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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산하에] 갑오농민전쟁 4. 농민군, 전쟁을 시작하다

구산하 | 기사입력 2023/04/02 [08:02]

[이 산하에] 갑오농민전쟁 4. 농민군, 전쟁을 시작하다

구산하 | 입력 : 2023/04/02 [08:02]

▲ 왼쪽부터 김개남, 손화중, 전봉준. [사진출처-동학농민혁명기념관]  


무장에서의 선언

 

농사는 땅을 갈아엎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농민들은 추운 겨울 땅을 갈아엎어 봄기운을 쏘이고 그곳에 새 생명의 씨앗을 뿌린다. 1894년 3월의 무장 기포가 이와 같았다. 농민들은 혹독했던 겨울을 갈아엎고 자기 손으로 새봄을 맞이하고자 했다.

 

고부에서의 봉기를 진압하겠다는 명분으로 자행된 안핵사 이용태의 만행은 농민들의 가슴에 불을 지른 격이었다. 전봉준은 때를 놓치지 않았다. 1894년 2월, 농민 전쟁을 호소하는 격문이 전라도 곳곳에 뿌려졌다. 각 고을에 날아든 항쟁의 불씨는 들불로 번지기 시작했고, 격문이 뿌려진 지 한 달 만에 4천 명의 농민군이 무장으로 몰려들었다. 황현의 기록에 따르면 “10여 읍이 일시에 봉기하여 열흘 정도에 수만 명이 모여들었다”라고 하니, 농민군 외에도 민중들의 합세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1894년 3월 20일, 고을이 생긴 이래 가장 형형한 눈빛이, 가장 뜨거운 함성이 무장을 가득 채웠다. 여기에는 전봉준 말고도 김개남, 손화중이 사람들을 이끌고 동참했다. 호남의 최대 접주인 손화중은 일본군이 ‘대접주 거괴’라고 불렀을 만큼 전라남·북도에 그 세와 영향력이 큰 사람이었고, 김개남 역시 호남에서 명성을 떨친 동학 지도자였다. 

 

기꺼이 반란이 되겠노라고 결심한 수만 명을 마주했으니 전봉준도, 김개남과 손화중도 말로 다 형언할 수 없는 벅참을 느꼈을 것이다. 이 자리에서 전봉준은 선언문 격인 창의문을 낭독한다. 

 

창의문에는 왜 농민들이 들고일어날 수밖에 없었는가, 왜 들고 일어나야만 하는가를 호소하고 선언하는 내용이 담겼다. 특히 부패한 탐관오리 한 명이 아니라 조선의 봉건 지배층 전체를 문제 삼고 있는데, 그동안 농민들의 봉기가 지역 탐관오리의 수탈과 학정에 맞서 산발적으로 진행되었던 것과는 뚜렷이 구별된다. 지배층이 보국안민을 추구하기는커녕 자기 몸 하나만 온전하기를 꾀한다고 비판하는 대목에서는 농민들의 나라 사랑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창의문을 한 줄, 한 줄 읽어가는 전봉준의 목소리는 절절하게, 또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그의 뜨거운 음성이 그곳에 모인 이들의 심장을 세차게 두드렸고 장내는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고부를 점령하다

 

그 달아오른 기세로 가장 먼저 진격한 곳은 고부 관아였다. 고부 관아를 습격한 것은 전주성을 치고 서울로 간다는 원래의 구상을 실현하고자 한 이유도 있었지만, 기선제압의 의도도 있었다. 조병갑, 이용태의 참혹한 만행과 그로 인해 고통받는 민중들을 그대로 두고서 전진해나갈 수는 없는 법 아니겠는가. 농민군은 고부에서 상대의 기를 완전히 꺾어 승기를 쥐고자 했다. 그 승기가 서울로 진격하는 길에 큰 힘이 되어줄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깊은 밤, 고부의 지축을 흔드는 우레와 같은 함성과 함께 달려오는 수천의 농민군. 고부 관아의 관리들은 그 기세에 완전히 압도당해 싸워볼 엄두도 못 내고 도망쳤다. 농민군의 완벽한 승리였다. 

 

고부를 완전히 장악한 농민군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옥에 갇힌 이들을 풀어주는 것이었다. 고부 봉기의 주동자로 몰려 온갖 고초를 치렀던 이들이었다. 농민들은 온전히 자기의 힘으로 자기의 동지를 되찾았다. 만신창이가 된 동지를 끌어안고, 옥문을 열어준 고마운 동지를 부둥켜안고 여러 의미의 눈물을 흘렸으리라.

 

그다음에 한 일은 무력을 보강하는 일이었다. 농민군은 관아에 있던 여러 무기를 꺼내 무장을 강화했는데, 그 수가 워낙 많아져 무기가 부족했다. 무기가 없는 농민들은 죽창을 손에 쥐었다. 

 

총창, 죽창을 손에 든 농민군은 고부 곳곳에서 ‘보국안민’의 기치에 맞게 탐관오리를 처단하고 민중들의 생활 안정을 도모했다. 그토록 바라던 농민들의 세상을 자기 손으로 만들어냈다는 자부심과 승리의 기쁨이 충천했다.

 

서면 백산, 앉으면 죽산

 

이제 농민군은 다음 목적지인 백산으로 향했다. 무장에 미처 도착하지 못했던 농민군들도 속속들이 백산으로 모여들었는데, 그 수가 엄청났다.(이때 모인 농민군의 수를 적게는 8,000명에서 많게는 3만 명까지 추산한다.) 

 

새 세상을 꿈꾸는 이들의 연대는 엄청난 힘을 만들었다. 그 위력은 단순히 머릿수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이제 이 많은 이들은 엄연한 ‘농민군’이었다. 농민군은 백산에 호남창의대장소를 설치하고 대장에 전봉준과 총관령(오늘날의 부대장 격)으로 손화중과 김개남, 총참모로 김덕명과 오시영을 추대했다. 어엿한 지휘체계와 규율을 세워 정식 군대의 면모를 갖춘 것이다. 

 

호남평야가 내려다보이는 작은 산 백산의 풍경은 장관이 따로 없었다. 흰옷을 입은 농민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면 마치 흰 산처럼 보였고, 농민들이 자리에 앉으면 손에 들린 죽창이 하늘을 찌를 기세로 솟아 푸른 산을 이루는 것 같았다. 서면 백산, 앉으면 죽산! 백의민족의 결기가 날카로운 죽창 끝에 빛나고 있었다.

 

이들은 호남창의대장소 명의로 격문을 작성해 전라도를 넘어서 전국에 궐기 소식을 알리고 동참을 호소했다. 격문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격문

우리가 의를 들어 차에 지함은 그 본의가 단단 타에 있지 아니하고 창생을 도탄의 중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다 두자 함이라.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버히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구축하자 함이다. 양반과 부호의 앞에 고통을 받는 민중들과 방백과 수령의 밑에 굴욕을 받는 소리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자라. 조금도 주저치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하여도 미치지 못하리라. (출처-東學史, 우리역사넷 재인용)

  

반봉건, 반외세! 농민군은 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기 위해 두 가지 길을 걷겠노라 선언했다. 또한 함께할 자들을 지목해 호소했는데, “고통을 받는 민중들” 뿐만 아니라 “방백과 수령의 밑에 굴욕을 받은 소리(아전)”들도 대상이었다. 수령의 밑에서 일하는 아전을 적으로 배척하기보다는 끌어들이려 한 것이다.

 

당시 농민군의 정치적 판단은 참으로 예리하고 현명하다. 당면한 시국에서 적이 누구인가를 정확히 꿰뚫어 대결 전선을 분명히 하는 것, 그 외는 포용력을 발휘해 넓은 연대·연합을 구축하는 것. 이는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싸워야 할 상대가 누구인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거나 함께 힘을 모아야 할 이를 적대시하면 그 싸움은 결코 승리할 수 없다. 

 

격문뿐만 아니라 아래의 사대명의라는 글도 발표되었는데, 농민군의 강령과도 같은 것이었다. 

 

사대명의

① 사람을 죽이지 않고 물건을 파괴하지 않는다.(不殺人不殺物).

② 충과 효를 모두 온전히 하며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케 한다.(忠孝雙全 濟世安民)

③ 일본 오랑캐를 몰아내어 없애고 왕의 정치를 깨끗이 한다.(逐滅倭夷 澄淸聖道)

④ 군대를 몰고 서울로 들어가 권세가와 귀족을 모두 없앤다.(驅兵入京 盡滅權貴) (정교, 『大韓季年史 上』, 국사편찬위원회, 1971, 우리역사넷 재인용)

 

여기에도 농민들의 애국충정의 마음이 절절히 녹아난다. 개인의 이익이나 안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온 민중을 위해서 궐기한 이들의 마음은 얼마나 맑고 깨끗한 것인가. 갑오년 농민군의 모습에서 윤석열 퇴진 촛불에 참여하는 국민분들의 모습이 보인다. 윤석열의 검찰 독재에 맞선 민주의 촛불은 매국노를 처단하는 자주독립의 촛불로 진화하여 더 거세게 불타오르고 있다. 애국이라는 숭고한 가치를 품고 떨쳐나선 이들의 삶은 시대를 초월하여 연결되어 있으며, 변치 않는 울림을 준다.

 

농민군의 격문과 사대명의는 삼천리 방방곡곡에 퍼져나갔다. 온 나라는 제각기 다른 이유로 들썩이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드디어 천지가 개벽한다는 기대감에, 또 다른 누군가는 이길 수 없는 두려움과 불안감에 들썩였다.

 

백산에서의 정비를 마친 농민군은 보국안민이 크게 박힌 대장기를 앞세우고 다음 목표인 전주성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농민군은 가는 곳마다 환영받았는데, 엄격한 규율을 적용해 높은 도덕성을 자랑했기 때문이다. 아래는 농민군이 정한 4대 약속과 12개 조 기율이다. 

 

4개 약속

1) 적을 대할 때는 언제나 칼날에 피를 묻히지 않고 이기는 것을 가장 큰 공으로 삼는다.

2) 비록 부득이 싸우더라도 절대로 인명을 상하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3) 행군할 때에는 언제나 절대로 남의 물건을 해쳐서는 안된다.

4) 효제충신한 사람이 사는 마을이 있으면, 그 주위 10리 안에는 주둔하지 않는다. (: 金允植, 『續陰晴史上』, 국사편찬위원회, 1971, 우리역사넷 재인용)

 

농민군 12개 조 기율

1. 항복하는 자는 사랑으로 대한다(降者愛待).

2. 곤궁한 자는 구제한다(困者救濟).

3. 탐학한 자는 추방한다(貪者逐之).

4. 순종하는 자에게는 경복한다(順者敬服).

5. 도주하는 자는 쫒지 않는다(走者勿追).

6. 굶주린 자는 먹인다(飢者饋之).

7. 간사하고 교활한 자는 그치게 한다(奸猾息之).

8. 빈한한 자는 진휼한다(貧者賑恤).

9. 불충한 자는 제거한다(不忠除之).

10. 거역하는 자는 효유한다(逆者曉諭).

11. 병든 자는 진찰하여 약을 준다(病者診藥).

12. 불효한 자는 형벌을 가한다(不孝刑之). (「주한일본공사관기록 (번역본) 1」,  우리역사넷 재인용)

 

백성들에게는 조금의 피해도 주지 않아야 한다는 것, 사람을 귀히 대해야 한다는 것, 고매한 인격을 소유할 것을 강조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런 군대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며, 어찌 환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전 세계 어느 나라의 혁명사를 찾아봐도 이처럼 수준 높은 정치·도덕의식을 자랑하는 경우는 없다. 참으로 자랑스러운 우리 민족이다. 이에 반해 농민군을 진압하고자 한 관군은 형편없었다. 당대 민중들이 누구의 편에서 싸웠는지는 자명하다. 무엇보다 농민군은 민중 자신의 군대이기도 했으니 말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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