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낸시 펠로시의 인권 타령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 기사입력 2022/08/08 [13:53]

[기고] 낸시 펠로시의 인권 타령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 입력 : 2022/08/08 [13:53]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이 연방하원 의원단과 함께 아시아 순방 길에 중국의 강력한 경고를 무시하고 지난 8월 2일 밤 대만을 전격 방문하였다.

 

지난 7월 28일 시진핑 중국 주석은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전화 통화 이후 발표문을 통해 “우리는 대만 독립과 분열, 외부 세력의 간섭을 결연히 반대하며 (중략) 중국의 국가 주권과 영토의 완전성을 결연히 수호하는 것은 14억여 중국 인민의 확고한 의지 (중략) 민심은 저버릴 수 없으며, 불장난하면 반드시 불에 타 죽는다”라고 경고하였다.

 

또한 지난 1일 자오리젠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펠로시 의장이 대만에 간다면 이는 중미 관계를 심각하게 파괴해 매우 심각한 사태와 후과를 초래할 것 (중략) 중국 인민해방군은 절대 좌시하면서 손 놓고 있지 않을 것”이라고 군사행동을 암시하였다.

 

1991년 9월 4일, 북경 천안문 광장의 반(反)중 행위

 

그런데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의 반중행위는 이것뿐만 아니다.

 

펠로시는 1991년 9월 4일 천안문 사태 시위 과정에서 구금된 인사들의 석방을 위해 당시 민주당 하원의원과 함께 인권 문제 대표단의 자격으로 중국 북경에 갔다.

 

당시 펠로시 의원 일행은 북경 천안문 광장에 있는 인민영웅기념비 앞에서 ‘중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숨진 사람들을 애도함’이라고 쓰인 검은색 현수막을 펼치고, 기념비에 헌화하며 시위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추모하는 짤막한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중국 당국 몰래 동행한 미국 기자들과 함께 숙소 호텔을 빠져나와 돌출 행위를 벌인 것이다.

 

이는 명백히 중국의 1989년 6.4 천안문 사태 유혈 진압을 규탄하는 행위였다.

 

중국은 이들이 벌인 돌출 행위에 대해 국내법 위반이자 고의적인 반(反)중국 행위라고 경고하였다. 특히 추도식은 불법적이며 의도적인 반혁(反革) 사건이며, 중국 내정에 대한 명백한 간섭으로 중국 국민으로부터 극도의 분노를 자아냈다고 규탄하였다.

 

▲ 1991년 낸시 펠로시 모습.

 

화평연변(和平演邊)과 중국의 반격

 

1989년 당시 등소평은 “서방 국가들은 지금 한창 초연(硝煙) 없는 3차 세계대전을 벌이고 있다. 초연 없는 전쟁은 곧 사회주의 국가를 화평연변(사회주의 국가의 체제 변화를 유도하는 전략을 일컫는 말) 하려는 전쟁”이라고 규정하였다.

 

또한 “중국이 폭난(爆亂, 천안문 사태를 말함)을 평정한 뒤 7개국 수뇌가 중국에 대한 제재 선언을 발표했는데 그들이 무슨 자격이 있으며 누가 그들에게 그런 권력을 주었는가? 진정으로 말하면 국권은 인권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약소국가와 3세계 국가들의 국권은 언제나 그들에 의해 침범당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 정부의 공식문서인 인권 보고가 중국의 인권을 거론하면서 노골적으로 중국을 비난하고 있는 것은 명백한 내정간섭이며 미국의 궁극적인 목적은 중국에 대한 화평연변 전략을 실현하는데 있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1989년 당시는 도미노 현상처럼 동구권과 소련이 몰락하는 사회주의 대사변의 시련 속에 중국은 국가 생존 문제에 온 힘을 모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미국을 비롯한 서방 7개국은 1989년 7월 파리에서 개최된 G7회담에서 중국이 천안문 사태에서 폭력으로 인권을 유린했다고 비난하며 세계은행의 대중 차관을 중지하고 중국의 GATT 복귀를 연기하는 등 본격적인 대중 제재를 가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중국 지도부는 천안문 사태를 당의 지도와 사회주의를 근본부터 부정하는 동란으로 규정하며, G7 참가국의 내정간섭을 단호히 거부한다고 말하였다.

 

물론 인민해방군을 동원하여 사람이 희생된 것은 잘못된 조치이지만, 당시 천안문 사태에 대해 중국 정부가 단호한 조처를 하지 않았다면 현재의 중국은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하나의 중국 국토완정

 

우리가 흔히 이야기 하는 중국 국토는 청나라 건륭제 때 완성되었다.

 

물론 1689년 강희제 때 서양 국가 러시아와 최초로 맺은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러시아와 국경을 정리하였다. 

 

그리고 건륭제는 서역을 점령하며 이름을 ‘새로운 영토’라는 뜻인 신강(新講)으로, 또한 신장과 맞닿아 있는 티베트도 안정시키며 내륙 영토를 확정했다. 

 

또한 현재 중국의 국토완정의 핵심인 대만을 푸젠성에 병합시켰다. 그러나 청일전쟁의 결과로 일본에 대만을 할양했으나 2차 세계대전 후 중국에 돌아왔다. 이후 국공내전에서 인민해방군이 승리하면서 장개석과 국부군은 중국 본토에서 대만으로 도피하면서 국민정부를 세운다. 1954년 국민정부와 미국은 상호방위조약에 체결하고, 미국으로부터 군사·경제 원조받았다. 

 

그러나 미국 대통령 닉슨이 1970년 2월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면서 미국과 대만 관계는 변하였다. 닉슨 독트린은 중국과 ‘핑퐁 외교’와 닉슨의 중국 방문을 성사했다. 닉슨은 1972년 2월 중국을 방문해 미중 정상회담을 갖고 ‘하나의 중국’을 인정하고 이 입장에 도전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하나의 중국’ 원칙은 중화인민공화국(중국)만이 전 중국을 대표하는 유일 합법정부이며, 대만·홍콩·마카오 등은 중국 일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유엔 총회는 1971년 10월 26일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의 유엔 가입을 승인했다. 중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이사국이 된다. 그리고 중화민국(대만)은 유엔과 관련 기관에서 배제됐다.

 

미국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1979년 1월 1일 중국과 정식 수교하고 대만과 단교하였다. 

 

한국도 1992년 8월 24일 중국과 수교하면서 대만과 단교하였다.

 

 

‘중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조선)’에 대한 내정간섭

 

중국 북경 시위 이후에도 펠로시는 1991년 중국에 대한 미국의 무역 최혜국 대우 연장 시 ‘중국 인권개선’을 조건부로 하는 법안을 발의해 하원에서 통과시켰다. 

 

그리고 이것도 모자라 매년 무역 최혜국 대우 자격을 연장하는 과정에서 ‘중국 인권’ 문제나 ‘티베트 인권’ 관련 조항 등을 부가하는 법안을 제출하며 중국을 압박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베이징 올림픽 거부를 미 행정부에 요구하는가 하면, 바이든 대통령에게 미중 정상회담에서 ‘중국 인권’을 언급하도록 강요하였다. 

 

이것뿐만 아니라 한술 더 떠 조선의 인권까지 시비하였다.

 

펠로시는 1997년 8월 동료의원들과 함께 정보위원 자격으로 이틀간 조선을 방문할 때, 조선의 식량 사정을 파악하고 북한의 고위 관리들과 미사일, 미군 유해, 상호연락사무소 개설 문제 등을 논의하였다.

 

하지만 펠로시는 이런 사안보다 이른바 조선의 인권 문제를 거론하였다. 

 

▲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인권이란 나라가 있고 난 뒤에 있다.

 

과거 일제강점기 시절 일제에 의해 유린당한 우리 독립운동가들의 인권을 그 어느 나라도 문제를 제기해 주지 않았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은 나라를 잃은, 나라가 없는 개별 인사였기 때문이다.

 

펠로시 의장의 ‘중국 인권’과 ‘조선 인권’에 대한 행위는 분명한 내정간섭이다.

 

지금 미국은 중국과 조선의 인권을 거론할 상황이 아니다.

 

당장 미국 내의 인종차별과 극심한 빈부격차, 무차별 총기 난사 사건 그리고 마약 중독을 해결에 나서야 한다.

 

펠로시와 미국은 중국과 조선에 대한 인권 타령을 할 때가 아니라 미국의 인권 타령을 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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