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편까지 일본의 침략과 민비 일당의 학정에 시달리던 민중의 저항, 임오군란에 대해 살펴보았다. 새로운 나라를 꿈꾸며 항쟁에 참여했던 민중은 처형당했고 그들의 정치적 구심이었던 흥선대원군은 청나라로 납치되었다. 그리고 민비 일당은 청나라를 등에 업고 정치적 재기에 성공했다. 과연 임오군란 이후 조선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번 연재에서는 흔히 삼일천하(三日天下)라고 알려진 갑신정변에 대해서 세 편에 걸쳐 다룬다. 이번 편에서는 갑신정변의 배경이 되었던 당시 사회상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심해지는 청의 내정간섭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을 심화한다. 본래 청나라는 동아시아에서는 물론이고 전 세계에서도 손에 꼽히는 강대국이었다. 광활한 영토, 강한 국방력, 튼튼한 경제력을 갖추었던 청나라의 위상은 실로 대단했다. 그러나 영국과의 아편 전쟁을 겪은 후, 청나라의 위상은 빠르게 추락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몰락이 코앞이었다.
옛 영광을 되찾고자 하는 청나라의 시도는 주변국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 주요 대상이 조선이었다. 그러나 조선을 노리는 것이 어찌 청나라뿐이었을까. 조선의 주변국인 러시아와 일본 역시 조선에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했다. 특히 무력을 앞세워 조선을 개항시킨 일본의 공세적인 조선 진출은 청나라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이를 견제하기 위한 청나라의 묘책, 다른 열강들을 조선에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조선과 미국의 수호 통상 조약의 체결이 그 시작이었다. 제너럴셔먼호를 앞세워 조선을 침략했던 미국은 여전히 조선과의 통상 수교를 원하고 있었으나, 미국에 대한 조선의 반감이 컸기 때문에 미국 뜻대로 잘되지 않았다. 미국은 일본의 손을 빌려보려 했으나 미국의 조선 진출을 원치 않던 일본은 주선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조선 역시 일본을 통한 교섭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완고한 태도를 보였다.
안달이 난 미국에 청나라가 손을 내밀었다. 청나라의 이홍장은 미국의 동아시아 함대 슈펠트 제독을 초청해 조선과의 통상 조약을 알선하겠다고 제안했다. 미국은 거절할 까닭이 없었다. 동시에 일본 주재 청나라 공사관을 통해 조선의 수신사로 파견된 김홍집에게 ‘조선책략’이라는 책을 전달하게 했다. 조선이 살기 위해서는 미국과 연합해야 한다는 내용의 책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체결된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은 불평등 조약 그 자체였다. 일본과 맺은 강화도 조약과 마찬가지로 치외 법권이 규정되었다. 미국인이 조선 땅에서 범죄를 저질러도 조선은 처벌할 수 없는 것이다. 최근에도 주한미군이 택시 기사에 운임을 제공하지 않고 무차별 폭행을 가하고 그대로 미군기지로 도주한 사건이 있었다. 피해자는 처벌은커녕 치료비 보상이라도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1882년에 미국에 부여된 치외 법권이 140년이 흐른 오늘에도 이어지고 있다니, 참으로 비극적이다.
미국과의 조약에서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최혜국 대우 규정이다. 최혜국 대우란 향후 조선이 다른 나라와 맺게 될 모든 조약에서 미국과의 조약보다 유리한 내용이 미국에 자동으로 적용된다는 것이다. 황당하기 짝이 없는 내용이다. 미국과의 불평등한 조약은 다른 서구 열강과의 조약에서 기준이 되었다. 조선의 국익은 심각하게 침해당하게 되었으나 그것은 청나라가 알 바가 아니었다. 청나라는 미국을 통해 일본을 억누를 수 있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자기 영향력을 확인시켰으니 흡족할 따름이었다.
이런 와중에 임오군란이 발생한 것이다. 조선 민중의 저항이 청나라엔 달갑지 않았다. 더욱이 일본이 발 빠르게 군대를 출병시키자 자기 구상에 차질이 생길까 초조했다. 임오군란 당시 청나라가 자기 군대를 조선으로 보내 적극적으로 개입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임오군란은 끝났지만, 청나라는 조선에 계속해서 자기 군대를 주둔시켰다. 조선의 외교와 군사, 재정까지 장악하고자 시도했다. 청나라는 자국인 마젠창과 독일인 묄렌도르프 등 ‘고문’이라는 이름을 붙인 30여 명을 앞세워 조선의 내정에 본격적으로 간섭했다. 조선 정부로부터 벼슬을 받고 녹봉을 받았다고 그들이 조선을 위해 일했겠는가. 이 외국인들이 자기 조국을 위해 악착같이 움직였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면서도 말로는 조선을 위한다고 부르짖었다. 심지어 묄렌도르프는 조선 관복을 입고 돌아다녔다니, 얼마나 기만적인가.
오랫동안 중국과 조선이 조공 관계를 맺어왔으나 조선의 내정은 조선의 몫이었다. 왕이나 세자를 책봉할 때 한 번씩 오가는 일 외에는 조선의 정치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일까지는 없었다. 그런데 그 오랜 전통이 깨진 것이다.
1882년 9월에 청나라와 맺은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에서도 조선은 청나라의 제후국이며 이와 관련해 재논의할 것이 없다고 밝히고 있다. 조선이 청나라의 지배 아래 있음을 명시한 것이다. 나라 대 나라로 맺는 조약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청나라와 조선의 무역에 관한 내용을 담은 장정은 청나라의 특혜를 보장해주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한성과 양화진의 개방이었다. 청나라 상인들에게 일본과의 통상 수교 조약에 따라 개항된 세 곳의 개항장 외에 서울에서의 상업 활동을 보장해준 것이다. 저렴하고 다양한 청나라의 상품이 조선 시장에 대량으로 유입되게 되었다. 이는 조선에 경제적 타격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나아가 청나라에 부여된 ‘특혜’를 다른 열강은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득달같이 달려들어 청나라와 같은 대우를 하라고 조선 정부를 압박했다.
열강의 각축장이 된 조선
조선은 열강의 각축장이 되었다. 당장 청나라와 일본의 다툼이 본격화되었다. 조선을 손아귀에 넣고자 하는 일본의 야욕은 결코 청에 뒤지지 않았으니 말이다. 일본은 종주권을 강화하려는 청나라에 맞서 조선을 독립국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래야 조선을 자기가 지배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이를 위해 일본은 서구 열강의 힘을 빌리는 것부터 청나라와 조선 종주권 문제를 직접 논의하는 것까지 계획하고 있었다. 외세에 힘입어 한자리 얻어 보려는 한심한 자들은 하루는 청나라 군대를, 하루는 일본 공사관을 찾아가는 한심한 작태를 보이기도 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미국을 시작으로 서구 열강들도 조선에 달려들었다. 조선은 청나라의 주선으로 영국, 독일 등과도 연달아 통상 조약을 체결했는데, 이것은 하나같이 다 불평등 조약이었다.
대표적으로 영국과의 조약 내용을 살펴보자. 영국의 군함이 조선의 바다 어디나 오갈 수 있으며 선원이 자유로이 상륙할 수 있다고 규정되어있다. 외국 군대의 군함이 제멋대로 우리 바다를 드나들다니,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인가. 경제적으로도 문제가 많았다. 영국의 상품에 대한 관세를 조선 정부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과 영국의 합의를 통해 적용하도록 규정했다. 영국은 자국의 상품에 대해서는 무관세에 가까운 관세율을 적용하고 조선의 상품에 대해서는 고관세를 적용하고자 했다. 나아가서 영국이 제물포, 원산, 부산 3곳 개항장의 토지를 사들이고 공장을 짓도록 허용했다. 이는 조선의 경제 주권을 심각하게 침해한 것이다.
서울 곳곳에는 각국의 공사관이 세워졌다. 조선의 수도에 자리 잡은 ‘공사’라는 이름의 약탈자들은 어떻게 하면 조선을 더 뜯어먹을 수 있을지 촉각을 세웠다. 열강의 이권 경쟁은 끝이 없었다. 조선 침략의 첫 주자인 일본은 이대로 가다가는 조선을 뺏기는 것이 아닌지 큰 위기감을 느꼈다. 일본은 다른 열강에 뒤처지지 않게 새로운 통상장정을 맺고 세칙을 마련하며 더욱 공세적으로 이권 침탈을 자행했다.
단순히 경제 침략만이 아니었다. 각 나라는 개항장과 그 주변 지역에서 자유로운 왕래를 보장받았는데, 개항장 외의 지역을 다녀도 이를 제대로 적발하거나 처벌하지 않았다. 이에 상인으로 위장한 각국의 간첩이 조선 팔도를 휘젓고 다녔다. 이들은 조선의 지리를 파악해 지도를 작성하는가 하면, 나라의 실태를 상세히 파악하고 각종 정보를 수집하는 등의 행위를 일삼았다. 심지어는 일본 간첩들이 독도를 자기 땅이라고 표시한 팻말을 세우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으니, 나라 꼴이 보통 엉망이 아니었다.
새로운 정치 세력이 꿈틀대다
절망스러운 것은 민비 일당은 이 위기를 돌파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 외세의 힘으로 호의호식하며 살고 있었다. 애초에 자기의 정치적 재기를 위해 외세에 나라를 갖다 바친 세력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임오군란으로 죽을 고비를 넘겼다가 궁으로 돌아온 민비의 무속 신봉은 한층 더 심해졌다. 충주로 피신했을 때 만난 무당이 자신의 환궁 날을 맞췄다며, 그 무당을 아예 궁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그러고는 나라의 중대사를 결정할 때면 그 무당을 불러 답을 구했다. 심지어는 무당에 ‘진령군’이라는 직위를 내려주고 사당까지 지어주는 한심한 작태를 보이기도 했다. 벼슬을 얻고자 하는 사람이나 일부 관료들이 그 무당을 찾아가 줄을 대기도 했다. 이런 상황이니 이들에게는 더 기대할 것도 없었다.
이에 조선의 상황에 강한 위기의식을 갖고 새로운 내일을 꿈꾸는 정치 세력이 꿈틀대기 시작했으니, 개화파였다. <저작권자 ⓒ 자주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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