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9월 시작된 새 세계의 꿈
북러정상이 19일 정상회담을 진행하고 ‘북러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에 관한 조약’(북러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양국이 꿈꾸는 새 세계의 설계도를 담고 있다.
북러 양국이 추구하는 새 세계는 조약 서문에 나오는 “패권주의적 기도와 일극 세계 질서를 강요하려는 책동으로부터 국제적 정의를 수호하며 국가들 사이의 성실한 협조, 상호 이익 존중, 국제 문제들의 집체적 해결, 문화 및 문명의 다양성, 국제 관계에서의 국제법 우위에 기초한 다극화된 국제적인 체계를 수립하며 공동의 노력으로 인류의 존재를 위협하는 임의의 도전들에 대처해나가려는 지향”이라는 표현에 집약적으로 담겨 있다.
양국 정상은 지난해 9월 13일 보스토치니 우주기지 정상회담에서 만나 새 세계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이날 정상회담 후 열린 연회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이번 방문은 국제무대에서 진보와 반동, 정의와 불의의 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으며 자주적인 세력들의 공동 의지와 단결된 힘으로 세계의 다극화 과정이 힘차게 전진하고 있는 시기에 이루어졌다”라고 하면서 “안정적이며 미래지향적인 새 시대 북러관계의 백년대계를 구축하고 그 위력으로 두 나라에서의 강국건설 위업을 강력히 추동하며 진정한 국제적 정의를 실현”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를 통해 북러가 지금의 세계정세를 진보·정의 세력과 반동·불의 세력이 대립하며 치열하게 투쟁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자주세력이 단결해 다극화 질서를 만들어가고 있으며 북러 두 나라가 그 선두에 서려고 한다는 점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북러는 일극 체제를 다극 체제로, 미국·유럽 중심의 대서양 시대를 동북아 시대로 바꾸기로 합의한 것이다.
당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북러 관계를 “불굴의 전략적 협력 관계로 전환”하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이번에 양국은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선언하였다. 그리고 당시 구상했던 내용들이 이번에 체결한 조약에 23개 조항에 걸쳐 구체적으로 담겼다.
동맹 관계 복원
이번에 체결한 북러조약에서 가장 주목받는 내용은 군사동맹 관계를 복원하는 부분이다.
조약 3조는 “쌍방은 공고한 지역적 및 국제적 평화와 안전을 보장하기 위하여 상호 협력한다. 쌍방 중 어느 일방에 대한 무력 침략 행위가 감행될 수 있는 직접적인 위협이 조성되는 경우 쌍방은 어느 일방의 요구에 따라 서로의 입장을 조율하며 조성된 위협을 제거하는 데 협조를 상호 제공하기 위한 가능한 실천적 조치들을 합의할 목적으로 쌍무협상 통로를 지체 없이 가동시킨다”라고 하였다.
어느 한 나라가 전쟁 위협을 받으면 지체 없이 서로 협의해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협력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한반도 인근에서 한미연합훈련을 하면 북한과 협의해 러시아가 태평양함대의 전략핵잠수함이나 전략폭격기로 동해에서 무력시위를 할 수도 있다. 거꾸로 나토가 러시아 근처에서 대규모 연합훈련을 하면 북한이 미국의 군사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대륙간 탄도미사일 발사 훈련을 진행할 수도 있다.
조약 4조는 “쌍방 중 어느 일방이 개별적인 국가 또는 여러 국가들로부터 무력 침공을 받아 전쟁 상태에 처하게 되는 경우 타방은 유엔헌장 제51조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러시아 연방의 법에 준하여 지체 없이 자기가 보유하고 있는 모든 수단으로 군사적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한다”라고 하였다.
만약 전쟁이 발발하면 ‘지체 없이’ ‘모든 수단’을 동원해 서로를 돕는다는 것이다. 이른바 ‘자동 개입’ 조항이다. 1961년 북한과 소련이 체결한 ‘우호협조 및 상호원조에 관한 조약’ 1조에 나오는 “일방이 어떠한 국가 또는 국가 연합으로부터 무력 침공을 당함으로써 전쟁상태에 처하게 되는 경우에 체약 상대방은 지체 없이 자기가 보유하고 있는 온갖 수단으로써 군사적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한다는 내용이 부활한 셈이다.
여기서 ‘모든 수단’이라고 했으므로 당연히 핵무기도 동원할 것이다. 다만 ‘무력 침공을 받아 전쟁 상태에 처하게 되는 경우’라고 하였으므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말처럼 한국이 북한을 공격할 계획이 없다면 북러조약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조약 8조는 “쌍방은 전쟁을 방지하고 지역적 및 국제적 평화와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방위 능력을 강화할 목적 밑에 공동조치들을 취하기 위한 제도들을 마련한다”라고 하였다.
이에 따라 북러는 평시에도 군사력 강화를 위해 협력하게 되었다. 서로에게 필요한 무기를 제공한다거나, 무기 기술을 전수한다거나, 첨단 무기를 공동 개발하는 것도 가능하다. 또 정찰 정보를 교환하고 정찰위성 사진이나 레이더망 정보를 실시간으로 공유할 수도 있다. 이에 따라 북러의 군사력은 지금보다 더욱 강해질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면 미국 중심의 서방 군사력이 러시아 군사력에 밀리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지난 17일 사브리나 싱 미국 국방부 부대변인은 브리핑에서 “우리는 러시아가 북한, 이란과 같은 국가들에게 무기를 지원받는 것을 보고 있다”라고 주장하며 “이와는 대조적으로 미국, 다른 유럽 파트너, 전 세계 동맹국 50여 개국이 우크라이나의 노력을 지원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북·러·이란 세 나라의 군사력이 미국을 중심으로 한 50개국 군사력을 앞선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제 북러가 본격적인 군사협력을 진행하면 미국 중심의 서방 군사력과의 차이가 더 벌어질 것으로 보인다.
북러 경제 협력
1) 중국과 달리 대북 제재를 완전히 무시한 러시아
이번에 체결한 북러조약에는 경제 협력에 관한 내용도 많다. 예를 들어 조약 10조에는 “쌍방은 무역 경제, 투자, 과학기술 분야들에서의 협조의 확대 발전을 추동한다. 쌍방은 상호 무역량을 늘리기 위하여 노력하며 세관, 재정 금융 등 분야들에서의 경제 협조에 유리한 조건을 마련하며 1996년 11월 28일에 채택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와 러시아 연방 정부 사이의 투자 장려 및 상호 보호에 관한 협정에 따라 상호 투자를 장려하고 보호한다. 쌍방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러시아 연방의 특별 또는 자유경제지대들과 이러한 지대들에 관여된 단체들에 협조를 제공한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하지만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대북 제재라는 장벽이 이런 협력을 가로막고 있다. 게다가 러시아는 대북 제재 결의안에 찬성한 안보리 상임이사국이다. 위 10조의 내용은 사실 대북 제재에 걸려 거의 실현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렇다고 북러 양국이 이행하지도 않을 합의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푸틴 대통령은 이번 방북에 앞서 18일 노동신문에 기고문을 보냈다. 여기서 푸틴 대통령은 “우리는 서방의 통제를 받지 않는 무역과 상호 결제 체계를 발전시키고 불법적이고 일방적인 제한 조치들을 공동으로 반대해 나갈 것”이라고 하였다. 대북 제재를 반대한다는 것이다.
푸틴 대통령은 북러조약을 체결하면서도 “정치적 동기로 제재와 제한 조치들을 하는 것을 사실상 반대한다”라고 하면서 “서방이 정치, 경제, 기타 분야에서 자기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습관적으로 써먹는 수법인 제재 압살 책동에 계속 대처할 것이며 이 맥락에서 미국과 그 추종세력들의 사촉을 받은 유엔 안보리의 무기한 대북 제한 조치는 재검토되어야 한다”라고 강조하였다.
푸틴 대통령은 북러정상회담 후 베트남에 가서 기자회견을 했는데 이 자리에서도 대북 제재의 문제점을 언급했다. 그는 자신이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이라며 2차 세계대전 당시 레닌그라드 봉쇄의 잔혹함을 소개하면서 대북 제재가 그와 같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나는 평양에서 연설하면서 이 제재 체계에서 무엇을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전반적으로 오늘날의 요구에 부합하는지 우리가 모두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진심을 담아 말했다”라며 “오늘날의 상황에서는 기존의 방법으로 제재를 개정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든 해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또 “미국의 제안에 따라 도입된 제재가 그 모든 힘과 의미, 인도주의적 원칙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이것이 우리가 제재 관련 작업을 시작하고 계속하려는 이유다. 물은 돌을 닳게 한다”라고 했다.
미국이 거부하기 때문에 유엔 대북 제재를 파기할 수는 없지만 어떻게든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매우 강한 의지를 보인 것이다. 실제로 러시아는 3월 28일 열린 유엔 안보리 회의에서 대북제재위원회 산하 전문가위원회 임기 연장 결의안에 거부권을 행사해 대북 제재를 무력화하였다. 당시 중국은 기권했다.
이렇게 보면 러시아는 유엔 대북 제재를 완전히 무시하기로 작정한 게 아닌가 싶다. 사실 러시아는 이미 높은 수준의 대러 제재를 장기간 받아왔기 때문에 굳이 대북 제재를 열심히 지킬 이유가 없다.
반면 중국은 대북 제재 완화의 필요성을 주장하면서도 행동에 나서지는 않고 있다. 여전히 미국의 눈치를 보는 것이다. 중국은 미국의 고립봉쇄 정책으로 공격을 받지만 그래도 여전히 서방과 경제교류를 광범위하게 하고 있기 때문에 조심스럽다. 대북 제재를 무시했다가 중국 고립봉쇄 정책이 더욱 심해져 대북 제재 수준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러시아가 대북 제재를 무시하기 시작하면 그다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도 안보리 결의를 지키지 않는데 다른 나라가 그걸 착실하게 지킬 이유는 없다. 게다가 대북 제재 이행을 감시하는 전문가위원회도 사라졌다. 더더욱 대북 제재에 동참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대북 제재는 완전히 무너지고 한국과 미국 정도나 지키고 있을 것이다.
2) 경제 협력의 모습
앞으로 북러 경제 협력이 본격화하면 어떤 일들이 가능할까?
먼저 연해주 농업 개발을 들 수 있다.
올레그 코제먀코 연해주 주지사는 지난해 11월 11일 타스통신과의 대담에서 “올해 안으로 북한을 방문해 관광·통상·농업·건설 분야 협력 방안을 논의할 예정”이라며 “연해주는 북한 농민들에게 농업용지 일부를 제공하는 방안을 검토할 것”이라고 했다.
연해주는 면적이 16만 5,900제곱킬로미터로 한국(10만 제곱킬로미터)보다도 더 넓지만 인구가 2023년 기준 약 182만 명으로 인구밀도가 매우 낮은 지역이다. 인구는 계속 줄어들고 있으며 그나마 전체 인구의 약 3분의 1이 블라디보스토크에 거주한다. 인구가 적다 보니 개발도 많이 안 되어 있다. 지역내총생산(GRP)은 2018년 기준 8,340억 루블(약 133억 달러)로 인구 70만 규모의 제주시(182억 달러)보다도 적다.
연해주 경제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65%나 되며 이 가운데 콩(대두)을 가장 많이 재배한다. 그런데 1980년대 말부터 인구가 감소하면서 경작 면적도 점차 줄어들고 있다. 비옥한 토지가 농사지을 사람이 없어서 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연해주는 외국인 농장을 유치하고 있다. 한국도 10여 개의 기업이 진출해 있다. 대표적으로 현대중공업이 2009년부터 안양시 면적의 약 2.5배에 달하는 면적의 농장을 운영했고 이를 2018년 롯데상사가 매입해 운영하고 있다. 대부분 콩, 옥수수, 귀리를 재배하며 농작물의 60% 이상을 중국에 수출하고 30% 정도는 국내에 반입한다.
2008년에 연해주로 진출한 서울사료도 있다. 서울사료는 여의도 면적의 27배인 80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농장을 확보하고 옥수수, 콩, 귀리, 밀을 재배하며 젖소도 600마리나 키운다. 서울사료 관계자는 “연해주는 여름 일조량이 강해 생장 환경이 좋고, 긴 겨울을 감안하면 콩과 옥수수 재배가 경쟁력이 있다”라고 설명했다.
북한은 연해주와 맞닿아 있기에 운송 등에서 한국보다 훨씬 유리하다.
시베리아 목재도 주목할 자원이다.
러시아는 세계 최대 산림 부국으로 전 세계 산림의 약 20%를 차지한다. 북한은 수십 년 전부터 시베리아에 벌목공을 파견해 왔지만 지금은 대북 제재로 인해 중단된 상태다. 북한은 최근 평양을 비롯해 각지에서 엄청난 건설을 하고 있기 때문에 목재 수요가 많을 것이다. 따라서 러시아가 대북 제재를 무력화하면 다시 시베리아에 벌목공을 파견할 것으로 보인다.
시베리아 목재는 우리도 주목할 대상이다. 우리나라는 목재의 90%를 수입에 의존하는데 러시아는 2021년 기준 5번째로 많이 수입하는 나라다. 그런데 대러 제재로 인해 목재 수입이 막히고 가격이 뛰는 문제가 발생했다. 목재뿐 아니라 시멘트, 마감재 등 여러 건축 자재의 가격이 대러 제재 때문에 폭등했다.
최근 수도권 곳곳에서는 폭증하는 건축비 때문에 소송전이 끊이지 않는 상황이 펼쳐졌다. 건설사는 공사 도중 건축 자잿값이 폭등하는 바람에 공사비를 더 달라고 하고 발주처는 너무 많이 요구해서 못 주겠다고 버티는 것이다. 강북구의 한 재건축 단지는 최초 공사비에서 무려 50%나 더 요구하는 실정이라고 한다.
모두 대러 제재에 동참해서 발생한 일이다.
러시아의 천연가스도 우리에겐 주목할 자원이다.
러시아는 오래전부터 시베리아와 사할린의 천연가스를 북한과 한국에 공급하는 사업을 추진해 왔다. 하지만 남북관계가 풀리지 않으면서 우리에겐 ‘그림의 떡’이나 다름없었다.
북한은 남북관계와 무관하게 러시아와 가스관을 연결해 천연가스를 수입할 수 있었지만 지금까지 추진하지 않았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러시아와 충분한 신뢰 관계를 쌓기 전에 에너지 의존도를 높이는 것을 부담스러워했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양국 관계가 역대 최고의 신뢰 수준을 보이고 있으며 북한도 에너지 자립도를 충분히 높인 것으로 보이기에 러시아 천연가스 도입을 검토할 수 있다.
만약 러시아의 가스관이 한국까지 들어온다면 우리 경제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한국은 세계 2위의 액화천연가스 수입국이다. 가스는 난방, 발전, 자동차 연료, 주방 조리 등 우리 생활에 폭넓게 쓰인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새 가스요금이 크게 올라 자영업자들에게 큰 고통을 주었다. 지난 21일 한국은행이 발표한 5월 생산자물가지수에 따르면 산업용 도시가스가 4월에 비해 5.3%나 올랐다고 한다.
만약 합의만 되면 러시아의 가스관이 한국까지 들어오는 데 2년이면 충분하며 가격은 지금에 비해 3분의 2에서 3분의 1까지도 가능하다고 한다. 반값 가스비가 가능한 셈이다. 또 수입 다변화 효과가 있기 때문에 향후 액화천연가스 가격 협상에도 유리해진다.
북러 국경지대인 라선시와 하산이 경제특구로 크게 개발될 것으로 보인다.
원래 두만강 유역을 북·중·러가 중심이 되어 국제경제특구로 만들자는 구상은 매우 오래전부터 있었다.
대표적으로 1992년 유엔개발계획(UNDP)의 지원을 받아 북·중·러가 참여해 출범한 두만강개발계획(TRADP)이 있다. 이 계획은 2005년 9월 대상 지역을 몽골 동부와 한국 동해안까지 넓혀 광역두만개발계획(GTI)으로 확대되었다. 한국도 여기에 관심이 많은데 문재인 정부 시절에는 러시아 자루비노항과 중국 동북 3성의 중간 지점인 하산에 한국 전용 산업공단을 조성해 일자리 창출은 물론 한국의 환동해권 지역 복합 물류망 건설까지 구상한 적이 있다.
또 2000년대 들어 시작한 ‘라진-하산 프로젝트’도 있다. 라선시와 하산시 사이의 철도를 보수하고 라진항을 개방해서 한·중·러가 이용하자는 것이다. 러시아는 철도로, 중국은 도로로 라진항까지 갈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경제 구상들은 대북 제재 때문에 답보 상태에 있다.
러시아가 대북 제재를 넘어 북러 경제 협력에 적극 나서면 라선-하산 지역에 새로운 국제경제특구가 열릴 수 있을 것이다. 개성공단과 비슷한 공단이 조성될 수도 있다. 지난해 북러정상회담에서 푸틴 대통령은 자동차 공장에 관해 언급한 적이 있다. 라선-하산 특구에 자동차 공장을 세우면 북한, 러시아 극동지역, 중국 동북 3성에 판매할 수 있으며 라진항을 통해 제3국으로 수출도 쉽게 할 수 있다.
북러 국민의 만남
북러조약에는 군사, 경제 협력 외에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의 교류 협력 사업이 들어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식량, 에너지 안전, 정보통신기술 분야의 안전, 기후변화, 보건, 공급망 등의 협력(9조) ▲무역 경제, 투자와 우주·생물·원자력·인공지능·정보기술 등 과학기술 분야의 공동연구와 협력(10조) ▲기업 연단, 토론회, 전시회, 상품전람회 공동 개최(11조) ▲농업, 교육, 보건, 체육, 문화, 관광 등의 협력과 환경보호, 자연재해 방지 분야의 협력(12조) ▲입법, 사법 교류(15조) ▲공보, 출판, 문학 분야 교류(19조) ▲언론 협력(20조) 등을 담고 있다.
이미 지난해 북러정상회담 이후 북러 사이에는 여러 분야의 대표단이 오가며 교류 협력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이것이 더욱 활발해지며 정부 차원을 넘어 민간 차원의 교류, 협력이 늘어날 것이다.
민간 교류가 늘어나면 양국 국민의 분위기도 좋아질 것이다. 미국 주도의 제재에도 굴하지 않고 반제자주의 길을 걸으며 자력으로 강국을 건설한다는 처지의 공통점도 있고, 양국 최고지도자의 우애도 돈독하고, 여러 측면에서 서로를 지지하고 지원하고 있기 때문에 국민들끼리 만나도 서로 기분이 좋고 화목하고 힘도 날 것이다. 함께 하하호호 웃는 날도 많아질 것이다.
북러관계의 독특한 성격
푸틴 대통령은 18일 노동신문 기고문에서 “나라와 국민 사이 교류를 보다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고 신뢰와 상호 이해를 강화하는 모든 것”을 계획하고 있다고 하였다. 인간적인 교류라는 건 아마도 인간적으로 서로 신뢰하고 정을 나누며 의리를 지키는 것을 의미하는 듯하다. 국가 간 교류에서 ‘인간성’을 찾는 게 몹시 독특하다. 국내에서는 러시아 문화가 그다지 알려진 게 없는데 러시아 국민은 의리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으로 대러 제재가 시작되고 루블화가 폭락하자 세계 주요 자동차 업체들은 모두 러시아에서 철수했다. 그러나 현대차그룹은 손해를 보더라도 버텼다. 당시 정몽구 회장은 “어려움이 있더라도 러시아 시장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라며 “시장이 회복됐을 때 우리 브랜드가 최고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상품과 마케팅 전략을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정 회장의 ‘의리’에 러시아인들이 환호했다. 현대차, 기아차는 러시아 국민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로 순위를 매기는 ‘2015 러시아 올해의 차’의 4개 부문에서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현대·기아차는 러시아에서 국민차로 등극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러시아에서 점유율 2, 3위를 다툴 정도로 인기가 좋았던 현대·기아차도 결국 전쟁의 여파로 러시아에서 철수했다. 윤석열 정부가 대러 제재 동참을 선언하면서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리고 현대·기아차가 빠진 공간을 중국 자동차 기업이 차지했다. 전문가들은 러시아 공장 철수는 유럽 진출의 교두보를 포기하는 것이라며 공든 탑이 무너진다고 한탄했다. 의리를 중시하는 러시아 국민의 눈 밖에 나면 다시 과거의 인상을 되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국내 사업가들이 러시아에 진출할 때는 러시아 술인 보드카를 잘 마셔야 한다는 얘기가 있다. 러시아에서는 ‘술을 잘 마시면 사업이 쉽게 잘 되지만 못 마시면 어렵다’, ‘술잔이 있으면 모든 게 해결되고 술잔이 없으면 모든 게 어려워진다’, ‘술 없는 인간관계는 존재할 수 없다’ 같은 말을 흔히 들을 수 있다. 물론 21세기 들어서는 이것도 옛말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러시아 사람들이 애주가로 유명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술이라는 건 술자리를 통해 인간적 친밀감을 느껴야 사업 상대로 인정해 준다는 의미일 것이다.
미국 사람과 사업을 하려면 돈 대 돈으로 협상을 잘하고 계약을 철저하게 잘 맺어야 한다. 반면 러시아 사람과 사업을 하려면 정과 의리, 신뢰가 중요하다. 러시아 사람들은 돈보다 그런 걸 더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우리 민족성과 비슷한 면이 있다.
돈으로 맺어진 관계는 일시적이며 언제든 바뀔 수 있다. 돈이 목적이면 돈을 더 많이 주는 쪽으로 옮겨가게 마련이다. 반면 인간성을 토대로 맺어진 관계는 강렬하며 항구적이다. 푸틴 대통령이 ‘인간적인 교류’를 언급한 것도 그 때문인 듯하다.
푸틴 대통령은 북러정상회담 후 언론 발표를 하면서 “송도원 국제소년단야영소에서 특별 군사작전 전사자 자녀들을 위한 야영을 마련해준 북한 동료들과 김정은 동지에게 개인적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이 진심 어린 배려와 우정의 손길에 깊이 감사드린다”라고 하였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희생된 군인의 자녀를 북한 최고의 청소년 야영 시설인 송도원 국제소년단야영소에 초대했다는 게 이번에 처음 공개된 것이다. 푸틴 대통령이 이런 북한의 세심한 배려에 감동하지 않았을까 싶다.
북러관계는 돈과 이익 중심이 아니고 인간성이 중심이라서 더 공고하고 위력적이며 항구적일 가능성이 높다.
다른 나라의 모습
1) 중국
국내 언론은 북러관계가 밀접해지면서 중국이 소외된다, 중국이 반발한다는 식으로 보도한다. 일부 전문가들도 북·중·러 가운데 중국을 떼어낼 좋은 기회라면서 한국이 중국을 끌어당겨야 한다는 식으로 주장한다. 모두 북·중·러를 이간질해서 갈라놓아야 한다는 절박감에서 나오는 이야기다.
하지만 정작 중국은 차분한 모습을 보인다. 어디까지나 북한과 러시아 두 나라 사이의 일인데 이에 관해 중국이 가치 평가를 하면 그 자체가 간섭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에 최대한 말을 아끼고 조심하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중국은 당연히 북러협력에 합류할 것이다. 북한, 연해주와 맞닿은 중국의 동북 3성은 시진핑 국가주석이 야심 차게 추진하는 일대일로 사업은 물론 북한·러시아 항구를 빌려 동해로 진출하는 차항출해(借港出海) 전략의 요충지다. 원래 일대일로 사업은 동북 3성이나 북한, 러시아 극동지역과는 무관한 사업이었다. 하지만 2018년 9월 10일 랴오닝성이 ‘일대일로 종합시범구 건설 총체방안’을 발표해 단둥-평양-서울-부산 연결을 통한 일대일로의 한반도 확장을 명시하였다. 그해 9월 말 시진핑 국가주석은 동북 3성을 방문하고 일대일로를 동북지역까지 건설하는 방안을 논의하였다.
같은 시기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4차 동방경제포럼에 시진핑 국가주석과 동북 3성 당서기들이 전원 참석해 러시아 극동지역 개발과 동북진흥전략의 연계를 추구했다. 이 자리에서 시진핑 국가주석은 동북아경제권을 주창했다. (변현섭, 「중국의 일대일로와 중·러 협력:동북3성 및 극동지역 교통물류협력을 중심으로」, 『중소연구』 42권, 한양대학교 아태지역연구센터, 2019.)
북·중·러 접경지역의 개발을 중심으로 북·중·러 경제협력이 발전하면 세계 경제의 중심이 되고 경제 부흥의 기관차가 될 수 있다. 대책 없이 추락하는 미국·유럽 경제와 선명하게 대비될 것이다. 미국·유럽 중심의 대서양 시대가 동북아 시대로 전환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10~20년 후 세계의 중심은 완전히 이동할 것이다. 여기에 이란, 베네수엘라 같은 반제자주적인 국가들도 합류할 것으로 보인다.
또 주목되는 건 브릭스다. 지금 세계는 브릭스가 G7을 앞질렀다며 주목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번 북러정상회담에서 북한의 브릭스 가입이 논의되지 않겠냐는 전망도 나왔다.
북러조약 7조는 “쌍방은 국제 평화와 안전을 유지하려는 목적으로부터 출발하여 유엔과 그 전문 기관들을 비롯한 국제기구들의 테두리 내에서 쌍방의 공동의 이익과 안전에 대한 직접적 또는 간접적인 도전으로 될 수 있는 세계와 지역의 발전 문제들에서 상호 협의하고 협조한다. 쌍방은 상호성에 기초하여 매 일방이 해당한 국제 및 지역기구들에 가입하는 것을 협조하며 지지한다”라고 하였다.
북한이 브릭스에 가입하려고 하면 러시아가 협조하고 지지해야 하는 것이다. 절묘하게도 올해 브릭스 의장국은 러시아다.
올해 초 여러 나라가 브릭스에 가입했는데 애초에 가입하기로 한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르헨티나가 갑자기 번복하면서 약간 김이 빠지는 모양새가 되었다. 이럴 때 북한이 가입한다면 의장국인 러시아 처지에서도 체면이 살고 세계적인 브릭스 가입 흐름을 다시 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아직 북한이 브릭스 가입 의사를 밝힌 적은 없다. 하지만 북러정상회담 이틀 후 김영권 체육성 부상이 이끄는 대표단이 브릭스 플러스 체육부장관 회의 참가를 위해 출국한 것을 보면 브릭스에 관심이 큰 것은 분명하다. 브릭스 플러스는 기존 브릭스 성원국인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올해 가입한 이란, 아랍에미리트, 에티오피아, 이집트를 더해서 부르는 표현이다.
2) 한국
한국 정부는 북러정상회담 결과를 강하게 비판하며 우크라이나에 살상 무기를 지원할 것처럼 얘기하고 있다. 반면 국민은 윤석열 정권의 이런 태도를 보면서 어이없어하고 있다. 애초에 북한과 러시아를 적으로 돌리고 한·미·일 삼각동맹을 추진해 북러가 동맹을 맺게 만든 핵심 당사자가 윤석열 정권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목할 지점은 따로 있다.
지금 한국 경제는 출로가 안 보이는 안개 속에서 헤매고 있다. 경기는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물가 폭등으로 서민들은 생존의 위기에 몰렸다.
이런 때 어떤 정치인이 북러경제협력에 함께하는 게 활로라고 주장하면 어떻게 될까?
세금도 못 내던 1인 기업의 말만 믿고 포항 앞바다에서 석유를 찾는다며 5천억 원을 날릴 게 아니라 그 돈을 러시아 가스관 연결에 투자하면 서민들은 반값 난방비, 반값 교통비, 반값 전기요금으로 큰 혜택을 볼 수 있다. 러시아에서 원자재를 열차로 값싸게 실어 나르면 건축비 폭등으로 인한 소송전을 하지 않아도 된다. 이런 파격적인 공약을 내걸면 상당한 지지를 받을 것이다.
지역에서도 마찬가지다. 부산시장 선거에서 ‘부산에서 출발해 원산을 거쳐 연해주로 가는 크루즈관광을 시작해 부산을 국제관광도시로 만들자, 해운대 같은 관광지를 서너 개 더 만들자’ 이런 공약이 가능하다. 지금 부산 경제가 전국적으로도 굉장히 안 좋고 출로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부산 시민들이 크게 호응할 수 있다.
보수정당 지지층이 두터운 지역인 강원도에서 2010년대에 민주당 도지사가 연거푸 당선된 것도 남북경제협력을 향한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보수정당의 도지사 후보조차 남북경제협력을 공약으로 내걸 정도였다. 강원도는 유일하게 남북이 분단된 도인데다 접경지역이라는 특성 때문에 다른 지역에 비해 낙후했다. 그런데 남북관계가 발전하고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면서 남북경제협력이 도민 생활에 도움이 된다는 게 확인되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지난 6~9일 실시한 유럽의회 선거에서 프랑스 극우 정당 국민연합(RN)이 30%가 넘는 득표로 집권 여당을 두 배 이상 앞질렀다. 이에 마크롱 대통령은 의회를 해산하고 조기 총선을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선거 결과를 두고 유럽의 경제 위기로 극우세력이 득세한다고만 분석한다. 국민연합을 이끄는 마린 르펜 대표는 친러 성향의 정치인으로 대러 제재를 반대하고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것보다 러시아와 대화하는 게 효율적이라고 주장했다. 국민연합 압승의 배경에는 이런 지점이 있다.
독일도 올라프 숄츠 총리가 위기에 놓였다. 지난 1월 한 여론조사에서는 60%가 넘는 국민이 총리 교체를 요구했고 심지어 여당 지지자의 47.9%도 총리 교체를 요구할 정도로 인기가 없다. 반면 앙겔라 메르켈 전 총리는 지금도 인기가 좋다. 메르켈 전 총리는 임기 중에 대러 제재가 시작됐지만 푸틴 대통령과 계속 대화하며 독일-러시아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
이처럼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경제 위기에 빠진 유럽은 러시아와 관계 회복을 주장하는 정치인이 득세하고 러시아를 적대하는 정치인은 국민의 버림을 받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대러 제재에 동참해 경제가 어려운 한국도 같은 상황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한국도 이제 북·중·러 경제에 동참하자고 주장하는 정치세력이 살아남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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