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상천외, 18도구 김일성주석 비밀동굴
[기행문] 만주 항일전적지를 찾아서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1/11/01 [02:03]  최종편집: ⓒ 자주시보

 

▲ 혜산에서 압록강 건너 중국 18도구하와 압록강이 만나는 지점에 있는 동굴로 김일성 주석이 비밀독립운동을 할 때 이용했던 은신처이다. 원래 입구와 동굴 앞부분은 도로를 만들며 잘려나가고 그 중간 부분이 조금 절벽에 노출되어 있었다.     © 자주민보

 

▲ 김일성 주석의 비밀 은신처 대밭골 동굴의 바로 아래 계곡, 원래 입구가 있던 골짜기이다. 경사가 급해 물살이 빨랐고 물소리도 컸다.    © 자주민보

 

▲ 구글 지도로 찾아본 김일성 주석의 대밭골 동굴 , 압록강 바로 앞에 동굴이 있다. 위치로 보면 일제 입장에서도 장백 쪽으로 쑥 들어간 이 곳에 초소를 설치하면 강건너 일대를 훤히 볼 수 있는 전략적 위치이다.  김일성 주석의 허를 찌르는 대담성을 느낄 수 있는 비밀 은신처이다. 대밭골 동굴에서 압록강만 건너면 혜산이 오른쪽 아래 혜산이 지척이다.   © 자주민보

 

▲ 류복순(76) 여사     © 자주민보



장백현에서 압록강을 따라 차로 20여분을 남쪽으로 내려가면 18도구하가 압록강과 합류하는 지점에 작은 동굴이 하나 있다.


바로 김일성 주석이 이 장백현 일대와 국내 독립운동가들을 만나 비밀지하조직 사업을 할 때 은신처로 이용했던 석회암 동굴이다.


앞과 뒤로 작은 봉우리가 서 있어 보초를 세우면 주변 움직임을 감시하기 좋았으며 동굴 입구는 골짜기 아래 깊은 곳에 있었다. 그 앞에는 18도구하가 빠르게 흘러내려가며 큰 물소리를 만들어 주어 동굴안의 소리를 막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물이 흐르는 곳에서는 군견도 냄새를 맡지 못한다.


특히 이 동굴은 특이해서 안에서 밥을 짓느라 불을 피워도 연기가 뒷산 너머 대밭골(리텐동)로 나가기 때문에(산 정상이라는 증언도 있음) 마치 뒷마을에서 나오는 연기처럼 보여 누구도 알지 못한 비밀 은신처였다고 한다.


지금은 그 동굴 입구가 있던 계곡 옆으로 도로를 내느라고 밀어버려 동굴의 중간지점이 언덕에 조금 노출되어 있는 상태이다.

사라진 입구와 노출된 지금의 입구를 비교해보면 동굴은 계곡에서부터 점차 위쪽방향으로 형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니 계곡이 흐르는 동굴 입구는 늘 공기가 차게 마련이어서 안에서 피운 연기와 더운 공기는 위쪽으로 해서 산꼭대기와 뒤쪽 마을로 빠져나가게 되었던 것 같다.


1965년 북의 유명한 항일투사 박영순을 단장으로 하는 항일유적지 답사단이 장백현에 왔을 때 김일성 주석이 꼭 찾아보라고 했다며 ‘밭골 동굴’을 찾기 위해 인근 마을을 수소문하고 다녔다고 한다.


그때 류복순 여사 아버지(류춘심,)가 밭골은 약칭이고 정식명칭은 ‘대밭골’이라면 그 동굴을 안내해주어 조선 답사단에게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 답사단이 동굴을 발견했을 때가 북의 국경절이어서 그 답사단의 국경절 행사를 이 동굴 앞에서 진행했다고 한다.


현재 제남에서 살고 있는 류복순 여사의 아버지는 1982년 74세의 나이로 유명을 달리하면서 그의 딸인 류복순 여사에게 그 동굴 입구에 ‘김일성 장군이 사용하던 동굴이라는 기념비’를 꼭 세워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래서 류순 여사는 지금도 그 기념비를 세우기 위해 수년 전부터, 제남과 이 장백현을 오가며 동굴과 아버지와 삼촌들이 김일성 주석에게 식량을 날라다 주던 오솔길, 그리고 항일활동을 하는 과정에 희생되었던 조직원의 시신을 묻어준 무덤도 다시 찾는 등 열성적으로 발굴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류복순 여사는 필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장백현과 중조우의 차원에서 김일성 주석 유적지 기념비를 세우기로 이미 합의를 보았었는데 장백현장이 다른 사람으로 바뀌면서 그 계획이 미뤄지고 있어 안타까운 마음으로 아버지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지금도 애를 쓰고 있다고 말했다.
북측의 심양 영사관에도 관련 편지를 보내 일일천추의 마음으로 답변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장백현의 김일성주석 항일활동도 주력은 조선족이었지만 적지 않은 중국인들과도 함께 한 활동이다. 2사의 조국안은 중국인 지휘관이었다. 김일성 주석의 요리사 연합동이도 중국사람이었고 경위대원에도 중국인이 있었다고 한다.
중국 정부에서도 오래 전부터 길림시절 김일성 주석의 유적지인 약왕묘나 육문중학교를 조중친선의 유적지로 기념하고 있다. 장백현의 유적지도 그런 북중친선 유적지로 기념된다면 북중우호관계를 강화하고 후대들에게 선혈들의 애국의 넋을 전해주는데 큰 기여를 하지 않겠는가.
http://www.jajusibo.com/sub_read.html?uid=1895

http://www.jajusibo.com/sub_read.html?uid=6890
http://www.jajusibo.com/sub_read.html?uid=1981

류복순 여사는 15살에 나이를 속여 한국전쟁 당시 중국지원군으로 입대하여 간호사로 활동하다가 이후 의대를 나와 오랜 기간 중국 제남 공군부대 군의로 복무하며 혁혁한 치료성과로 많은 군인들을 치료하고 제대 후엔 병원을 개설, 현재 제남에서 아주 이름이 높은 명의로 소문이 나 있다.


전화통화 과정에 류복순 여사는 이 대밭골 동굴 일대에서 김일성장군이 활동했다는 증언을 동굴 뒷산 너머 대밭골 마을, 중국이름으로 리텐동에 가면 들을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동굴 뒷산을 에돌아 리텐동에 가보니 정말 94세의 서태순 할머니가 청년 김일성 장군을 직접 만났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 장백현 18도구 리 마을의 서태순 할머니(94세)     © 자주민보



다음은 대담 내용이다.


이름과 나이가 어떻게 됩니까?
서태순이요. 94세

조선에서 왔습니까?
19살에 조선 중강진에서

남편 이름은 어떻게 됩니까.?
남편은 한태익이고, 시숙인 큰 아주버님은 한치익, 한 10살나마 차이 날 거우다.

일제시대에 김일성 장군에 대해 혹시 들은 것이 있습니까?
(처음에는 잘 모르겠다고 자꾸 머뭇거리던 할머니가 안심을 시켜드리자 말을 시작)
김일성 장군님이 시형 집에 와서 이틀을 묵고 갔는데 직접 밥도 해드렸소다.
풀을 삼아서 만든 초신을 신고 왔는데 버선을 신고 있었소.
시숙이 이런 말 절대 하지 말라고, 머리 떨어진다고 해서, 지금 처음으로 하는 말이요.
김일성 장군님은 이틀 고방에만 있었소다.

언제왔습니까?
(잘 모르겠다고 하더니, 한참 생각한 후에)
내 결혼한 이듬해이니 23살 때

무슨 음식을 대접했습니까?
그때는 먹고 살기 다들 어려워서, 좁살에다가 감자를 놔서 밥을 했어라,
그런데도 그렇게 맛있다고...
장군님은 그런 말을 안 하는데, 우리 큰 아주바이가 그랬소다.
제수 밥 한 기 정말 맛있다고 하셨다고,
시래기장국을 끓였어라, 배추시래기 넣어서


음식을 직접 하신 거네요?
맏동서는 키도 조그만데 넷째 애를 낳아서 밥을 못했소, 그래 내가 했소다.

김일성 장군님 얼굴도 직접 봤겠네요?
시숙이 고방에다 김일성 장군님을 가만히 모셔놓고 내숭도 아니 내고,
밥상을 들일 때도 시숙이 얼굴도 못 보게 해서,
고개 푹 숙이고 들어가서 밥상만 놓고 나왔다가,
드시고 나면 또 고개 푹 숙이고 들고 나왔소다.

잘생겼습니까.
(살짝 미소를 지으시더니)
이뻤어요, 얼굴이 둥그렇고 넓죽허니 잘생겼습디다.
(....유도질문에 넘어가서 좀 멋쩍어 하시면서도 진지하게)
어째 아니보겠소,
나라의 영웅, 우리 아버지보다도 큰 데
어째 아니보겠소!


글을 쓰는 지금도 “어째 아니보겠소” 하던 서태순 할머니의 그 순박한 표정이 생생하다.

중국에서 문화혁명 당시 친북인사들이 조선특무로 몰려 박해를 받은 적도 있고 또 항일독립운동 당시 김일성 주석과 관련된 사실은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할 비밀이라고 철저히 교육을 받아서인지 다른 조선족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쉽게 말을 잘 꺼내지 못한다.

한족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김일성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거리낌 없이 하기 때문에 그래서 한족 취재는 금방 끝낼 수 있다.

북에서도 혁명사를 발굴하는데 하도 비밀을 철저히 지키는 바람에 애를 먹었다고 한다. 60년대 대대적으로 항일혁명사를 조사할 때 김일성 주석이 이제는 말해도 된다고 특별 방송까지 해서야 북 주민들이 입을 열었다는 것이다.


당시 장백현과 백두산 일대 조선 주민들이 김일성 부대를 지키기 위한 비밀엄수 규율이 얼마나 강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일제 100만 관동군이 독판치던 만주 한 복판에서 김일성 부대가 그렇게 일제의 탄압을 피해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었던 한 비결도 바로 이런 주민들의 보호 때문이었던 것 같다.


서태순 할머니는 직선거리로 1-2킬로 정도 밖에 떨어져있지 않은 대밭골 동굴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다만 시숙과 남편이 유격대에 식량을 많이 져 날랐다는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동굴 기념비를 추진하고 있는 류복순 여사(76)도 아버지 살아생전 그 일가가 어떻게 김일성 주석의 활동을 지원했는지 자세히 들어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리텐동에서 태어난 류복순 여사의 아버지(류춘심, 맏아들), 어머니(심확실), 삼촌(류천선, 둘째)이 모두 다 김일성 장군을 도와주었다고 한다. 특히 삼촌은 김일성 주석의 숙부인 김형권 삼촌과도 함께 활동한 것으로 들었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김일성 주석의 편지를 직접 유격대원들에게 전달하는 일도 했었는데 편지를 애기바위(애기바우) 아래 숨겨 놓기도 했다고 한다. 편지나 식량을 주고 받을 때 암호로 서로를 확인했는데 “발구(손수레의 일종)를 만드는 목재사러 왔다”, 그러면 “발구를 사겠다”, “발구를 빌려가겠다” 는 식으로 답을 해서 서로를 확인했다고 한다.
김일성 장군의 편지를 전달할 때 사용하던 암호가 '얼음새 꽃'이었는데 그래서 1938년에 태어난 류복순 여사의 아명을 '얼음새 꽃'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따라서 김일성 장군은 1938년을 전후하여 이 리텐동 동굴을 비밀근거지로 이용하면서 유격대원을 파견하여 주변 일대에서 조국광복회와 같은 비밀반일조직을 꾸리는 일을 왕성하게 전개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류복순 여사가 기억하는 아버지 증언에 따르면 김일성 장군은 어느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고 한다. 거쳐를 계속 옮겨다녔고 그 와중에 이 동굴도 두어 번 이용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신 김일성 부대 비밀조직원들이 동굴을 은신처로 주로 활용했다는 것이다.
 
당시에 동굴 인근에 집이 세 채가 있었는데 이 집 사람들 몰래 식량을 가져다 주느라 삼촌과 아버지는 늘 조심했다고 한다.
굴을 드나들 때도 200여미터 골짜기 위에서 물이 흐르는 계곡을 걸어 동굴입구로 접근했기 때문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을 수 있었다고 했다. 아무리 추운날 발이 시려도 꼭 그렇게 물 속을 걸어 동굴로 접근했다는 것이다.
동굴은 입구는 좁았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70여명이 앉을 수 있을 정도로 큰 공간이 있었다고 한다. 훗날 한 포수가 토끼를 잡으러 그 굴에 들어갔다가 그 크기를 확인했었는데 몇 년 전 그 포수가 리텐동을 찾아간 류복순 여사에게 그 동굴 크기를 알려주었다고 한다. 그 아흔이 넘은 나이의 포수는 지금도 살아있다. 
지금은 길을 내느라 그 굴의 큰 공간른 사라진 상태이다.

식량을 운반하는 방법도 가지가지였다고 한다.
류복순 여사 어머니가 새벽에 깨를 뿌린 시루떡을 잔뜩 해서 새벽에 장백진에 팔러간다고 하고선 동굴에 가져다주기도 했는데, 당시 어린이였던 류복순 여사가 "엄마 왜 이렇게 일찍 팔고 왔어" 물으면 가다가 넘어져 떡을 망쳐서 장사를 못하고 왔다고 둘러대기도 했다고 한다.
해방 후 훗날 아버지가 말하길, 김일성 장군 부대 비밀공작원들에게 찰떡을 해 주면 더 좋은데 찰떡은 쳐야하기 때문에 소리가 나서 시루떡을 했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류복순 여사 아버지는 동네에 등짐장사꾼으로 소문이 났었는데 때로는 엿장수로, 또 고기장수, 나무꾼으로 위장을 하고 밀림 속 밀영까지 드나들었다고 한다.
깊은 밀영에 갈 때는 허리에 도끼를 차고 가 나무에 표시를 해 나올 때 길을 확인했다고 한다. 물자를 공급하고 비밀 편지나 소식을 전달하기에는 장사꾼으로 위장하는 것이 효과적이었던 것 같다.
이런 자세한 내막은 해방 후 아버지가 류복순 여사에게 들려주었다고 한다.

그 류복순 여사 아버지는 74세 82년에 유명을 달리했다고 한다.
류복순 여사 삼촌은 조선에 들어가 철도부 간부로 활동하다가 교통사고로 사망되었다고 한다.


리송덕 연변 역사학자는 김일성 주석은 1936부터 1940년 말까지 장백현 일대를 돌아다니며 왕성하게 반일무장투쟁을 전개하는 한 편 반일 비밀조직인 ‘조국광복회’를 꾸리기 위해 열성을 다하던 때였기에 장백현 18도구에 비밀근거지를 꾸려 활용했을 것임 자신도 필요하면  직접 와서 이용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특히 동굴이 있던 18도구는 장백현에서도 가장 조선 안쪽으로 깊이 들어간 지점이다. 국내로 조직원을 파견하고 또 국내의 조직원을 만나기에 좋은 장소였던 것이다.

흠이 있다면 압록강 국경변이라 일제의 감시가 매우 심한 곳이고 강변 초소도 분명히 조밀하게 배치되어 있을 곳이라는 점이다.


▲ 김일성 주석이 장백현 일대에서 일제와 무장투쟁을 전개하면서 다른 한 편 비밀독립운동조직인 '조국광복회'를 도처에 꾸리기 위한 사업을 정력적으로 전개하던 시기 산 속에서 막 결혼했던 김정숙 아내와 함께 찍은 사진, 평소 김일성 주석이 가장 아꼈던 아내 사진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진은 본지에서 길림 육문중학교 기념관에서 촬영한 것 © 자주민보


비밀근거지를 깊은 밀림속이 아닌 압록강 바로 앞에 만들어놓은 것은 좀 위험을 감내하더라도 순전히 국내 독립운동을 더 잘 도와주기 위한 것 때문이었을 것이다.

국내에서 살던 사람들이 압록강을 건너서 다시 장백현의 산이나 골짜기를 타고 곰의골 밀영이나 홍두산 밀영 등 조선인민혁명군 밀영이 있던 깊숙한 밀림지대까지 들어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건너다닌 사람들도 없진 않았지만 밀림 도처에 밀정이 우글거리고 마을마다 주재소(경찰서)가 즐비한 곳에서 행동거지가 조금만 달라도 바로 눈에 뜨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함께 동굴을 찾은 리송덕 역사학자는 김일성 주석이 직접, 혹은 권영벽이나 리제순과 같은 김일성 부대 핵심 간부들이 숨어있다가 국내에 들어가 조국광복회 회원들을 만나기에도 좋고 또 밤에 살짝 압록강만 건너오게 하면 바로 만날 수 있는 곳이 18도구 대밭골 동굴근거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보천보 전투 이후 일제가 혜산사건을 일으켜 200여명(400여명이라는 설도 있음)을 검거 조국광복회 조직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자행하던 시기가 바로 37-40년 시기이니 김일성 주석은 좀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장백현 일대의 조직을 재정비하면서 파괴된 국내조직도 복구하기 위해 국내와 소통이 용이한 혜산 바로 건너편 18도구에 동굴 근거지를 이용했던 것 같다.


어쨌든 일제는 김일성 주석이 아무리 기상천외하고 과감한 작전을 펴는 신출귀몰한 사령관으로 알고 있었지만 자신들 코밑에 그런 근거지를 만들어놓고 일시에 활화산으로 터져오를 조선독립의 끓는 용암을 국내 깊이 줄기차게 불어넣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알았다면 이 오묘하고 기상천외하며 대담한 은신처에 기절초풍했을 것이다.


그런 김일성 주석을 장백현의 조선동포들이 목숨으로 보호하고 지켜주었던 것이다.


필자는 하 많은 사연을 안고 묵묵히 흐르는 역사의 강 압록강을 따라 차를 타고 다음 취재지인 간삼봉전투 유적지로 향했다.(계속)



▲ 희안한 동굴을 확인하고 기뻐하는 전 연변박물관 혁명역사부 주임이었던 리송덕 역사학자     © 자주민보

 

▲ 압록강변 18도구 김일성 주석의 대밭골 동굴 앞 필자     © 자주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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