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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한국을 ‘일본의 속국’으로 보는 6가지 근거

박명훈 기자 | 기사입력 2023/03/30 [11:33]

미국이 한국을 ‘일본의 속국’으로 보는 6가지 근거

박명훈 기자 | 입력 : 2023/03/30 [11:33]

가쓰라-태프트 밀약

 

미국이 한국을 ‘일본의 속국’으로 인식해온 역사는 매우 뿌리 깊다. 이를 알기 위해선 먼저 조선왕조 말기, 구한 말의 상황을 들여다봐야 한다.

 

 

외세에 침탈당한 조선왕조와 민족의 운명은 ‘바람 앞 등불’처럼 위태로웠다. 청일전쟁(1894년)과 러일전쟁(1904년)은 모두 일본이 조선을 손에 넣으려 한 전쟁이었다.

 

그런데 러일전쟁이 끝나가던 1905년 7월 29일, 일본과 미국은 이른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가쓰라 다로 일본 총리와 윌리엄 태프트 미국 전쟁부 장관(훗날 미국의 27대 대통령)이 일본 도쿄에서 만나 맺은 밀약이다.

 

밀약에는 미국이 일본의 조선 지배권을 인정하고 일본이 미국의 필리핀 지배권을 인정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가쓰라 총리는 러일전쟁이 끝난 뒤에도 대한제국을 내버려 두면 경솔하게 다른 외국과 조약이나 협정을 맺는 ‘옛날 버릇’으로 돌아갈 것이라며 확실한 조치로써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이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태프트 장관은 일본이 대한제국(조선)에 대한 종주권, 즉 외교권을 확보하는 것은 러일전쟁의 타당한 결과라고 긍정했다.

 

밀약 이후 7개월이 지난 11월 17일, 조선의 외교권이 일본에 통째로 넘어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됐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알지 못했던 고종 황제는 여러 차례 미국 정부에 도움을 요청하는 밀서를 보냈지만 돌아온 건 “미국 정부는 (조선에) 어떠한 도움을 주는 것도 고려하지 않고 있다”라는 답이었다.

 

특히 “나는 일본이 한국을 손에 넣는 것을 보고 싶다. ...(중략)... 일본은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다”라는 망언을 내놓는 등 ‘친일파’로 유명했던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 대통령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크게 환영했다. (1900년 당시 루스벨트 미 부통령이 워싱턴 주재 슈테른베르크 독일 주재 대사에게 보낸 편지 내용 중 일부)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내용을 검토한 루스벨트 대통령은 “(태프트) 장관이 가쓰라 백작과 나눈 모든 대화는 모든 면에서 절대적으로 타당하다”라며 밀약을 인정했다. 

 

루스벨트 정권 시기 가쓰라-태프트 밀약에 이어 미일 신사협정(1907년), 다카히라-루트 협정(1908년) 등 미일 간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하는 협정이 잇달아 체결된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특히 다카히라-루트 협정에서는 미일 양국이 서로 가진 외부 영토를 ‘영토적 속국들(territorial possessions)’이라고 표현했다. 미국이 조선을 ‘일본의 속국’이라고 못 박은 셈이다. (「[한미관계를 돌아본다 ③-2] 일본의 조선침략 후원자 미국 “가쓰라-태프트 밀약” -2」, 새로운 사회를 위한 연구원, 2013.6.12.)

 

일제 식민통치를 ‘합법’으로 인정한 맥아더 포고령

 

일제가 패망한 1945년 8월 15일 이후에도 조선을 일본의 속국으로 여기는 미국의 시각은 달라지지 않았다. 

 

1945년 9월 9일, 미 육군 태평양방면 육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명의로 이른바 ‘맥아더 포고령(남한 점령 태평양 주둔 미군사령관 포고 제1호)’이 발표됐다. 

 

맥아더 포고령에는 “일본 천황(일왕)의 명령에 의하고 또 그를 대표하여 일본 제국 정부의 일본 대본영이 조인한 항복 문서의 조항에 의하여 본관의 지휘하에 있는 승리에 빛나는 군대는 금일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 영토를 점령한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여기에는 미국이 조선인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은 것은 물론, ‘1910년 경술국치가 합법이고 일본의 조선 통치는 정당했다’라는 인식도 담겨 있다.

 

1945년 9월 9일 미 유력지 뉴욕타임스는 “미국이 한국인의 항구를 접수했다”라면서 “일본 경찰이 미 점령군 환영 행사에 나온 한국인 노동자 500명에게 발포해 2명이 죽었다”라고 보도했다.

 

맥아더 총사령관이 임명해 38도선 이남 한반도를 장악한 존 하지 미군정 사령관은 1945년 9월 11일 뉴욕타임스와의 대담에서 “내가 민간인들 접근 금지를 명령했다”라며 “그들이 미군 입국작전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에게서 (미군을) 보호하기 위해 일본군에게 무기 소지를 허락해야 했다”라고 발포 명령을 인정했다. 

 

미국은 일본 경찰에 항의하며 거리 행진을 한 한국인에게도 “한국의 평화를 괴롭히거나 점령군을 적대시하는 행위는 사형 선고를 포함한 강력한 처벌을 부를 것”이라고 강력히 경고했다. 해방 직후 한 달 동안 미군정의 명령에 따라 일본 경찰이 학살한 조선인은 최소 35명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미군정은 “사령관의 판단에 따라 어떤 ‘일본인들’이라도 어떤 책임 있는 자리에 기용될 수 있다”라고 했다. 미군정이 일본을 통해 조선을 통치하겠다고 선언한 셈이다. 이런 미국이 일제에 부역한 친일파들을 불러들여 행정, 군 요직 곳곳에 앉힌 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독도를 폭격장으로 사용한 일본 미군정

 

미국은 우리 땅 독도 또한 일본의 영토로 인식해왔다.

 

1947년 9월, 일본을 통치하는 미국의 연합군최고사령부(GHQ)는 독도를 미공군의 폭격연습장으로 지정했다.

 

이후 1948년 6월 8일 오전 11시, 일본 오키나와 가데나 미군기지에서 출격한 미군 폭격기 B-29가 독도 주변을 폭격했다. 조선일보는 관련 보도에서 “비행기 수 대가 출현하여 폭탄을 투하한 후 기총소사(기관총으로 근처 표적을 사격하는 것)까지 행하고 사라졌는데 어부 16명이 즉사하고 10명이 중상을 당했다”라고 전했다.

 

하지만 실제 피해는 훨씬 심각했다. 폭격에서 살아남은 장학상 씨는 “30여 척의 동력선에 한 척당 5~8명이 타고 있었으니까 150여 명 정도가 숨졌다고 보면 될 것 같다”라고 증언했다. (「미군 독도 폭격 사건」,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그 뒤에도 1950년 9월 15일, 일본에 있는 미국 극동공군사령부 소속 폭격기에 의한 2차 독도 폭격이 벌어졌다. 2차 독도 폭격 당시에는 우연히도 주변에 사람이 없어 인명 피해는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눈에 띄는 건 미국 극동공군사령부 사령부가 2차 독도 폭격을 앞두고 시마네현 어부들에게만 ‘사전 경고’를 내렸다는 점이다. 독도가 시마네현에 속했다는 일본의 주장을 인정한 것으로 풀이된다. 

 

미국의 시각에서 보면 독도에서 어업 활동을 하는 한국인 어부는 남의 바다에서 불법 조업이나 하는 사람들이니 죽어도 상관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일본말만 할 줄 아는 ‘한국군 장교’

 

한국전쟁 당시 문익환 목사, 정경모 선생은 미군정 인사들의 통역 담당을 맡았다. 훗날 문 목사와 정 선생은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한평생을 바쳤다.

 

문 목사의 삶을 다룬 『문익환 평전』에 따르면 정전협정에 파견된 한국군 장교는 일본어에 능숙했고 우리말을 전혀 하지 못했다. 서툰 영어로 대응하는 이수영 대령을 보고 북한의 장춘삼 대좌가 ‘우리말 다 잊어버렸나? 에이 개XX야!’라고 비난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에 관해 평전은 “한국 측 대표는 발표권이 없으니 미국 측 옵서버에 불과했는데 그나마 한국어도 영어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파견되었다. 그 좁은 회담장에서 가끔 터져 나오는 일본어가 한국 측 장군 목소리라는 사실은 현실의 서글픔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라고 전했다.

 

정경모 선생의 자서전 『시대의 불침번』에도 비슷한 일화가 나온다. 정전협정 진행 과정에서는 남북 간 포로 교환 관련 회의가 열렸다. 그런데 한국군 옵서버로 파견된 일본군 육군 대위 출신 유재흥 중장은 우리말을 아예 못했고, 한국군 통역장교가 일본어로 통역을 해야만 회담 내용을 이해했다고 한다. 

 

늘 곁에 통역관을 데리고 다닌 유재흥 중장은 한국전쟁 당시 사단장과 군단장을 거쳐 전쟁이 끝난 뒤에는 국방장관까지 지냈다. 

 

‘우리말을 하지 못하는 한국군 장교’는 모두 미군정이 인정한 친일파 출신이다. 이는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을 지휘한 미국이 얼마나 ‘일제 출신’을 중시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독도 언급 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1952년 4월 28일, 미국이 주도해 2차 세계대전 처리를 끝맺고 전범국 일본을 국제사회에 복귀시킨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됐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는 전범국 일본, 미국의 식민지였던 필리핀을 포함해 48개국이 서명했지만 정작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은 참가하지 못했다. 또 조약에는 ‘독도는 한국 땅’이라는 내용이 담기지 않아 일본이 독도를 두고 시비를 걸 빌미를 줬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최종안에는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포함한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 권원 및 청구를 포기한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일본은 이 최종안을 근거로 ‘한국의 독도 지배권’ 관련 내용이 없다면서 독도가 일본의 영토라는 억지 주장을 펴고 있다

 

그런데 본래 1949년 10월 13일 나온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초안에는 독도가 한국의 땅으로 명시돼 있었다. 하지만 윌리엄 시볼드 주일 정치고문(주일본 미국 임시대사)이 초안 수정에 개입하면서 내용이 바뀌었다.

 

시볼드 고문은 1949년 11월 4일 미 국무부에 보낸 비밀전문에서 “리앙쿠르드암(다케시마-독도)에 대한 재고를 권고한다”라면서 “이 섬들에 대한 일본의 소유 주장은 오래됐고 타당해 보인다”라고 주장했다. 미 국무부는 이를 받아들여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1차 개정안에서 독도가 일본의 땅이라는 언급을 넣었다. 

 

이후 독도 관련 내용은 여러 차례 수정됐다가, 최종 수정안에서는 독도에 관한 언급을 아예 빼는 것으로 결정됐다. 결과적으로 일본에 유리한 판단이었다. ([한역오]⑦9월 8일…‘독도 문제’ 품은 샌프란시스코 조약 체결, CBS 노컷브이, 2021.9.8.)

 

한일관계를 ‘이혼한 부부’에 비유한 바이든

 

지난 2016년 8월, 미국 시사지 애틀랜틱에 「지정학의 치료사(Geopolitical Therapist)」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실렸다. 당시 조 바이든 부통령은 애틀랜틱과의 대담에서 아베 신조 총리의 요청으로 자신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한일관계를 중재했다고 자랑했다.

 

이도 모자라 바이든 부통령은 스스로를 “부부를 재결합시키는 이혼 상담사 같았다”라면서 한일관계를 ‘사이가 나쁜 부부관계’에 비유했다. 이는 일제가 조선을 식민침탈했다는 역사를 안다면 결코 해서는 안 될 망언이었다. 또 일제강점기 조선 식민지배가 합법이었다는 일본의 주장을 인정한 것으로도 풀이된다.

 

바이든은 대통령이 된 뒤에도 한국을 일본의 속국처럼 여기는 듯한 행보를 보였다.

 

지난 1월 13일(미국 현지 시각) 워싱턴DC 백악관에서 미일정상회담이 진행됐다. 그런데 바이든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는 공동성명에서 “안보 및 다른 분야에서 한·미·일 간 필수적인 3국 협력을 강화할 것을 약속한다”라고 했다. 자리에 없는 한국을 끌어들여 ‘약속’을 운운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 지난 3월 21일, 김준형 전 국립외교원장은 국회에서 열린 긴급좌담회 ‘윤석열-기시다 한일정상회담 분석 및 평가’를 통해 미국의 노림수를 짚었다.

 

김 이사장은 “한국은 삼각 동맹에서 평등한 플레이어가 아니라 (미국과 일본 아래인) 하부 구조로 편입했다”라면서 “한·미·일 안보 협력의 확대는 강제동원을 포함한 과거사와 독도 영토 문제, 수출규제 등 한일 간의 중요하고 민감한 이슈들에 대한 일본의 책임론을 희석하고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기정사실로 만들어줄 것”이라고 경고했다.

 

오는 4월 26일, 미국 백악관에서 한미정상회담이 열린다. 이미 바이든 대통령은 윤석열 정권이 일본에 면죄부를 준 이른바 ‘강제동원 해법안’에 관해서도 직접 성명까지 내며 극찬한 바 있다.

 

강제동원 해법안으로 미국의 칭찬을 받은 윤석열 대통령은 앞으로 독도, 일본군 ‘위안부’, 자위대의 한반도 개입 관련 사안에서도 일본에 양보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시민들은 매주 전국 곳곳에서 “자주독립”을 외치고 있다. 한국을 일본의 속국으로 여기는 미국에서 벗어나야 진정한 자주독립과 해방도 올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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