 진압 명분으로 제일 먼저 긴급 체포하고 투옥했다.
경시청은 조선인 무정부주의자인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朴文子)가 천황 암살 음모를 꾸몄다며 체포하면서 대역사건으로 만들었다.
또한 일본의 유명한 무정부주의자 오스기 사카에(大杉榮)와 연인 무정부주의자인 이토 노에(伊藤野枝)를 체포해 도쿄 헌병대본부에서 학살했다. 심지어 같이 연행된 여섯 살짜리 조카도 무자비하게 살해했다.
일본 정부는 걷잡을 수 없이 퍼져가는 사회적 불안과 공포를 무마하려고 사회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를 폭동 주범으로 몰며 속죄양으로 삼았다.
일본의 군인, 경찰, 자경대를 총동원한 조선인 학살
일본은 왜 군인과 경찰 그리고 자경대 등 군관민(軍官民)을 총동원하여 조선인을 학살하였을까?
지진과 대형 화재로 극도의 혼란이 초래되는 상황에서 사회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 그리고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마구 불을 지르고 다닌다는 유언비어가 당시에 난무했다.
특히 ‘조선인이 방화하고 있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약을 풀고 있다’, ‘조선인이 부녀자를 강간하고 있다’라는 등의 너무나 악의적인 유언비어는 일본인을 극도의 공포로 몰아갔다.
그러지 않아도 러시아 혁명의 열풍 속에 일본인과 조선인의 사회주의 연대를 일본은 두려워하였는데 좋은 구실을 잡은 것이다.
그리고 조선인을 찾아내기 위해 일본어의 ‘ら(라) 행(行)’ 발음과 일본어의 탁음 발음-예를 들면 ‘15엔 55센(十五円 五十錢, 쥬고엔 고짓센)’-을 발음토록 하여 발음이 시원치 않으면 학살의 대상으로 삼았다.
특히 학살 방식은 너무도 잔혹했다.
여성을 죽창으로 찌른다든가 배를 눌러 내장을 뽑아내는 극악무도한 짓을 자행하였다. 민족 차별뿐만 아니라 이런 성적 차별은 일본군위안부 문제로까지 이어진다.
조선인에 대한 학살이 자행되자 상해 임시정부는 그 진상을 조사했다. 당시 임시정부가 간행하는 독립신문은 조선인 학살자 수를 6,000여 명에서 1만 3,000명, 많게는 2만 1, 600명이라고 보도했다.
이후 재일사학자 강덕상의 연구로 6,661명이 학살되었다고 하지만 아직 정확한 학살 숫자는 규명되지 못하고 있다.
북한은 일본 정부가 유언비어를 퍼트리고, 이를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계엄령’을 선포한 뒤 군·경과 민간인으로 구성된 ‘자경단’을 동원해 2만 3,000여 명 이상의 조선인을 집단 학살했다고 밝혔다.
조선인에 대한 혐오를 앞세워 일본 정부가 저지른 대량 학살 범죄임이 명백하지만, 100년이 다 되도록 아직 진상규명조차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다행히 지난 12일 서울 언론회관에서는 ‘간토학살 100주기 추도사업 추진위원회 발족식’ 개최됐다.
과거를 반성하지 않는 나라는 같은 잘못을 되풀이한다.
지난 1964년 한일협정 반대 운동 때 일본의 진보진영 논리는 북한과 중국 등 사회주의권에 대항하려고 군사동맹을 강화하려는 것에 대한 저항이었지, 식민 지배에 대한 속죄나 배상에 대한 언급은 일본인 운동에는 없었다.
이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간토대지진 때 희생된 사이타마(埼玉), 군마(群馬), 가나가와(神奈川), 지바(千葉)현 등에 있는 위령비에는 학살의 책임자가 명시되지 않았다.
대체로 “간토 지진에 즈음해 조선인이 동란을 일으켰다는 뜬소문에 의해 도쿄 방면에서 온 수십 명이 이 땅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라는 식이다.
그런 가운데 75년 전 1947년 3월 지바현 서부 지역인 후나바시(船橋)에서 윤근 재일조선인연맹 위원장 주도로 추모식을 열고 비를 세웠는데 비문에는 “야마모토 군벌 내각이 조선인을 죽였다”라고 분명하게 쓰여 있다.
그리고 13년 전 2009년 8월 29일 도쿄 스미다구(墨田区) 야히로(八広)에 ‘간토대지진 때 한국 조선인 추도비’가 세워졌는데 이 추도비는 학살의 책임자를 분명히 기록했다.
아래는 비문이다.
“1923년 간토대지진 때 일본의 군대, 경찰, 유언비어를 믿은 민중에 의해 많은 한국 조선인이 살해됐다. 도쿄의 시민 주거지에서도 식민지하의 고향을 떠나 일본에 와 있던 사람들이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귀중한 생명을 빼앗겼다. 이 역사를 마음에 새겨 희생자를 추도하고 인권 회복과 두 민족의 화해를 염원하며 이 비를 세운다.”
간토학살 100년, 특별법 제정으로 진상 규명하라!
일본 정부는 학살 인정하고 조선인 차별 말라!
남북해외 공동사업으로 역사 정의 실현하자! <저작권자 ⓒ 자주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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