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중국·러시아 접경과 맞닿은 곳에 러시아의 도시 블라디보스토크(대략 인구 60만 명)가 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우리나라 사람들도 코로나19 사태 이전까지 자주 찾던 유명 관광지다.
지난 5월 4일 중국 해관총서(세관)는 홈페이지에 올린 2023년 44호 공고에서 “지린성과 헤이룽장성이 내달(6월) 1일부터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항을 자국 항구처럼 사용할 수 있게 됐다”라고 밝혔다.
송쿠이 중국-러시아 현대지역경제연구소 소장은 중국 관영 환구시보 영문판 글로벌타임스에 쓴 기고에서 “블라디보스토크 항만으로 중국과 러시아는 항구 건설과 물류 분야에서 더 많은 협력을 할 수 있고 중국 동북부의 경제 활력과 러시아의 극동 개발을 더욱 강화할 수 있다”라고 짚었다.
중국 지린성은 사방이 내륙으로 막혀 있어 물자를 옮기려면 약 1,000킬로미터가 떨어진 황해 쪽 다롄항으로 멀리 돌아가야 했다. 그랬는데 앞으로는 200킬로미터 떨어진 블라디보스토크 항구를 통한 ‘물류 혁신’이 가능해졌다.
그런데 러시아가 중국에 블라디보스토크 항구를 이용하게 해줬다는 소식에 전 세계가 놀랐다. 원래 중국 땅이었던 블라디보스토크를 러시아가 빼앗은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19세기 들어 제정 러시아는 동쪽으로 영토를 확장해 갔고 청나라 국경까지 닿았다. 러시아는 무력으로 청나라를 압박했고 1858년 아이훈 조약,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태평양과 맞닿은 중국 동북부 땅을 건네받았다. 러시아는 부동항(얼지 않는 항구)인 이곳에 블라디보스토크(동방을 정복하라)라는 이름을 붙여 전진 기지로 삼았다.
그랬던 러시아가 163년 전 중국에서 빼앗은 권리의 일정 부분(항만 사용권)을 중국에 돌려준 셈이다. 이를 두고 서방 주요 언론은 ‘러시아가 중국에 경제적으로 종속됐다’고 주장했지만, 러시아는 어디까지나 중국의 무관세 통관을 허용했을 뿐 블라디보스토크 항구 자체를 중국에 넘기거나 빌려준 것은 아니다.
과거 중국과 소련은 블라디보스토크와 주변 일대를 두고 영유권 분쟁과 기싸움을 벌인 적도 있다. 러시아의 관점에서 볼 때 중국과 상호협력을 위해 ‘결단’을 내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앞서 지난해 12월, 러시아 대통령을 지낸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은 중국을 찾아 러시아 극동 지역의 상당 부분을 초대형 특구로 개방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중국 측도 1,600억 달러(대략 212조 원)에 이르는 막대한 투자를 하겠다고 화답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 극동 지역을 대표하는 최대 도시다. 극동 지역의 면적(700만 제곱킬로미터)은 인도의 2배가 넘고 석유, 가스, 석탄, 목재 등 자원도 풍부하다. 다만 인구는 800만 명 남짓으로 면적에 비해 적은 편이다. 중러 양국은 블라디보스크를 중심으로 중국 둥베이, 러시아 극동 지역 일대를 발전시키려는 구상에 합의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지난 3월 21일(러시아 현지 시각) 중러 정상이 모스크바에서 발표한 「2030년 중러 경제협력 중점 방향 발전 계획에 관한 공동성명」에 중국이 블라디보스토크 항구를 사용할 수 있는 근거가 담겼다.
공동성명에는 “철도·도로·항공·수운·해운 등을 통한 양국 간 물적·인적 교류가 원활히 진행되도록 한다. 호혜 정신에 입각해 양국의 국경을 넘나드는 운송 잠재력을 발산시키고 병목 현상을 우선적으로 해결한다”라면서 “또한 단계적으로 중·러 변경 기반 시설, 특히 중점 통상구 건설을 완비해 통관·검역 효율을 높인다”라고 나와 있다.
중러 양국이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협력에 나서게 된 건 알고 보면 미국의 대외정책, 한반도의 정세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러시아는 지난 2018년 판문점선언을 계기로 한반도와 가스관, 철도 연결 등을 통한 극동 개발에 공을 들였으나 미국이 북미 하노이 정상회담 당시 합의를 결렬시키면서 물거품이 됐다. 중국 역시 북한의 라진항을 통해 태평양으로 진출하려고 했으나 러시아와 같은 이유로 무산됐다.
게다가 중러 양국은 미국이 주도하는 대중국 봉쇄망, 대러 제재에 맞닥뜨렸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이 있었다. 미국의 압박을 받아온 중러 양국이 이제는 블라디보스토크를 발판으로 전례 없는 협력에 나선 셈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미국이 주도한 히로시마 G7(주요 7개국) 정상회의 폐막 직후 러시아 중요 인사의 방중도 잇따랐다.
러시아 타스통신에 따르면 지난 22일 니콜라이 파트루셰프 국가안보위원회 서기는 중국 천원칭 당 중앙정법위원회 서기와 안보회담에서 “중국과 관계를 심화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러시아의 전략적 노선”이라면서 “러시아는 모든 분야에서 중국과의 협력을 강화하고 상호 지원을 늘릴 것”이라고 밝혔다.
다음날인 23일에는 미하일 미슈스틴 러시아 총리가 미국의 제재를 받는 인사들을 포함한 1,200여 명의 대규모 경제 사절단을 이끌고 베이징을 찾았다.
미슈스틴 총리는 리창 중국 국무원 총리와 회담에서 미국을 겨눠 “서방 집단의 선정적인 압력에 영향을 받아 러시아와 중국 관계는 전례 없이 높은 수준에 있다”라면서 “러시아와 중국 국민은 그들의 역사와 풍부한 문화와 전통을 소중히 여기며 우리의 문화, 교류, 소통의 발전을 지지한다”라고 강조했다.
시기상 중러 양국이 블라디보스토크를 발판으로 한 양국 협력을 강조하는 동시에, 미국을 견제하며 만남의 의미를 극대화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중러 양국이 ‘블라디보스토크 협력’으로 얻게 될 구체적인 이익은 무엇이 있을까.
이와 관련해 지난 5월 19일, 박종수 전 대통령 직속 북방경제협력위원회 위원장은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에서 “이번 합의는 중국과 러시아의 윈윈(상부상조)”이라며 중러 양국이 얻은 이익을 각각 세 가지로 꼽았다.
중국이 얻은 이익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중국이 블라디보스토크 항구를 통해 태평양으로 진출하게 되면서 일대일로가 이어졌고 유럽으로 통하는 북극항로로 진출하는 입지적 조건을 갖추게 됐다.
두 번째, 그동안 중국에서 개발이 뒤떨어지고 바다가 멀었던 둥베이 3성 지역이 블라디보스토크 항구를 통해 재개발을 추진할 수 있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
세 번째, 대만과 가까운 남태평양 지역에 이어 북태평양 지역을 둘러싼 패권 싸움도 시작됐다. 중국이 북태평양에서 러시아와 함께 군사력을 강화해 미국과 일본에 대응할 수 있게 됐다.
러시아가 얻은 이익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지난 2011년부터 시작했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차질을 빚었던 러시아의 극동 개발이 중국을 유치하면서 탄력을 받게 됐다.
두 번째, 러시아가 극동 지역과 가까운 북태평양 지역에서 군사력을 강화해 왔는데 여기에 중국이 우군으로 합류하게 됐다.
세 번째, 러시아가 중국과의 협력을 통해 북극항로에서부터 남태평양까지 공중, 해상, 해저를 통해 자유자재로 오갈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다.
박 전 위원장은 “사실 지금 미국이 중국과 러시아를 서로 결합시켜주는 역할을 한 것"이라며 ”냉전 당시 때도 (중러 양국이) 이렇게 밀착된 적이 없는데 (지금은) 사실상 동맹 관계”라고 분석했다.
중국과 러시아를 동시에 적대한 미국의 전략이 오히려 ‘중러관계 강화를 통한 반미 연대’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오게 됐음을 꼬집은 셈이다.
블라디보스토크가 한반도, 중국, 러시아와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 이곳을 중심으로 눈에 띄는 북·중·러 간 경제, 군사 협력이 오갈 가능성도 있다.
앞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지 전 세계의 이목이 쏠린다. <저작권자 ⓒ 자주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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