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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산하에] 조선 침략을 시작하는 일본 1. 운요호 사건

구산하 | 기사입력 2022/09/09 [10:49]

[이 산하에] 조선 침략을 시작하는 일본 1. 운요호 사건

구산하 | 입력 : 2022/09/09 [10:49]

지난 편에서 미국이 통상과 개항을 요구하며 조선을 침략한 신미양요에 대해 살펴보았다. 외세에 맞서 조국을 지키는 길에 조선인은 목숨을 주저하지 않았고, 결국 미국은 본래의 목적을 단 하나도 이루지 못한 채 조선을 떠나야 했다. 조선 민중의 목숨으로 지켜낸 피어린 승리였다. 그러나 침략을 본성으로 하는 제국주의가 한번 드러낸 침략 야욕을 거둘 리 만무하다. 조선과 동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침략 야욕 역시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19세기 후반으로 갈수록 조선을 둘러싼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은 더욱 심해지는데, 조선과 동아시아가 패권 다툼의 새로운 무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러일 전쟁과 청일 전쟁이 조선 땅에서 일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미국은 조선을 순순히 놔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다만 예상치 못한 조선의 강력한 저항, 미국의 복잡한 국내 정치 상황, 러시아의 남하 등을 고려하여 미국은 새로운 전략을 고안하게 된다. 미국이 무력으로 개항시킨 일본을 앞세우는 것이다. 러시아와 적대적 관계였던 영국 역시 일본의 한반도 진출에 우호적이었다. 미국과 영국이 일본의 조선 침략을 어떻게 뒷받침했는지는 훗날 러일 전쟁의 사례에서 더욱 분명히 확인된다.

 

 

제국의 태동

 

그렇다면 일본은 어땠을까? 임진왜란을 일으켜 조선을 침략하고 명나라까지 점령하고자 했던 일본이다. 조선은 여전히 탐나는 땅, 정복하고 싶은 대상이었다. 일본이 운요호를 앞세워 조선으로의 침략을 본격화하던 무렵, 일본의 정치 상황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일본은 오랫동안 막부(바쿠후) 체제를 중심으로 나라를 운영했다. 막부란 그 우두머리인 장군(쇼군)을 중심으로 하는 무사 정권으로 실질적인 권력을 쥐고 일본의 중앙 정치를 지휘해왔다. 막부 체제에서 일왕은 신적인 존재, 다시 말해 현실 정치와 구별되는 상징적인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일본이 미국을 비롯한 서양 열강에 문을 열게 되며 하급 무사들을 중심으로 불만이 거세졌다. 서양 오랑캐에 나라를 팔아먹었다는 것이었다. 이는 막부 타도 운동으로 번지게 된다. 사쓰마번과 조슈번, 가장 거대한 지방 권력이 막부 타도 운동에 결합하며 결국 1867년, 막부의 장군이 일왕에게 정권을 이양하게 된다. 이후 한차례의 내전을 거친 끝에 일본을 지배해온 막부 체제는 해체되고 일왕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게 된다. 그 유명한 메이지 유신이다.

 

표준 국어 대사전에 의하면, 유신은 낡은 제도를 고쳐 새롭게 한다는 뜻이다. 메이지 유신은 단순히 지배자를 교체하는 것이 아닌 나라 전체를 탈바꿈하는 것이었다. 즉, 메이지 일왕을 중심으로 하는 근대적 통일 국가 체제가 새로이 확립된 것이다. 이런 변화가 향한 방향은 명확했다. 자신을 무력으로 굴복시킨 서구 열강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 동아시아를 지배하는 제국이 되는 것. 일본의 침략 야욕에 시동이 걸렸다.

 

 

높아지는 침략의 목소리

 

일본의 침략 야욕이 본격화되며 조선과 일본의 관계는 더욱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새로 들어선 메이지 정권은 조선에 이를 알리고 새로운 외교 관계의 정립을 위한 외교 문서를 보낸다. 이 외교 문서에는 이전에 찾아볼 수 없었던 표현들이 등장한다. 일본이 ‘천황’, ‘황실’, ‘봉칙’, ‘황조’, ‘황상’ 등의 용어를 사용하며 황제의 나라를 표방하고 조선을 향해서는 ‘귀국’이라 지칭하며 자신의 아래에 있는 나라인 양 취급한 것이다. 더해서 기존에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사용하던 문서의 양식도 지키지 않았다. 조선은 기존의 관례에서 벗어난 일본의 외교 문서를 거부했다. 

 

그러나 조선의 거절에도 메이지 정권은 1870년과 1871년, 일본 외무성의 외교관들을 보내 외교 문서 전달을 계속 시도한다. 본래 일본과 조선의 외교를 담당하던 대마도의 사람들과 달리 일본에서 온 외교관들의 태도는 막무가내였다. 외교 문서를 들고 왔지만 그들의 진짜 관심사는 조선과의 평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에서의 ‘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조선을 정복하려는 것이 본심이었다.

 

결국 일본의 외교관들은 조선이 외교 문서를 받지 않는 것에 불만을 품고 ‘난출’을 감행한다. 1683년,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단절된 일본과의 외교 관계를 다시 맺으며, 약조를 체결한다. 그중 가장 중요한 내용이 난출에 관한 것으로, 일본 사절단이 머물 수 있는 왜관을 제외하고 출입을 허락하지 않는 곳에 마음대로 출입하는 경우(난출할 경우) 사형에 처한다는 내용이다. 이는 어제의 침략자에게 이 땅을 활보할 자유는 허락하지 않겠다는 조선의 강한 의지이기도 했다. 

 

▲ 약조제찰비. {사진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그런데 약 200여 년 가까이 지켜지던 약속을 일본이 일방적으로 깨고 허락되지 않은 조선 땅을 활보한 것이다. 이는 조선과 일본의 평화적인 관계를 깨는 신호탄과 같았다. 다시 침략의 발톱을 드러낸 일본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이 문제에 강하게 대응하지 않았다. 원래 약조대로라면 사형에 처하거나 엄벌로 다스려야 했는데 말이다. 일본이 조선의 이런 대응을 자비나 호의로 받아들였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강한 자에 약하고 약한 자에 강한 것이 침략자이다. 조선의 무른 대응은 침략의 기회를 엿보던 일본에 조선은 별것 아니라는 자신감을 더해 주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1873년, 일본은 초량 왜관을 조선과의 아무런 소통 없이 일방적으로 접수했다. 그리고 근대적 외교 관계가 맺어지지 않았는데도 왜관의 명칭을 ‘대일본국 공관’으로 바꿔버린다. 조선과의 어떤 협의도 없이 일방적인 실력 행사를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 일본은 일본 상인의 조선에서의 불법 상행위를 멋대로 인정하기에 이른다. 이에 조선은 이를 금지하는 명령의 글을 써 붙여 강경히 대응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당시 일본에서는 일본을 ‘무법지국(법이 없는 나라)’이라 표현한 글의 내용을 문제 삼으며, 조선을 무력으로 정복하자는 정한론이 힘을 얻게 된다. 특히 난출을 감행했다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일본으로 돌아간 외교관 일당들은 정한론을 열심히 부르짖는다.

 

조선을 무력으로 점령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었으나, 그 시기를 두고는 입장의 차이가 있었다. 메이지 정권이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내치를 우선해야 한다는 쪽과 빠르게 조선 정복을 위한 무력을 행사하자는 쪽으로 나눠진 것이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이것은 정한론을 둘러싼 입장 차가 아닌 메이지 정권 내의 권력 다툼이었다.

 

메이지 일왕은 내치를 우선하자는 쪽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정한론을 주장하는 세력의 불만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오만방자한 조선을 혼내줘야 한다며 무장 봉기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들의 불만을 잠재우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된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 정도 정권이 안정되고 국력이 강해지자 1874년 대만 침략을 시작으로 일본의 대외 침략 정책에 불이 붙었다. 그리고 일본이 그토록 손아귀에 넣고자 했던 땅, 조선을 향한 침략의 닻을 올렸다. 조선 앞바다에 운요호를 띄운 것이다.

 

 

미국에 배운 수법 그대로

 

운요호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인 1874년과 1875년, 일본은 조선에 또다시 외교 문서를 보냈다. 조선이 문제 삼았던 용어들은 제대로 고치지 않은 채, 다른 문구를 일부 수정하는 식이었다. 외교 문서를 가장한 힘겨루기, 협박장이나 다름없었다. 결과적으로 조선은 해당 문서의 접수를 거부했으나 그 과정은 이전과는 달랐다. 이것을 받느냐 받지 않느냐를 둘러싸고 조정에서 한바탕 논쟁이 벌어진 것이다. 단호한 거절이 아닌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타진하는 달라진 분위기. 이는 고종이 친정을 선포하며 흥선대원군이 권력에서 물러나게 된 것과 관련이 있다.(관련해서는 뒤에서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조선의 연이은 거절에도 일본은 위축되지 않았다. 조선 침략의 명분을 쌓기 위해 거절을 유도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조선 점령의 단꿈에 부푼 일본은 미국에 배운 수법을 그대로 써먹는다. 자기들이 압도적인 군사력을 자랑하는 미국의 군함에 무릎 꿇었던 것처럼 군함과 함포를 앞세워 조선을 짓밟겠다는 것이었다.

 

운요호가 처음 조선의 바다에 모습을 드러낸 건 1875년 5월이다. 부산에 나타난 운요호는 조선의 바다를 무단으로 탐측하며 무력 시위를 진행했다. 6월에는 조선 관리를 운요호에 태운 후 일본 군함의 합동 발포 연습을 지켜보게 했다. 대놓은 협박이었다. 이후 영흥만까지 가며 남해안과 동해안 일대의 해안을 측량하고 무력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9월 20일, 운요호는 강화도 초지진으로 침입해왔다. 조선은 침입군을 향해 포를 발포했다. 지극히 상식적인 정당방위였다. 그러자 운요호는 기다렸다는 듯이 맹렬한 포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이후 일본은 영종도 앞바다에 군함을 정박시키고 압도적인 화력을 자랑하며 영종도에 포격을 가한다. 조선군은 이를 당해내지 못했고 500여 명의 조선군은 도망치기에 이른다. 포격으로 조선을 쑥대밭으로 만든 일본은 영종도에 상륙해 조선의 대포와 화승총을 약탈하고, 잔학한 살육과 방화, 약탈을 자행했다. 순식간에 지옥으로 변해버린 땅, 그 전날 임진왜란의 공포를 떠올리게 하는 끔찍한 광경이었다.

 

일본의 다음 행보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운요호 사건을 구실삼아 조선을 겁박해 새로운 외교 관계를 정립하고 개항시키는 것이었다. 미국이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앞세워 신미양요를 일으킨 것과 그대로 겹친다. 1876년 1월, 일본은 군함 3척, 800여 명의 군인을 이끌고 다시 조선 앞바다에 나타난다. 그렇게 조선과 일본 사이의 협상이 시작된다. 일본의 속셈은 뻔한 것이지만 여기서 의아한 것은 조선의 대응이다. 프랑스군도, 미군도 죽음으로 맞서 싸워 물리쳤던 조선 아니었는가. 서양의 열강에도 굴하지 않던 조선이 왜 일본과는 이렇게 쉽게 마주 앉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다음 편에서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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