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백현에 깃든 항일투쟁사
-김일성 부대와 중조혈맹의 뿌리
리송덕 역사학자
기사입력: 2011/12/06 [16:40]  최종편집: ⓒ 자주시보

 

[편집자 주: 이 글은 연변박물관 혁명사부 전 주임이자 동북3성지역 항일전적지에 대한 가장 많은 현장조사를 진행하고 많은 관련 저서를 출간한 조선족 리송덕 역사학자가 자주민보에 기고한 첫 글이다. 김일성 주석과 관련된 존칭 부분은 규정된 편집방향상 생략하려고 했지만 리송덕 역사학자가 사상과 정치를 떠나 역사학자로서 한 역사적 인물에 대한 신념의 표현이라며 고치지 말 것을 요청하여,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르지만 원로 역사학자의 의사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그대로 전제한다.]


▲ 장백현 일대 항일전적지     © 자주민보

 

▲ 김일성 주석이 장백현 일대에서 일제와 무장투쟁을 전개하며 비밀독립운동 조직인 '조국광복회'를 도처에 꾸리기 위한 사업을 정력적으로 전개하던 당시 최현부대 사진사가 촬영한 것, 김일성 주석과 김정숙 여사가 막 사랑을 시작하던 때로 보인다. 김일성 주석이 개인적으로 가장 아꼈던 항일투쟁 사진이라고 한다.   ©자주민보



[장백현 사람들이 혁명적 원군전통의 모범을 창조하고 빛내인 영웅적 인민이다. 원군사업은 범 국민적인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장백사람들이 보내준 원호물자들에는 어느 것이나 눈물겨운 지성이 깃들어 있다. 밤을 세워가며 짚신을 삼고 주구들의 눈을 피해 보초를 서며 방아를 찢는다.

항일대전의 나날에 물방아소리와 더불어 장백사람들 중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진 이 몇이고 감방에서 숨진 이는 얼마인가.
원군의 길을 걷다가도 백두설령에서 몸을 얼구로 쓰러진 사람을 생각하면 머리가 숙어지고 감사의 정이 가슴에 차 넘친다.]-'세기와 더불어' 제5권 182쪽 ‘물방아 소리’중에서


김일성 수령님께서는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장백 조선족 자치현 조, 중 인민들의 원군사업을 이렇게 높이 평가해주셨습니다.


그리고 2012년 4월 15일은 조선의 위대한 영수 김일성 장군 탄생 100주년입니다.

필자는 연변에 사는 역사학자로서 그간 장백현 일대의 항일유적지를 취재한 내용과 최근 알게 된 할 항일투사 류춘심의 딸인 류복순 여사 가족의 이야기 그리고 장백현 일대를 직접 조사한 증인들의 이야기 등을 종합하여 정리해보았습니다.

이를 통해 김일성 주석 탄생 100돌의 의미와 장백현 일대 우리 선혈들의 항일투쟁사도 되새겨 보고, 류복순 여사의 부친의 유지이자, 본의의 간절한 염원인 장백현 항일전적 표식비 건립 사업에 도움을 주고자 합니다.

▲ 유복순 여사     ©자주민보

관련기사 참조: http://www.jajusibo.com/sub_read.html?uid=8003


다음은 류복순 여사(1938생)의 증언입니다.


[저는 산동성 제남시에 살고 있는 류복순이라고 합니다. 길림성 장백 조선족 자치현 17도구 리전동촌에서 1938년에 태어났습니다. 만 13살 되는 해에 중국인민지원군에 입대하여 40여년 간 공군병원에서 근무하다가 정년퇴직하였습니다.

내 나이 74세가 되었는데 남은 여생에 지난항일전쟁시기 내가 살던 고향 장백현 인민들의 항일의 피어린 사적과 아버지(류춘심), 삼촌(류춘선), 어머님(심확실) 그리고 선배들께서 들려준 이야기와 또 내가 어린 시절에 직접 목격하고 경험했던 기억들을 더듬어 장백현 인민들의 우수한 혁명전통을 글로 적어, 자라나는 후대들에게 물려주고자 합니다.

먼저 내가 태어났을 때의 아명은 ‘얼음새꽃’이라고 불렀답니다. 눈 속에서도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그 기상을 닮으라고 그렇게 불렀답니다.

나는 1938년 태어났는데 그때 장백현의 혁명정세는 엄혹했습니다. 일제의 혹심한 파쇼통치가 강화되고, 집단부락을 만들어 주민들을 모아놓고 꽁꽁 감시를 하여 유격대와 철저히 차단시키고 여기 저기 산개된 마을들과 혁명적 인민들에게 삼광정책 즉, 모조리 불사르고 빼앗고 죽이는 정책을 펴는 등 귀축같은 만행을 저질러 장백 인민들과 항일연군에게는 매우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장백현의 당조직과 당원 등 애국적 군대와 인민들은 놈들의 엄밀한 감시에도 불구하고 모험을 무릅쓰고 항일연군 부대의 길을 안내해주고 양식, 의복, 신, 약품, 소금, 성냥 등을 보내주었으며 항일연군부대를 힘 있게 지원하였습니다.

1930년대 초에 우리 집은 조선의 양강도에서 살다가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뒤 압록강을 넘어 장백현 17도구 막치기(편집자 주: '치기'는 끝부분이란 말이다. 막치기는 맨 끝부분을 의미한다.)인 영화동, 40여 산재호(드문드문 흩어져 있는 집들)가 살고 있는 곳에 자리 잡았습니다.

그 때 이곳에 김세윤(필자 주-이 사람이 지역 책임자) 김형권(필자 주-김일성 장군 삼촌), 최효일, 박차석, 등이 함께 덕수골을 거점으로 백산청년회를 조직하였습니다. 반일의 뜻을 둔 저희 삼촌(류춘선 둘째아들)과 저희 아버지 류춘심도 백산청년회에 가입하여 반일활동을 진행하였습니다.]-
유복순 여사 증언


류복순 여사는 이렇게 자신의 아버지 형제가 김일성 장군이 조직지도하던 항일혁명조직에 이사 온 초기부터 관계했다고 증언하였습니다.

1936년 8월 김일성 장군이 직접 이끌던 항일연군 제2군 6사의 김주현을 책임자로한 선발대가 장백현으로 들어와서 처음 자리 잡은 곳이 17도구 덕수골 태양촌입니다. 이 때 이도강 경찰서와 혜산경찰서 200여명이 덕수골 막치기로 몰려와서 1936년 9월 1일 오후에 우리 김일성 부대와 약 반시간 전투가 벌어졌는데 김일성 장군 부대가 매복전술로 적 40여명을 순식간에 소멸하였습니다.

이 전투가 장백현에서 처음으로 울린 첫 전투총성으로 장백인민들의 반일투쟁의 신심을 크게 북돋워주었습니다.


김일성 장군이 인솔한 항일연군 부대는 홍두산, 곰의골, 지양개, 부후물, 천봉, 가재수, 덕수골 등지에 밀영을 세우고 전투원들을 각지에 파견하여 군중사업을 벌이시었습니다.

이리하여 항일연군 제2군 6사가 직접 영도하는 장백현 당위원회가 세워지고 당조직을 건립확대하고 반일혁명단체들인 반일구국회(주로 한족들은 이렇게 부름)와 조국광복회 등 조직을 세워 홍색근거지를 확대하고 있었고, 인민들이 항일연군부대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여 나서던 형세였습니다.


항일연군 제2군 6사는 박득범을 책임자로 한 4사, 조국안(한족, 길림시절부터 김일성 주석과 함께 항일에 들어선 동지)을 책임자로 한 2사가 서로 협력하여 소덕수, 반절구, 도천리, 홍두산, 이동강 전투에서 적을 심중하게 타격하였다. 이로써 장백인민들의 반일투지는 더 없이 드높아졌습니다.


류복순은 “저희 삼촌은 당조직에 가입하고 17도구 조국광복회 평강덕(영화동) 지회 김세윤 책임자와 함께 반일활동을 진행하였습니다.”라고 말했는데 1937년 봄에는 20도구, 17도구, 도천리를 중심으로 항일유격근거지가 건립되고 전 현적으로 확장되어가고 있었습니다.

1936년 10월부터 1937년 10월까지 1년여 간 항일연군의 전투승리와 당조직의 확대발전 그리고 반일단체들이 확대 발전됨에 따라 크게 각성한 인민들은 분분히 항일대오에 참군하였습니다.
1937년 10월 통계에 따르면 4사(박득범), 2사(조국안), 6사(김일성) 항일연군 부대의 대오는 500여명으로 발전하였습니다.-‘장백혁명투쟁사자료집’(장백조선족자치현당사공작반공실) 43쪽

이로써 항일연군의 가장 큰 어려움은 식량공급이었다. 적의 손아귀에서 빼앗아 군량을 보충하는 것 외의 대부분은 군중들이 생명 위험을 무릅쓰고 가져온 양식에 의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각 지방의 당조직과 군중단체들은 군중을 조직 발동하여 항일연군의 길안내며, 정보, 통신연락 및 양식, 물자운반, 부상병 치료 및 보호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일제는 혁명형세가 고조되는 것에 당황망조하여 항일연군과 인민의 연계를 끊기 위해 1937년 8월부터 3광정책을 쓰며 산재호를 한 곳에 모아 집단부락을 만들고 무장자위단과 각종 특무조직과 경찰, 헌병 등을 배치해 놓았습니다.

1937년 ‘주경동참사’도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참사는 지봉팔 노인이 항일혁명군 부상병 2명을 치료해주다가 토벌대가 들이닥치자, 부상병을 빼돌리고 고발한 변절자를 처단해버렸는데 그에 대한 앙갚음으로 일제가 주경동 전 주민을 학살한 사건으로 총 39명이 학살 당했습니다. 장백현에서는 이 유적지에 기념비도 세우고 현재 혁명역사 교양기지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제의 집단부락 정책으로 당시 항일연군은 매우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1937년 겨울에 큰 눈이 내려서 더욱 식량공급이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장백현 당조직과 애국적 인민들은 놈들의 엄밀한 감시에도 불구하고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계속 양식, 천, 의복, 신발, 약품, 소금, 성량 등을 계속 밀영에 보내주었습니다.


▲ 혜산에서 압록강 건너 중국 18도구하와 압록강이 만나는 지점에 있는 동굴로 김일성 주석이 비밀독립운동을 할 때 이용했던 은신처이다. 원래의 입구는 공사용 돌을 캐가느라 다 무너지고 동굴 끝 부분만 이렇게 절벽에 노출되게 되었다.     ©자주민보

 

▲ 구글 지도로 찾아본 김일성 주석의 대밭골 동굴     ©자주민보

 

당시 류복순 여사의 가족들도 항일혁명군 지원에 적극 나섰는데 다음은 그에 관한 증언입니다.

[저희 삼촌과 아버지 어머니께서 항일전쟁의 나날에 원군사업을 하시던 일과, 장백인민들이 원군사업을 하던 사실들을 열거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17도구 리전동 마을 500여 미터 뒷산에 지하에 산굴이 있었습니다. 이 산굴 입구는 장백현으로부터 림강현으로가는 도로 옆에 있는데 18도구 냇물이 압록강과 합류하는 지점 다리인 하구교 아래에 있었습니다.

10여 년 전 장백현과 림강시 버스길 건설 당시 이 일대 돌을 캐서 길을 닦는데 사용하는 바람에 원래의 굴 입구 등이 허물어지고 그 안쪽 끝부분만 조금 절벽에 노출 된 상태입니다.

이 산굴은 사람의 활동이 가능한 깊이가 약 50여미터였다고 한다. 입구는 좁았지만 들어가면 50여 명이 둘러앉을 수 있는 넓은 공간이 있었으며 이곳에서 불을 피우면 연기가 산 정상 3곳으로 흘러나가서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연기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더욱이 보통사람들은 다리 아래에 풀 더미 속에 감추어진 이 입구를 알지 못했으며 오직 1930년대 초반에 김형권 등 백산청년회가 활동할 때 이곳을 비밀연락처로 활용하였습니다.

1936년 8월에 항일연군 6사 선발대가 온 다음에 이곳을 지하당 일꾼과 조국광복회의 주요한 책임자들의 비밀 접선, 회합 장소로 활용하였으며, 그 뒤 김일성 장군님께서도 이 산굴에 머물면서 주변 조직원들과 조선(국내)에서 오거나 국내로 파견되어 나가던 일꾼들을 지도하던 곳이기도 합니다.

그때 저희 아버지가 삼촌의 지시에 따라 적들의 눈을 피해가면서 양식을 가지고 하구교 다리 밑에 와서 지하공작원과 접선할 때 암호를 아버지에게 들어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공작원이 묻기를 “어디에서 오시는가”라고 물으면 우리 아버지는 “얼음새꽃 골에서 왔다”고 대답하면 또 그분이 “무슨 일로 왔는가”고 물으면 아버지는 목수들이 구멍을 뚫을 때 쓰는 공구인 “끌을 가지러 왔다”고 대면 암호가 맞았고 그러면 그 공작원이 그 물건을 다리 밑에 놓고 가라고 지시하고 또는 아버지에게 연락 통신문을 주면서 밀영에 가져다 주라고 지시하면 아버지가 그것을 가지고 밀영까지 가져다주었답니다.

삼촌이 직접 통신문을 가지고 와서 아버지에 주면서 밀영 등에 가져다주라고 한 적도 있습니다.

아버지는 때로는 쌀장수, 물고기장수, 나무장수, 소장수 등 여러 장수로 가장하여 틈만 나면 쌀 등 여러 원호물자를 지고 밀영에 가져다 주었습니다. 밀영에 갈 때는 허리춤에 작은 도끼를 차고 가서 나무에 표시를 하여 돌아올 때 길을 찾을 수 있게 했다고 합니다.

어머니도 이런 어버지를 적극 도왔는데 내가 5살 때 쯤 찰떡을 치면 소리가 들려 혹시 돌아다니던 밀정의 의심을 살까봐 시루떡을 잔뜩 쪄서 새벽에 장백진에 떡장사를 하러 간다며 저에게 동생들 잘 돌보고 있으라고 하고 떡을 이고 나갔는데 금방 돌아오셨기에 “왜 이리 빨리 돌아왔냐”고 물으니 어머니는 “가다가 넘어져서 떡을 다 버렸다”라고 대답했었습니다. 후에 어머니는 그 떡도 인근 항일혁명군에게 가져다 준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외에도 어머님 아버님, 삼촌과 동네 분들이 유격대를 원호한 일은 이루 다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 북측 신파(현 김정숙 군)의 김정숙 여사가 압록강을 건너다니며 비밀지하독립혁명사업을 진행했던 나루터 사적비와 일제 감시 포대 사적     © 자주민보

 

▲ 중국 측에서 13도구나룻터(북 신파나룻터 맞은편)세운 김정숙 여사 항일 유적표식비     ©자주민보, 표식비 뒤에 흐르는 강이 압록강이고 그 건너가 김정숙군이다.

 
특이한 일은 김정숙 여사가 조선의 신파(김정숙 군)로 비밀지하조직사업을 위해 건너갈 때 그 나루터 인근에 있던 우리 집에 들러 도시락을 드시고 간 적이 두어 번 있었는데 어머니가 나루터까지 나에게 바래다 주라고 해서 김정숙 여사 손을 잡고 함께 나루터로 나간 적이 있습니다.

김정숙 여사는 도시락을 드시면서 나에게도 나누어 주던 일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나는 그것이 좋아 아주머니가 오면 그렇게 반가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머니는 김정숙 여사가 떠나고 나면 돌아서 눈물을 훔치며 “에그, 어떻게 저런 여장부가 다 있을까. 남정네들도 나다니기 무서워하는 밀림을 여자 혼자서 저렇게 다니기가 얼마나 무섭고 힘들까”라며 감탄을 하면서도 안타까워하셨습니다.

당시 밀림에서 나물캐던 여성들이 강도에게 당해 시신으로 발견되는 경우가 있어 여성들이 혼자 밀림에 들어가는 일을 매우 두려워했습니다. 어머니도 아버지랑 함께 밀림에 갔다가 아이들 걱정에 먼저 내려오다가 불쑥 나타난 한 남자가 자꾸 따라오자, 기지를 발휘해 큰아들 이름을 크게 부르며 마구 달려 내려와 겨우 화를 면했다고 합니다.

1965년 항일전적지 답사단이 우리 17도구에 오시어 ‘대밭골’이란 곳을 물었을 때 리전동에는 ‘대밭골’을 아는 분이 유일하게 저희 아버지뿐이었습니다.

우리 집은 17도구치기 영화동에 자리를 잡았다가 일제가 37년 집단부락을 만들 때 조직의 비밀명령에 따라 삼촌과 함께 리전동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바로 ‘대밭골’이란 명칭은 이곳에 리전동이라는 집단부락이 만들어지기 전 산재호가 있을 때의 명칭이었습니다.

조사단은 다시 묻기를 “그럼 대밭골 근처 어디에 지하동굴을 있는지 아는가?”

그래서 저희 아버지께서는 “나의 동생 류춘선은 원래 당원이고 조국광복회의 지회장으로서 상급의 지시에 따라 이곳 지하동굴에서 비밀조직사업을 전개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 굴의 위치를 압니다. 나도 조국광복회 회원으로서 동생의 지시를 받들어 양식도 운반하고 통신연락도 하여 밀영에 보내군 하여 그 지하동굴의 입구를 알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조사단과 함께 그 굴에 들어가 확인했습니다.

1965년 그해 9월 조선노동당 창건 20주년이 되는 해 대형 경축행사를 항일유적지 답사단과 함께 혜산에서 온 경축단이 그 굴 앞에서 진행하였습니다.

나는 그 경축행사 때 아버지에게서 이 산굴에 대한 이야기를 상세히 들었습니다.

이곳 리전동은 김일성 장군님의 삼촌 김형권 선생이 우리 삼촌과 함께 백산청년회 활동을 하던 곳이고 우리 아버지께서도 그 때 백산청년회에 가입하였다고 말씀하셨고 그 뒤 항일연군(6사 김일성 부대)가 온 다음에 우리 삼촌은 조국광복회 17도구 리전동 지회장으로 주로 연락통신을 담당하였으며, 김일성 장군이 이 17도구에 왔을 때도 삼촌이 영접했다는 사실을 아버지에게서 들어서 알게 되었습니다.
(필자 주: 광복 직후 류복순 여사 삼촌인 류춘선이 20만 인구의 혜산 철도국 책임자로 등용된 점을 보면 그가 항일혁명투쟁 당시 중요한 인물이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이 대형 기념행사의 소식이 당시 조선의 노동신문에까지 보도되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 류복순 여사의 증언



이 류복순 여사의 증언과 증거 동굴은 장백현 인민들이 김일성 장군과 항일혁명군을 어떻게 지지 원호하였는지를 생생하게 알려주는 자료로서 중요한 가치가 있습니다.

특히 혜산 사건으로 류복순 여사의 가족들은 심한 고초를 겪었음에도 끝까지 항일투쟁을 전개했다는 점을 후대들은 꼭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1937년 10월 조선에서 변절자의 고발로 혜산의 헌병과 경찰들은 장백현에 와서 공산당 조직성원과 광복회 회원들을 대대적으로 검거, 수색, 체포하였는데 중국공산당 장백현의 현위원회 서기 권영벽, 리제순 등 지도부들과 반일구국회 성원들이 체포 구금되었다. 그 수가 400여명이나 됩니다.-‘장백혁명투쟁사자료집’(장백조선족자치현당사공작반공실) 44쪽


이 때만 해도 류복순 여사의 삼촌은 체포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일제가 변절분자들을 묶어서 1938년 봄 ‘귀순공작반’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체포되지 않은 지하당원과 반일회 성원들을 하나하나 체포하였습니다.

이때 소장수로 가장하고 지하사업을 벌리던 류복순 여사의 삼촌도 변절자의 밀고로 체포되었습니다.


류복순 여사는 관련하여 이렇게 증언하였습니다.

[삼촌(류춘선)은 금화(반절구)경찰서에 가서 갖은 고문을 다 당하고 심문을 받았으나 끝까지 소 장사꾼으로 우겼습니다. 이에 연루되어 아버지, 삼촌댁도 경찰서에 불려가서 혹형을 받았습니다. 금방 풀련난 삼촌댁은 이후 삼촌 감옥 면회를 갔다 오면 온갖 고문으로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남편의 모습 때문에 며칠 동안 밥도 먹지 못하고 눈물만 흘렸습니다.

그런 고문과 악형에도 아버지는 쌀장사꾼, 삼촌은 소장소꾼이라고 끝까지 우겼습니다.

그 때 삼촌은 놈들에게 “내가 장사 밑천으로 집에 숨겨둔 아편과 형님 집에 있는 아편이 있을 것이니 가서 확인해 보라”라며 경찰과 싸웠습니다.

그래서 경찰들이 직접 집에 와서 아편을 확인하고서는 어느 정도 믿어주었으며 서울 서대문감옥으로 보내지 않고 경제사범으로 판결, 연길감옥으로 보냈습니다. 아편은 자기들이 다 가져갔습니다. 당시 아편은 지금의 금과 같은 화폐구실을 했던 귀중한 물건이었습니다.

삼촌은 8.15 해방과 더불어 7년 옥살이를 하고 풀려나 소련 홍군과 김일성부대가 함께 일제를 치고 조선을 해방시킬 때 조국으로 들어가 혜산 철도책임자로 활동하다가 이후 애석하게도 교통사고로 사망했습니다.

삼촌의 유해는 조선 혜산 열사릉원에 안장되었습니다.

1937년 10월 혜산사건에 연루되어 삼촌과 함께 사업을 하시던 전우(이름은?)가 체포되었는데 놈들은 금화경찰서에서 갖은 악형을 가하다가 이 혁명가를 리전동 산굴 앞에 끌고 와서 총살한 다음 그 시체를 옥수수밭에 버렸습니다.

지금 금화촌에 살고 있는 92세의 ‘위’가라는 성을 가진 한족 로인(지금 살아있음)이 당시 이 시체를 가만히 수습하여 인근에 묻었다가 해방 이후 1965년 조선 사람들이 와서 유해를 수습하여 조선 하구촌 대안에 안장하고 큰 비석을 세웠습니다. 우리가 이쪽에서 육안으로도 그 비석을 볼 수 있습니다.

위 로인은 학살 당시 그 혁명가가 심하게 저항을 하는 바람에 일제가 총살하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전해주었습니다. (필자 주: 아마 동굴 등 비밀근거지를 알아내려고 현장에 끌고 왔다가 강력히 저항하자 학살한 것으로 추정됨)]-
류복순 여사 증언


류복순 여사의 위의 증언만 봐도 당시 김일성 부대를 도와준 인민들에 대한 일제 탄압이 얼마나 극악했는지 단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제의 그런 탄압에도 불구하고 장백현 인민들은 변함없이 항일혁명군을 지지 원호하였습니다.


▲ 장백현 18도구 이텐동 마을의 서태순 할머니(94세)     ©자주민보


지난 9월 26일 지금 장백 조선족자치현 17도구 리전동 촌, 즉 비밀 산굴 인근 마을에 살고 있는 금년 94세의 서태순 할머니를 직접 만나 들어보니 당시 조직원이 아닌 평범한 인민들도 대부분 일제에게 들켜 목이 떨어지더라도 당연히 김일성 장군을 지원해야 한다는 생각을 다들 품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서태순 할머니는 남편이 한태익이고, 시아주버니가 한치익인데 이 시아주버니가 반일회 지하당 책임자로서 서태순 할머니가 23살 되는 해(1940년즈음) 김일성 장군님이 시아주버니 집 뒤고방에 2일간 머물다 갈 때, 직접 밥을 지어 드렸다고 합니다.

가난하여 좁쌀에 감자를 넣어 밥을 해드렸는데 시아주버님은 김일성 장군님이 “참 맛있다”고 달게 드셨다고 했습니다.

그때 서태순 할머니는 시아주버님이 "김일성 장군님 이야기를 하면 우리들 목이 떨어진다고 절대 말하지 말라"고 해서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이제야 처음 한다며 취재차 방문한 필자에게 들려주었습니다.

당시 서태순 할머니 맏동서는 갖 출산을 한 상태라 밥을 짓지 못해 서태순 할머니가 김일성 장군님의 밥을 지었다고 합니다. 김일성장군님은 외투를 둘러입고 광목버선에 초신을 신고 왔었답니다.

 

▲ 2011년 9월 26일 반절구(금화촌)의 중국 한세부 로인의 증언을 통해 김일성 장군이 지휘한 반절구 전투에 대해 조사하는 리송덕 역사학자     ©자주민보



리전동에서 8키로미터 정도 떨어진 반절구(금화촌)에서도 류복순 여사 삼촌과 관련된 전투가 벌어졌다고 해서 지난 9월 26일 찾아가보았습니다.

역사 자료에 따르면 1938년 5월 2일 김일성 장군이 지휘한 반절구(금화촌)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류복순 여사는 아버지인 류춘심에게 들었는데 그때 전리품을 운반하는 길안내를 류복순 여사 삼촌 류춘선이 했다고 합니다. 물론 아버지도 함께 물자 운반을 하였답니다.


반절구에는 그 전투를 생생하게 알고 있는 한세부(한족-1932년생)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 노인이 6살 때 금화촌에서 벌어졌던 전투를 아버지가 아들(한세부)에게 들려준 것입니다.

그때 금화촌은 180여 호의 큰 집단부락으로 네 귀에 포대를 쌓고 무장자위단 40명(단장 송성업-한족)에 경찰 9명이 있었습니다. 한세부가 기억하는 경찰 이름은 한옥봉, 리수창, 한규장, 한광규, 한규얼, 등이었는데 악질 마금두산림경찰토벌대 일부도 이 집단부락에 주둔하고 있었답니다.

김일성 장군님이 직접 지휘한 6사 3개 중대가 1938년 5월 2일 밤 9시에 전투를 시작하여 40분만에 금화촌을 점령하였습니다. 자위단 단장을 비롯하여 네놈을 죽이고 15명을 포로하고 나머지는 투항하였습니다.


역사자료를 보면 김일성 부대는 보총 15자루, 경기관총 1자루, 밀가루 200여 포대, 10여 상자의 탄약과 많은 군용품 물자를 노획하였습니다. 이 많은 전리품 중에 일부는 백성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머지는 150여 명을 동원하여 밀가루, 입쌀, 천, 탄약상자 등을 밀림 속을 이동 천교부근까지 운반하여갔습니다. 여기에서 40여 명의 청년들이 항일연군에 가입하였고 류복순 여사의 증언에 따르면 여사의 아버지와 삼촌은 혁명조직의 지시에 따라 다시 돌아왔습니다.


한세부의 증언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도 경찰이었는데 돌려보내주어 돌아왔다고 합니다. 경찰임에도 김일성장군이 “너희들을 살려보낼 테니 나쁜 짓 하지 말고 일제와 싸우라” 해서 너무 감격하여 밀림을 걸어 내려오는 동안 항일연군을 적극 도울 의지를 가슴에 새겼다고 합니다.


1999년 직접 현장조사한 바에 따르면 지금 13도구 중학교 수학선생으로 일하다 퇴임한 84세(1927년생)의 채규응(蔡奎應)선생은 그의 아버지 채항묵이 장백현 상강구 광복회 지회 책임자로 사업하다가 ‘리전동 광복회’ 성원들과 함께 활동했다고 증언했습니다.

리전동은 류복순 삼촌, 류춘선이 책임자로 있던 마을입니다. 그러니 그들과 함께 사업한 것입니다. 채항묵은 리전동에서 체포되어 총살당했고 해방 후 북에서 조선 혜산 열사릉원으로 이장해갔습니다.


이상 내가 듣고 보고 알고 있는 사실을 종합하여 말씀드렸습니다.


류복순 여사는 끝으로 “내가 남은 여생에 일제식민통치 시기 반일성전에 몸과 마음을 다 바친 선조들의 영웅적 업적과 당의 영도 아래 창조한 장백현 인민들의 자랑스런 혁명투쟁사를 후대에 길이 전하고자 이 리전동 지하동굴 앞에 사적 표식비를 꼭 세우고 싶습니다.”라며 간절한 염원을 표하였습니다.

필자도 생각도 같습니다. 가능하다면 더불어 이곳에 장백현 인민들의 항일혁명투쟁 사적관을 꾸려 중조인민의 공동항일투쟁 업적을 널리 소개, 중조인민이 피로써 맺은 우의는 누구도 깨뜨릴 수 없다는 혁명전통을 후대들에게 전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간삼봉 전투는 만주항일전쟁 중에서 단일 전투로는 가장 큰 전과를 올린 전투이다.그때 김일성 장군이 지휘처로 삼았던 돌배나무가 지금도 보존되어 있는데 장백현 문물지에서는 이 나무를 ‘중조우의수’라고 명명했다.     © 자주민보/ 리송덕 역사학자 제공



중조인민의 반일공동투쟁의 사적지가 이 장백현 일대에 특히 많이 있습니다.


첫째, 김일성동지 소년시절 8도구 소학교 공부하던 자리, 8도구에 있는 아버지 김형직 선생의 의원자리

둘째, 김일성 삼촌 김형권 선생이 백산청년회 비밀근거지로 삼고 이용한 리전동산굴

셋째, 김정숙 동지께서 조국광복회를 조직하고 활동하시던 도천리 우물터

넷째, 김정숙 동지께서 13도구 압록강 대안의 신파(김정숙군)를 넘나들던 압록강 나루터와 일제 감시 포대, 이와 관련하여서는 조선 측과 중국 측 모두 나루터 표식비를 이미 세워놓았다.

다섯째, 37년도 6월 국내진출 첫 전투인 보천보전투를 위해 압록강을 건너던 자리(21도구 제비등판)

여섯째, 37년 6월 29일 간삼봉전투를 항일연군 2군 6사(김일성 사령관)가 1군 2사(한족 조국안 사령관) 2군 4사와 공동으로 진행했는데, 일제 라남74여단(친일파 김석현이 지휘) 500여명이나 살상했던 유적터가 있다. 이 간삼봉 전투는 만주항일전쟁 중에서 단일 전투로는 가장 큰 전과를 올렸다. 그때 마시던 우물과 김일성 장군이 지휘처로 삼았던 돌배나무가 지금도 보존되어 있는데 장백현 문물지에서는 이 나무를 ‘중조우의수’라고 명명했다.

일곱 번째, 주경동참안지 39명 학살

여덟 번째, 리계순 열사묘

아홉 번째 장백현 가재수에 있는 조오선 열사의 묘, 적들이 모두 경찰서에 집결되어 있었는데 그 경찰서를 지키는 포대를 깨기 위해 조오선 (54세)할머니가 도끼로 포대의 문을 깨부수어 유격대가 포대를 점령할 수 있게 했다. 할머니에게는 돌보는 아이가 3명이나 있었는데도 그런 용기를 낸 것이다.

열 번째, 항일연군 1로군 정위 위증민이 앓을 때 지양개 밀영에서 김일성 장군이 병치료를 조직하고 돌봐줌, 설에 교즈를 함께 들며 국제주의적 전우애를 나누었다.

열한 번째, 2사 사장 조국안이 열하원정 이후 겨울에 만신창이의 신세로 귀환했을 때 김일성 장군님이 의복을 지원하고 1달간 휴식을 보장하였다. 이후 원기를 회복한 2사는 독자적으로 도천리전투 전개하여 대승하였다.

열두 번째, 교방의 5형제가 김일성 장군 부대에서 싸운 이야기, 이중에 교방의는 김일성 장군 경위부대의 통신원으로 활동하다가 김일성 주석에게 날아온 총탄을 몸으로 막아 희생되었고, 전투에서 총에 맞은 그 다섯째 동생 교방신을 김일성 주석이 관운장 이야기를 하면 총알제거 수술을 해주는 등 중조우의를 맺은 가문-장백혁명투쟁사 자료집 쪽(장백조선족자치현당사공작반공실)

열세 번째, 중조 항일연군의 비밀근거지 ‘곰의골’, ‘홍두산’, ‘지양개’ 밀영 터 등등


이밖에 100여 차례 일제와 싸워 모두 승리한 항일연군 전전지 등 장백현 곳곳이 모두 중조 공동 투쟁 유적지라 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김일성 장군님이 조선사람들은 물론 중국인들과도 어떻게 친혈육보다도 강한 사랑과 전우애를 나누었는지 생생한 체험담을 담고 있는 중국 공군 지휘관이었던 교방의의 회상기를 일부분 소개합니다.

▲ 중국 항일혁명가 교방의(위) 교방신(아래)     © 자주민보 / 리송덕 역사학자 제공



김일성주석 중국인호위병 교방의의 회상기

-다음 글은 교방의가 63년(당시 52세) 공군 임직시절 고향(장백 19도구)을 방문하고 장백진 1중학교에 와서 보고를 할 때 그 학교의 사충신 교사가 정리해서 발표한 자료를 담고 있는 ‘장백혁명투쟁사자료집’(장백조선족자치현당사공작반공실)에서 인용한 것이다.
                     

                                                                    -중국 공군 지휘관이었던 교방의

 

간고한 항일연군 생활

  
교방의는 장백현 19도구 쌍산두 사람이다. 아버지 교잠산인데 1937년에 그의 큰 형 교방인, 셋째동생 교방례, 넷째 교방지, 다섯째 교방신 이렇게 5형제가 항일연군에 참가했다.

 

첫째 교방인은 다리를 절어서 지하공작사업을 수행하다가 일제에게 체포, 총살당했다.

본 내용을 구술한 교방의는 항일연군 2군 6사(김일성 부대) 8탄의 노전사다.

셋째 교방례는 장백현에서 희생되었다.

넷째 교방지는 33년에 입당했다. 넷째는 경위중대의 기관총사수였고 목숨을 던져 김일성사령관을 위기에서 구했다.

 

다섯째는 12살에 입대한 김일성 사령관 경위부대원이었다. 나이가 어려 통신원으로 활동했다.


1937년 넷째동생 교방지가 김일성 사령관과 함께 양강구에 회의를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총 18명이 돌아오던 중) 그 가운데 한 변절자가 '저 대오 안에 김일성 사령관이 있다‘고 일제에 밀고하여 토벌대가 이 대오를 포위했다. 바로 5도양차(청산리 전투했던 곳)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토벌대와 교전 중에 교방지는 부상을 당했는데 스스로 나서서 ‘네 이놈들아! 김일성을 찾는가, 내가 김일성이다.’라며 적들의 주의를 자신에게 집중시키는 한편, 경위대원들에게 빨리 김일성 장군을 엄호해서 피하라고 했다.

그는 이 전투에서 영웅적으로 싸우다가 희생되었다.(121쪽)

 

중국 유격대원에 대한 김일성 사령관의 사랑


다음은 12살 즈음에 형을 따라 6사에 입대한 교방신 동생이 직접 나에게 한 말이다. (형제들이 유격대에 입대할 때 교방신 하나만 집에 두고 가면 누가 돌보겠냐며 아버지가 형제들에 막내동생도 유격대에 데려가라고 해서 교방신은 아주 어린 나이에 유격대에 입대하게 된 것임)

김일성 사령관은 지도를 한 시도 손에서 놓지 않는다. 어디를 가건 대원들 휴식을 시켜놓고 김일성 사령관은 지도를 보며 다음 행동계획을 면밀히 짜 놓은 다음에 다시 출발명령을 내렸다.(121쪽)”


김일성 사장은 하급을 매우 관심하였다.

5도양차전투 시 내 손뼈가 부러졌을 때 김일성 사령관이 면도칼을 가지고 부러진 뼈를 뽑아낼 때 마취약이 없는 상태에서의 수술이라 매우 아팠는데 사령관은 나의 아픔을 가셔주기 위해 관운장 이야기 등 우스개소리를 해주었다.(동생 나이가 당시 약 15세 쯤 되었을 것이다.)

손이 상하다보니 원래는 경위대원인 내가 사령관님을 보좌해야하는데 사령관님이 소변볼 때 바지도 내려주고 또 입혀주고, 양말이 젖으면 불에 쬐어 말려주었다. 원래는 내가 사령관님의 양말을 말려주어야 해야할 일인데...

너무 감동해서 우니, 김일성 사령관님이 “울지 말라, 중국사람이나 조선사람은 모두 함께 일본놈을 치는데 내가 사령관이라고 해서 경위대원의 바지와 양말도 말려주지 못하겠는가”

그래서 울음을 그쳤다.


그이께서는 늘 전사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고 어울렸다. 김일성 장군님이 가장 좋아하는 지정곡이 있었는데 (중국인 전투원이 많은 부대에서는)‘모인수(毛仁壽, 사람이름)를 욕하다’라는 중국노래를 잘 부르시었다.


일본놈들에게 빼앗은 이불용 모피를 김일성 장군님이 가지고 다녔는데 아주 추운 그해 겨울 그 절반을 잘라서 나를 덮어주었다.


나이어린 경위대원들의 경각성을 높이기 위해 밤에 보초를 서다가 조는 경우, 김일성 사령관님은 몰래 조는 보초의 탄알을 빼내고서는 아침에 일어났을 때 농담을 걸었다. “(필자 주: 보초를 서면서 조는 그런 정신으로는 일제를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은근히 깨우쳐주기 위해)집 생각이 나서 가겠으면 집에 가라, 총도 가져가도 되는데 내 총만은 가져가지 말라, 나는 그 총을 들고 끝까지 싸울 것이다.”


중조우의의 꽃 조선여성혁명대원

(오중흡이 지휘하던) 7퇀(연대)에 조선족이 많고 8퇀은 한족이 많았다.

가장 생활이 곤란한 시기에 8퇀의 취사원을 조선족 여성들이 담당했다.

밥을 하는 것이 대단히 간고했다. 어깨에 40-50개의 그릇을 가지고 다녀야하고 사무장은 큰 가마를 메고 다니고, 하루 밤에 자는 시간이 기껏해야 3-4시간뿐이었다.

8퇀 취사반에 키가 작고 나이가 어린 별명이 ‘소야단-작은 오리알 같은 여자아이’인 조선족 여성 취사원이 있었는데, 먹을 것 자기는 안 먹고 부상병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먹이려고 애를 썼다. 나도 부상당했을 때 그런 사랑을 받았는데 정말 눈물이 났었다.

취사반은 남으면 먹고, 모자라면 굶었다. 숙영지에 가서 그릇을 씻고, 옷을 말려주고, 신 안쪽에 풀을 깔아주고, 정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교방의 구술 끝)


이상의 자료는 류복순 여사가 조사한 자료를 전화통화로 요해한 다음 2011년 9월 25일 장백현 현장을 직접 답사하고 유관 산 증인을 만나 조사한 내용과 이후 류복순 여사가 보내준 친필자료, 그간 필자의 조사자료, 관련 항일혁명사, 김일성 주석 회고록 등을 참고하여 집필한 것입니다.[2011.11.27 연길에서, 리송덕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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