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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77년 전 ‘한국인은 미군의 적’으로 선언하고 들어온 미군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 기사입력 2022/09/08 [16:48]

[기고] 77년 전 ‘한국인은 미군의 적’으로 선언하고 들어온 미군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 입력 : 2022/09/08 [16:48]

▲ 1945년 9월 9일 조선총독부 국기 게양대에 걸린 일장기가 성조기로 교체되는 사진. 주한미군이 2020년 9월 9일 공개했다.     

 

오늘(9월 8일)은 미군이 한반도에 들어온 지 77년 되는 날이다.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항복하자 미국은 소련이 한반도 전역을 장악하는 것을 우려해,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분할할 것을 소련에 제안했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일월서각, 1986)에는 “1945년 8월 10일과 11일 사이 자정 무렵 본스틸 대령과 러스크 소령은 (중략) 미국과 소련이 점령할 지역을 확정을 짓는 개괄적인 명령을 기초하기 시작했다. (중략) 국무부 쪽에서는 분할선을 가능한 한 북으로 올려 그을 것을 희망했으나 미국이 상륙하기도 전에 소련이 한국 전역을 점령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군부 쪽에서는 보다 조심성있게 움직였다. (중략) 당시 갖고 있던 지도는 벽에 거는 극동 지도뿐이었으며, 마감 시간은 점점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본스틸은 서울 북방으로 선이 통과하여 이것이 한국을 거의 똑같이 양분한다는 것을 발견했다”라고 쓰여있다.

 

이렇게 38도선이 어이없이 그어지며 조국은 두 동강이 났다.

 

북위 38도선으로 국토가 분단되고 민족은 분열되었고 남북에 각각 미군과 소련군이 들어온다.

 

1945년 8월 25일 북에 진주한 소련군 사령관 치스챠코프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조선 인민들에게! 조선 인민들이여! 붉은 군대와 연합국 군대들은 조선에서 일본 약탈자들을 구축(몰아서 쫓아내는 것)했다. 조선은 자유국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신조선의 역사의 첫 페이지가 될 뿐이다. 화려한 과수원은 사람의 땀과 노력의 결과이다. (중략) 조선 사람들이여! 기억하라! 행복은 당신들의 수중에 있다. 당신들은 자유와 독립을 찾았다. 이제는 모든 것이 죄다 당신들에게 달렸다.”

 

소련군은 조선 인민의 해방자를 자처했으며 소련 군정은 조선인을 적으로 여기지 않았다. 조선은 해방된 민족이었다. 

 

그러나 38도선 이남에 진주한 미군은 달랐다. 

 

9월 3일 오키나와를 출발한 미국 제24군단 사령관 하지 중장은 미국 장교들에게 한국인은 ‘미군의 적’이라고 말하며, “항복의 조례와 규정을 적용하라”라고 지시했다. 

 

이는 9월 7일에 발표된 맥아더의 포고령 제1호와 2호, 3호를 통해 구체화했다.

 

포고령 1호에는 “나의 지휘하에 있는 승리에 빛나는 군대는 금일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 영토를 점령한다”,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 등의 내용이 있다.

 

그리고 포고령 2호에는 “항복문서의 조항 또는 태평양 미국육군 최고 지휘관의 권한 하에 발한 포고 명령 지시를 범한 자, 미국인과 기타 연합국인의 인명 또는 소유물 또는 보안을 해한 자 공중치안 질서를 교란한 자, 정당한 행정을 방해하는 자, 또는 연합군에 대하여 고의로 적대행위를 하는 자는 점령군 군율 회의에서 유죄로 결정한 후 동 회의의 결정하는 대로 사형 또는 타 형벌에 처함”이라는 내용이 적시됐다.

 

포고의 내용으로 봤을 때 미군은 군사적으로, 점령군으로 적대 지역에 진주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미군정은 친일본, 반조선이었다.

 

무자비하고 살벌한 맥아더 포고령에 점령군 사령관인 존 하지 중장은 일장기 대신 성조기로 무장했다. 미군의 옷을 갈아입은 일제 통치가 시작된 것이다.

 

미군은 조선인 폄하와 인종차별 그리고 친일파를 등용하며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인민위원회, 조선인민공화국,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전국농민조합총연맹 등을 불법화하고 탄압했다.

 

그러나 미국의 점령 침략 야욕은 이미 조선 말기부터 있었다.

 

▲ 신미양요 때 조선에 온 미국 군함 콜로라도호. [사진출처- 한국정보문화원]     

 

제너럴셔먼호 사건과 신미양요(辛未洋擾) 그리고 ‘가쓰라-태프트 밀약’

 

1866년 7월 미국의 제너럴셔먼호는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불법 침입하고 통상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를 거부하자 담판하러 왔던 조선 정부 관리를 억류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이에 격분한 민중들이 선교사 등 선원 전원을 처단하고 선체를 불 질러 버렸는데, 이것이 이른바 제너럴셔먼호 사건이다. 

 

이후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미국은 조선에 대해 무력에 의한 강제 통상을 계획하고 덕진진과 광성보를 점령하나 대원군의 결사 항전을 본 미국은 결국 퇴각하는데, 이것이 소위 신미양요다

 

그러나 미국은 침략야욕을 버리지 않고 호시탐탐 조선을 노리다가 러일전쟁(1904~1905)을 기회로 조선 문제를 포함하는 이른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일본과 맺는다.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해 주는 대신 미국은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한 것이다. 

 

이후 일본은 1905년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하고 1910년 조선을 강제 병합하여 36년 동안 조선을 식민지로 삼았다.

 

하지만 선각자와 민중들은 조선 독립을 위해 중국과 소련 접경지역에서 항일 무장 독립운동 세력을 창설하며 고군분투하였고, 국내에도 독립을 위해 투쟁했다.

 

그러나 해방 후에 미소 강대국의 농단으로 정작 분할됐어야 할 전범 국가인 일본은 분단되지 않았고 조선이 분단되는 기막힌 일이 벌어졌다.

 

『두 개의 한국』(돈 오버도퍼, 로버트 칼린 지음, 길산, 2002)에 따르면 미국은 일본에서 군정을 실시하기 위한 준비 작업으로 약 2,000명의 민정관을 양성했지만 정작 조선에 대해서는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은 채 야전군 사령관에게 맡겼다고 한다.

 

미국에 있어 조선은 전범 국가인 일본을 지키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또한 미국은 40여 년 전의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다시 반복한 셈이다. 

 

1948년 단독정부 수립 이후 남쪽 민중은 완전한 자주·민주·통일국가 완성을 위해 간고한 투쟁의 길을 간다.

 

반미자주 운동의 투쟁사

 

애국애족 학생 열사들과 민중들의 자주권을 찾기 위한 투쟁은 1980년대에 광주 미문화원 방화(1980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1982년), 서울· 대구· 광주에서의 미문화원 점거 운동(1985년)으로 일어났다.

 

특히 5.18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서울대 김세진·이재호의 분신(1986년) 그리고 이동수·˙홍기일·이무헌·강상철 이후 이한열·강경대·박승희 등 수많은 젊은 청년과 학생들의 산화가 있었다. 

 

1990년대는 주한미군 철수 운동, 팀스피릿 합동군사훈련 반대운동이 이어진다.

 

2000년대에는 매향리 사격장 폐쇄 투쟁(2000년, 매향리 주민대책위원회), 미국 미사일방어(MD) 저지 투쟁, 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사 사건 촛불 투쟁(2002년, 미군 장갑차 여중생 고신효순·심미선 살인사건 범국민대책위), 이라크 파병 반대 투쟁(2003년, 이라크 파병 반대 국민행동), 평택미군기지 확장반대 투쟁(2003~2006년, 미군 기지 확장반대 팽성 대책위원회), 무건리 훈련장 확장반대 투쟁(2008년, 무건리 훈련장 확장반대 주민대책위원회), 을지 프리덤 가디언 전쟁 훈련 반대 투쟁, 주한미군 탄저균 불법 반입 진상규명 투쟁, 을지 프리덤 실드 반대 투쟁 등 수많은 반미자주 투쟁이 벌어졌다. 

 

▲ 지난 8월 26일 용산미군기지에 진입해 한미연합훈련 중단을 요구하며 주한미군에 면담 요청하던 대학생이 경찰에 의해 끌려나오고 있다. ©김영란 기자

 

경제주권 투쟁사

 

이뿐만 아니라 애국애족 학생 열사들과 민중들의 경제주권을 찾기 위한 투쟁은 1960년 4.19혁명 공간에서 한국전쟁 후 최초의 반미투쟁인 2.8 한미 경제 협정 반대 투쟁(1961년, 2.8 한미 경제 협정 반대 공동투쟁위원회)에서 시작됐다.

 

1980년대 미국영화 수입 개방 반대 동이 있었다.

 

1990년대에는 우루과이 라운드(UR) 반대운동이 있었다. 특히 ‘기네스북’ 1991년 판에 “가장 짧은 기간에 얻은 가장 많은 서명”으로 등재된 쌀수입 개방 반대 투쟁(1991년, 쌀수입 개방 반대 범국민 서명운동)은 약 40일 만에 전체 인구의 1/3에 이르는 1,300만 명이 서명했다. 이는 단군 이래 최초로 187개 시민·사회단체와 농민단체, 학계가 연합하여 우리 쌀 지키기 범국민운동(1992년, 「우리 쌀 지키기(UR 반대) 범국민 비상대책회의)으로 확산됐다.

 

▲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

그리고 2000년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투쟁(2006년, 한미 FTA 저지 범국민 운동본부), 광우병 촛불 투쟁(2008년, 광우병 위험 미국산 쇠고기 전면 수입을 반대하는 국민대책회의) 등으로 민중의 투쟁 역사는 경제주권 투쟁사이자 우리민족끼리 함께 살자는 통일운동이라 할 수 있다.

 

통일은 우리 민족의 비극적 분열을 마감하고 외세에 의해 두 동강 난 우리의 영토가 완정(完整)되며 군사주권인 전시작전통제권을 되돌려 받는 일이다. 통일은 굴욕적인 망국 협상인 한미 FTA 협정 등을 폐기하고, 우리 민족의 먹거리와 민족 농업 그리고 쌀 주권을 되돌려 받는 일이다. 

 

반제자주평화애호 세력은 총 단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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