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1월 29일 자(인터넷 신문 기준) 한 기사의 제목이다. 제목을 보면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인텔과 TSMC’가 보조금 지원의 ‘유력 후보’라니 미국에 반도체 공장을 짓는 기업들 모두에게 보조금을 주는 게 아니었나?
미국은 반도체지원법을 통해 미국 내 반도체 생산시설을 짓는 기업에 보조금(전체 527억 달러 규모. 한화로 약 69조 원)을 지원하고, 세액공제를 해주기로 했다. 반도체 보조금을 미끼로 삼성전자를 포함해 반도체 기업을 자국 내로 끌어들인 것이다.
하지만 반도체지원법은 반도체 기업들에게 ‘당근’만을 선사하지 않는다. 미국으로부터 보조금을 받으면 공장에서 나오는 수익을 미국과 공유해야 하며, 공장 운영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나아가 향후 10년간 중국 같은 ‘우려국가’에 반도체 설비를 지을 수 없다. 보조금을 지원받는 대신 막대한 비용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결국 바이든 정부가 보조금을 미끼로 미국 내 투자를 유치한 것이 아니라 중국과의 관계를 단절하라며 팔을 비틀어 미국에 공장을 짓게 한 것이다.
관세청에 따르면 2023년 12월 기준 한국의 반도체 수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31.1%다. 홍콩(22.0%)까지 포함하면 53%가량이 중국으로의 수출이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과의 관계를 끊고 미국을 중심으로 한 반도체 공급망에 들어오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이나 다름없다.
뒤이어 다른 질문이 떠 오른다. “그렇다면 삼성전자는?”
위 아시아경제 기사의 부제목 중 하나는 “3월 승인 전망...삼성도 유력 후보”이다. 삼성전자는 텍사스 테일러와 오스틴에 각각 1,926억 달러와 245억 달러를 투여해 공장을 짓기로 했고, SK하이닉스 역시 150억 달러를 미국에 투자하기로 했다.
기사 제목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한국 기업들은 아직 미국으로부터 보조금을 받지 못했다. 더군다나 기사의 주 제목에 인텔과 TSMC가 올라 있고, 보조 제목에 삼성전자가 거론되는 걸 보니 삼성전자 순서가 맨 앞쪽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170개 이상의 업체들이 반도체법에 따른 보조금을 신청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고, 보조금을 받은 기업은 영국 방산업체 BAE시스템스와 미국 반도체 업체 마이크로칩 테크놀로지 두 곳뿐이다. 책정한 예산 대비 보조금 신청 기업이 많은 것이다.
자국 내 재정 여력도 고려하지 않고 정치적 목적을 위해 앞뒤 가리지 않고 미국에 투자를 강제한 결과다. 지금까지의 상황만 보면 미국이 전 세계를 상대로 일종의 사기를 친 것이나 다름없다.
더군다나 보조금 지원에도 미국 우선주의가 작동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 반도체 기업들은 “미국 기업이 더 많은 지원을 받아야 한다”라며 정부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선거를 앞둔 바이든 정부 입장에서는 미국 기업들의 요구를 무시하긴 힘들다.
작년 11월 초 미국 정부가 군사용 반도체 생산을 위해 인텔에 최대 40억 달러의 보조금을 선지급할 것이라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전체 보조금 지원 예산이 527억 달러이고 170여 기업들이 신청했으면 단순 평균하면 한 기업당 3억 달러가 지원된다. 투자 규모들이 다르겠지만 인텔이 40억 달러를 가져가면 나머지 기업들의 보조금 액수가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로 인해 한국 기업들은 당장 보조금을 받지 못하고 있고, 이중 삼중의 피해를 보고 있다.
삼성전자에서 파운드리 사업을 총괄하는 최시영 사장은 작년 12월 미국에서 열린 국제전자소자확회(IEDM) 기조연설에서 “테일러 공장에서 내년 하반기 안에 첫 번째 웨이퍼가 나오고 2025년부터 대량 양산을 시작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삼성전자의 테일러 공장은 애초 2024년 하반기 양산을 목표로 하고 있었는데, 가동 시기를 연기한 것이다.
반도체 산업의 특성상 투자 이후 최종 제품이 생산되기까지 3~4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 보조금 지연으로 투자 시기와 공장 가동 시기가 밀릴 경우 그 기간 동안의 시장 변화에 대처하기 힘들어진다. 그 공장에서 양산하기로 한 제품의 활용도가 떨어질 수도 있다. 그렇다고 기업 입장에서 당장 투자에서 발을 뺄 수도 없는 상황이다.
현대자동차와 배터리 업계 역시 난처한 상황을 호소하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1월 18일 미국 정부에 제출한 의견서에서 특정 핵심광물의 경우 전기차 배터리 공급망에서 외국우려기업(FEOC)을 즉각적으로 제거하는 게 ‘비현실적’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현대차 측은 “중국이 2022년 전 세계 구형(spherical) 흑연의 100%와 합성 흑연의 69%를 정제·생산했다”라며 “다른 국가들이 단기에 중국을 대체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라고 지적했다. 중국의 흑연을 사용하지 않고 당장 미국이 제시한 기준에 맞는 전기차를 생산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미국 정부는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을 통해 전기차 보조금을 받으려면 배터리 부품은 올해부터, 배터리에 들어가는 핵심광물은 2025년부터 미국이 지정한 외국우려기업에서 조달하면 안 된다는 규정을 둔 바 있다. 작년 12월 1일 발표한 세부 규정안에서는 외국우려기업을 사실상 중국에 있는 모든 기업으로 규정했다.
배터리 업계 역시 마찬가지다. LG에너지솔루션과 SK온, 삼성SDI 등 국내 배터리 3사와 한국배터리산업협회도 외국우려기업 규정과 관련한 어려움을 미 정부에 전달했다.
LG에너지솔루션은 배터리에 들어가는 핵심광물 총가치의 10% 미만을 차지하는 저가치 재료(코발트, 텅스텐, 흑연 등)는 외국우려기업 규정에서 예외로 해달라고 제안했고, SK온은 중국산 흑연을 대체할 공급망을 구축하려면 최소 3∼4년이 걸린다고 어려움을 호소했다.
미국의 자국 중심적, 막무가내식 세계 공급망 재편 속에서 한국 기업들의 피해는 쌓여만 간다. <저작권자 ⓒ 자주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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