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지지율이 바닥을 치고 정권을 향한 국민의 저항이 폭발하면 정권은 정국을 뒤집으려고 여러 시도를 한다.
그게 국민 여론에 귀를 기울이고 민생을 살피는 등 긍정적 방향이면 좋겠지만 현실은 반대다.
정권은 보통 정보기관, 권력기관을 동원해 민심을 왜곡하고 여론을 다른 곳에 쏠리게 하며 정권을 비판하는 세력을 제거하려고 시도한다.
1991년 정원식 사건
1991년은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학생들과 노태우 군부독재의 탄압이 강하게 충돌한 해였다.
연일 군부독재 퇴진 시위가 열리는 가운데 강경대 열사가 경찰에 맞아 숨지고 김귀정 열사가 경찰의 강경 진압에 사망하였으며 여러 대학생이 군부독재에 항거해 분신하며 군부독재가 위기에 몰렸다.
이대로 가면 1960년 이후 31년 만에 부활한 6.20지방선거에서 열세를 면치 못할 것으로 판단한 정권은 모종의 공작을 펼쳤다.
노태우 대통령은 1,500명의 교사를 파면하는 등 전교조 탄압으로 악명 높았던 정원식 문교부장관을 국무총리 서리로 임명했다.
정 장관은 민주화운동을 하는 대학생들을 징계하는 등 학생운동 탄압에도 앞장선 인물이었기에 대학생들은 정원식 국무총리 서리 임명을 강력히 반대하였다.
당시 정 장관은 여러 학교에 출강을 다녔는데 가는 곳마다 대학생들의 항의를 받아 승용차가 찌그러지기까지 했다.
이윽고 정 장관이 국무총리 서리 취임을 앞두고 마지막 강의를 6월 3일 한국외국어대학에서 하겠다고 발표했다.
대학생들은 정 장관을 강력히 응징하자며 들끓었고 이 소문이 돌자 정 장관 주변에서는 수행원을 동반하고 가라고 건의했지만 이상하게도 정 장관은 혼자 외대를 갔다.
예상대로 대학생들의 거센 항의가 빗발치며 강의는 정상적으로 할 수 없었고 정 장관은 강의를 중단하고 교수실로 피했다.
결국 대학생들이 달걀과 밀가루 등을 투척하며 정 장관을 응징했는데 이걸 언론이 대서특필하면서 정국이 급변했다.
정권과 언론은 대학생들을 ‘스승을 폭행한 패륜 학생’으로 몰아갔고 경찰은 대대적인 탄압에 돌입, 310명의 대학생을 구속했으며 5명을 수배했다.
이 사건으로 학생운동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퍼지면서 군부독재 퇴진 시위가 사그라들고 6.20지방선거에서 여당인 민자당이 압승하였다.
당시 여러 정황을 보면 정원식이 의도적으로 학생들을 자극해 공격을 유도한 것이 아닌지 의심된다.
1997년 이석 치사 사건
국제통화기금(IMF) 사태가 터졌던 1997년은 김영삼 정권이 최악의 위기에 몰렸던 때다.
1996년 12월 26일 신한국당(현 국힘당)이 노동법, 안기부법을 날치기로 통과하면서 노동계를 중심으로 전 국민적 투쟁이 시작되었고, 1997년 들어서는 연초부터 한보철강 부도 사건으로 경제 전반이 뒤숭숭했다.
이에 대학생들은 김영삼 정권을 조기에 타도하자며 연이어 총궐기를 진행했고 김영삼 정권은 연말 대선에서 정권 재창출이 매우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이 씨는 처음에는 한총련 관련 동향을 조사해 경찰에게 넘겨왔다고 순순히 자백하다가 갑자기 도주하려 하였고 이 과정에서 학생들과 물리적 충돌이 있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이 씨가 숨진 채 발견되었고 언론은 ‘대학생들의 폭행으로 죄 없는 시민이 사망’하였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 사건으로 대학생 6명이 실형을 선고받았고 한총련은 대대적인 탄압을 받게 되었다.
대학생들은 여러 의혹을 제기하며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김영삼 정권은 이 사건을 활용해 학생운동에 큰 타격을 주었지만 그렇다고 민심이 김영삼 편을 들지는 않았다.
연말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며 사상 첫 정권교체가 이루어졌고 김영삼 정권은 민심의 심판을 받았다.
계엄을 노린 징후들
이처럼 정권이 위기에 몰릴 때마다 정권에 비판적인 세력을 탄압하기 위한 빌미가 되는 사건들이 절묘한 시점에 발생해왔다.
그리고 이런 사건들은 세월이 흐른 뒤 공안기관의 공작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지금 윤석열 정권은 지지율이 바닥까지 떨어졌고 탄핵의 위기에 몰렸다.
야당에서 ‘계엄 경고’가 계속 나오는 게 우연이 아니다.
윤석열 정권은 당연히 정국 반전을 노린 다양한 계획을 짜고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는 윤석열 탄핵을 주장하는 시민사회단체를 공격할 빌미를 마련하기 위한 음모도 있을 수 있다.
대규모 공안 정국을 만든 뒤 이를 빌미로 계엄을 선포할 수도 있다.
원래 검사들이 이런 공작에 능하다.
예를 들어 한동훈 국힘당 대표의 장인인 진형구 대검찰청 전 공안부장은 1998년 조폐공사 노동조합의 파업을 유도한 뒤 무자비하게 진압한 이른바 ‘파업 유도 사건’을 저지른 자다.
8월 24일 ‘윤석열 퇴진! 김건희 특검! 104차 촛불대행진’ 참가자들이 행진을 하는데 갑자기 경찰이 행진을 막으며 피켓을 내리고 구호를 외치지 말고 한 줄로 인도로 통행하라는 부당한 요구를 하며 시민들과 실랑이를 벌인 일이 있다.
그다음 주인 31일 촛불대행진 때는 경찰이 예전과 달리 방패를 들고나와 시민들을 위협했다.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정국을 뒤집으려는 정권이 일부러 시민들을 자극해 충돌을 유도한 뒤 강경 진압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한다.
윤석열 탄핵 가능성이 커질수록 정국 반전을 노린 여러 사건이 발생할 수 있기에 경각심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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