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란이 되자 하네
전봉준은 본래 몰락한 시골 양반 가문 출신이었다. 이름만 양반이었지 그 궁핍함은 일반 백성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전봉준은 생계를 위해 약을 팔거나 풍수를 봐주었으며, 편지를 대필하기도 했다. 세 마지기의 논을 경작했으나 그것으로는 밥을 제대로 먹기 쉽지 않았다. 이런 환경이 전봉준을 각성시켰던 것일까? 전봉준은 고통받는 민중의 삶을 굉장히 아프게 받아들였다.
비단 전봉준만이 아니었다. 썩어빠진 세상에 맞서 기꺼이 반란이 되고자 꿈꾸는 이들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시대가 이들을 불러내고 있었다. 가슴 깊숙이 반란의 꿈을 품은 청년 전봉준은 이곳저곳을 유랑하며 자기와 같은 꿈을 품은 이들과 연을 맺게 된다. 김덕명, 김개남, 송희옥, 손화중, 서장옥, 황화일 등 훗날 갑오농민전쟁의 주요 인물들의 만남은 이렇게 이뤄졌다. 이들은 그저 세상에 분노한 개개인이 아니라 사회 변혁을 조직하는 운동가이자 혁명가였다. 같은 뜻을 품고 한 길을 걷는 동지였다.
전봉준이 1890년대 초, 동학에 입교한 것도 이런 흐름에서 이뤄진 것이었다. 전라도 고부 지역의 동학 접주가 되고도 그는 종교로서 동학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에게 동학은 부조리한 현실을 바꾸기 위한 아주 좋은 수단이었을 뿐이다. 전봉준 본인도 동학에 발을 들인 것이 보국안민을 위해서였다고 밝히기도 했다.
앞서 살펴본 원평 집회는 척양척왜, 보국안민의 뜻을 품은 이들의 조직력과 정치력을 모두 선보인 자리였다. 전봉준과 그의 벗들에게 자신감을 불어 넣어준 시간이기도 했다. 이제는 때가 왔음을 직감한 이들은 새로운 봉기 준비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봉기의 불이 당겨진 곳, 전봉준이 살고 있던 고부였다.
고부 땅의 탐관오리, 조병갑
고부는 정읍의 옛 지명이다. 드넓은 평야를 가진 호남은 조선의 식량을 책임지는 지역이었고, 고부는 그런 호남의 대표적인 곡창지대 중 하나였다. 바꿔말하면 탐관오리에겐 자기 배를 불리기에 이보다 더 좋은 땅이 없다는 이야기이다.
당시 고부 군수 조병갑은 어떻게 하면 한 푼이라도 더 뽑아낼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농민들을 더 쥐어 짜낼지 고민하는 작자였다. 머릿속이 온통 더러운 탐욕으로만 채워진 그의 만행을 몇 가지만 살펴보도록 하자.
어느 날 조병갑은 멀쩡히 잘 쓰던 저수지를 두고 만석보라는 새로운 보를 쌓게 했다. 보를 쌓는 일은 당연히 농민의 몫이었다. 농사일만으로도 이미 고된 농민들은 영문 모를 노역에 시달렸다. 그렇게 농민들의 피땀으로 만석보가 만들어지자, 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새로 지은 저수지의 물을 쓰는 것이니 값비싼 물세를 내라는 것이었다. 물세 명목으로 뜯어간 쌀이 700여 석에 달했다. 수탈도 이런 ‘창의적’인 수탈이 없었다.
세금을 면제해 준다고 약속하여 농민들이 논을 개간하게 해놓고서는 수확 때 강제로 세금을 거두어 가버린 일도 있었다. 거짓말로 세금을 늘려서 걷고 그 차액을 자기 잇속으로 챙기기도 했다. 사기꾼도 이런 사기꾼이 없고 도적놈도 이런 도적놈이 없었다.
갖은 죄목을 만들어내는 것에도 선수였다. 불효죄, 음란한 죄, 화목하지 않은 죄 등을 지어내어 농민들을 잡아들였고, 돈을 갖다 바치지 않으면 곤죽이 되도록 매질을 해댔다.
심지어는 자기 아버지의 선정을 기리는 비석을 세우겠다며 2만 냥에 가까운 돈을 갈취했다. 백성을 수탈하기 위해 효(孝)까지도 명분 삼는 그의 집념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이러니 고부 군수 조병갑과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전봉준 세력과의 마찰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1893년 말, 농번기가 끝나며 분위기는 무르익어 간다. 전봉준을 비롯해 많은 이들의 눈은 더욱 매서워졌으며 발걸음은 더욱 재빨라졌다.
1893년 11월과 12월, 농민들은 조병갑과 전주 감사에게 부정부패한 사례들을 적어가 시정을 호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부패한 권력자들은 농민들의 호소를 귓등으로 흘리고 오히려 이들을 감옥에 가두거나 쫓아냈다. 곱게 말해서는 들을 생각이 없음이었다.
사발통문
1893년 11월, 사발통문이 돌려지기 시작했다. 전봉준, 송두호, 정종혁, 송대화, 김도삼, 송주옥, 송주성, 황홍모, 최흥열, 이봉근, 황찬오, 김응칠, 황채오, 이문형, 송국섭, 이성하, 손여옥, 최경선, 임노흥, 송인호. 이상 20명의 사람이 거사를 일으킬 것을 호소했다. 고부에서 「각리 집강 좌하 [사발통문]」*라는 이름으로 돌려진 사발통문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 「각리 집강 좌하 [사발통문]」, 출처-『사료로 본 한국사』 ,국사편찬위원회)
차라리 난리가 나기를 바라고 참 잘 되었다고 이야기하는 정도이니 백성들이 얼마나 신음하며 살았는지 알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 거사가 조병갑이라는 일개 탐관오리에 대한 응징을 넘어서 전주 감영과 서울까지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봉준이 준비하던 농민 봉기는 즉흥적이거나 산발적인 것이 아니라 매우 치밀하고 뚜렷하게 계획된 것이었다. 단순한 분노의 표출이 아니라 ‘변혁’의 기회를 노려 봉기를 기획하고 있었음이다. 이는 저항의 성격과 수준이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졌음을 보여주는 놀라운 대목이다. 사발통문에 이름을 올린 이들이 이 봉기의 기획자이자 주도자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 와중에 고부 군수 조병갑이 익산으로 발령이 났다. 조병갑의 학정을 계기로 봉기를 준비하던 입장에서는 차질이 생긴 것이다. 그런데 이 탐관오리의 고부 사랑이 어찌나 각별하고, 당시 조선의 탐관오리 감싸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조병갑이 다시 고부 군수로 부임해오게 된다. 정치를 잘한 수령을 연임시키는 ‘포잉’이라는 조치를 이용해서 말이다. 아주 기만적인 처사였다. 지긋지긋한 조병갑 없는 세상에서 살아보나 기대했던 민심은 걷잡을 수 없이 격앙되었다.
고부 농민 봉기
1894년, 농민들은 다시 고부 관아와 전라 감영으로 찾아가 폐단을 바로잡을 것을 호소했다.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이 그 앞장에 섰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모진 매질이었다. 전라 감영에서, 고부 관아에서 연이어 매질을 당한 전창혁은 이 일이 있고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목숨을 잃게 된다.
농민들이 준 기회를 보란 듯이 차버린 부패한 권력. 이제 더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1894년 1월 10일, 전봉준은 천 명이 넘는 농민을 이끌고 봉기했다. 새벽이 되자 죽창을 든 농민들이 고부 관아로 향하는 길을 장악하고 관아를 습격했다. 눈치 빠른 조병갑은 이미 꽁무니를 뺀 이후였다.
고부 관아를 손에 넣은 농민들은 억울하게 옥에 갇혔던 이들을 풀어주고, 조병갑이 세금이라며 갈취했던 쌀을 나눠줬으며 무기고를 털어 무장했다. 봉기한 농민 중 일부는 만석보로 달려가 이를 단숨에 허물어버렸다. 자신들을 고달프게 한 탐욕과 학정의 상징을 허물어버린 것이었다.
봉기한 농민들은 잠잠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 조병갑이 관아로 복귀하고자 시도하자 농민들은 더욱 분노하였고 고부를 완전히 장악하기에 이른다. 탐관오리들이 물러간 고부 땅은 오랜만에 활기를 찾았다.
한편, 고부만이 아니라 전라도 곳곳에서 농민들의 저항이 시작되고 있었다. 사태가 예사롭지 않음을 느낀 전라 감영이 군사를 징발해서 대비하라고 할 정도였다. 전봉준은 주력부대를 고부에서 백산으로 이동시켰다. 곳곳에서 들고 일어난 농민들을 규합해 애초에 목표했던 세상을 갈아엎는 길로 나아가려는 의도였다.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조정은 조병갑을 잡아들이고 새로운 고부 군수를 임명하고 이용태를 안핵사로 보내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다. 고부 군수로 부임한 박원명은 민심을 누그러뜨리고자 애를 썼다. 자칫하다가는 일이 크게 번질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새로 부임한 군수가 유화책을 쓰자 고부의 성난 민심도 조금은 가라앉는 듯했다.
문제는 안핵사의 직함을 달고 온 이용태였다. 그는 조병갑에게 뒤지지 않는 악질적인 인간으로, 주동자 색출을 내걸고 농민들에 대한 탄압을 본격화했다. 이용태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잡아들이고 무자비하게 폭행했으며, 급기야는 살인과 강간 같은 반인륜적인 만행까지도 자행했다. ‘동학도’들을 잡는다는 명분 아래 고부뿐만 아니라 인근의 여러 지역을 나다니며 탄압을 자행하는 이용태의 악랄함에 농민들은 격분했다.
고부 농민 봉기가 갑오농민전쟁으로 전환되는 순간이었다. (계속) <저작권자 ⓒ 자주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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