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전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자신과 불화설이 나온 발레리 잘루즈니 우크라이나군 총사령관을 8일(현지 시각) 해임했다. 잘루즈니 전 총사령관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2022년 2월부터 최근까지 총사령관을 맡았다.
이날 젤렌스키 대통령은 성명에서 “잘루즈니 총사령관을 만나 2년 동안 우크라이나를 지켜준 그에게 감사를 표하고 해임을 통보했다”라면서 “우크라이나군이 요구하는 혁신과, 누가 군의 새로운 지휘부로 참여할 수 있을지 논의했다”라고 밝혔다.
또 “잘루즈니 장군에게 팀의 일원으로 남아 달라고 요청했다”라면서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젤렌스키 대통령은 잘루즈니 전 총사령관이 우크라이나군 내부에서 어떤 직책을 맡게 될지는 밝히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 젤렌스키 대통령이 잘루즈니 전 총사령관과의 불화설을 사실상 인정한 것 아니냐는 평가가 나온다.
성명에서 젤렌스키 대통령은 “오늘부터 새로운 지휘부가 우크라이나군 지휘를 맡게 될 것”이라며 “시르스키 중장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라고 했다. 올렉산드르 시르스키 신임 우크라이나군 총사령관은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방어를 맡은 육군 총사령관 출신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군사 지휘부뿐만 아니라 국가 지도부의 대대적인 개편을 계획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왜 이 시점에서 젤렌스키 대통령이 우크라이나군의 총사령관을 갈아치우고, 국가 지도부의 대대적인 개편을 언급한 것인지 의문이 제기된다. 안 그래도 미국과 서방 각국 정치권이 별 성과가 없는 우크라이나군에 지원하는 걸 마뜩잖아하는 상황에서, 총사령관과 국가 지도부를 바꾸게 되면 러시아군에 패착만 노출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미국 유력 언론은 잘루즈니 전 총사령관의 해임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뉴욕타임스는 “전쟁 중 군 고위 지휘부를 해임하는 결정은 작전계획 차질 같은 위험을 초래한다”라면서 “우크라이나에는 일반 참모직을 맡을 고위 지휘관이 없다”라고 꼬집었다.
월스트리트저널도 “잘루즈니 장군이 젤렌스키 대통령의 잠재적인 경쟁자로 불리지만, 본인은 공개적으로 정치적 야망을 표명한 적은 없다”라며 “이번 조치는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상당한 정치적 위험”이라고 진단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왜 잘루즈니 총사령관을 해임했는지에 관해서는 두 가지 분석을 제기해 볼 수 있을 듯하다.
첫 번째는 잘루즈니 전 총사령관이 러시아와의 전쟁 지속을 강조하는 젤렌스키 대통령과 생각을 달리한 점이다.
앞서 지난해 11월 11일 잘루즈니 당시 총사령관은 영국 매체 이코노미스트와 대담에서 “우리(우크라이나군)는 (러시아군과 전쟁에서) 교착 상태”라고 평가하면서 “결코 아름다운 돌파구는 없을 가능성이 높다”라며 우크라이나의 승리 가능성을 낮게 봤다.
이후 젤렌스키 대통령은 잘루즈니의 핵심 참모 중 한 명을 해임했고 12월 17일에는 잘루즈니의 집무실에서 도청 장치가 발견됐다. 이와 관련해 젤렌스키 대통령이 개입한 것 아니냐는 추측이 잇따른 바 있다.
또한 일부에서는 우크라이나가 불리하자 잘루즈니 전 총사령관이 젤렌스키 대통령 몰래 미국, 서방 각국과 휴전 논의를 했다는 관측도 제기했다. 이는 전쟁 지속을 강조하는 젤렌스키 대통령의 기조와는 딴판이다.
앞서 1월 30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 등은 우크라이나 소식통을 인용해 1월 29일 젤렌스키 대통령이 잘루즈니 총사령관에게 군사 고문을 맡아달라며 사퇴를 요구했지만, 잘루즈니가 이를 거부했다고 보도했다. 그러자 젤렌스키 대통령이 “고문 역할을 맡는 것과 관계없이 총사령관직에선 무조건 해임될 것”이라고 통보했다고 한다.
1월 30일 러시아 관영 스푸트니크통신은 우크라이나의 올렉시 곤차렌코 국회의원을 인용해 젤렌스키 대통령이 잘루즈니 전 총사령관에게 사퇴를 권했다고 보도했다. 잘루즈니 전 총사령관은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영국 주재 우크라이나 대사 또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보좌관직을 제안 받았지만 모두 거부했다고 한다.
2월 9일 우크라이나 매체 ‘키이우 인디펜던트’는 “젤렌스키 대통령이 시르스키를 새 총사령관으로 지목한 배경으로 “시르스키의 임명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라면서 “(시르스키) 장군은 잘루즈니를 대신할 유력한 후보 중 한 명으로 지목됐는데, 특히 그가 대통령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라고 짚었다.
그러면서 “시르스키는 앞으로 며칠 안에 군대의 새로운 지도부를 발표할 것으로 예상된다”라고 했다.
이런 측면에서 젤렌스키 대통령이 자신과 가까운 시르스키 총사령관 임명을 통해 러시아와 무리하게 전쟁을 계속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해 볼 수 있다.
미국 매체 폴리티코는 2월 8일 「잘루즈니가 나오고 ‘정육점’이 들어왔다」 제목의 기사에서 시르스키 총사령관에게는 “도살자”라는 평가가 있다며 우크라이나군 내부의 분위기를 전했다. 시르스키 총사령관이 형세가 불리한 러시아군과의 바흐무트 전투 등에 부하들을 억지로 떠밀어 죽게 했다는 것이다.
폴리티코에 익명을 요청한 우크라이나 군인들은 시르스키 총사령관 임명을 두고 “매우 나쁜 결정”, “우크라이나군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 같지 않다”, “최전선에 있는 부하들을 위험에 빠트린다” 등의 평가를 했다.
두 번째로는 젤렌스키 대통령이 정치적 경쟁자로 떠오른 잘루즈니 총사령관에게 부담을 느꼈다는 분석이다.
지난해 12월 키이우 국제사회학 연구소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 영웅’으로 떠오른 잘루즈니 전 총사령관의 신뢰도는 88%였지만, 현직인 젤렌스키 대통령의 신뢰도는 62%에 그쳤다. 이와 관련해 젤렌스키 대통령이 정치적 위기를 느끼고 잘루즈니 전 총사령관을 해임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다. 의혹을 뒷받침해 주는 정황도 있다.
뉴욕타임스는 “키이우의 야당 인사들은 ‘젤렌스키 대통령이 잘루즈니 장군을 해임하려는 것은 정치적 요인 때문’이라고 말했다’”라고 보도했다.
원래대로라면 오는 3월 우크라이나에서 대선이 예정돼 있지만, 우크라이나 의회인 ‘우크라이나 최고 라다’는 최근 계엄령을 연장해 대선을 연기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이끄는 집권 여당 ‘인민의 종’이 다수인 라다는 2월 6일 오는 5월 13일까지 계엄령 기간을 늘리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우크라이나 헌법에 따르면 계엄령 아래에서는 대선을 치를 수 없다. 이에 관해 일부에서는 젤렌스키 대통령이 잘루즈니 전 총사령관의 대선 출마를 막으려 계엄령을 유지한 것이란 의혹을 제기한다.
두 가지 분석으로 본다면 젤렌스키 대통령은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무리하게 잘루즈니 전 총사령관을 해임했다고 추정할 수 있을 듯하다.
잘루즈니 전 총사령관의 해임은 안팎으로 위기에 몰린 젤렌스키 정권의 처지를 보여준 것이란 평가가 나온다. <저작권자 ⓒ 자주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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