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반하장 일본
임오군란 당시 민중들의 가장 큰 원성을 산 대상은 일본이었다. 일본 공사관이 가장 먼저 습격을 당한 것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분노한 민중에 칼을 휘두르며 부리나케 도망쳤던 하나부사 일본 공사 일행은 인천을 통해 탈출에 성공했다. 일본에 도달한 하나부사 공사는 일본 정부에 군란 사실을 알리며, 군함의 파견과 무력 시위를 주장했다.
이미 조선 침략의 닻을 올린 일본 정부는 이를 기회 삼아 침략의 속도를 올리고자 했다. 6월 22일에 외무상 서기관 고도가 이끄는 군함 2척과 해병대 150명이, 29일에는 하나부사 일본 공사를 필두로 군함 4척과 수송선 3척, 1개 대대 병력 1,600여 명이 제물포에 상륙했다.
임오군란이 일어난 지 겨우 17일 만이었다. 강화도 조약으로 경제적 침략을 감행한 일본이 이제는 군사적 침략의 검은 속내를 드러낸 것이다. 혹자는 이를 두고 마치 임오군란이 일본에 빌미를 준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이것은 본질을 호도하는 것이다. 일본의 조선 침략은 이미 결정된 것이었다. 조선 민중이 빌미를 제공한 것이 아니라 일본이 무엇이라도 빌미 삼아 자기의 제국주의적 야욕을 실현하려 한 것이다.
대규모의 병력을 이끌고 조선에 도착한 하나부사 공사는 기세등등하게 서울로 향했다. 그리고 고종 앞에 일본의 요구 사항이라며 책자 하나를 떡하니 들이밀었다. 일본은 주동자를 처벌할 것과 피해에 대한 보상을 요구했다. 나아가 일본군의 출병 비용도 조선이 배상하라고 요구했다. 보상이니 배상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 조선에는 모두 적반하장격의 이야기들이었다.
무엇보다 문제가 된 것은 일본의 1개 대대 병력을 서울에 주둔시키겠다고 한 것이다. 일본은 공사관의 안전을 담보하기 위해서라고 이야기했지만, 조선에 군사적 개입을 원활하게 하려는 침략적 의도였다. 우리의 영토에 외국군대가 주둔하는 것은 그 자체로 주권이 짓밟히는 일이다. 더욱이 수도에 외국군대가 주둔하다니! 이는 독립된 국가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예속의 상징과도 같은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서울을 비롯해 우리 영토 곳곳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에 대해서는 어떤가. 일본군 주둔의 본질이 ‘침략’이라면, 미군 주둔의 본질은 무엇인가. 우리 사회가 이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침묵하고 있진 않은지 진지하게 생각해볼 문제이다.
일본의 요구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일본은 이 사건과 전혀 관련이 없는 개항과 통상의 확대를 요구하고 나섰다.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아무 내용이나 마구잡이로 갖다 붙인 것이다.
일본은 무력을 앞세워 이런 얼토당토않은 내용의 조약(훗날의 제물포 조약)을 강요했다. 3일 안에 답을 주지 않으면 국교를 단절하겠다며 강하게 몰아붙였다. 일본의 이런 태도는 타오르는 조선 민중의 반일 감정에 기름을 끼얹었다.
일본의 요구를 수용하지 말고 무력으로 맞서자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흥선대원군은 일본의 요구를 거절하며 무력 대응의 원칙을 세웠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 조선에 온 청나라 군대에 조속히 서울로 와달라는 연락을 보낸다. 안타깝게도 흥선대원군은 일본의 침략에는 경각심을 가졌으나 청나라의 속셈은 보지 못했다.
조선의 강경한 태도와 청나라의 출동 가능성 등을 고려한 일본은 일단 제물포로 돌아가 무력 사용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다시 기회를 노리는 민비 일당
임오군란 당시 일본과 더불어 타도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 민비와 그 척족세력이었다. 분노한 군인과 민중은 민비를 처단하기 위해 궁궐뿐만 아니라 민비가 치성을 드리러 자주 다니던 절과 굿당을 습격하기도 했다.
민비는 그들을 피해 피난길에 올라 친척인 충주 목사 민응식의 집으로 몸을 숨겼다. 하루아침에 모든 권력을 잃고 은둔자 신세로 전락한 민비와 척족세력.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권력을 향한 그들의 욕망과 집착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권좌를 되찾기 위한 민비 일당의 대작전이 시작되었으니, 그 첫걸음은 흥선대원군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민비는 편지로 자신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고종에게 알리며 흥선대원군을 제거하기 위해 청나라를 끌어들이라고 조언한다. 그리고 청나라에 머물고 있던 영선사 김윤식을 통해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했다.
자기의 권력을 위해 서슴없이 외세를 끌어들이는 민비와 그 일당의 모습은 경악스럽다. 조국과 민족을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이는 있을 수 없는 행위이다. 그러나 일신의 영달을 위해 사는 이들에게는 전혀 거리낄 것이 없는 선택이다.
최근 윤석열의 행보를 보더라도 마찬가지다. 윤석열의 관심사는 오로지 자기의 사익에만 있다. 그러니 미국이나 일본의 뒤꽁무니만 졸졸 쫓아다니며 나라를 전쟁의 접경으로 내몰고 있지 않은가. 윤석열에게 지켜야 할 국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나라를 서슴없이 팔아넘기는 매국노의 본능에 충실한 윤석열이다. 최근에 프놈펜 공동성명의 발표만 보더라도 그렇다. 미국과 일본의 돌격대를 자처하며 북한과 중국, 러시아를 향해 사실상 전쟁을 선포하는 윤석열의 모습은 전 국민을 아연실색하게 했다.
지난 역사의 민비에 오늘날의 윤석열이 겹쳐 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권력 집단은 외세와 결탁할 수밖에 없음이다.
청나라, 대원군을 납치하다
한편 청나라가 처음 임오군란 소식을 듣게 된 것은 6월 18일, 일본에 주재하던 청나라 공사를 통해서이다. 주일공사 리수창은 일본이 군함과 병력을 조선에 보내려 한다는 소식을 전하며 청나라 역시 군함을 파견할 것을 주장했다.
청나라는 일본이 조선을 무력으로 완전히 점령하게 되는 상황을 걱정했다. 따라서 일본의 행동을 감시하기 위해 군함 3척을선발대로 파견했고, 6월 27일 제물포에 도착한다.
청나라는 사건을 파악하기 위해 관련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한다. 특히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민비 일당의 연락을 받은 김윤식 등이 청나라와 접촉해 군란 세력을 소탕하고 조선과 일본 사이의 조약을 조정해줄 것 등을 요청했다.
청나라는 이 요청을 받아들여 흥선대원군의 제거 방책 등을 마련했고 4,500여 명의 군대를 조선으로 출동시켰다. 서울로 들어간 청나라 군대는 조선과 일본 사이를 중재하는 것처럼 굴었다. 그러나 이 중재라는 것은 사실상 성립될 수 없는 것이었다. 일본이 침략 야욕을 버리거나 조선이 굴복하지 않으면 답이 없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청나라의 관심사는 오로지 청나라의 이익이었다.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영향력만 유지할 수 있다면 조선의 국익이 침해당한들 무슨 상관이랴! 이 와중에 대원군의 존재가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한 일본이 청나라와 흥선대원군의 제거에 대해 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7월 13일, 청나라는 흥선대원군을 납치해 청나라로 끌고 가버린다. 흥선대원군 납치는 청·일 외세와 민비 일당의 합작품이었다. 한 국가의 정치인이 외세에 의해 이토록 무참히 끌려가는 모습은 참으로 모욕적이다.
다시 외세라니! 저항하는 민중
흥선대원군을 납치한 청나라는 궁궐과 사대문에서 조선 군인들을 몰아내고 청나라 군대를 배치했다. 서울 전역을 외국군대가 장악한 것이다. 청나라는 흥선대원군 납치 소식을 들은 조선 민중의 저항을 막으려는 의도였다. 곳곳에는 그 어떤 소요도 엄금한다는 포고문이 붙었다.
하지만 민중과 군인은 끝까지 저항했다. 일본이라는 외세, 그에 빌붙은 부패한 정치권력을 처단하고 새로운 나라를 만들고 싶었던 열망이 청이라는 외세에 의해 좌절되려 하니, 그것을 어찌 그대로 보고 있을 수 있었을까.
민중들은 서울 곳곳에서 청군과 맞서 싸웠다. 크고 작은 전투가 계속 이어졌다. 당시 저항이 얼마나 강력했던지 청군이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그러나 거의 비무장 상태나 다름없던 민중들과 구식 무기로 무장한 군인들이 청나라의 신식 무기와 화력을 당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청나라는 흥선대원군의 정치 세력을 처단하는 한편, 임오군란에 가담한 군인들이 많이 살던 왕십리와 이태원 등을 대대적으로 공격했다. 민중들은 마지막까지 돌을 던지며 필사적으로 싸웠다. 너무나 끔찍한 것은 이들을 소탕해달라고 요청한 것이 고종이라는 것이다. 외국 군대를 향해 우리 백성을 학살, 진압해달라고 요청하는 국왕이라니. 당시 민중들이 느꼈을 배신감과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외세를 등에 업고 민중을 짓밟은 민비 일당은 그토록 원하던 정권을 다시 손아귀에 넣었다. 7월 25일, 고종은 민비가 살아있음을 공식적으로 알렸다.
일본 역시 그들이 원하던 것을 얻을 수 있었다. 7월 15일부터 17일까지 3차례의 회담을 거쳐 위에서 살펴보았던 내용을 제물포 조약이라는 이름으로 체결했다.
항쟁에 참여했던 주요 군인들은 모두 처형당했다. 이후에도 왕십리 일대에서는 범인을 잡는다며 마을을 습격하거나 애꿎은 민중들을 죽이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임오군란이 남긴 것
그렇다면 임오군란은 결국은 ‘진압’당한 실패한 역사일까. 그렇지 않다. 임오군란이 우리 역사에 남긴 의의를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
먼저 임오군란은 일본이라는 외세의 침략적 본질을 정확히 꿰뚫고 그에 맞서 싸웠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일본의 조선 침략이 본격화되던 시기에 이를 정조준해 투쟁한 것이다. 외세의 침략에 굴하지 않은 조선 민중의 힘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일본 공사관을 습격해 그들을 나라 밖으로 내쫓은 것에서 우리 민족의 남다른 저항 의식이 돋보인다. 침략자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민중의 저항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일본은 더 거침없이 조선을 침략하고 수탈하려 들었을 것이다.
다음으로 외세와 결탁한 정치권력을 단죄하고자 했다는 데서도 의의가 있다. 당시 민중들이 민비와 그 일당을 단죄하고 정치적으로 거세한 이후 흥선대원군을 복귀시킨 것도 중요한 대목이다. 물론 흥선대원군이 갖는 한계도 명확하나, 자기의 이해와 요구를 실현할 정치 세력을 찾고자 했던 민중들의 시도와 노력은 큰 의미를 지닌다.
마지막으로는 그 어떤 외세에도 환상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흥선대원군은 일본을 극도로 경계하면서도 정작 청나라는 조선을 도와줄 것으로 생각했다. 크나큰 오판이었다. 외세는 외세일 뿐이다. 우리의 국익, 우리의 삶을 지켜주지 않는다. 외세에 의존해서 우리의 살길을 도모하려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지금 광장에서는 윤석열 퇴진의 촛불이 타오르고 있다. 그곳에서 “퇴진이 평화다”라고 외치고 있다. 미국과 일본이라는 외세에 굴종하며 전쟁으로 달려가는 윤석열을 향한 국민의 강력한 경고이자 준엄한 명령이다. 임오군란 당시 외세와 그에 빌붙은 정치 세력에 맞서 나라를 뒤엎었던 민중들. 그들의 뜨거운 염원은 ‘진압’당하지도, 사라지지도 않았다. 역사의 물줄기를 따라 이어, 이어져 광장의 촛불로 활활 타오르고 있다. <저작권자 ⓒ 자주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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