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5일 마석 모란공원에서 ‘통일열사 신향식 42주기 및 남민전 동지 합동 추모제’가 개최되었다.
박정희 군사 파쇼 정권에 맞서 1976년 2월 29일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남민전)를 발기한 김병권, 이재문, 신향식 선생과 이해경 중앙위원의 묘소가 그동안 지방에 뿔뿔이 흩어져 있다가 마석 모란공원으로 모두 이장됐다.
이 모든 이장에는 작년 9월 17일 숙환으로 운명한, 남민전 황금수 선생의 아내이신 안경자(93세) 여사의 동지애와 통 큰 물질적 후원이 컸다.
이제 중앙위원 중 묘소가 다른 곳에 있는 분은 선산에 묻혀있는 안재구 선생뿐이다.
생존 남민전 동지들은 43년 만인 2021년 11월 20일에, 발기 3인과 ‘통일열사 이재문 40주기’ 그리고 먼저 간 동지들을 포함해서 ‘합동추모제’를 개최하면서, 열사들의 숭고한 신념과 자주·민주·통일 정신을 기렸다.
아울러, 매년 10월 초가 되면 관련 단체와 ‘합동추모제’를 개최하고 있다.
올해는 남민전동지회, 경북대학교민주동문회,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단체연대회의(추모연대), 사월혁명회, 서울대학교민주동문회, 한국진보연대가 공동 주최하였다.
사월혁명회 회원 중에는 남민전 성원으로 옥고를 치른 분이 여럿 있다.
이날 신향식 선생 묘소 앞에서 ‘합동추모제’를 진행한 후 열사 묘역에 있는 이재문 동지, 이해경 동지, 김병권 동지 그리고 김희상·김충희 동지, 박석률 동지 등을 참배했다. 이제 세상을 떠난 남민전 동지는 모두 25분이나 된다.
박정희의 ‘10월 유신’과 긴급조치를 통한 영구집권
박정희 군사 파쇼 정권에 맞서 1976년 2월 29일 남민전을 발기할 당시 미국과 남베트남의 패망으로 전 세계가 요동쳤다.
그러나 1975년 4월 30일 남베트남의 패망은 박정희의 ‘10월 유신’ 영구집권을 위한 결정적 구실을 주었다. 연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남침 규탄 대회를 개최하면서 이 분위기를 교묘하게 이용해 민주화 시위를 원천적으로 봉쇄해 나갔다.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호를 시작으로 모든 긴급조치의 결정판인 긴급조치 9호가 1975년 5월 13일 공표되었다.
긴급조치 9호는 ① 헌법에 대한 논의 자체와 일체의 유언비어 날조·유포, 사실의 왜곡·전파 행위를 금지하고, ② 학생 집회, 시위 또는 신문, 방송, 기타 통신에 의해 헌법을 부정하거나 또는 폐지를 청원·선포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③ 수업, 연구 또는 사전에 허가받은 것을 제외한 일체의 집회, 시위 또는 정치 관여 행위를 금지하고, ④ 이러한 조치에 대한 비방 등을 금지하고, ⑤ 이러한 금지를 위반한 내용을 방송, 보도, 기타의 방법으로 전파하거나 그 내용의 표현물을 제작·소지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⑥ 주무장관에게 이 조치의 위반 당사자와 위반 당시의 소속 학교·단체·사업체 등에 대해 제재·휴교·폐간·면허취소 등의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권한을 주고, ⑦ 이런 명령이나 조치는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으며 위반자는 영장 없이 체포할 수 있도록 규정되어 있다.
한마디로 제2의 유신쿠데타에 이은 제3의 쿠데타로 민주정치를 박살 내는 초법적 조치였다.
긴급조치 9호는 거의 5년, 날수는 1천 669일(4년 6개월)이나 지속하면서 8백여 명의 구속자를 낳는 공안탄압의 무시무시한 대기록을 세웠다.
긴급조치 9호의 대상은 물론 대학이었다.
1975년 이후의 대학 교내 시위는 학교 곳곳에 있는 경찰의 감시 눈초리로 대개 10분 이내에 끝났다. 짧으면 몇십 초, 잘해야 5분을 넘기기 어려운, 시위다운 시위를 하지 못하고 무지막지하게 머리채를 잡혀 끌려가기가 일쑤였다.
그리고 4월혁명 공간 활동했던 혁신계 자주·민주·통일 인사들에게는 소위 인혁당사건을 만들어 북한과 연계시켜 처형하고, 장기 옥살이를 시키는 등 너무도 엄혹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베트남전쟁의 승리 소식은 역으로 혁명가들에게 자신감과 희망을 주었다.
베트남은 공안 기관이 조작한 한국의 전위 조직인 인혁당과 남민전에 항상 등장하는 나라다.
북베트남과 베트콩 對 남베트남과 미국, 한국·호주·뉴질랜드 등 용병국과의 전쟁
베트남은 외세 침탈과 저항 운동 역사에서 우리나라와 유사한 점이 매우 많다. 혁명가들은 베트남의 민족해방 전쟁을 응용·활용해 왔다.
베트남은 역사적으로 중국에 조공을 바쳤고, 프랑스와 일본 식민 지배를 당했다. 우리 또한 프랑스의 식민 지배만 당하지 않았지, 똑같은 상황이었다.
특히 한반도가 38도선을 기준으로 남과 북으로 분단이 되었다면, 베트남은 17도선을 기준으로 남과 북으로 분단됐다. 그러나 베트남은 남베트남 내의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이 구축되어, 우리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베트콩의 무력과 밀림 그리고 해방구를 활용한 민족해방전선으로 미국의 꼭두각시 정부 남베트남과 싸웠다.
미국은 1964년 ‘통킹만 사건’을 구실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화력과 기동력으로 가난하고 농민이 대다수인 베트남을 침공했다. 미군은 핵무기를 제외하고는 사용할 수 있는 무기를 모두 사용했다.
전쟁 난민 작가 출신 비엣 타인 응우옌은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은 초음속 전투기, 네이팜탄, 백린탄, 항공모함, 전략폭격기, 제초제 그리고 섬광과 굉음 속에서 분당 6,000발을 발사할 수 있는 소위 미니 기관총이 장착된 헬리콥터를 사용하는 괴물 같은 거대 산업과 비대칭적 전쟁을 벌였다. (중략) 그들은 게릴라전이라는 비대칭적 방식으로 대응했다. (중략) 미국은 이 전쟁에서 5만 8,000명가량의 인명 손실을 보았고, 한국은 5,000명 정도가 목숨을 잃었다. 반면에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는 공식적인 전쟁 동안 약 4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라고 비대칭성을 지적했다.
베트남전쟁은 북베트남과 베트콩 對 미국 꼭두각시인 남베트남과 미국 그리고 한국, 호주, 뉴질랜드 등 용병국과의 싸움이었다. 또한 베트남전쟁은 동양에 대한 서양의 전쟁이며 남반구(글로벌 사우스)에 대한 북반구(글로벌 노스)의 전쟁이자 무엇보다 혁명에 대한 미 제국주의와의 전쟁이었다.
도쿄대 후루타 모토오 교수는 『역사 속의 베트남 전쟁』(일조각, 2007)에서 미군이 베트남에서 고전했음을 사망한 미군 병사 통계에서 찾았다.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서 미군 병사가 전사한 원인으로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은 포탄이나 대형 화기의 파편에 의한 사망인데, 각각 제2차 세계대전은 53퍼센트, 한국전쟁은 59퍼센트에 이른다. (중략) 그런데 베트남전쟁에서는 이러한 대형 화기의 파편으로 인한 전사자가 36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 그 대신 소형 화기에 의한 전사자는 51퍼센트, 계략이나 지뢰에 의한 전사자는 11퍼센트에 이르렀다. 이는 베트남전쟁이 소형 화기를 가지고 싸운 백병전이라는, 즉 미국이 군사력에서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없는 입장에서 싸웠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미국은 이 전쟁에서 50만의 군대와 가장 최신예 무기, 군사 기술에도 불구하고 패했다. 미국의 반공주의자들, 군인, 정치가, 언론들은 “위대한 미국이 그따위 베트콩에 굴복했다”, “협상 무용, 무력 해결”의 구호를 외쳐댔지만, 베트남전쟁은 그렇게 끝이 났다.
민전과 민자통 이후 최대 전선 조직, 남민전을 결성하다
남민전은 해방 공간의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과 4월혁명 공간의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 이후 최대 전선 조직이었다.
해방 공간의 민전은 1946년 2월 15일 결성대회를 치르며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1945년 11월 5일 결성), 전국농민조합총연맹(전농, 1945년 12월 8일 결성), 전국청년단체총동맹, 전국부녀총동맹, 조선문화단체총동맹, 학병동맹 등이 참가한 상설 공동 전선체였다.
4월혁명 공간의 민자통은 발기를 주도한 민족건양회와 혁신정당 사회당·사회대중당·혁신동지총동맹, 종교계 천도교·유교회, 지역 조직인 경북민족통일연맹, 피학살자유족회, 교원노조 그리고 청년단체인 민주민족청년동맹·통일민주청년동맹 등을 중심으로 1961년 2월 25일 결성된 상설 공동 전선체였다.
남민전 또한, 발기했던 당시 세 분이 인혁당, 전략당, 통혁당을 대표하는 대표성을 가진다고 볼 수는 없지만, 어떻든 당시 비합 조직들을 남민전으로 통합하여 박정희 군사 파쇼 정권 타도 민족해방전선을 결성한 것이다.
발기 3인의 대표적 약력이다.
중덕(中德) 이재문(李在汶) 선생은 경북 의성에서 출생하여 4월혁명 공간에는 통일민주청년동맹(통민청) 활동과 민족일보 기자로,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으로 구속 이후 계속해서 1971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 대구경북지부 활동,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되지만 1차, 2차 인혁당에 연루가 된 상태였다.
김병권(金秉權) 선생은 대구에서 출생하여 해방 공간에는 대구 대중일보 기자로, 4월혁명 공간에는 사회당 경북도당 상임위원으로 활동하다 1968년 남조선해방전략당(전략당) 사건에 연루돼 징역을 살고 나와 1975년 사회안전법 신고를 거부하며 수배 중이었다.
신향식(申香植) 선생은 전남 고흥에서 출생하여 서울대 졸업 후, 1965년 동아출판사 제작부에 취업하여 임금 투쟁과 노조 결성 그리고 학사주점 활동을 하였다. 이후 1968년 통일혁명당사건으로 구속되어 1972년 만기출소 후, 1975년 사회안전법 발효에 맞서 신고를 거부하며 지하투쟁에 돌입한 상태였다.
세 선생은 비밀 유지를 위해 1976년 2월 29일, 4년마다 한 번 2월에 29일을 두어 하루를 늘리는 윤년에 남민전을 발기한다. 비록 발기인은 셋밖에 안 되지만, 과거의 어떤 운동보다 각계각층을 결합한다는 목표를 분명히 했다.
남민전 강령 제1조는 “미일을 비롯한 국제제국주의의 일체의 식민지 체제와 그들의 앞잡이인 박정희 유신 독재 정권을 타도하고 민족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연합정권을 수립한다”라고 되어 있다. 즉 당시 남민전이 지향하는 것은 이 땅을 억누르고 있는 제국주의가 기본 척결 대상이고, 그다음에 그를 대리하는 박정희 정권을 타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민족적이고 민주적인 정부를 새롭게 수립해야 한다는 목적의식적으로 한 전선 운동이었다.
남민전, 성명·시위의 반유신 투쟁을 넘어 혁명으로
유신 군사독재 정권의 말기적 상황은 박정희 일인 지배 체제가 강고해, 통상적 방법으로 도저히 박정희 파쇼독재를 무너뜨릴 수 없었다.
특히 대학의 산발적인 시위와 유인물 뿌리기 그리고 명망가, 지식인 중심의 평화적 시위나 성명의 민주화 운동으로는 더욱 한계가 있었다.
그러다 1975년 4월 11일 유신체제와 긴급조치의 만행에 서울대 농대 김상진 열사의 할복 항거는 일회적인 시위와 유인물 살포에 머물고 있던 학생운동에 다시 불을 지피는 역할을 했다.
또한, 1976년 3월 1일 재야 원로·교수·종교인들이 ‘국민이 1인 독재 정권의 철쇄에 묶여…. 총파국으로 한 발 한 발 나아가고 있다. 박 정권은 책임을 지고 퇴진’할 것을 주장한 ‘민주 구국 선언’은 비록 20명의 발표 인사가 즉각 체포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투쟁의 장을 마련하였다.
남민전은 이런 엄혹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자기 몸을 희생하는 그야말로 해방 공간의 투쟁처럼, 혁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또한 4월혁명 공간처럼 청년, 학생, 교사, 혁신계 등 남민전에 참여한 성원들은 매우 광범위하고 조직적이었다.
특히 광범위한 출신을 활용한 남민전의 활동은 그야말로 기상천외하였다.
서울 시내 전역을 대상으로 학교, 버스정류장 등에 반독재 삐라 살포 그리고 기관지인 「민중의 소리」를 대학가에 직접 돌리는, 이전의 비합법 조직에서는 볼 수 없는 대담한 투쟁도 불사했다. 또한 “격! 몰아내자 박정희” 제하의 ‘파라슈트 작전’ 등을 개발하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남민전은 반유신 투쟁 자금 조달을 위해 보석상과 고위 공직자 자택을 침입한 ‘지에스 작전’과 ‘봉화산 작전’ 그리고 당시 민중에게 공분을 산 악덕 기업 동아건설 회장 자택을 강탈한 ‘땅벌 작전’ 등으로 민중에게 오히려 희망을 주었다.
특히 6‧3한일협정반대 투쟁 당시 최초로 화염병이 나왔지만, 남민전은 그것 이상의 혁명적 무장투쟁을 위해 예비군 훈련장 무기 획득도 했다.
이것은 소위 인혁당 사건을 조작하여 국가 살인한 박정희 유신체제가 평화적인 시위나 유인물 몇 장으로는 타도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남민전 성원들은 성명·시위의 반유신 투쟁을 뛰어넘어, 해방 공간이나 4월혁명 공간처럼 혁명적으로 자기 몸을 던졌다.
물론 1979년 8월 남민전 산하 조직인 민주구국학생연맹은 신민당사에서 농성 중이던 YH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가혹한 진압과 이 과정에서 사망한 김경숙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 ‘횃불 투쟁’으로 명명된 유인물을 배포하는 학생들의 민주화 투쟁도 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10월 4일 국회에서 김영삼 의원 제명 결의안이 통과되던 엄중한 난국을 돌파하기 위해, 10월 9일과 16일(이후 박정희 암살 후 11월 13일) 남민전 사건을 발표하면서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위한 전위대로서 폭력에 의해 적화통일을 기도해 온 대규모 반국가 조직체’, ‘자생적 공산혁명세력’으로 몰아붙이며 84명을 검거한다.
신향식 선생의 ‘삶과 죽음’ 그리고 김남주 시인의 「전사 2」
추모연대 ‘열사의 삶’에 나와 있는 신향식 선생의 ‘삶과 죽음’이다.
동지는 청년 시절, 서울에서 노동청, 동아출판사 등에서 일하면서 ‘60년대 학사회’의 상무간사로, ‘학사주점’의 봉사부장, 총무부장으로 활동하였다.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검거되어 징역 3년 6월을 선고받고 복역 후 1972년 출옥하였다.
1972년 10월 박정희 정권이 유신쿠데타를 일으켜 유신헌법을 선포하고, 1975년에는 사회안전법이라는 악법을 만들어 민족민주운동가들을 합법적으로 감시, 투옥할 수 있도록 하자 그에 맞서 지하투쟁을 결심하였고, 이후 피신에 들어가서 1976년 2월 이재문, 김병권 동지들과 함께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를 결성하여, 중앙위원으로서 1979년 10월 검거될 때까지 민족의 자주·민주·통일을 위해 박정희 유신 독재 정권에 맞서 헌신적으로 투쟁하였다.
동지는 검거되어 1980년 12월 법정 최고형인 사형을 선고받아, 1982년 10월 8일에 조국의 통일과 민주정부 수립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서울구치소에서 형 집행을 받아 운명하였다.
남민전 동지 김남주 시인의 「전사 2」의 일부로 신향식 선생 추모의 결의를 대신한다.
해방을 위한 투쟁의 길에서 많은 사람이 죽어갔다 많은 사람이 실로 많은 사람이 죽어갔다
수천 명이 죽어갔다 수만 명이 죽어갔다 수십만 명이 다시 죽어갈지도 모른다
지금도 지금도 죽어가고 있다 나라 곳곳에서 거리에서 공장에서 감옥에서 압제와 착취가 있는 곳, 바로 그곳에서
어떤 사람은 투쟁의 초기 단계에서 죽어갔다 경험의 부족과 스스로의 잘못으로 어떤 사람은 승리의 막바지 단계에서 죽어갔다 이름도 없이 얼굴도 없이 살을 도려내고 뼈를 깎아내는 지하의 고문실에서 쥐도 모르게 새도 모르게 죽어갔다
(중략)
오늘 밤 또 하나의 별이 인간의 대지 위에 떨어졌다 그는 알고 있었다 투쟁의 길에서 자기 또한 죽어갈 것이라는 것을
그 죽음이 결코 헛되이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렇다 그가 흘린 피 한 방울 한 방울은 어머니인 조국의 대지에 스며들어 언젠가 어느 날엔가는 자유의 나무는 열매를 맺게 될 것이며 해방된 미래의 자식들은 그 열매를 따먹으면서 그가 흘린 피에 대해서 눈물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쑥스럽게 부끄럽게 이야기할 것이다 <저작권자 ⓒ 자주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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