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봄, 전세는 다시 역전된다. 미군과 국방군이 3월 15일 서울을 다시 탈환한다.
3월 16일 이후 중국지원군 제1제대의 각 군은 38선 이북으로 물러나 휴식을 취하고, 대신 제2제대의 각 군은 미리 설치한 진지에서 유엔군과 치열한 격전을 벌인다.
3월 23일, 미군과 국방군은 고양, 의정부, 가평, 춘천 선을 점령하며, 38선 이남을 대부분 되찾은 다음 38선 이북을 공격한다.
4월 10일 유엔군은 이른바 ‘캔자스선’이라 불리는 방어진지를 구축한다. 서쪽의 임진강에서부터 동쪽의 양양을 잇는 선이었다. 이후 4월 12일 공격의 중점을 소위 ‘철의 삼각지’라는 철원, 평강, 김화 지구로 돌린다.
반면 중국지원군은 줄곧 미군의 ‘자석전술’을 ‘기동방어’로 맞서면서 대치했다. 미군이 조금 진격하면 중국지원군은 조금 물러나고, 상대가 오지 않으면 물러서지 않았다.
유엔군 서울 재수복 후, 휴전 논의와 맥아더 전격 해임
홍학지는 전쟁회고록 『중국이 본 한국전쟁』에서 당시 작전을 설명했다.
“상대는 계속해서 ‘주력은 밀집형으로’, ‘고르게 진격하는’ 등 이른바 ‘자석전술’로 점차 밀어붙이면서 기계화 장비와 우세한 화력에 의존해 아군에 대해 소모전을 벌였다. 아군은 넓은 정면에서 중요지점을 정해 방어에 나서면서 단계적으로 준비 태세를 갖추었다. 병력 배치는 ‘점으로써 면을 제압한다’(이점제면(以點制面))는 원칙, ‘병력은 전방은 적고 후방은 많이’(전경후중(前輕後重)), ‘화력은 전방에 집중한다’(전중후경(前重後輕))는 원칙에 따라 저격과 반격, 매복, 습격 등 각종 수단을 총동원해 진지마다 상대의 공격을 막거나 상대를 대량 살상했다.”
유엔군의 반격으로 서울을 회복한 미국은, 정전회담을 호소하는 대통령 성명을 준비한다.
소련·러시아사 및 남북한 현대사 등에 정통한 도쿄대 명예교수인 와다 하루키의 『한국전쟁』(창작과비평사, 1999) 내용이다.
“애치슨이 1951년 3월 23일 트루먼에게 건네준 성명안은 ‘대한민국과 유엔에 대해 범해진 침략’을 격퇴하는 일이 완수되었다고 하면서, 유엔 안보이사회의 1950년 6월 27일 결의로 되돌아가 지역의 평화와 안전을 회복하는 문제가 남아있다. 유엔군 사령부는 전투를 중지할 교섭에 들어갈 용의가 있다고 하였다. 바로 그 다음날 한국의 전선 시찰에 나선 매카서(맥아더)는 비행장에서 중국의 연안지역과 내륙부에 대한 폭격을 주장하는 위협적인 성명을 발표하였다. (중략) 격노한 트루먼은 4월 11일 매카서 해임을 발표한다. 대통령은 한국에 대한 방침이 아시아의 대립을 ‘제3차 세계대전’으로 발전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며, 미국은 정전하여 재침략 방지책을 취함으로써 평화를 달성하기를 추구한다고 말했다. 매카서 후임에는 리지웨이가 임명되었다.”
미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는 상관에 대해 오만불손(傲慢不遜)할 뿐 아니라 전쟁광이었다.
맥아더는 1950년 6월 29일 오후, 미 공군 제3폭격전대의 평양비행장 폭격을 대통령 재가 없이 명령했다.
아무리 서울이 함락되고 전황(戰況)이 엄중하여 제공권 장악의 중요성이 절실하였다고 해도, 맥아더의 행위는 절차와 계통을 무시한 하극상이었다. 특히 전쟁 적대국 수도의 비행장을 폭격하는데, 대통령의 허가 없이 전구 사령관인 맥아더가 즉흥적인 결정을 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도를 넘는 월권행위였다.
중국지원군 당위원회 개최와 2개 병단 병력 도착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맥아더는 중국 본토 확전과 핵 사용 하극상을 저지른다. 전쟁광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성명이었다.
이종석 저서 『북한-중국관계(1945~2000)』(도서출판 중심, 2001)에 나온 맥아더의 하극상이다.
“중공군 참전 이후 미국 내에는 휴전과 확전의 두 가지 주장이 대립하고 있었다. 현지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를 중심으로 한 군부는 핵무기 사용과 중국 본토로의 확전 등 대중국 강경책을 주문하고 있었다. (중략) 그러나 1951년 3월 24일 맥아더가 모든 관리들에게 정책 결정 사항에 대해 어떠한 공식 성명도 발표하지 못하도록 한 트루먼의 명령을 어기고 확전 성명을 발표하자, 이를 계기로 트루먼은 맥아더를 해임시키고 후임에 리지웨이 장군을 임명했다. 중국이나 소련에게 맥아더의 해임은 미국이 핵무기를 사용하거나 중국 본토를 공격할 의사가 없으며 휴전 용의가 있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실제로 미국의 협상파는 유엔군이 1951년 초 38선까지의 북진에 성공함으로써 휴전을 위한 명분을 얻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정세 속에 4월 6일 팽덕회는 강원도 김화의 금광 굴에서 지원군 당위원회를 열었다.
홍학지의 『중국이 본 한국전쟁』에서, 팽덕회 사령관이 지난 4차례의 전역에 대한 주제 발표 내용이다.
“그는 제4차 전역의 교훈을 두 가지 측면에서 분석했다. 그는 군사상의 측면에서 중국인민지원군이 현대화 장비를 갖춘 상대와 맞서 고정방어를 한다는 것은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며 따라서 기동방어가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지적했다. 그는 또 정치적 측면에서 항미원조전쟁은 장기적으로 치러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38선을 돌파해서 서울을 점령한다고 해서 순풍에 돛 단 듯이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것은 일종의 환상이라는 점을 일깨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곧 60만 명의 병력을 보충받아 순환 참전이 가능하게 하고, 지원군 장비의 개선이라든지 보급 기구의 강화, 또 공군과 기갑병부대 참전 등을 통해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전쟁을 끝내자’라고 역설했다.”
중국지원군의 기다리던 2개 병단 병력이 도착했다.
유엔군은 계속된 2개월간의 공격으로 병사들이 피로에 지친 데다 손실도 엄청났는데, 중국지원군의 대부대가 들어와 새로운 공격 준비를 한다니 무척 두려워했다.
5월에 접어들면서 38도선을 경계로 일진일퇴가 거듭된다.
김일성 수상의 신화사통신 조선분사 대리사장과의 대담
1951년 2월 6일 김일성 수상은 신화사통신 조선분사 대리사장과의 대담에서 유격대 활동에 대해 긍정적으로 답했다.
한국전쟁 60주년 특별기획 『역사학의 시선으로 읽는 한국전쟁』(휴머니스트, 2010)에 실린 김광운의 「북한의 비정규전 조직과 전개」 연구 논문이다.
“경상남북도에서 활동하는 박종근 유격대와 김원팔 동무들이 지도하고 있는 유격대들은 수백여 명으로부터 수천여 명으로 달하는 대부대로 되어 대구 주변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지리산을 중심으로 전라남북도에서 활동하는 리현상 동무가 지도하는 유격대들은 대연합부대로 되었다. 적들은 수 개 사단을 동원하여 그를 토벌하려 하지만, 유격대들의 맹렬한 활동은 도저히 막아낼 수 없을 것이다. 충청남북도에서는 대전 좌우를 중심으로 하고, 윤상철·김용암 부대들이 맹렬히 활동했다. 유격대들은 그 지방 인민들의 적극적인 지지와 원호 속에서 자기의 활동 구역을 날로 넓히고 있으며, 일부 지역들에서는 몇 개 면 혹은 몇 개 군들을 해방 구역으로 창설했다.”
김일성 수상의 이러한 대담은 박종근 경북도당 위원장이 1951년 1월 중순에 영주군 부석면으로 남하해 온 인민군 2군단을 만나 중앙당에 보고서를 보낼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남 지역 빨치산부대 중에 지대 개편 명령을 1951년 1월 중으로 실현한 부대는 경북도당이 유일했다. 박종근은 이미 1951년 1월 20일, 김일성 총사령관의 명령서를 접수하고 곧바로 제3유격지대를 편성했다.
또한 김광운은 같은 논문에서 유격전이 제2전선으로 효과적이었다고 분석했다.
“당시 유격부대의 후방 교란 활동은 습격과 도로 차단을 반복하고, 미 제8군과 10군의 지상 연결을 가로막으면서 동시에 양군의 측면, 배후를 위협하는 수준이었다. 이에 당황한 국무부 극동 담당 차관보 러스크(Dean Rusk)는 한국에 대한 가장 시급한 행동 조치를 언급하면서 ‘38선에 근접하기 위해서 1950년 6월 25일 이전에 한국군이 차지했던 방어 요지를 강화해야 하며, 38선 이남 지역의 게릴라들을 궤멸시켜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한국은 게릴라 진압을 위해 국군과 경찰 병력 총 9개 사단, 6개 유격대, 10개 경비대대와 국민방위군 1개 연대, 그리고 경찰 29개 대대를 동원했다. (정석균, 『대비정규전사』,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88.)
국군토벌대에 맞서 싸우다 입은 총상으로, 박종근 스스로 운명을 결정하다
이런 상황에서 박종근 경북도당 위원장은 1951년 2월 14일 제3유격지대를 이끌고, 횡성군 둔내면에서 제2전선 근거지로 생각한 보현산(1,124m)으로 향한다. 보현산은 경북 영천군 화북면과 청송군 현서면에 걸쳐 있는 대구에 인접한 요충지였다.
제3유격지대는 조선인민군 제2군단 본부가 있는 횡성에서 병력과 무기를 지원받아 남하하지만, 국방군과 조선인민군이 대치하고 있는 전선을 돌파하면서 많은 희생이 뒤따랐다.
지춘란의 부군 황금수는 “지춘란이 위급 상황에서 팔로군의 도움을 받았다”라고 이야기한 것으로 보아, 제3유격지대에는 지춘란뿐만 아니라 중국 동북 3성 조선인 출신 팔로군도 함께 배속된 것으로 추측된다.
횡성에서 병력을 보충받을 때, 제2전선 빨치산 임무를 위해 그들도 배속된 것이 아닌가 한다.
지춘란은 박종근 부대에 배속되어, 뒤에 일월산에서 제3지대 사령관 남도부를 따라 남하할 때까지 의료 요원으로 박종근과 함께 빨치산 활동을 한다.
박종근 제3유격지대 사령관이 활동한 곳은 소백산맥을 따라 강원도 영월군 선달산(1,236m)·어래산(1,064m)과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산(1,219m) 그리고 영주군 부석면 남대리 등으로 추론된다.
하지만 박종근의 제3지대는 국군토벌대에 갇히고 만다.
임경석 교수는 『독립운동 열전 ②』(푸른역사, 2022)에서 박종근 사령관의 빨치산 활동과 고뇌에 찬 결심, 그리고 본인이 결정한 운명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다.
“박종근 사령관은 애초의 계획을 폐기하고 ‘부대별 분산 투쟁’ 방침을 수립했다. 역량 보존에 적합한 방침이었다. 대원들을 네 개의 부대로 나눴다. 자신이 이끄는 본대는 일월산에 거점을 두고, 다른 세 부대는 경북 관내의 다른 산악지대에 분산 배치했다. 지휘관의 성을 따서 도부대, 백부대, 강부대라고 부르는 세 예하 부대는 각각 청량산 지구, 금장산-명동산-주왕산 지구, 태백산-소백산 지구에 주둔했다. 박종근이 이끄는 제3지대는 악조건 속에서도 10개월을 더 버텼다. 그러나 1951년 12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전개된 대규모 토벌 작전의 시련을 견뎌내지는 못했다. 작전이 거의 막바지에 이른 1952년 2월 어느 날, 박종근 제3지대 사령관은 총상을 입었다. 스스로 움직일 수 없을 정도의 중상이었다. 생존자의 증언에 따르면, 동료들이 들것을 만들어서 싣고 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눈 덮인 한겨울 산중에서 쉴 새 없이 추격해 오는 토벌대를 피해 다니면서 부상자를 돌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박종근은 권총으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길을 택했다. 경북 영양군 석보면 포산리에 있는 포도산(748m)의 한 기슭, 1952년 2월 27일의 일이었다.”
박종근 경북도당 위원장과 아내 이숙의
박종근의 아내 이숙의는 해방 이듬해인 1946년 3월 1일 좌·우익이 한자리에 모여 기념행사도 하고 동시에 강연회를 열었던, 의성읍에 있는 한 극장에서 박종근을 만났다고 기억했다. 당시 이숙의는 공주여자사범학교 심상과(尋常科)를 졸업한 교원이었다.
『이 여자, 이숙의(빨치산 사령관의 아내, 무명옷 입은 선생님)』(삼인, 2007)에서 이숙의는 첫 만남 인상을 적었다.
“다음으로 연단에 선 것은 좌익 대표 박종근(朴宗根)이었다. 이 젊은 청년의 예지에 가득 찬 눈빛은 어느 누구와도 비길 수 없는 자신감으로 번득이고 있었다. (중략) 강연 내용이 다 기억나지는 않지만, ‘3.1절, 3.1만세운동의 의미는 다만 선열의 숭고함을 되새기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우리들은 왜 3.1운동이 실패했는지를 그 조직과 방법에 있어 다각도로 연구해 보아야 한다’는 요지였던 것 같다. (중략) 그는 3.1운동의 업적을 부인하자는 것이 아니며, 이를 비판적으로 바라봄으로써 앞으로 조국을 짊어지고 나아갈 때 더 진지하고 정확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후 이숙의는 결혼과 짧은 행복을 맛보지만, 박종근은 10월 대구인민항쟁으로 인해 도피하다 1947년 12월에 이북으로 올라간다. 결혼한 지 6개월 만이었다.
박종근은 소련 모스크바 조선당학교에서 2년간의 유학을 통해 견문을 넓혔다. 유학에서 돌아온 그에게 주어진 보직은 경북도당 위원장직이었다. 29세였지만 이론과 실천 활동 등 경륜이 있는 중앙당 간부였다.
그는 일제강점기 사상범으로 3년 7개월을 복역했다. 해방공간에서는 경북 의성군에서 면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군당 선전부장·조직부장을 지냈다. 서울에서 비합법 조건 아래 당중앙 선전부 소속의 중간 간부로 일했다.
박종근은 6.25전쟁이 발발한 뒤, 집에는 들르지도 못한 채 산으로 올라갔다. 경북도당 위원장이자 제3유격지대 사령관으로서 산악지대의 빨치산 활동을 이끌기 위해서였다. 결국 박종근은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1952년 3월 무렵 ‘태백산 총사령관 박종근 사살’이라는 대서특필된 신문 기사를 통해 이의숙은 남편의 최후를 알았다. 기나긴 기다림이 이렇게 왔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평생 아버지 품에 안긴 적이 없는 빨치산의 딸 ‘박소은’이 있었다. 고난의 세월을 보내면서 이숙의는 딸을 키웠다.
비전향장기수 송환과 김익진과 이숙의의 만남
2000년 6.15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된다.
이때 이행 사업의 하나인 ‘비전향장기수 송환’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일어나는 9월 2일 전날, 박종근 위원장과 함께 활동한 김익진 비전향장기수와 이숙의는 극적으로 상봉한다.
김익진은 “1951년 태백산 기슭에서 제가 받은 명령이 아주머니와 따님을 찾아서 북송하는 것이었습니다. 박종근 위원장님은 전선에서도 언제나 딸의 모습을 보고 싶어 했고, 아주머니에 대한 사랑을 뜨겁게 간직하고 계셨습니다”라고 이야기한다.
또한 김익진은 자신이 이 문제로 남파되어 임무를 수행하던 중 검거되어 30여 년을 비전향으로 살았다고 했다.
조선작가동맹 김덕철은 김익진 선생을 주인공으로 삼아, 박종근 경북도당 위원장과 아내 이숙의 여사의 숭고한 이야기를 『의리』란 소설로 발표한다.
북한의 노래 「생이란 무엇인가」가 가슴을 울려온다.
생이란 무엇인가 누가 물으면 우리는 대답하리라 마지막 순간에 뒤돌아볼 때 웃으며 추억할 지난 날이라고
시냇물 모여서 강을 이루듯 날들이 모여 생을 이루리 그 생이 짧은들 누가 탓하랴 영생은 시간과 인연 없어라
생이란 무엇인가 누가 물으면 우리는 대답하리라 세월이 간대도 잊을 수 없는 조국에 바쳐진 순간이라고
고요한 아침에 이슬이 지듯 한 생이 사라진대도 어머니 조국은 기억하리라 그대의 이름과 걸어온 길을
현재 평양시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박종근의 가묘가 있다.
※ 격주로 연재합니다. <저작권자 ⓒ 자주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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