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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는 지금] 체첸 전쟁과 우크라이나 특별 군사작전 ①

이인선 객원기자 | 기사입력 2022/10/17 [20:00]

[러시아는 지금] 체첸 전쟁과 우크라이나 특별 군사작전 ①

이인선 객원기자 | 입력 : 2022/10/17 [20:00]

지난 8일 새벽(현지시각) 러시아와 크림반도를 잇는 크림 대교(케르치 해협 대교)가 폭발해 끊기는 사건이 발생했다. 

 

미하일로 포돌랴크 우크라이나 대통령실 고문은 이날 트위터에 “크림, 대교, 시작이다. 불법적인 모든 것은 파괴되어야 하고 훔쳐진 모든 것은 우크라이나에 돌아와야 한다. 그리고 러시아에 점령당한 모든 것은 해방되어야 한다”라고 올리며 크림대교 폭발을 기뻐했다.

 

이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러시아 수사당국은 크림대교 폭발 사건을 우크라이나 특수기관의 소행이라고 지목하고 이를 ‘테러 행위’로 규정했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안보회의 부의장은 돈바스 지역 매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범죄에 대한 러시아의 유일한 대응은 테러리스트들을 직접 패망시키는 것일 수밖에 없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러시아의 이러한 대응은 소련 해체 이후 진행된 두 차례의 체첸 전쟁을 떠올리게 한다.

 

두 차례에 걸쳐 체첸 전쟁을 살펴보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특별 군사작전에 어떠한 생각으로 임하고 있는지 이야기한다.

 

 ©이인선 객원기자

 

1차 체첸 전쟁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은 1985년 취임 때부터 1991년 소련 해체 때까지 개혁·개방 정책(이른바 페레스트로이카·글라스노스트)을 추진하며 개인의 자유를 확대하고 국가의 개입을 줄이고자 했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이러한 정책에 자극받은 소련 내 공화국들은 분리독립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1989년 발트 3국(리투아니아·에스토니아·라트비아), 조지아(그루지야), 우크라이나가 분리독립을 요구한 데 이어 러시아도 1990년 6월 12일 분리독립을 공표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흐름에서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소속의 ‘체첸-인구시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하 체첸-인구시 자치공화국)’에서도 분리독립 움직임이 늘어갔다.

 

체첸-인구시 자치공화국 내 분리독립 세력 중 하나가 1990년 생겨난 ‘체첸인 전민족대회’이다. 이들은 소련과 러시아에서 독립해 체첸인만의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체첸인 전민족대회 집행위원회 의장이었던 조하르 두다예프 전 소련군 장성은 1991년 6월 8일 ‘노흐치최 체첸 공화국’ 건국을 선포했다. 이어 두다예프 의장은 동년 7월 노흐치최 체첸 공화국이 소련과 러시아에 소속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반면, 체첸-인구시 자치공화국 지도부는 소련 해체에 반발해 쿠데타(일명 ‘8월 쿠데타’)로 생겨난 소련 국가비상사태위원회(1991년 8월 19~21일 존속)를 지지했고 러시아에 존속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하지만 8월 쿠데타가 실패하자 두다예프 의장은 1991년 9월 6일 체첸-인구시 자치공화국에서 체첸인만 따로 독립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추동된 두다예프 의장의 지지자들이 체첸-인구시 자치공화국 최고위원회 건물과 방송국들을 습격해 유혈 점령하면서 체첸-인구시 자치공화국을 사실상 해체했다.

 

이 습격으로 40명 이상의 의원이 구타당했고 비탈리야 쿠첸코 그로즈니시 시의회 의장은 창문 밖으로 내던져져 사망했다. 이에 대해 도쿠 자브가예프 체첸-인구시 자치공화국 최고위원회 의장은 1996년 러시아 국가두마(하원) 회의에서 “전쟁은 쿠첸코 그로즈니시 시의회 의장이 대낮에 사망했을 때 시작되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후 두다예프 의장과 분리주의자들의 통제하에 1991년 10월 27일 대통령 선거와 의원 선거를 실시했고 두다예프 의장이 노흐치최 체첸 공화국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11월 초 취임과 동시에 러시아로부터 분리독립을 선언했다.

 

보리스 옐친 초대 러시아 대통령은 이들의 분리독립을 인정하지 않았고 1991년 11월 7일 체첸-인구시 자치공화국과 관련해 비상사태를 선포하는 법령에 서명했다. 옐친 대통령이 2,500명의 병력을 투입하고 두다예프 대통령이 주민 총동원령을 내리면서 유혈 충돌이 발생했으나 이 법령이 러시아 의회의 승인을 받지 못하면서 3일 만에 일단락되었다.

 

공화국 내 두다예프 지지자들은 1992~1993년 600건 이상의 학살을 자행하고 철도와 마차 등을 약탈했다. 1993년에만 559대 이상의 열차가 이들의 공격을 받았고 1994년에는 1,156개 이상의 마차와 527개 이상의 컨테이너가 약탈당했다.

 

또한 1993년 6월 4일 공화국 내부에서 쿠데타가 일어났고 체첸 북부 지역에서 러시아 연방에 잔류하길 원하는 반두다예프 무장투쟁 조직이 태동했다. 

 

노흐치최 체첸 공화국 지도부는 1994년 1월 14일 헌법을 개정하며 국명을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으로 바꿨다. 하지만 러시아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에서도 테러와 내전으로 점철된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을 공식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1994년 여름부터는 두다예프 대통령에게 충성하는 군대와 러시아의 지지를 얻은 반두다예프 무장투쟁 조직인 ‘체첸 공화국 임시평의회’가 충돌하면서 내전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1994년 10월과 11월 우마르 아브투르하노프가 이끄는 임시평의회 부대들은 수도 그로즈니시에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다가 패퇴했다. 

 

두다예프 대통령은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옐친 정부가 임시평의회 부대들을 배후 조종했다며 70여 명의 러시아인 포로를 인질로 잡았다. 그러면서 그는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과 힘을 합쳐 러시아의 침략을 물리치겠다며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을 이슬람 국가로 전환하겠다고 선포했다.

 

이에 옐친 정부는 체첸 지역을 안정화하겠다며 정규군을 투입했으나 그로즈니시를 공습한 러시아 공군기들이 그로즈니시를 장악하는 데 실패하며 대치 상황이 이어졌다.

 

옐친 정부는 1994년 11월 28일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 내전 당사자들에게 48시간 내 휴전과 무장 해제를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그러나 두다예프 대통령이 끝까지 항전하겠다고 밝히면서 옐친 대통령이 1994년 12월 1일 6시를 기해 러시아군을 대거 체첸 국경에 배치하는 일촉즉발의 상황까지 치닫게 되었지만 파벨 그라초프 러시아 국방부 장관과 두다예프 대통령이 휴전에 합의하면서 일단락되는 듯했다.

 

그러나 1주일도 채 안 되어 옐친 대통령은 국내외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12월 9일 체첸에 대한 총공세를 명령함에 따라 러시아 정예군 3만 명이 그로즈니시를 향해 진격했다. 탱크와 장갑차를 앞세운 러시아의 대규모 기갑부대 병력이 12월 11일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 영토로 진입하면서 양 군대의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1차 체첸 전쟁’의 시작이었다.

 

1차 체첸 전쟁에서 그로즈니시가 폐허가 된 것은 물론 수많은 군인과 민간인들, 두다예프 대통령이 사망했고 전 세계 이슬람 무장 조직이 합류한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 측의 테러가 이어지면서 러시아도 많은 피해를 입었다. 결국 옐친 대통령은 1996년 6월 러시아 대선 공약으로 이치케리야 체첸군과의 평화협정 체결을 내걸며 체첸에서의 전쟁을 끝내고 러시아군을 철수하겠다고 밝혔다.

 

알렉산드르 레베드 러시아 국가안보위원회 서기는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이 수복한 그로즈니시를 여러 차례 방문했고 1996년 8월 체첸과 인접한 러시아 연방 소속 다게스탄 공화국 하사뷰르트에서 평화협상을 이뤄냈다. 이후 1997년 5월 12일 옐친 대통령과 아슬란 마스하도프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 대통령이 크렘린궁에서 만나 러시아군의 철수와 2001년 12월 31일까지 5년간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의 독립 문제 논의를 유보하기로 하는 내용이 담긴 ‘평화와 상호 관계에 관한 조약(이른바 하사뷰르트 협정)’에 서명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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