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산하에] 미국, 조선을 침략하다 2. 남연군 묘 도굴 사건, 개인의 일탈일까?

구산하 | 기사입력 2022/08/12 [17:11]

[이 산하에] 미국, 조선을 침략하다 2. 남연군 묘 도굴 사건, 개인의 일탈일까?

구산하 | 입력 : 2022/08/12 [17:11]

미국을 빼놓고 한국 사회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단호하게 말하건대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한미관계를 나라 대 나라의 단순한 외교 관계로만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2차 세계 대전 이후 자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만들고 싶었던 미국의 야욕이 가장 노골적으로, 집중적으로 펼쳐진 곳이 한반도이기 때문이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조선 땅에 군정을 실시해 친일파들을 부활시킨 것도 미국이고, 멀쩡한 한반도 허리에 분단선을 그은 것도 미국이며 전쟁 기간 내내 무고한 민간인을 집단 학살한 것도 미국이다. 한마디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와 지배 권력은 철저히 미국의 의도와 적극적 개입 아래 탄생했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는데 다음 단추가 바르게 끼워질 리 만무하다. 한국에 대한 미국의 개입은 정치, 사회, 경제, 문화에 걸쳐 전방위적으로 이뤄졌으며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이런 불평등하고 종속적인 한미관계에 대해 누군가는 ‘보이지 않는 식민지’라 비판할 정도다. 

 

이 ‘보이지 않는 식민지’는 검은 머리 미국인들에 의해 안 받침 되어왔다. 미국에 의해 구원받은 이들이 미국에 얼마나 충성할지는 불 보듯 뻔한 일 아닌가. 그들은 분단이라는 민족의 아픔을 자기 권력의 기반으로 삼고 미국을 위해 ‘죽도록’ 싸웠다. 그것이 자신들의 살길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이 불평등한 한미관계가 미국과 검은 머리 미국인들에는 살판을 열어줬을지 몰라도 우리 민족, 우리 국민에게는 죽을 판, 고통과 비극 그 자체였다. 그 죽을 판을 뒤집고 인간답게 살고자 싸워온 것이 이 땅의 역사다. 금기시되고 불온시 되어온 역사, 그것을 활짝 열어야만 오늘날 한국 사회를 바로 이해하고 더 나은 내일로 나아갈 수 있다. 더 나은 내일 만드는 데 보탬이 되고자 ‘이 산하에’ 연재를 시작한다. 

 


 

1편에서 제너럴셔먼호 사건으로 우리 민족과 미국의 첫 만남을 살펴보았다. 조선의 호의를 무시한 채 살인과 약탈을 일삼은 제너럴셔먼호는 조선 민중의 분노로 불태워졌다. 한 줌의 잿더미가 되어버린 침략자의 최후였다. 그러나 이것이 조선에 대한 미국의 야욕까지 재로 만든 것은 아니었다. 제너럴셔먼호 사건이 있고서 5년이나 흐른 어느 날, 미국은 느닷없이 ‘진상규명’을 들고나왔다. 아닌 밤중에 봉창 두드리는 소리도 아니고 침략자의 입에서 진상규명이라니 황당할 따름인데, 미국은 말로만 그치지 않았다. 미군의 총탄 아래 속수무책으로 쓰러진 조선군의 시체 위로 미군의 성조기가 올랐으니, 그 유명한 신미양요다. ‘미군’이 이 땅에 처음 발을 디딘 순간이었다.

 

 

통상수교라 쓰고 침략이라 읽는다

 

신미양요를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짚고 넘어갈 역사적 사건이 하나 있다. 우리에게 오페르트 도굴 건으로 널리 알려진 남연군 묘 도굴 사건이다. 

 

18세기 후반부터 조선의 바다에는 이양선이 출몰하여 통상수교를 요구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이전 글에서 살펴본 것처럼 통상수교는 그 본래의 뜻과는 달리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과 약탈의 의도가 집약된 것으로 사실상 식민지화의 첫 단계와도 같았다. 

 

그 중 대표적인 사건이 1866년 발생한 병인양요이다. 프랑스는 프랑스 선교사와 천주교 신자들이 사망한 병인박해를 이유로 조선을 침략했다. 그러나 그것은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의 본심은 조선과의 통상 조약을 체결하고 조선을 식민지로 삼는 것에 있었다. 실제 프랑스는 조선을 침략하기 몇 해 전, 베트남에서도 비슷한 행태를 보였다. 1857년, 프랑스 선교사를 탄압한 것을 빌미 삼아 천주교 포교의 자유와 통상수교를 요구하며 베트남을 침략한 것이다. 

 

압도적인 전력을 앞세워 강화도를 점령한 프랑스군에 맞서 조선군과 민중은 최선을 다해 싸웠다. 다행히 조선군은 정족산성 전투를 통해 승기를 잡을 수 있었고, 결국 프랑스군은 싸움을 포기하고 외규장각 도서를 비롯한 각종 문화재를 약탈하며 철수했다. 제너럴셔먼호 사건에 이어 병인양요까지 통상을 이야기하며 접근해온 세력의 침략자적 본질이 만천하에 드러났고, 이에 대한 조선의 경계는 더욱 강화되었다.

 

▲ 오페르트의 남연군 묘 도굴 상황을 재연한 모습. [사진출처-'KBS 역사저널 그날' 방송화면 갈무리]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는 다짐

 

이런 와중인 1866년 3월과 8월, 독일인 오페르트가 조선 정부에 두 차례에 걸쳐 통상 교섭을 시도한다. 당연히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오페르트는 새로운 계획을 세우게 되는데, 당시 실권자인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파헤쳐 시체와 부장품을 가지고 흥정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천인공노할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무려 140여 명의 도굴단이 꾸려졌다. 그중에는 프랑스군의 강화도 침략의 안내자 역할을 했던 프랑스 신부 페롱도 포함이 되어 있었다.

 

1868년, 이들은 1천 톤급의 대형 기선 차이나 호와 그레타 호 두 척을 끌고 일본에 들러 소총과 도굴에 필요한 도구를 구입 후, 남연군의 묘가 있는 충남 덕산군으로 향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남연군의 묘를 향하는 그들은 이미 침략군이었다.

 

“병졸 100여 명이 군복을 입고 창, 칼, 총 등을 가지고 곧바로 관청으로 들이닥치더니 무기를 빼앗고 관청 건물을 파괴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사유를 물었더니 대답하지 않고 총을 쏘아대고 칼질을 하면서 접근하지 못하게 하다가 곧바로 남연군(南延君)의 묘소로 달려갔습니다. 묘촌(墓村)에서 호미와 괭이 등의 연장을 빼앗아갔기 때문에 아전, 군교, 군노, 사령들과 가동(伽洞)의 백성들을 거느리고 가서 죽기 살기로 맞섰으나 그들의 드센 칼과 총을 대적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서양 도적들이 과연 묘소를 범하여 사초 3장을 떼어 내기까지 하였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고종 5년 4월 21일 기록)

 

이처럼 오페르트와 그 일당은 덕산군에 상륙하자마자 관청과 민가를 습격해 각종 무기와 연장을 약탈해 밤새 도굴을 시도했지만, 무덤이 견고해 실패로 돌아간다. 

 

별 소득 없이 철수하게 된 오페르트는 인천 영종도에 들러 흥선대원군 앞으로 전해달라며 편지를 한 장 남기는데 그 내용이 기가 차다. “남의 무덤을 파는 것은 예의가 없는 행동에 가깝지만, 무력을 동원하여 백성들을 도탄 속에 빠뜨리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라며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는가 하면, “본래는 여기까지 관을 가져오려고 하였으나 과도한 것 같아 그만두고 말았”다며 이는 자기가 예의를 중하게 여기는 모습이라며 뻔뻔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흥선대원군에 교섭을 요구하며 나라를 위태롭게 할 우환을 당할 것이라는 등의 협박을 덧붙이기도 했다.

 

이에 조선 정부는 영종 첨사의 명의로 회답을 보내니 그 내용이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 신하와 백성은 있는 힘을 다하여 한마음으로 네놈들과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는 것을 다짐할 뿐이다.”(「고등학교 한국사」, 92쪽, 헤남에듀)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는 것은 실은 어마어마한 표현이다. 상대와 자신 중 하나는 없어져야 한다는 것 아닌가. 조선이 이 일에 얼마나 격노했는지 느낄 수 있다. 망자의 무덤을 파헤치는 행위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흉악무도한 범죄행위이다. 더욱이 부모가 물려준 것이라 하여 머리카락 한 올도 함부로 자르지 않았던 것이 유교의 나라, 효(孝)의 나라 조선 아닌가? 이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야만 행위였다. 

 

비록 미수에 그쳤으나 이 사건을 계기로 서양 침략자들에 대한 조선 민중의 적개심은 다시 한번 들끓게 된다. 이제 서양 열강은 단순한 침략 세력이 아닌 도저히 같은 하늘을 이고, 같은 땅을 딛고는 살 수 없는 상종 못 할 이들이 되었다. 조선 정부는 서양의 배에 대해서는 유원지의(柔遠之義 : 낯선 사람을 잘 대접한다는 뜻) 원칙을 적용하지 않겠다는 것을 천명했다.

 

 

남연군 묘 도굴 사건, 진범은 따로 있다?

 

그런데 여기 놀라운 주장이 있다. 남연군 묘 도굴 사건에서 오페르트는 사실 행동대장에 지나지 않고 이 사건의 진짜 배후, 진범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배후에 대한 의심이 제기되는 이유는 이 사안이 그만큼 중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조선이 약소국이라고 한들, 이것이 한 개인이 타국을 상대로 호기롭게 감행할 수 있는 정도의 일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다.

 

그 배후로 거론되는 것이 이 도굴단에 자금줄을 댄 미국인 젠킨스다. 일반적으로 돈을 댄 쪽과 돈을 받고 실행에 옮기는 쪽, 어느 쪽이 진범에 가까울까? 흥미로운 것은 젠킨스가 상하이 미국 총영사관의 통역을 지낸 이력이 있다는 점이다. 미국의 공직 출신의 인물이 자금줄 역할을 한 것이다. 이는 이 사건이 단순히 오페르트라는 개인의 정신 나간 만행이 아닌 미국을 비롯한 다양한 국가의 첨예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와 관련한 북한의 주장이 눈에 띈다. 연합뉴스는 2001년 4월 27일 기사를 통해 북한의 ‘젠킨스 주범론’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그 내용에 따르면, 북한은 이 사건을 미국이 ‘예속적인 불평등 조약’을 강요하고 ‘침략의 길’을 열기 위해 계획적으로 감행한 것으로 보고 있다. 

 

북한은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당시 미국의 셰넌도어 호의 활동을 들고 있다. 미국의 셰넌도어 호가 남연군 묘 도굴 50여 일 전에 황해남도와 평안남도 일대에 출동해 수십 여일 간의 약탈행위를 자행했는데, 이것이 젠킨스와 도굴단을 돕기 위한 의도적 행위였다는 것이다. 셰넌도어 호에 시선이 쏠리는 틈을 타 젠킨스 일당은 손쉽게 남연군 묘로 침투할 수 있었고, 실제 도굴단이 상하이로 돌아가던 날 셰넌도어 호 역시 우리 해안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고 한다. 

 

또한 북한은 젠킨스가 해당 사건과 관련해 증거불충분으로 무죄 석방된 것에도 주목하고 있다. 당시 이 사건은 조선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큰 논란이 되었다. 조선으로부터 사건의 보고를 받은 청나라는 각국 공사관에 사안의 처리를 요청했다. 오페르트는 함부르크 법정에 기소되어 징역형을 받아 3개월간 투옥되었고, 프랑스의 페롱 신부도 본국으로 소환 후 인도로 전임되었다. 그런데 자금줄을 댄 미국인 젠킨스는 미 영사재판소에 기소되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무죄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사실상 아무런 조치도 받지 않은 것이다. 만약 젠킨스의 행위가 개인의 일탈 행위라면 오히려 이를 처벌해 미국 정부와 무관한 것임을 보여줘야 하지 않았을까? 아주 형식적이고 낮은 수위의 처벌일지라도 함부르크와 프랑스 정부가 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그런 요식행위조차 하지 않았다. 북한은 그 이유를 이 사건이 젠킨스 개인의 일탈 행위가 아닌 미국의 아시아 침략 정책에 따른 침략행위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연합뉴스는 북한이 사료를 바탕으로 ‘젠킨스 주범론’을 일관성 있게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해당 사안이 연구할 가치가 있어 보인다고 언급하고 있다. 제너럴셔먼호 사건과 신미양요, 그사이에 발생한 남연군 묘 도굴 사건은 과연 우연일까? 아니면 정말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의 하나로 계획된 것일까? 이에 관한 연구가 더 진척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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