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오래 살던 동네의 옆집 언니 같은 분을 만났습니다. 차림에도 말에도 꾸밈이 없고, 직설적이면서도 맞장구를 치면 신나고 화끈하게 쳐주는 발랄한 중년이었는데, 바로 법학박사인 김은진 교수님이었습니다.
만난 지 얼마 안 되어 본의 아니게 그분의 집에 신세 질 일이 생겼습니다. 재미동포 신은미 선생님과 전국 순회를 하며 통일 대담을 이어가던 중이었습니다. 원래 익산의 원광대학교에서 진행될 예정이었던 행사를 당일 학교 측의 불허방침으로 급하게 장소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후에 안 일이지만 이른바 종북몰이를 이어가던 종편 방송에서 학교 측으로 종일 전화를 해 압력을 넣었다고 합니다. 지역의 배려로 인근 성당에서 성황리에 진행되던 행사는 한 일베 청소년이 사제폭발물을 투척하면서 일순간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그때 초유의 사태를 겪은 일행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누군가의 안내에 따라 지역 인사의 자택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알고 보니 그 집이 김은진 교수님 댁이었습니다. 자욱한 연기 속에 뿔뿔이 흩어졌다가 만나 안부를 확인하니 폭발에 화상을 당하거나 질식을 겪거나 옷에 불이 붙은 사람 등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일행은 흡사 피난민처럼 그 댁의 거실과 안방을 차지하고 그날 겪은 일과 시국을 토로하거나, 화상으로 병원에 실려 간 분들의 안부를 확인하다가 잠을 청했습니다. 그날 집주인은 그 난민들을 재우느라 지니고 있던 이불이란 이불을 다 꺼내 온 집안에 펼쳐야 했는데, 그중에는 결혼했을 때 해왔을 법한 꽃분홍에 연둣빛 이불도 있었습니다. 최소한 20년은 돼 보이는 이불과 낡은 가구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박사님 댁’ ‘교수님 댁’의 모습하고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날 밤 사제폭발물 테러 뉴스를 듣고 서울에서 익산까지 달려오신 분이 있었는데 김승교 변호사님이셨습니다. 김승교 변호사님은 집주인 김은진 교수님의 같은 과 후배였습니다. 두 분은 말투도 성격도 완전히 딴판이었는데, 김은진 교수님 댁에서 본 낡은 가구와 이불들은 김승교 변호사님 댁에서 굉장히 두껍고 볼록한 골동품 텔레비전을 만났을 때를 생각나게 했습니다.
김은진 교수님을 더 자주 만나게 된 것은 우리의 변호사, 김승교 동지가 우리 곁을 떠나면서부터였습니다. 김은진 교수님은 80년대 학생운동을 하던 이들이 노동 현장이나 농민운동 현장으로 투신할 때 누구보다 원칙적이고 진실했던 후배 김승교 동지가 현장이 아니라 사법고시를 택해 의아했다고 했습니다. 그가 마침내 변호사가 되어 굳이 이적단체를 찾아다니며 돈이 되지 않는 관련 사건을 도맡아 뛰는 모습을 보면서 서서히 오해가 풀렸지만, 시간이 좀 걸렸다고 했습니다.
국가보안법 법정의 최선두에서, 진보단결의 모범으로, 지역민과 후배들의 든든한 후견인으로, 매일매일 값지게 살아온 김승교라는 후배와 그 진심을 이제 알았는데, 너무나 급작스럽게 떠났다고 안타까워했습니다. 김승교 동지가 떠나고 참 많은 사람이 새삼 그 역할에 고마워하고 너무 이른 이별에 아쉬워했지만, 김은진 동지는 추모에서 더 나아가 ‘김승교 동지가 했던 일 중 일부라도 내가 하겠다’라 며 발 벗고 나서셨습니다.
한 번도 당적을 갖지 않았던 분이, 김승교 동지가 생의 마지막 시기 지키려고 갖은 정성을 들였던 당의 당원이 되셨습니다. 낯선 고장에서 출마도 하시고 적지 않은 나이에 통일선봉대 활동도 하셨습니다. 지금도 촛불의 불씨를 지켜 머지않은 날에 타오를 횃불을 준비하느라 매일매일 바쁘십니다. 건강한 생활 기풍을 세우기 위해 바쁜 와중에도 운동을 계속하며 생활에서도 스스로 모범을 세워 많은 후배가 일일 운동을 따라 실천하고 있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청년 학생들이 하는 일을 늘 고무하고 기회가 될 때마다 밥을 먹이느라 바쁘십니다. 늘 낡은 옷에 낡은 가방을 메고 다니는 검소한 분이 후배들에게는 뭐든 더 퍼주고 싶어서 안달하십니다. 아마도 천성이 그러시겠으나 그것이 김승교 동지가 남긴 일이라 여겨서 더욱 살뜰하게 챙기시는가 싶습니다. 우리는 때로 김은진 동지가 너무나 편하고 친근해서 그분의 결심과 실천이 얼마나 쉽지 않은 것인지 간과하곤 합니다.
틈이 나면 후배들 곁에 달려가 자리하는 김은진 동지를 뵐 때마다 김승교 동지를 떠올립니다. 곧 8월, 김승교 동지를 더 많이 떠올리고 추모할 수밖에 없는 계절을 맞이하면서 새삼 김승교 동지가 남긴 당부와 과제, 믿음에 대해 생각합니다. 김은진 동지는 그런 김승교 동지의 유지를 온 삶으로 실천하고 있습니다. 김은진이자 김승교입니다. 열사의 분신이자 부활입니다. <저작권자 ⓒ 자주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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