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조신원운동으로 시작된 투쟁
당시 동학은 조선 정부로부터 사교로 낙인찍혀 크게 탄압받고 있었다. 이에 반해 천주교, 기독교와 같은 서양 종교는 사실상 포교의 자유를 인정받기 시작했다. 프랑스, 미국 등 외세의 압력에 조선 정부가 굴복한 결과였다. 서양의 종교와 선교사들도 버젓이 조선 땅에서 활보하는 판에 조선인이 만든 조선의 종교만 박해받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동학에 대한 탄압의 본질은 정치적 박해에 있었다. 지배층이 보기에 동학은 불온한 민중의 집결지, 즉 반란 세력이나 다름없었다. 지배층의 학정이 거세질수록 동학에는 더 많은 농민이 몰려들어 그 세가 날로 커졌으며, 동시에 가해지는 탄압 역시 거세졌다. 숱한 탐관오리들은 자기 눈에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이들은 모조리 동학도로 몰아 짓찧어댔다. 오늘날의 ‘빨갱이’ 몰이랄까. 이런 상황에서 1892년, 충청 감사 조병식과 전라 감사 이경직은 동학 금지령을 내린 후 동학도들을 수색해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탄압은 필연적으로 항쟁을 부른다. 농민들은 교조신원운동의 형태로 집단행동에 나서게 된다. 교조신원운동은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의 죄를 벗기고 종교의 자유를 얻기 위한 운동이면서 이를 이용해 당대 농민들의 정치적 요구를 강하게 제기하고자 한 투쟁이었다. 갑오농민전쟁 코앞에서 발생한 교조신원운동은 농민들의 투쟁력을 높이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첫 신호탄을 쏘아 올린 곳은 공주였다. 공주에 모인 1,000여 명의 농민은 충청 감사 조병식에게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담은 글을 작성해 보냈는데 그중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었다.
“방금 서양 오랑캐의 학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뒤섞여 있고 왜놈 우두머리의 독이 외진에 도사리고 있으니 망극할 일이며, 음흉하고 거역하는 싹이 임금님의 수레 바로 밑에서 일어나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절치부심하는 일이다. 심지어 왜놈 상인들은 각 항구를 두루 통하여 싸게 사서 비싸게 팔아 얻는 이익을 저들이 마음대로 하니 돈과 곡식이 마르고 백성들이 지탱하고 보전하기 어렵다. 심복같은 땅과 인후같은 장소의 관세 및 시장세와 산림과 천택의 이익마저 오로지 바깥 오랑캐에게로 돌아가니 이것이 또한 우리들이 손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리는 바이다.” (출처 : 우리역사넷)
투쟁에 나선 이들은 서양 세력과 일본의 침탈, 그로 인해 불안해진 백성의 삶에 대해 성토하고 있는데, 이는 교조신원운동의 본질을 잘 보여준다. 갑오년에 들었던 척양척왜, 보국안민의 기치가 이미 이때부터 녹아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농민들의 투쟁에 위기감을 느낀 조병식은 동학을 허용하는 것은 자기 소관이 아니라고 선을 그으면서도, 각 군의 수령들에게 백성의 수탈을 금한다는 지시를 전달했다. 농민들의 분노가 더 번지지 못하게 하려는 꼼수였다.
어쨌거나 관이 한발 물러나는 모양새를 취한 것이니 큰 의미가 있었다. 농민들의 기세는 더욱 높아졌다. 공주에서 이룬 작은 성과를 발판 삼아 삼례에서 더 큰 투쟁을 벌이기로 한다. 삼례는 충청도에 인접한 전라도 지역이다. 곡창지대가 많은 전라도 지역에는 농민도 많았고 착취와 수탈도 많았다. 그렇게 수천의 농민들이 삼례로, 삼례로 몰려들었다. 동학이 만들어진 이후 가장 큰 규모의 집회였다. 이는 동학의 조직력이 그만큼 강해졌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당시 민중들의 저항 의식과 투쟁 의지가 한껏 고조되었음을 드러낸다. 한마디로 조직된 민중이 역사의 전면에서 자기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삼례를 차지한 수천의 농민들은 일주일이 지나도록 물러가지 않고 자기의 요구를 관철하고자 시도했다. 그 위력에 겁을 먹은 전라 감사 이경직은 교조 신원에 관한 문제를 조정에 보고할 것과 전라도 지역에서의 탄압을 금할 것을 약속했다.
외국 공사관들에 나붙은 벽보
이제 공은 조선 정부로 넘어갔다. 농민들의 발걸음도 서울을 향했다. 이때 이어진 투쟁은 그 주도 세력에 따라 내용과 성격에서 다소 차이를 보인다.
먼저 최시형을 비롯한 교단 지도부는 종교적 색채가 강한 운동에 나선다. 이들은 1893년 광화문에 모여 조정을 향해 교조 신원을 요구하는 상소 운동을 진행했다. 그러나 고종은 “이단을 내세워 야료를 부리는 자들은 선비로 대우할 수 없으며 나라 법에 따라 죽임이 내려질 것”(고종실록, 고종조 30년 2월 15일)이라며 이들의 요구를 단칼에 거절하였고, 별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이에 반해 전라도 지역의 인사들은 외세를 겨냥한 투쟁에 나선다. 이들은 상소 운동이 아닌 독자적인 벽보 투쟁을 진행했는데, 그 타격 대상은 프랑스 공사관, 미국 공사관, 일본 공사관 등 외국 공사관과 외세가 세운 교회당과 학당 등이었다. 벽보는 선전포고를 앞두고 보내는 경고장과도 같았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너희는 우리나라의 법을 어겨가면서 교당을 짓고 선교하고 있다. 만약 행장을 꾸려 속히 돌아가지 않으면 3월 7일에 우리 당이 너희 공사관으로 들어가서 깡그리 쓸어버릴 것이다” (프랑스 공사관에 붙은 벽보의 내용 / 출처 : 김윤식, 속음청사)
“너희는 비록 오랑캐지만 천품 받음이 대략 같음을 아는가, 모르는가? 이미 인도에 처하였으면 각기 나라를 다스리고 각기 생산을 보호하여 길이 강토를 보존하며 위로는 받들고 아래로는 백성을 기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망령되이 탐욕의 마음을 가지고 남의 나라에 웅거하여 공격을 장기로 삼고 살육을 근본으로 삼으니 진실로 무슨 마음이며 끝내는 무엇을 하려는가? 기회는 너희들이 스스로 잡는 것이니 후회하지 말라. 우리는 두말하지 안 하오니 급히 너희 땅으로 돌아가라.” (일본 공사관에 붙은 벽보의 내용 / 출처 : 1893년 4월 10일의 일본 외교문서)
이 같은 벽보는 외세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실제 프랑스 공사관은 본국에 군함을 보내달라 요청했고 일본 공사관 역시 관련한 내용을 예의주시해 본국에 보고했다.
보은과 원평, 봉기의 서막
상소 운동과 벽보 투쟁 이후 투쟁은 더욱 격화되어 보은과 원평의 집회로 이어진다.
1893년 3월, 보은에는 수만 명이 모여 ‘보국안민, 광제창생, 척양척왜’라는 반봉건, 반외세의 구호를 전면에 내걸고 집회에 나섰다. 종교적 성격보다도 정치적 성격이 한층 강화된 것이다. 어떤 기치를 공식화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위에서 살펴본 공주와 삼례 집회에서도 이런 내용이 녹아있었지만, 지도부가 이를 전면화, 공식화한 것은 아니었다. 민중의 항쟁 의지가 미온적이었던 교단 지도부까지도 견인했음을 보여준다.
조정에서 파견한 어윤중이 작성한 아래의 글을 보더라도 보은집회에 참여한 이들의 폭이 동학교도를 넘어서 조선의 변화를 바라는 민중으로 완전히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처음에는 부적, 주술로써 무리를 현혹하고 참위를 전하여 세상을 기만하였는데, 필경에는 재기를 갖추고도 뜻을 얻지 못한 자, 탐묵이 횡행하는 것을 분하게 여겨 민중을 위해 목숨을 바치려는 자, 우리의 이원을 빼앗는 것을 분통하게 여겨 큰소리하는 자, 탐사·묵리의 침학을 당해도 호소할 바 없는 자, 경향에서의 무단과 협박 때문에 스스로 보전할 수 없는 자, 경외에서 죄를 짓고 도망한 자, 영읍속들의 부랑무리배, 영세농상민, 풍문만을 듣고 뛰어든 자, 부채의 참독을 견디지 못하는 자, 상천민으로 뛰어나 보려는 자가 여기에 들어왔다”(출처 : 어윤중, 취어)
수만의 인파가 몰린 것 또한 엄청난 일이었다. 지금도 수만 명이 모이는 집회를 열기 쉬운 일이 아닌데, 당시 조선 인구가 1,600만~1,700만 명 정도임을 고려해 보면 실로 대단한 일이었다. 게다가 동학 창당 이래 가장 큰 규모였던 삼례집회가 열린 지 6개월도 되지 않아 10배 넘는 인원이 몰려든 것 아닌가! 이 장면은 오늘날의 윤석열 퇴진 촛불을 연상케 한다. 200여 명 남짓으로 시작한 퇴진의 촛불이 수십만의 횃불이 되기까지 걸린 시간도 6개월이 채 되지 않았다. 우리 민족의 피에 항쟁의 역사적 DNA가 유전되어 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안타까운 것은 민심을 모아서 투쟁을 승리로 이끌어야 할 지도부가 중간에 사라졌다는 것이다. 보은집회가 길어지자 조정은 어윤중을 시켜 농민들을 회유하는 한편, 대포를 설치하여 군사적 진압을 시도하려 했다. 지도부는 무력으로 맞서 싸우는 상황을 두려워했다. 민중을 믿지 못하고 권력에 겁먹었기 때문이다.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당시 시대 상황으로 인해 아직 도착하지 못한 이들이 계속해서 모이고 있는 와중이었다. 항쟁에서 지도부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같은 시기에 전봉준을 비롯한 전라도 지역의 농민들은 원평집회를 열었다. 여기에도 수만 명이 몰려들었다. 이들은 벽보 투쟁을 주도했던 세력이기도 하다. 당시 전라도 지역의 동학 조직들은 교단 지도부나 다른 접들과는 달리 강한 저항 의지와 투쟁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이 보은이 아닌 원평에서 집회를 따로 연 이유는 노선상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원평집회를 주도한 세력의 정치적 지향이 보은집회의 지도부에도 영향을 미쳐 반외세, 반봉건을 전면에 내걸게 했다고 본다. 어쨌거나 교단 지도부가 이끄는 보은집회와 비슷한 규모의 집회를 조직할 수 있는 조직력을 갖췄다는 것은 눈여겨볼 지점이다. 이는 당대 민심 반영이기 때문이다. 실제 원평집회를 주최했던 세력은 이후 갑오농민전쟁의 핵심 지도 세력이 되어 항쟁을 이끌었다.
일단 보은과 원평의 집회는 마무리되었으나, 이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다. 본격적인 봉기 준비에 착수했기 때문이다. 농민들의 이런 움직임은 조선 정부와 외세를 긴장하게 했다. 조정에서는 보은집회와 원평집회가 열리던 당시 이들이 서울로 진격해올 것에 대비해 군사적 대응을 준비하기도 했다. 한심하게도 고종은 이때부터 외국군을 끌어들여 백성들을 진압하고자 했다. 중국이 영국의 병력을 빌려 쓴 것을 언급하며 청나라 군대를 동원하자며 반대하는 대신들을 설득하기까지 했다. 외세 없이는 못 사는 머저리였다. 영국, 프랑스, 미국, 일본, 청나라 등의 외세는 몰래 모여 대책을 논의하기도 했다.
그리고 드디어 고부에서 봉기가 시작됐다. 녹두장군 전봉준의 등장이었다. <저작권자 ⓒ 자주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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