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11월 18일은 이창기 기자의 5주기입니다. 이창기 기자를 추억하는 사람들이 보내온 추모 글과 시를 소개합니다. 다섯 번째는 노래패 ‘우리나라’의 가수 백자 씨의 글입니다. (편집자 주)
가을 단풍은 더욱 짙어가네 -이창기 동지를 추억하며
형을 처음 만난 것은 1998년이었습니다.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출신 문예 일꾼들이 모여 있던 ‘문학예술청년공동체’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말로만 듣던 ‘홍치산 시인’을 만난 터라 무척 설렜습니다. 형은 첫 만남부터 인상 깊었습니다. 선이 뚜렷한 얼굴만큼이나 성격이 시원시원하고 열정적이었습니다. 군대를 전역하고 어떤 삶을 살아야 하나 고민하는 저에게 형은 우리 민족의 승리를 신명에 넘쳐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이야기에 빠져들어서 시간이 이렇게 흘렀나 싶을 정도로 밤은 깊어갔고, 그러면 자신의 자가용으로 집까지 바래다주곤 했습니다. 그 차 안에서도 늘 주제는 조국이었고 민중이었습니다. 서로 이야기에 빠져 간혹 길을 지나치기도 했습니다. 아무래도 좋았습니다. 형의 얘기에 다시 가슴이 뛰고 몸에 피가 도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다 하루는 “얼마 전에 한 친구를 만났는데 참 좋더라”라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지금 바로 찾아가자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좀 당황했습니다. 밤도 깊었고, 거리도 멀었습니다. 결국 형의 차를 타고 그 친구 동네로 갔습니다. 그리고 또 모여 앉아서 조국의 미래에 대해 한참을 얘기 나눴습니다. 형의 그 결단력이 없었다면 ‘노래패 우리나라’는 없었을 것입니다. 형은 그야말로 물심양면으로 저희를 도와줬습니다. 나중에 형이 하늘로 가고 형수님께 들어보니 정말 큰돈을 ‘우리나라’에 주셨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당시엔 형도 자주민보를 만든다고 여유가 없었을 때입니다. 심지어 당신 집에 자주민보 사무실을 차릴 정도였습니다. 정말 가족의 고생이 보통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도 저희를 후원하셨던 것입니다. 그 돈으로 사무실도 구하고 1집도 냈습니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른 어느 날 형이 국정원에 끌려갔습니다. 소위 간첩 혐의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지긋지긋한 간첩 타령의 그물에 형이 걸린 것입니다. 소식을 듣고 곧장 국정원 앞으로 갔습니다. 그때 국정원은 서울 인근에 새 건물을 지어 이사한 상태였습니다. 새 건물이 번쩍번쩍하더군요. 주변 풍경도 좋았습니다. 가을 단풍이 너무 아름답게 펼쳐졌습니다. 이런 아름다운 광경 저 안에 형이 두 손 묶인 채 간첩 혐의로 끌려가 있다고 생각을 하니 너무 역설적이었습니다. 아름다운 가을이 구타당하고 투옥된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쓴 노래가 「가을 단풍」입니다. 아무리 가둬도 형의 신념은 절대 가둘 수 없으리라는 생각, 형의 조국사랑은 저 가을 단풍처럼 더욱 짙어갈 것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물론 형은 절대 굴하지 않았습니다. 늘 우리의 앞에서 펄럭이는 깃발이었습니다.
시인 홍치산은 어떻게 기자 이창기가 되었을까? 이것은 형이 떠나고 저를 따라다니던 질문입니다. 주변 분들에게 여쭤보기도 했습니다. 형은 자신의 펜으로 이 땅의 적폐를 처단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가장 날카로운 방법을 강구했던 것 같습니다. 20대 때는 시인으로, 30~40대 때는 기자로! 그런데 형은 객관을 유지하는 기자가 아니었습니다. 인터뷰를 하다가 같이 분노하고 웃고 울었습니다. 김철민 감독과 함께 작업한 한국전쟁 당시의 민간인 학살을 다룬 다큐 영화 「잊을 수 없는 원한」을 보면 그분들의 원한에 공감하는 것을 넘어서서 형 자신이 그분들과 일체화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잊을 수 없는 원한」 영상 보기 - https://youtu.be/mBE9G5oYSVI?si=0Je4Pzt924DyFIzf)
통일행사 등에 참가했을 때는 카메라를 들고 취재하러 왔다가도 춤판이 벌어지면 흥분을 참지 못하고 뛰어들어 춤을 췄습니다. 한 행사에서 원로 선생님과 함께 춤을 추는 모습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습니다.
온몸을 다해 조국을 사랑한 형은 그만큼 몸이 나빠져 갔습니다. 밤을 새워 기사를 쓰고 그 기사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여기저기 통화를 하고 기사를 올려놓고서야 잠이 들었습니다. 형의 분석 기사들은 기사를 넘어서서 적폐들에 내리는 철추였고, 민중들에게 드리는 헌사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북미관계에서 어떤 문제가 생기면 형의 기사를 먼저 찾았고, 기사를 읽은 다음에야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 할 일을 찾았습니다. 그런 날이 많아질수록 형의 건강은 더욱 나빠졌습니다.
조국통일의 열기가 가장 뜨겁게 차올랐던 2018년, 결국 형은 몸져누웠습니다. 그러면서도 그해 가을 평양정상회담을 누구보다 기뻐했고, 거기에서 합의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서울방문을 누구보다 고대했습니다. 미국이 워킹그룹이라는 족쇄로 다시 통일을 묶으려고 하자 방북취재 의사를 밝히며 “나의 이 마지막 몸뚱어리를 남김없이 민족의 평화적 통일에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라고 호소했습니다. 그리고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서울 방문을 보면 내가 일어날 수 있을 것 같다”라며 서울정상회담을 소원하고 통일을 소망했습니다.
형이 누워있는 병실 밖으론 가을도 저물어 가고 있었습니다. 한 번이라도 더 형을 보고 싶어 하는 동지들이 병원으로 찾아왔습니다. 제가 있는 동안 한국대학생진보연합(대진연) 학생들이 찾아왔습니다. 대진연 학생들은 최근 자신들의 투쟁 모습을 사진으로 뽑아 와서 창가에 세웠습니다. 형은 기뻐했습니다. 얼굴에 생기가 돌았습니다. 지갑을 꺼내더니 돈이 이것밖에 남아있지 않다고 아쉬워하며 5만 원 한 장을 내밀었습니다. 그것은 형이 이 지상에서 행한 최후의 후원이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학생들에게 남긴 당부이자 사랑이며 투쟁의 계주봉이었는지 모릅니다.
누구보다 미래를 사랑했고, 누구보다 청년을 사랑했고, 누구보다 선생님들을 존경했고, 누구보다 어린 아이들을 사랑했던 사람. 시인이자 기자이며 투사였던 사람. 늘 열정에 넘쳐있었고, 그 열정으로 시를 토해냈으며 마치 미래에서 살다 온 것처럼 승리를 확신하고 그 소식을 기사로 전하던 사람.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털어 남들에게 쥐여 주고서도 더 줄 것이 없어 아쉬워하던 사람. 곁에 서면 물들어 번지게 하던 사람. 홍치산 시인, 이창기 기자. 가을 단풍이 짙어 갈수록 형이 그립습니다.
진보통일운동가 민족언론인 이창기 동지 5주기 추모행사 추모위원 모집 ◆ 기간: 11월 17일까지 ◆ 추모위원비: 2만 원 이상 (계좌: 우리은행 1002-240-084597 예금주-김영란) ◆ 추모위원 가입 링크: https://bit.ly/이창기추모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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