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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는 지금] 유대인 사회 형성에 도움을 준 러시아

이인선 객원기자 | 기사입력 2022/08/05 [17:44]

[러시아는 지금] 유대인 사회 형성에 도움을 준 러시아

이인선 객원기자 | 입력 : 2022/08/05 [17:44]

유대인은 ‘유대(가나안 지방) 지역의 사람’, 즉 기원전 10세기부터 기원전 6세기까지 존재했던 유다 왕국의 후손이라고 말하는 이들이다. 현재는 유대교를 믿는 사람과 이스라엘 거주민까지 아우르는 이름으로 쓰이고 있다.

 

134년 하드리아누스 로마 황제의 명령으로 모든 유대인이 유대 지역에서 추방되면서 유대인들은 수많은 나라에 흩어져서 살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인 민족으로 여겨지며 반유대주의 속에서 수백 년을 살아야 했다. 그러다 일부는 전쟁을 계기로 러시아 제국으로 넘어오게 되었다.

 

러시아 제국-소비에트 연방-러시아 연방으로 흘러가는 과정에서 러시아 당국은 유대인들을 고려해 그들의 의견을 들어주는 모습을 보였다.

 

이번 글에서는 러시아에 유대인이 오게 된 계기부터 러시아 내 유대인 자치주 형성 과정을 살펴보며 러시아와 유대인 사회의 관계를 이야기한다.

 

러시아로 오게 된 유대인들

 

폴란드는 1772년, 1791년, 1795년, 세 차례에 걸쳐 러시아 제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에 의해 영토가 분할됐다. 유대인이 많이 살던 폴란드 동부와 동남부 지역은 러시아 제국으로 편입됐고 약 100만 명의 유대인이 러시아 땅에서 살게 되었다.

 

그중에는 우리에게 몽타주 기법으로 유명한 영화감독인 에이젠슈타인과 화가인 샤걀, 레비탄, 칸딘스키, 노벨상 수상 작가이자 『닥터 지바고』 작가인 파스테르나크 등과 같이 러시아 역사와 문화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 인물들이 많았다. 

 

계몽 군주를 자처한 예카테리나 2세 러시아 제국 황제는 병합된 지역에서 유대인을 포함한 모든 이민족을 제국의 신민으로 수용해 그들의 이전 지위를 보장하는 칙령을 내렸다.

 

그러나 유럽 일대에서 반유대주의가 팽배했던 것처럼 러시아 제국 농민층 사이에서도 유대인이 ‘기생적’이고 ‘착취적’인 활동을 할 것이라며 불만이 터져 나왔다. 농촌 지역을 유대인에게서 보호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고 예카테리나 2세는 마찰이 생기지 않도록 유대인의 거주지를 폴란드에서 합병한 지역으로 제한하는 칙령을 내렸다.

 

유대인들은 이렇게 형성된 집단 거주지에 모여들기 시작했고 1800년에 100만 명을 넘기 시작해 1834년 120만 명, 1855년 320만 명, 1887년 550만 명으로 급속히 늘었다.

 

알렉산드르 2세 황제는 이를 고려해 유대인들에게도 교육의 기회를 허용했고, 1850~1860년대에 유대인 특권층(5만 루블 이상 소유한 제1길드 상인,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 수공업자, 전임 황제 니콜라이 1세의 군인 등)에 한해 원하는 곳에서 거주할 수 있는 자유를 허용했다.

 

또한 알렉산드르 2세는 산업화를 위해 유대인들에게 도움을 청했고 러시아의 은행 체계를 만드는 것을 유대인들에게 위임했으며 역사상 처음으로 유대인들을 귀족으로 임명하기도 했다. 이러한 정책이 러시아로의 유대인 유입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유대인의 자유를 상당 부분 보장하는 정책은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과 더불어 알렉산드르 3세가 다시 유대인의 권리를 제한하면서 막을 내렸다.

 

▲ 러시아어와 동유럽 유대어인 이디시어가 적힌 유대인 자치주 정부 명판. 

 

유대인 자치주

 

혁명 직전 러시아 제국은 세계에서 유대인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였다. 1909년 당시 전체 1,150만 명의 유대인 중 절반 정도인 521만 5,000명이 러시아 제국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과 연이은 내전으로 유대인들도 극심한 피해와 가난에 빠졌다. 특히 백군(반혁명 세력)이 자행한 대학살로 약 20만 명의 유대인이 죽었다.

 

블라디미르 레닌 인민위원장과 당시 러시아 혁명 주도 세력인 적군(볼셰비키)은 백군의 대학살에 대해 강력히 대처할 것을 선언했다. 1918년 7월 인민위원회에서는 모든 반유대주의 행위에 대해 유죄판결을 내리는 특별 법령이 논의되었다. 

 

인민위원회는 반유대주의 움직임과 유대인에 대한 대학살은 노동자, 농민의 혁명에 치명적인 위협이며 소비에트 러시아의 노동자들은 모든 가능한 방법을 동원하여 이와 맞설 것이라고 선언했다. 인민위원회는 또한 민족 차별은 혁명의 힘을 약화하는 것이고 대학살을 자행하는 자들이나 선동하는 자들은 법의 보호 밖에 놓이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선언문은 1918년 7월 27일 자 이즈베스티야 신문에 게재되어 공표되었다. 

 

레닌 위원장은 1919년 3월 공식 연설을 통해 지주와 자본가들이 농민들의 증오를 유대인들에게 돌리려 한다고 주장했다. 노동자의 적은 유대인이 아니라 자본가임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레닌 위원장은 “유대인들의 다수가 노동자이고 그들은 우리(슬라브인)와 같이 자본가에게 억압받는 우리의 형제이며 그들은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에서 우리의 동료”라고 선언했다

 

이와 더불어 유대인들의 가난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논의가 이뤄졌다. 러시아계 유대인 작가인 펠릭스 칸델의 저서 『Книга времен и событий. История евреев Советского Союза (1881-1917). Том 2 / 시간과 사건의 책 3권 : 소련의 유대인 역사(1881-1917)』에 따르면, 당시 경제학자들은 “유대인 주민들을 다른 경제 체제로 옮겨주지 않는다면 그들은 분명히 기아로 죽을 운명에 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소련 정부는 사회주의 경제 체제로의 전환 이후 유대인들에게 생존 수단을 제공하는 방편으로 유대인들이 농사지을 수 있는 곳으로 이주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고안했다.

 

1918년 1월 20일 민족 인민위원회 산하에 만들어진 ‘유대인 위원회’는 유대인들이 살아갈 수 있는 곳을 찾는 문제를 담당했다. 그리고 1924년 8월에는 유대인들의 이주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소련 중앙정부 공식기구인 ‘유대인 노동자를 위한 토지개척 위원회’(이하 토지개척 위원회)를 설립했다.

 

볼셰비키에는 트로츠키, 스베르들로프, 지노비예프를 비롯한 다수의 유대인이 포진해있었고 토지개척 위원회에도 유대인 볼셰비키인 비젠코, 추츠카예프, 스미르노프, 메레진, 라쉬케스, 라린 등이 위원으로 들어갔다.

 

앞서 언급한 칸델의 저서에 따르면, 스미도비치 토지개척 위원회 의장은 “소련 정권의 경제정책은 오래전부터 사적 매매, 중개업, 수공업으로 수입 대부분을 벌어들여 온 유대인들이 타락에 빠질 가능성을 없애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해결하려면 가난한 유대인들이 토지를 경작하도록 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초창기 유대인들을 위한 이주지로 우크라이나 남부 평야와 크림반도 북부가 선정됐다. 이곳은 경작되지 않은 땅이 대규모로 있었고, 유대인들이 1923년부터 이주해 소규모 농촌공동체를 꾸린 곳이었다.

 

땅은 경작을 위해 무상으로 제공되었다. 동시에 유대인 이주자들에게 특혜가 주어졌는데, 이는 세금 면제, 초기 3년 동안 군 복무 면제, 집을 짓기 위한 재료 제공, 비품 획득을 위한 비용 제공 등이었다.

 

1925년에는 비정부기구인 ‘유대인 노동자를 위한 토지개척 협회’가 결성되어 소련과 해외에서 유대인 이주를 위한 모금 활동을 벌였다. 이 단체에는 미하일 칼리닌 중앙집행위원회 의장과 게오르기 치체린 외무인민위원 등이 지도부를 구성했고 막심 고리키 등 학술, 문화 분야에서 저명한 인사들이 명예회원으로 있었다.

 

그러나 제국주의 국가들의 원조를 받아 유대인 거주지를 만든다는 점에서 사회주의 원칙과 맞지 않는다는 비판이 나왔다. 그러면서 새로운 이주 계획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이후 스탈린 서기장이 농업 집단화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시행하면서 유대인 이주 사업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소련 정부는 우크라이나와 크림반도 주민들의 반유대주의 감정과 대규모 이주 시 토지 부족 등을 이유로 새로운 땅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우크라이나인과 크림반도의 타타르인들은 유대인들을 달가워하지 않았고 유대인 이주자들은 이들과 긴장 관계에 놓여 있었다.

 

우크라이나 당 중앙위원회에선 이 같은 동요를 문제시했다. 당 회의에서 “이미 농민들 사이에는 유대인 이주자들에게 특별한 이익이 주어질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 토지가 충분하지 않은 일부 지역에서 이러한 논의들이 계속 이뤄지면 정치적으로 위험하다”라는 의견도 나왔다.

 

토지개척 위원회는 1926년 토지 탐사단을 재파견했다. 두 차례의 탐사 과정에서 발견한 극동 비로비잔 지역이 가장 긍정적으로 평가됐다.

 

소련 정부는 1928년 1월 17일 토지개혁 위원회의 탐사 보고서를 바탕으로 비로비잔 지역을 유대인 이주지로 결정했다. ‘유대인의 땅으로!’라는 구호 아래 진행된 이주는 유대 국가 재건이라는 희망을 품은 유대인들에게 힘을 주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한 유대인 여성은 “이 땅은 우리의 고국 속의 이스라엘이다!”라고 열광적으로 소리쳤다고 한다. 

 

1932년 4월 비로비잔에 온 하야 브라테르만이 한 이야기는 당시 유대인들이 했던 생각을 잘 보여준다. 그녀는 학교에 다니지 못하다 8살 때부터 하녀로 일했고 이후 담배공장에서도 일했다. 그녀는 “혁명이 유대인들에게 다른 사람들과 동등하게 살 수 있도록, 땅에서 일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했다”라며 “나는 잘살고 있다. 지금은 현실적인 것을 꿈꿀 수 있다. 우리 모두 행복하게 살고 있고 안락한 삶을 누리고 있으며 우리는 우리의 당과 우리의 친구이자 지도자인 스탈린 동지에게 감사하고 있다”라고 기쁨을 표했다.

 

비로비잔은 각국의 유대인 사회주의자들에게도 유대인의 땅으로 인식되었고 이들은 세계 최초의 유대 공화국을 비로비잔에 건설하겠다는 꿈을 안고 이곳으로 왔다. 1931년 미국(26명), 아르헨티나(43명), 폴란드(3명), 독일(9명), 루마니아(5명) 등에서 총 86명이 이주해왔고, 1932년에는 784명이, 1933년에는 500명이 해외에서 이주해왔다.

 

그들은 ‘이코르’라고 명명된 코뮌(정치공동체)에 소속되어 유대인 마을 건설에 이바지했다. 그 결과 유치원, 초중등학교, 병원 등이 생겨났다. 

 

1934년 5월 7일 소련 정부는 이곳을 ‘유대인 자치주’로 선포했다. 소련 정부는 “민족 국가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 자신의 조국을 건설하려는 뜨거운 열망이 유대민족 역사상 처음으로 실현되었다”라고 선언했다. 이후 1948년까지 비로비잔에 유대인 인구는 3만 명가량으로 증가했고 유대인들에게 민족 문화를 누리는 삶에 대한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성과는 좋지 못했다. 비로비잔 지역의 환경이 열악한 것도 있었지만 유대인들이 소련에 소속되지 않고 자신들만의 국가를 만들려는 의지가 강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스탈린 서기장의 지원을 받아 1948년 사회주의 성향의 다비드 벤구리온 총리와 유대인 지도자들이 이스라엘을 건국하자 유대인 자치주에서 이스라엘로 이주하려는 움직임도 생겨났다.

 

스탈린 사후에 수많은 유대인 자치주의 주민들이 뿌리를 찾아 이스라엘로 이주했고 결국 이 지역의 유대인 인구는 급감했다.

 

현재 유대인 자치주 내 유대인 인구는 1%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유대인들의 전통은 꾸준히 이어져 오고 있다. 현재까지 각종 간판이 러시아어와 이디시어(동유럽 유대어)로 병기되어 있고 역 앞에 유대인들의 상징인 메노라(촛대)가 있다. 그리고 유대인 회당인 시나고그도 존재한다.

 

또 1930년대 만들어진 이디시어 신문 ‘비로비자너 슈테른’은 지금까지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고 주 정부 차원에서 유대인들의 전통문화를 배울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가운데)과 러시아 유대교 최고 랍비 베렐 라자르(오른쪽)가 2019년 6월 4일 러시아 모스크바 유대인 박물관 앞에서 열린 행사에서 사업가 빅토르 벡셀베르그의 연설을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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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유대인 사회의 관계는 230여 년 동안 형성되었다.

 

러시아는 러시아 제국 시기 러시아 내 유대인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고 소련 시기에는 유대인 자치주를 만들어 주며 국제적인 유대인 사회 형성에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유대감은 현재 유대인 국가 이스라엘과의 관계로까지 이어졌다.

 

이스라엘을 제외하면 세계에서 유일한 유대인 행정 구역인 유대인 자치주에 관한 관심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오시프 브레네르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극동지부 지역문제 종합분석연구소 선임 연구원이 2019년 1월 14일 유럽-아시아 유대인 연구소에 게재한 글 「러시아의 유대인 자치주는 중요한 상징인가, 아니면 과거의 유물인가?」에서 “유대인 자치주가 형성된 지 80년 이상이 지났지만 이 지역을 향한 관심은 사라지지 않았다”라며 “이 지역은 유대 문화와 종교를 발전시키려는 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유대인의 자치적인 민족 문화가 비로비잔에 만들어졌다”라고 밝혔다.

 

이번 글에선 유대인 사회와 러시아의 관계를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유대인 국가 이스라엘과 러시아의 관계는 어떨까?

 

다음 글은 러시아와 이스라엘의 관계를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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