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인구 5위(대략 2억 4,049만 명)이자 ‘이슬람권의 유일한 핵보유국’인 파키스탄에서 임란 칸 전 총리의 지지자들과 군부가 대립하면서 혼란이 잇따르고 있다.
지난 9일(현지 시각) 이슬라마바드 고등법원에 출석하려던 칸 전 총리가 갑작스럽게 ‘납치’됐다. 칸 전 총리가 이끄는 파키스탄정의행동당(아래 정의행동당)이 공개한 당시 영상에는 무장 병력이 법원 청사 창문을 깨고 난입해 칸 전 총리를 끌고 가는 장면이 나온다.
칸 전 총리 측은 준 군사 세력이 칸 전 총리를 납치했다며 배후에 파키스탄 군부가 있을 것으로 의심했다. 칸 전 총리는 군부가 자신을 총리직에서 쫓아내는 등 자신을 탄압하고 있다고 주장해왔다.
그렇지 않아도 칸 전 총리 지지자들은 1년이 넘게 파키스탄 전역에서 군부를 규탄하고 샤리프 총리의 퇴진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이어왔다. 군부도 파키스탄 곳곳에 군대를 배치하며 시위대에 경고해왔다.
이런 분위기에서 칸 전 총리의 납치로 시위대와 군부의 대립은 훨씬 심각해졌다.
수천여 명이 넘는 시위대는 칸 전 총리의 석방을 요구하며 파키스탄 전역에서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특히 시위대는 칸 전 총리가 이송된 군사도시 라왈핀디의 육군본부를 습격하고 샤리프 총리의 사저도 공격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이 시위대에 총을 쐈고 사상자도 나왔다. 칸 전 총리가 또다시 군사 세력에 의해 끌려간다면 파키스탄의 혼란은 더욱 격화할 것으로 보인다.
12일 이슬라마바드 고등법원은 “누구도 법원에서 체포될 수 없다”라며 “앞으로 2주간 칸 전 총리는 부패 혐의로 체포돼서는 안 된다”라며 칸 전 총리의 보석을 허가했다. 칸 전 총리를 석방하면서도 2주 뒤에는 다시 체포될 수 있다는 단서를 단 것인데, 대법원으로선 칸 전 총리와 군부 양측의 눈치를 살핀 것으로 보인다.
13일 지지자들의 환영을 받은 칸 전 총리는 “나는 100% 다시 내가 체포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나의 아내에 대한 체포영장도 발부된 상태”라고 했다.
그런데 지금 파키스탄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규모 시위, 혼란의 본질은 파키스탄이 어느 방향으로 갈 것인가를 둘러싼 대립이다. 탈미와 반서방주의를 앞장세운 칸 전 총리와 다르게 군부와 결탁한 현 샤리프 정권은 상대적으로 미국과 서방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1956년 인도에서 분리·독립한 파키스탄은 미국에 안보를 의존해왔다. 특히 미국은 냉전 시기 인도와 대립하던 파키스탄을 도왔고 파키스탄은 미국에 의존하는 외교 행보를 보여왔다. 이런 파키스탄의 친미 행보를 두고 지난 2022년 4월 29일, 한국방송(KBS) 공식 유튜브 채널 ‘박종훈의 경제한방’에 출연한 강성용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남아시아 센터장은 “파키스탄이 외교권을 포기했다”라고 지적했다.
파키스탄에서는 미국에 기댄 부토, 샤리프 등 극소수 정치 집안이 총리를 번갈아 맡았다. 여기에 군부는 자신의 말을 잘 듣는 꼭두각시 총리를 배후에서 휘두르며 정치를 쥐락펴락했다. 이런 모습을 봐온 파키스탄 국민은 정치에 염증을 느껴왔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 속 파키스탄에서 제일 인기 있는 운동 종목인 크리켓의 ‘영웅’ 칸 전 총리가 정치판에 혜성처럼 등장했다.
칸 전 총리가 대표로 이끈 정의행동당은 부정부패 척결과 새로운 파키스탄을 구호로 들었고 2018년 8월 총선에서 압승했다.
총리로 선출된 칸 전 총리는 반서방주의를 앞세워 중국, 러시아와 관계를 적극 강화하는 행보를 보였다. 정반대로 탈미 행보는 두드러졌다.
지난 2021년 미군이 아프가니스탄 철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미국은 인근인 파키스탄을 군사 거점으로 활용하려 했다. 하지만 지난 2021년 6월 20일 익스프레스트리뷴 등 파키스탄 언론에 따르면 칸 총리는 “파키스탄 영토에서 아프간을 겨냥한 어떤 군사 활동이나 기지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며 미국의 요구를 단칼에 거부했다.
이같이 그동안 파키스탄 정치에서 볼 수 없던 ‘사이다 정치’를 해온 칸 전 총리는 지난 2022년 4월 의회에서 불신임안이 통과되며 갑작스럽게 쫓겨났다. 의회는 근거로 경제난과 칸 전 총리의 부패 혐의를 들었다.
정의행동당은 칸 전 총리가 100건 이상의 소송에 휘말렸고, 이는 정치적 목적에 의해 혐의가 덧씌워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칸 전 총리는 직접 “미국의 음모에 군부가 동조했다”라면서 샤리프 전 총리의 동생 셰바즈 샤리프 총리와 미국이 공모해 자신을 쫓아냈다고 주장했다.
지난 2022년 4월 13일, 의회에서 샤리프 총리가 선출되자 칸 전 총리는 트위터에서 “‘외세(미국)가 부추긴 정권 교체’로 총리직에서 축출된 이후 첫 종교행사에 참석한다”라면서 “모두 모이기를 바란다. 파키스탄은 독립 주권국가이지 외세의 꼭두각시가 아니다”라면서 조기 총선과 집단 행동을 촉구했다. 칸 전 총리가 공유한 글에는 1억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좋아요’를 눌러 큰 호응을 보였다.
이후 칸 전 총리의 지지자들이 파키스탄 전역에서 펼치는 ‘파키스탄 역사상 최대규모’ 시위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만큼 파키스탄 국민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정치인은 처음이다.
한국에 거주하는 파키스탄 사업가인 자히드 후세인 씨는 지난 2022년 5월 7일 유튜브 채널 ‘매불쇼’에서 파키스탄의 많은 젊은이가 칸 전 총리를 지지하고 있으며 다음 총선에 칸 전 총리가 다시 나오면 압승할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칸 전 총리는 지난 2022년 11월에는 자신을 노린 괴한의 총격을 받고 간신히 살아남기도 했다. 다리에만 총 세 방을 맞고 한 달 만에 활동을 개시한 칸 전 총리는 현 정권과 군부가 자신을 노렸다고 주장했다.
오는 10월로 총선이 다가오는 가운데 칸 전 총리와 그 지지자들은 여전히 거리에서 조기 총선과 정권 퇴진을 외치고 있다. 여기에 현 샤리프 정권은 군부와 협력해 칸 전 총리를 꺾으려 하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칸 전 총리의 기세가 높아지는 모양새다.
만약 칸 전 총리가 이끄는 정의행동당이 총선에서 승리하게 된다면 파키스탄은 다시 탈미·독자 노선을 추구하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 2022년 10월 파키스탄 선거관리위원회가 칸 전 총리에게 5년간 공직 박탈을 결정해 칸 전 총리가 직접 선거에 나오기는 어려워 보인다.
파키스탄 정치에 강한 입김을 넣어온 군부는 칸 전 총리의 지지자들에게 경고하는 등 칸 전 총리에 호의적이진 않아 보인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군부가 총선 없이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려는 것 아니냐는 주장도 제기하고 있다.
‘미국이냐, 아니냐’ 갈림길에 선 파키스탄이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세계의 관심이 쏠린다. <저작권자 ⓒ 자주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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