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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찾아서] (15) 제3지대장 남도부에 대한 허위 사실과 진실 ②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 기사입력 2024/04/30 [14:18]

[사람을 찾아서] (15) 제3지대장 남도부에 대한 허위 사실과 진실 ②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 입력 : 2024/04/30 [14:18]

이탈리아의 철학자이자 역사가인 베네데토 크로체(Benedetto Croce, 1866~1952)는 “모든 역사는 현대사다”라고 했다. 

 

역사를 서술한다는 것은 과거를 말함과 동시에 현재를 사는 민중에게 그것이 갖는 의미를 묻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또한 목적 의식적으로 미래의 전망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필자에게는 역사란 사실을 규명하는 작업이다.

 

남도부에 대한 1차 자료는 판결문과 신문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허위 사실이 버젓이 확인되지도 않고 사실처럼 기록돼 있다. 특히 당국의 자료들은 주로 전쟁 시기 빨치산과 남도부에 대한 만행과 죄상을 알리기 위해 악의적 왜곡과 반공·반북 그리고 폄훼가 대부분이었다. 

 

그뿐 아니라 남도부에 대한 소설·다큐멘터리 등 여러 창작물이 출처가 확인되지 않은 자료를 인용하거나, 남도부보다는 저자의 입장과 변명에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당파적으로 반북을 주장하며 미화하는 경우도 있다.

 

▲ 잡지 『신천지』 1954년 9월호 내용 일부. [출처: 강원도민일보]

 

1954년 잡지 『신천지』에 남도부가 기고했다는 기사 유무(有無)

 

정 아무개의 장편소설 『북위 38도선』(교학사, 2006)과 안 아무개의 『이현상 평전』(실천문학사, 2007)에 남도부가 잡지 『신천지』에 기고했다는 유격대에 대한 글이 사실인 양 기록되어 있다.

 

필자는 1954년 남도부가 체포된 상황에서 과연 잡지에 기고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었다.

 

그래서 제3지대장 남도부 유품 발굴에 참여하고 다양한 자료를 수집 분석한 임경석 교수에게 자문했다.

 

임경석 교수의 답변이다.

 

“한선생님의 자문에 답하기 위해서 문제의 잡지 『신천지』 1954년 판을 살펴보았습니다. 제가 검토한 것은 1954년 1월호부터 10월호까지 10개 호입니다. 하지만 그 지면 어디에서도 하준수나 남도부 명의로 발표된 빨치산 관련 기고문은 없었습니다. 

 

혹시 11월호나 12월호에 실렸는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 이 잡지의 종간호가 언제인지 확인했습니다. 『한국잡지백년 3』(최덕교, 현암사, 2004년)에 따르면 ‘1954년 10월 통권 68호까지 발행되었다’(457쪽)고 기록되어 있군요. 최덕교 선생도 제가 살펴본 1954년 10월호는 미처 구해 볼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 1954년 10월호가 마지막 호인 것 같습니다.

 

설령 『신천지』가 아닌 다른 잡지에 그런 글이 실제로 실렸다 하더라도 마땅히 사료 비판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남도부 자신의 내면의 진실을 반영한 것인지 여부를 의심해야 합니다. 수사 당국의 필요에 따라서 강제로 기고했을 수도 있고, 혹은 그의 동의 없이 마치 전향한 것처럼 꾸미기 위해서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엄정한 사료 비판을 거친 이후에 진위 여부를 판정하는 것이 요구됩니다.

 

따라서 제 판단으로는 문의하신 『이현상 평전』과 『북위 38도선』에 실린 이른바 남도부 기고문이라는 것은 신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첫째, 출처가 의심스럽기 때문입니다. 『신천지』 1954년 판에는 어디서도 그러한 기고문이 실려있지 않습니다. 둘째, 사료 비판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료 비판을 거치지 않고 출처가 의심스러운 상태에서 쓰여진 정보는 엄정한 학문적 훈련을 요하는 역사학자의 서술에서는 채택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허위 기고 사실을 기록했을까?

 

『북위 38도선(하)』와 『이현상 평전』의 유격투쟁 기고 내용

 

필자는 그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추론한다.

 

첫째는 남도부 휘하 대원으로 투항하여, 남도부를 유인 체포하는 공작에 가담한 성 아무개(가명은 차진철)의 반북 자기변명이다. 둘째는 반북, 전쟁 책임 운운하는 작가 안 아무개의 당파적 왜곡이다. 

 

정 아무개의 『북위 38도선(하)』 문제 내용이다.

 

“남도부 사령관은 수감 중인 1954년 『신천지』 잡지에 남조선 유격대에 관한 글을 실었다. 남조선은 지리학적으로 유격전이 성공할 수 없다. 유격투쟁이 불가능한 곳에 유격대를 투입 시킨 것은 작전상 오류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사령관이 말하는 유격전은 적어도 대대 규모의 작전을 전제로 한 전투였다. 그는 재래식인 소규모의 산발적이고 국지전적 기습은 실이 없다고 결단하고 그런 소규모 부대를 다수 복합적으로 통솔하는 기동화 부대의 개념을 구상한 것이다. 그는 이어서 대남 전략이 실패하자 남조선의 잔존 병력에게 책임을 전가시켜 기아처럼 버려서 전멸시킨 것을 비난했다.”

 

안 아무개의 『이현상 평전』 문제 글이다.

 

“전향을 거부한 하준수는 사형 선고를 받고 수감 중이던 1954년, 잡지 『신천지』에 남한의 유격투쟁에 관해 장문의 글을 실었다. 남한은 유격전이 성공할 수 없는 곳으로, 유격투쟁이 불가능한 곳에 유격대를 투입한 것 자체가 잘못이며 북한에서 이야기하는 재래식 소규모 산발적인 국지전적 기습은 현실적으로 더욱 어렵다는 것, 최소한 대대 병력이 합동 작전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환경이라는 내용이었다. 자신을 남파한 것이 남로당이 아니라 김일성이 직접 지도하는 조선노동당이었는데도 유격대가 패전한 이유로 남로당 출신들에게 뒤집어씌우고 패배를 이현상 등 유격대 지도부에게 뒤집어씌운 것도 역시 잘못이라고 비판했다.” 

 

『이현상 평전』의 작가 안 아무개가 정 아무개 장편소설 『북위 38도선』의 출처를 밝히지 않고, 그대로 인용한 것은 심각한 문제다. 내용이 똑같다. 

 

『이현상 평전』은 2007년 7월 23일 초판을 찍었는데, 참고 문헌에 『신천지』가 없다. 참고로 『북위 38도선』은 2006년 9월 15일 초판을 찍었다.

 

작가 안 아무개는 노동운동 활동을 하다, 근현대사에 관심을 가지고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전을 주로 쓴 작가이다. 특히 일제강점하 조선공산당 운동 관련해 여러 인물의 평전을 열정적으로 썼다. 하지만 이번 『이현상 평전』의 글은 아쉬움이 많다.

 

이외에 노가원의 전설적 남한 유격대 총사령관 하준수 일대기 『南道富』(월간 말, 1993)란 다큐멘터리에 출처를 밝히지 않는 여러 내용이 나온다. 

 

노가원의 『南道富』에 나오는 이승만의 돈암장(敦岩莊) 경호대장 설

 

노가원의 『南道富』에는 남도부가 이승만 대통령의 돈암장 경호대장으로 나온다. 

 

“제4지구당위원장 겸 유격총사령관 남도부 중장 – 일제 시절 학병을 거부하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항일무장투쟁단체 ‘보광당’을 조직해 강고한 유격투쟁을 전개했던 항일 투사, 8.15 직후 경찰서와 각 행정기관을 접수하고 민선 군수와 경찰서장 등을 선출하며 아마도 이 나라 최초의 ‘지방자치제’를 실천에 옮기려고 했던 민족주의자, 민족개혁주의자로서 새생활운동을 전개하고,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여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건군의 초석이 되고 싶어 했던 군 지도자, 리승만 대통령의 돈암장 경호대장, 민족정기를 바로잡고자 친일파‧민족반역자를 처단하라고 외치다가 끝내 그들 친일세력으로부터 공산당으로 몰려 지리산으로 쫓겨가야 했던 빨치산 지도자, 민족해방‧민족통일을 부르짖으며 5.10단정단선반대 무장봉기인 천왕봉 무장봉기를 주도했던 민족 혁명가”

 

참 어처구니없는 내용이다. 

 

이승만은 맥아더의 도움으로, 1945년 10월 16일 미국에서 귀국하여 잠시 조선호텔에 머물다 돈암장으로 거처를 옮긴다. 그리고 이승만은 1947년 8월 25일에 돈암장 생활을 정리하고 원효로4가에 있는 마포장(麻浦莊)으로 이사한다. 

 

그러니까 이승만의 돈암장 생활은 1945년 말부터 1947년 8월 25일까지이다.

 

남도부가 ‘돈암장 경호대장’이라 하였는데, 남도부(하준수)의 판결문에는 “8.15해방과 더부러 하산하여 거리 함양에서 소위 건국준비 위원회장 및 치안대장등에 취임하여 불법활동타가 재차 지이산에 도피입산하여 공산당조직등의 업무에 종사중 단기 4281년(1948년) 8월경 괴뢰 공산 대의원 입후보차 월북하여”라고 나온다. 

 

이런 건준과 치안대장 활동의 이력이 판결문에 있는데, 어떻게 이승만의 ‘돈암장 경호대장’으로 둔갑 활동할 수 있는가!

 

또, 노가원의 『南道富』에 나오는 허위 내용이다.

 

레닌 훈장과 영웅 칭호 주장, 노가원의 『南道富』

 

남도부가 소련으로부터 레닌 훈장과 영웅 칭호를 받았다는 내용이다. 

 

“마침내 월북의 길에 올라 소련 당국으로부터 레닌 훈장과 영웅 칭호를 수여 받은 국제적인 영웅, 강동정치학원 부대장 겸 군사교관, 조선인민유격대 제3병단 부사령관, 6.25 그날 남하 침투한 이래 제2전선을 담당한 남한 빨치산의 전설적인 총수로서 남한 유격총재 겸 제7군단, 남한 유격대 총사령관, 조선인민유격대 제3지대 남부 지대장, 조선인민유격대 제5지대장, 제4지구당위원장 겸 유격총사령관, 34세에 짧다면 짧은 생애를 살면서 굵고 치열하게 역사했던 사람. 그가 체포됐다.”

 

필자는 남도부의 ‘이승만의 돈암장 경호대장’과 ‘레닌 훈장과 영웅 칭호’는 출처가 없는 허위 사실로 추론한다.

 

일차적으로 출처를 밝히지 않았고, 만일 개인 증언이었다면 누구에게서 들었는지, 또한 상호 검증이 되었는지 밝혀야 했다. 

 

임경석 교수는 “남도부가 이승만의 경호대장을 했느니, 소련으로부터 무슨 훈장을 받았느니 하는 문장은 노가원 씨의 저서에서만 발견됩니다”라고 언급했다.

 

그리고 정창현 현대사 연구소장은 “노가원 기자의 책은 문헌보다는 각종 증언에 토대해 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확인되지 않은 내용이 많이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2차 대전이 끝나면서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한 장교들에게 훈장이 수여된 후에는 레닌 훈장이니 소련군 영웅 칭호는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남도부에게 상훈이 있었다면 북조선인민위원회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름으로 했겠지요.”

 

남도부는 1992년 김일성 주석 탄생 80주년에 조국통일상을 수상했다.

 

[출처: 통일부 북한자료센터]

 

참고로 김광윤의 『북한정치사 연구Ⅰ』(선인, 2003) 부록2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묻힌 사람들’에는 빨치산 주요 인사와 도당위원장인 김달삼, 리덕구, 리현상, 박영발(전남도당위원장), 박우현(충남도당위원장), 박종근(경북도당위원장), 방준표(전북도당위원장) 등이 있다.

 

황금수는 아내 지춘란이 생전에, 제3지대 사령관 남도부가 하산 결정하기 전부터 일관되게 당 하산 임무를 준 것을 꼭 지켜야 한다고 했다. 지춘란은 “남도부는 결의가 강한 사람이었다. 부대원들이 살아온 모든 것을 너가 살아서 돌아갈 수 있으면 3지대가 어떻게 싸웠다는 것을 증언해 달라고 부탁하였다”라고 여러 차례 황금수에게 강조했다.

 

또 체포 후 남도부는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이미 사형집행을 예견한 남도부가 지춘란에게 “너는 간호장이고 조선 반도 사람도 아니다. 그리고 조선인민군 출신도 아닌 팔로군 출신이기 때문에 이놈들이 함부로 사형 선고하지 않을 것이다.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살아남아서 당당하게 역사를 정확하게 보고해 달라”라고 말했다고 황금수는 증언했다.

 

필자에게 역사란 사실을 규명하는 학문이다. 

 

 

※ 격주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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