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정변 이후
조선을 변혁하고자 했던 흥선대원군의 개혁 정치도, 임오년의 군인과 민중의 저항도, 김옥균을 위시한 개화파의 정변도 안타깝게도 성공하지 못했다. 조선의 운명과 조선 민중의 운명은 더 위태로워졌다.
갑신정변 이후 일본은 주특기인 배상금 문제를 들고나왔다. 정변에 개입한 일본이 오히려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니 조선 정부는 황당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조선 정부의 억울함 따위야 일본이 알 바가 아니었다. 일본은 협상단에 2개 대대의 병력과 7척의 군함을 딸려 보냈다. 말이 협상이지 무력을 앞세운 협박이었다.
결국 조선과 일본 사이에 한성조약이라는 이름의 또 하나의 불평등한 조약이 체결되었다. 공식적인 사죄와 배상금은 물론이고, 일본인 스스로가 불태운 일본 공사관의 부지 이전과 신축 비용도 조선이 분담하기로 했다. 게다가 일본 공사관을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일본군 1개 대대를 한양에 주둔시키기로 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완전히 뒤바뀐 굴욕이었다. 조선은 자기를 지킬 힘도, 외세에 맞서 싸울 조금의 의지도 없음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자칫하면 조선에서의 입지를 잃을 뻔했던 위기를 영향력 확대의 기회로 반전시킨 일본은 기세등등해졌다.
이제 조선에는 청나라 군대에 더해 일본의 군대까지도 주둔하게 되었다. 조선이 머지않아 청나라와 일본의 전쟁터가 될지 모른다는 말이 나돌았다. 그러던 중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도 톈진 조약이라는 이름의 조약이 체결된다. 청일 양국은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를 철수할 것을 합의했으며, 향후 청일 양국 중 한쪽이 조선에 파병 시 다른 한쪽에 알릴 것을 약속했다. 일종의 숨 고르기였다. 청나라는 프랑스와의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일본과의 전쟁을 감행하긴 부담스러웠으며, 일본의 판단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문제는 정작 조선에서의 주둔과 파병을 논의하는 데에서 당사자인 조선은 철저히 배제되었다는 점이다. 조선의 신세가 이토록 처량했다.
몰려오는 외세, 계속되는 학정
청나라와 일본만 조선을 탐내는 것이 아니었다. 제국주의 열강들이 승냥이 떼처럼 조선에 몰려들었다.
먼저 1885년, 영국이 러시아의 남하를 막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거문도를 점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불리며 전 세계를 식민지화한 제국주의 국가였고, 러시아 역시 식민지 개척에 힘을 쏟고 있었다. 경쟁적으로 식민지 개척에 나선 두 나라는 곳곳에서 부딪치고 있었으며, 동북아시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조선 정부는 강화되는 청일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 다른 외세의 힘을 빌리고자 했다. 참으로 어리석고 한심한 생각이었다. 아무튼 또 다른 외세로 낙점된 것이 러시아였다. 줄곧 얼지 않는 항구(부동항)를 찾아 헤매던 러시아엔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온 셈이었다. 러시아는 영흥만을 조차(특별한 합의에 따라 한 나라가 다른 나라 영토의 일부를 빌려 일정한 기간 통치하는 일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하는 조건으로 조선과의 조약 체결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조선의 이권을 침탈하는 일도 더욱 잦아졌다. 이전에 일본의 강압에 의한 강화도 조약이 조선의 경제를 어떻게 몰락시켰는지 다뤘었다. 이 시기의 이권 침탈은 더욱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우선 청나라와 일본은 조선의 바닥까지 싹싹 긁어먹을 기세였다. 광산채굴권, 전신 가설권, 철도부설권, 산림채벌권, 어채권 등을 싹쓸이해갔다. 산, 땅, 바다 가리지 않고 조선의 온 산하가 외세에 의해 약탈당했다. 일례로 일본은 조선의 바다를 헤집고 다니며 물고기가 씨가 마르도록 쓸어 담았다. 조선의 어민과 해녀들이 생계의 곤란을 겪을 정도였다. 조선의 바다에서 일본의 해녀들이 물질하는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조선의 이권 침탈에 열을 올린 또 다른 대표주자는 미국이었다. 청일에 비해 뒤늦게 뛰어든 미국이었으나, 치열한 다툼에서 전혀 밀리지 않고 야금야금 이권을 챙겼다. 대표적인 것이 금광 개발이다. 평안도 운산 금광에는 정말 많은 양의 금이 매장되어 있었다. 미국은 고종과 민비를 구워삶아 금광의 개발권을 손쉽게 얻어냈다. 운산 금광은 아시아에서도 제일가는 금광으로 미국에 돈벼락을 안겨주었다. 미국이 이곳에서 40여 년간 금을 채굴해갔는데 그 순이익이 1,500만 달러(약 192억)가 넘었다고 한다. 이 어마어마한 국부가 외세의 배를 불리는 동안 조선 민중은 주린 배를 움켜쥐어야 했다. 어찌 분노하지 않고 통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고종과 민비는 나라를 떼어다 이 외세, 저 외세 입에 떠 넣어주기에 바빴다. 갑신정변 이후 개화파가 쫓겨나자 민비 일당의 입지는 더욱 견고해졌다. 그들의 방탕한 삶도, 각종 부정부패도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심해졌다. 외세의 침탈, 민비 일당과 탐관오리의 학정 아래 조선 민중은 더는 버틸 재간이 없었다.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분노가 들끓었다. 항쟁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새 세상을 준비하는 민중
민중의 분노는 곳곳에서 봉기로 터졌다. 이러다가는 죽겠구나 싶었던 농민들은 관아로 달려가 자신들을 착취하는 탐관오리들을 응징했다. 때로는 수백 명이, 때로는 수천 명이 나섰다. 정부는 안핵사를 파견해 상황을 무마하고자 시도했으나, 제대로 해결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민심은 날이 갈수록 흉흉해졌다.
조선 민중의 가슴에는 불이 타올랐다. 탐관오리 몇 놈을 때려눕혀 속을 푸는 정도로 꺼질 불이 아니었다. 그것은 단순한 분노와는 달랐다. 새 세상을 향한 희망의 불이었으며, 그것을 우리의 손으로 직접 만들겠다는 결의의 불이었으며, 이전과는 다른 차원의 싸움을 하겠다는 각성의 불이었다. 민중의 가슴에 이는 불은 혁명, 바로 그것이었다.
가슴에 혁명의 불을 품은 많은 이들이 조직을, 사상을 찾기 시작했다. 숱한 농민 봉기를 통해 경험을 축적한 민중은 산발적인 봉기로는 승리할 수 없다는 교훈을 얻었다. 이들이 모여든 곳이 바로 동학이다.
동학은 1860년 최제우가 창시한 종교다. 동학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 사상과 어둡고 불평등한 세상이 지나가면 살기 좋은 새 세상이 온다는 후천개벽 사상을 기본으로 조선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조선 후기에 새 세상의 도래를 열망하는 민중들의 염원이 정감록이나 미륵불 신앙과 같은 민간 신앙에 쏠렸는데, 동학은 이보다 한발 더 나아가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다.
특히나 인내천 사상은 핍박받고 착취당하던 민중을 하늘과 같은 존엄한 존재로 규정했는데, 이는 민중의 자기 인식을 높여주는 것이었다. 하늘만큼 귀한 사람이니 못 해낼 일이 무엇이 있으랴! 민중이 후천개벽의 주인으로 서게 하는 사상적 뿌리가 되어준 것이다.
조선의 기득권 세력에게는 불온해도 이런 불온한 사상이 없었다. 양반과 상놈의 구분이 명확한데, 감히 상것들이 하늘이라니! 모두가 평등하다니! 이 좋은 세상이 가고 상것들의 세상이 온다니! 이런 발칙한 소리가 어디 있단 말인가. 이 때문에 동학은 초창기부터 조선 정부의 박해 대상이 되었다. 초대 교주 최제우는 1864년 민심을 어지럽힌다는 죄명으로 참수당했다. 교주는 죽었으나 민심은 죽지 않았다. 외세가 날뛰고 민비 일당의 수탈이 가혹해질수록 동학에는 더 많은 민중이 몰려들었다.
동학의 다른 동력은 조직에 있었다. 동학은 ‘접’이라는 조직 체계를 갖추고 각 접은 접주의 지도를 받았다. 공통된 사상으로 조직된 대오의 위력은 역사 속에서 숱하게 확인이 된다. 세상을 바꿔보려는 자들에게 이런 체계는 너무나 좋은 수단이기도 했다.
물론 동학에 가담한 모든 이들이 이런 정치적, 역사적 수단으로 동학을 대했던 것은 아니다. 2대 교주 최시형을 비롯해 여러 인물에게 동학은 종교적 성격이 더 강했다. 종교로서의 동학, 저항의 수단으로서의 동학. 동학을 바라보는 두 시선에는 미묘한 차이가 존재했다. 이러한 차이는 저항의 첫 국면에서 미묘한 입장과 태도의 차이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이 서로 적대적이거나 분리되는 것은 아니었다. 민중의 열망이 동학이라는 종교를 역사에 불러낸 것이고, 그것을 불러낸 민중이 자기 저항의 수단이자 도구로 동학을 택했으니 말이다. 더욱이 마침내 이 저항의 불길이 전 조선 팔도를 집어삼키고 나서는 이런 구분의 의미가 무색해졌다.
동학의 토대를 빌려 새 세상을 준비하기 시작한 민중은 드디어 자기 위력을 과시할 첫 집단행동에 나선다. (계속) <저작권자 ⓒ 자주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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