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격전지 장백현과 보천보전투
[기행문] 항일유적지 장백현을 찾아서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1/10/31 [01:12]  최종편집: ⓒ 자주시보


  

▲ 연길에서 장백진 가는 길, 장백현은 지도에서 보다시피 한반도쪽으로 깊숙이 들어온 곳에 있는 국경도시이다. 국내 깊숙이 빠르게 진출하기 위해서는 독립군들이 이 장백현을 장악해야만 했다.  흰색의 봉우리가 백두산 천지이다.   © 자주민보

 
 

만산에 단풍이 막 물들기 시작한 10월 초 연변 객운장(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아침 버스로 출발하여 이도백하에서 점심을 간단히 먹었다. 버스는 무송 인근 만량에서 만강으로 꺾어 끝도 없이 이어진 고개길을 올라갔다.

그렇게 해발 2000여미터의 장백산 봉우리들 사이 추색이 완연한 절경의 19도구하 골짜기를 타고 고개를 넘어 오후 4시 쯤 목적지 장백진에 도착하였다.


그 고개 옆으로는 자작나무, 박달나무, 가문비나무 등 천고의 밀림이 아득히 펼쳐져 있었다.

연변박물관 혁명역사부 전 주임으로 근무한 리송덕 학자는 고개 옆의 산봉우리를 가리키며 곰의골밀영, 홍두산(해발 2010미터)밀영있는 봉우리라고 말해주었다.


1936년 남호두회의 이후 본격적으로 조국으로 진출할 것을 결정한 김일성 주석의 조선인민혁명군은 이 높고 깊은 밀림 한 가운데 이런 여러 밀영을 건설해놓고 장백현 일대를 돌아치며 일제토벌대를 무리로 쓸어버렸으며 곳곳 마을에 있는 일본통치기관을 요정내버림으로써 사실상 장백현 거의 모든 마을을 장악하고 곳곳에 조국광복회라는 반일혁명조직을 건설하였다고 한다.

김일성 주석이 길림 육문중학교를 다니며 혁명조직을 건설하던 시기부터, 장차 조국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도문 등 두만강지구와 압록강 상류 장백현을 반드시 혁명화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그때부터 비밀 반일조직을 이 지역에 수없이 건설하였다고 한다.


그때, 김일성 주석의 삼촌 김형권 투사도 이 장백현 일대에서 비밀조직건설에 힘썼으며 국내까지 진출하여 조직사업을 하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결국 옥사했다고 한다.


지도로만 봐도 장백진은 압록강변 국경 중에서 가장 우리 한반도 쪽으로 깊숙하게 들어온 곳에 위치해있다.

이 장백진에서 압록강만 건너면 바로 혜산이고 혜산에서 남쪽의 낭림산맥, 북쪽의 마천령산맥과 그 사이 개마고원을 타면 조국 곳곳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청진, 성진, 함흥, 원산 등 당시 주요 항구도시와 태백산맥을 타면 지리산까지도 진출할 수가 있는 곳이 장백진이다.


항일유적지를 취재하다보면 김일성 주석이 한반도와 그 주변 지리를 꿰고 있으며 이를 능숙하게 활용했음을 여러 차례 느낄 수 있었는데 장백현을 거점으로 삼은 것도 그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바로 그 장백진에서 압록강 넘어 북녘 땅을 바라보니 만단정회를 금할 수 없었다.

얼마나 많은 우리 선조들이 일본제국주의자들에 대한 복수의 일념을 안고 이 압록강을 건너 여기 장백으로 왔던가.

또 얼마나 많은 독립투사들이 민족의 가슴에 독립 열정을 다시 불러일으키기 위해 이 압록강을 건너 조국으로 들어갔던가. 또 그 순결하고 뜨거운 피 얼마나 흘렸던가. 장백현 골골마다 전투는 또 얼마나 치열했던가.


역사가가 들려준 김일성부대가 이 장백현 일대에서 일제를 족쳐버린 대규모 전투만해도 20가지가 넘었다. 실제로는 장백현 일대에서 100번도 넘는 전투가 벌어졌고 김일성부대는 전투마다 모두 이겼다고 한다.

무송현성전투, 도천리전투, 대덕수전투, 소덕수전투, 천교구전투, 삼문구전투, 리명수전투, 23도구전투, 신방자전투, 14도구전투(반절구전투), 태양촌 전투, 간삼봉전투 등등등


정말 가는 곳마다에서 노인들을 만나보면 김일성장군이 부대를 이끌고 마을을 공격하여 일본군경들을 족치고 일제의 상점과 창고를 털어 백성들에게 나누어주고 또 물자를 지고 바람처럼 사라졌다는 생생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어린 시절에 그 전투를 직접 경험한 노인도 있었고 부모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니 가을단풍 붉게 물들어가는 저 산하를 어찌 무심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가.
 

▲ 만강에서 장백현으로 넘어가는 해발 2000여 미터 도로를 달리는 버스에서 촬영한 주변 풍경, 이 험한 밀림지대에 밀영을 설치하고 조선인민혁명군이 일제와 결사전을 벌렸다고 한다.     © 자주민보



아, 장백현!

역사의 눈과 귀로 보고 듣노라면,
그날의 용맹한 청년장군의 단호한 공격개시 권총 신호탄소리,
원수 일제 격멸의 의지로 불을 뿜는 기관총소리, 
천둥치듯, 번개 번쩍 터지는 유격대원들의 몰사격소리,
돌격명령에 비호처럼 돌격하는 유격대원들의 함성소리,
포대가 작탄 불벼락에 박살이 난다.
일제 군경들 비명 지르며 막 쓰러진다.
조국광복회 회원들이 ‘조선은 살아있다.’, ‘끝까지 싸워 기어이 성스런 조국 땅에서 강도일제 쓸어버리자’ 구호를 외친다.
‘조국광복회10대강령’ 삐라가 함박눈처럼 온 거리에 쏟아져 내린다.

그때 청년 대장 언덕에 올라 짧은 연설을 하며 목이 멘다.

“언제나 그립고 보고싶은 동포들! 간악한 일제 탄압에 얼마나 고생이 많은가!
일제가 강대한 것 같지만 2천만 동포가 하나로 뭉쳐 내리치면 얼마든지 깨뜨릴 수 있다. 보라. 우리의 총탄에 녹아나버린 저 일제의 처참한 몰골을....”

터져나오는 만세의 함성, 함성!


이런 전투가 때로는 매일같이 연이어 이 장백현 일대를 휩쓸었다.

역사가들도, 백성들도 그 중에 첫 손가락에 꼽고 있는 전투가 있으니 바로 보천보전투이다.

▲ 장백진에서 압록강 너머 바라본 혜산의 보천보전투 기념탑, 압록강 상류라 압록강 폭이 그리 넓지 않았다. 쉽게 넘나들 수 있는 곳이었다.     © 자주민보

 

▲ 보천보전투 기념탑     © 자주민보



장백진에서 압록강 따라 남쪽으로 조금 내려가다보면 북과 교역을 하는 세관 조금 못 간 곳에 북측 압록강 가에 아담한 동산이 있었는데 그 봉우리에 붉은색의 거대한 보천보전투 기념탑이 서 있었다.

나무에 가려 그 모습을 다 볼 수는 없었지만 자못 웅장한 규모였다.



✦겨우 일본군경 7명 죽인 보천보전투?


1937년 6월 4일 당시 26세의 청년 김일성 주석이 조국에서 첫 총성을 울렸던 보천보 마을도 장백진 건너편 압록강 인근 마을이다.

죽인 일본 군경은 얼마 되지 않지만 그 역사적 의의는 매우 크다고 말했다.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소개한 보천보전투는 다음과 같다.


[당시 백두산 일대 조선과 중국 간의 국경지역인 장백을 중심으로 항일투쟁활동을 벌이던 동북항일연군 제1군 제6사는 백두산지구 유격구를 건설하고, 박달·박금철 등이 이끄는 갑산군 내 ‘조국광복회’소속 조직원들과 함께 압록강을 넘어 혜산진에서 20㎞ 떨어진 보천보에 침투하였다.
그들은 경찰주재소·면사무소·우체국 등의 관공서와 산림보호구 등을 공격하고 ‘조선민중에게 알린다, 조국광복회 10대 강령’ 등의 포고문과 격문을 살포하고 물자를 노획하였다. 이때 일경 7명이 죽었으며 여러 명의 중상자가 발생하였다. 일제탄압이 극심하였던 시기에 일어난 이 사건은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에 크게 보도되어 조선인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키고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리게 되었다.]-출처: 보천보전투(普天堡戰鬪)|네이버 백과사전


인터넷으로 ‘보천보전투’를 검색해보면 겨우 일제군경 7명밖에 죽이지 못한 전투라느니 전투에 참여한 부대원이 2백여명밖에 되지 않아 지금의 대대급도 안 된다며 당시 김일성 주석은 지금으로 말하면 대대장급도 아닌 중대장급으로 봐야 하지 않는가 하는 평가들이 나와 있다.


하지만 이는 당시 항일유격대에 대해 잘 알지 못한 판단이며 특히 보천보 전투가 지닌 정치적, 역사적 의의는 전혀 모르고 하는 소리다.


먼저 위키백과 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을 보자.


[보천보 전투는 군사적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는 단순 소동에 지나지 않았으나, 김일성이 의도한 바와 같이 일제의 지배력이 무적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줘 확산되어가고 있던 패배주의를 저지하는데는 큰 역할을 하였다. 특히 이러한 김일성의 의도는 이 사건에 대해 두번이나 호외를 발행하여 전국에 보도한《동아일보》에 의해 증폭되었다. 그리하여 당시 26살에 불과하던 김일성은 전국적인 유명인사가 되었으며, "김일성 전설"이 생겨날 정도로 신화화 되었다. 중도파 여운형뿐만 아니라 김일성과는 노선이 달랐던 임시정부의 김구도 보천보 전투의 결과에 고무되었다고 한다.]-위키백과사전 ‘보천보전투’ 검색 내용 중에서


이렇듯 위키백과에서도 군사적인 성과는 별 거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일제가 무적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확산되어가던 패배주의를 저지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여운형과 김구도 보천보전투에 고무되었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위의 네이버백과사전에서는 세계적으로 김일성 주석을 알리는 전투였다는 평가까지 내리고 있다.

이에 대해 리송덕 역사학자는 국내신문뿐만 아니라 일본의 여러 출판보도물들과 소련의 타스통신은 물론, 프라우다 등 해외 언론에서도 이 보천보전투를 중요하게 보도했다고 말했다.

특히 소련에서 발간되는 ‘태평양’이라는 잡지에서는 ‘북부조선지역에서의 빨치산투쟁’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보천보전투뿐만 아니라 김일성 항일무장투쟁 전반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보도했다고 한다.

바로 보천보전투부터 소련 보도출판물에 ‘김일성’이름과 조선인민혁명군이 본격적으로 보도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정말 별 거 아닌 전투였다면 이런 국내외 반응은 있을 수 없다.

세계는 그 작은 보천보전투에 왜 주목했던 것일까.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먹어치운 일제는 1937년 7월 중국 전체를 먹자고 중일전쟁까지 도발했다.

중국 전선에서 승승장구하던 일제는 당시 세계 반파쇼연합 진영에 크나큰 위협이었다. 소련만 하더라도 나찌독일이 호시탐탐 서부전선의 침략의 기회를 노리고 있는 상황에서 일제의 중일전쟁 발발은 시간문제로 부상했으니 얼마나 위기의식이 컸겠는가.

바로 그러한 때 승승장구하던 일본의 대륙진출의 교두보이자 가장 안전한 보루라던 조선 땅에 수백명의 조선혁명인민군이 나타나 일본 뒤통수를 호되게 후려쳤으니 일제도 경악했고 전 세계가 충격적 경탄을 금할 수 없었던 것이다.


1930년 후반의 국내 사정은 암흑 그 자체였다.

20년대 문화통치 가면도 벗어던진 일제는 만주사변을 일으키면서 ‘자 보라 이 강대한 일본을 그 누가 꺾을 수 있는가’하며 일본과 조선은 한 뿌리이니 이제 일본제국의 신민이 되어야 한다며 성도 이름도 일본식으로 바꾸게 하고 학교에서 조선말을 쓰면 가혹한 벌을 내리던 바로 그 살벌한 압제의 시기였으며 국내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세력들도 모두 숨을 죽이고 있는 암흑의 시기였다.


이러한 때에 새 군복을 척 떨쳐입은 김일성부대가 압록강을 넘어와 보천보국경도시를 족쳤으니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바로 보천보의 총성은 조선의 독립군은 살아있다는 호랑이 포효였으며 보천보 경찰서에서 타오른 화염은 일제 타승 그 희망의 횃불이었다.

그래서 여운형도 직접 달려가 불탄 보천보 경찰서 담벽을 쓸어보며 “조선은 살아있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던 것이고 김구도 김일성 부대와 연락을 취하기 위해 백방으로 파견원을 보냈던 것이다.


수천, 수만명이 폭동을 일으켜 일제 관공서를 들이쳤다고 해서 이런 정치적 파장은 결코 생기지 않는다.

전 세계가 주목하고 전체 조선민족이 김일성장군의 이름을 독립의 희망으로 직결시키며 흥분을 감추지 못한 것은 바로 당당한 군대가 쳤기 때문이었다.
전설로만 듣던 김일성 장군이 실제 존재하는 조선민족의 사령관임을 명백히 확인시켜주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김일성 주석은 보천보전투를 준비하면서 새 군복을 600벌 준비시켰다고 한다. 약 600명으로 조국진출전투를 계획했던 것을 알 수 있다.


500명이라고 해도 이는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국가적인 후원도 없는 조건에서 500명이 먹고 입고 무기와 탄약을 자체로 마련하여 20여 성상 간고한 투쟁을 이어간다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그때까지는 중국 공산당에서 도와준 것도, 소련에서 총알 하나 도와준 것이 없었다. 모두 일제관동군을 치고 빼앗은 것을 들고 싸웠다. 김일성 주석은 항일 초창기에 소련에 슈류탄 공장하나만 세워달라고 부탁했는데 거들떠보지도 않기에 자체로 슈류탄을 만들어 썼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최무선식으로 마루 밑 흙을 우려낸 물로 화약을 만들고 그 화약주변에 솥단지 등을 깬 파편을 넣어 둘둘 말아 만든 연길폭탄(작탄)이다.


거기다가 작은 산골마을에도 일제가 통치기관을 세워놓고 있었으며 깊은 골짜기 사냥꾼들이 사용하던 임시 움막에도 밀정을 박아 넣는 등 곳곳에 밀정을 깔아 유격대를 감시하는 것도 모자라 수백, 수천 때로는 수만 명의 토벌대를 동원하여 만주일대 밀림을 쌍끌이 저인망식으로 뒤지고 다니던 1930년대에 500여명의 전투부대를 데리고 국내까지 들어와 일제를 족친 것이다.

그 김일성 부대는 일회적 싸움으로 끝낼 세력이 아니었던 것이다.


장백진에서 혜산으로 그리고 험준한 낭림산맥을 타고 태백산, 지리산으로 이동하며 전국 도처에서 그런 무장투쟁 대오를 준비하여 때가 되면 일거에 전 민중과 함께 들고 일어나 일제 군대와 경찰서를 습격하여 일시에 점령해버리는 전민항쟁 해방의 불길을 지펴올릴 핵심세력이었기에 일제가 기겁을 하고 세계가 주목했던 것이다.

당시 김일성 부대는 일제와의 싸움에서 노획한 전투무기들을 곳곳에 기름종이에 싸서 묻어두었던 것도 바로 조국으로 운반하여 전민행쟁 때 써먹으려고 그랬다고 한다.


김일성 부대가 많아야 수백명 밖에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들도 많은데 이것도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

관련 역사가들은 말한다. 당시에 유격대 수를 늘리려고 했다면 얼마든지 늘릴 수는 있었다. 하지만 먹고 입을 군수물자를 어떻게 해결하겠는가. 군대는 적당한 규모만 유지했다. 나머지는 모두 마을 속으로 내려 보내 반일조직을 꾸리는 일을 시켰던 것이다.

또 많은 전투원을 국내와 일본 등 해외에도 보내 비밀조직을 꾸리게 했다.

비밀조직이 백성을 많이 묶어세우면 군대를 만드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특히 전투경험이 많은 지휘관은 장백현 일대에서 실전 속에서 키워냈으니 이들이 각 지역에 퍼져 백성을 군대로 묶어세우면 순식간에 백배, 천배의 군대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실제 소련군과 협동작전을 펴기는 했지만 8.15해방당시 조-소연합군이 파죽지세로 일제의 최정예라고 했던 100만 일본 관동군을 순식간에 격파하고 이북지역을 해방했던 것도 곳곳에서 무장부대들이 호응하여 전민행쟁에 떨쳐나섰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깜짝 놀란 미국이 서둘러 핵무기까지 일본에 투하하면서 일제의 항복을 받아내었으며 소련을 압박하여 38선 이남으로는 내려오지 못하게 했던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는 군대도 없는 도시에 그것도 군사적인 요충지도 아닌 히로시마, 나가사키라는 중소도시에 핵을 두 방이나 터트릴 이유가 없지 않는가.


그것만이 아니다. 김일성 주석이 직접 지휘하고 다녔던 부대가 동북항일연군 6사 약 1000여명으로 추산되지만 수십만명에 달했던 전체 동북항일연군의 협동작전을 조직지도하고 그들이 위기에 빠졌을 때 구해주고 힘을 준 이가 김일성 주석이었으며 양정우, 주보중 등 중국의 간부들이 이끌던 혁명군의 반수 이상, 간부들의 경우 70% 이상이 조선족 병사들이었고 이들은 김일성 주석의 정치사상적 방침에 따라 싸웠다.

실제 김일성 주석이 직접 발굴 육성한 많은 유격대원을 중국부대를 지원하기 위해 보내준 경우가 많았다. 위증민, 주보중 등 중국 지휘관의 경위대의 핵심도 김일성 주석이 파견한 유격대원이었다고 한다.

조선족이면서 중국부대 지휘관이었던 김책, 최용건 등의 경우엔 김일성 주석과 연계를 갖지는 못했지만 김일성 주석이 쓴 ‘조국광복회 10대강령’과 같은 저서를 보며 항일운동 방향을 잡고 승리적으로 투쟁을 개척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김일성 주석이 중국 구국군 반일부대를 혁명세력 편으로 돌려세워 중국측 부대에 얼마나 많이 합류시켰는지 모른다.


그래서 주보중도 만주에서 항일혁명은 조선족의 공로가 크다고 높이 평가했으며 그 스스로도 김일성 주석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고백하고 해방 후에도 김일성 주석과 각별한 우정을 나누며 죽는 순간까지 김일성 주석을 잊지 못해했다고 한다.



✦왜 혜산이 아니라 보천보를 쳤을까?


조선족 역사학자들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원래 김일성 주석은 보천보가 아니라 중요한 군사적 거점이었던 혜산을 치려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김일성 주석이 이끄는 주력부대는 혜산 맞으편 장백진으로 나갔고 성동격서의 전법으로 일제의 이목을 분산시키기 위해 최현이 이끄는 4사를 장백현 북부로 진출시켜 무산 쪽을 치게 했으며 2사 등 다른 부대는 장백현 남쪽 림강 쪽으로 진출시켰다.

그런데 그만 최현의 4사가 무산쪽에서 일제를 쓸어버리기 시작하자 일제는 주변 모든 부대를 동원하여 4사를 꽁꽁 포위하고 말았던 것이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주력부대가 조국진출을 포기하고 바로 4사를 구원하러 가야할 형편이었다. 그렇다고 강대한 일제 무력이 버티고 있는 혜산을 주력 일부를 4사 구원에 보내고 나머지만으로도 칠 경우 실패할 우려가 높았다.

그래서 지휘관들이 다들 조국진출을 포기하고 4사를 구원하러 가야한다고 할 때 김일성 주석은 사색을 거듭한 끝에 조국진출 효과도 얻으면서 4사도 동시에 구원할 절묘한 방안을 내놓았는데 혜산을 치려던 계획을 변경하여 그 북쪽에 있는 보천보를 치자는 것이었다.


보천보는 무산쪽에 가깝기 때문에 4사를 포위하고 있는 일제군대의 뒤통수를 때리는 효과도 있으면서 명백한 압록강 너머 조국 땅이었으며 혜산과도 20킬로밖에 떨어져있지 않아 혜산을 친 효과가 있을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 예상은 적중했다.

일제는 경악했고 세계는 경의로운 눈으로 보천보를 바라보았으며 4사를 포위하던 일제무력은 보천보의 총알이 자신들의 뒤통수로 바로 날아오기라도 하는 양 깜짝 놀라 포위를 풀고 도망치고 말았다.


후에 그렇게 포위를 뚫고 나온 최현은 지양개에서 김일성 주석을 만나, 갑자기 일본군들이 포위를 풀고 황황히 도망가버리기에 “이게 무슨 귀신의 조화인가 했는데 그게 김일성 사령관님의 조화였군요”라며 탄복했다고 한다.


그때 최현은 보천보에서 함께 싸우지 못한 것을 두고 안타까워했는데 그 한을 간삼봉전투에서 원 없이 풀었다.

보천보에서 얻어맞은 일제는 혜산과 인근의 모든 무력을 총출동시켜 김일성 부대의 뒤를 쫓았고 이를 간삼봉에서 매복하고 기다리던 김일성 부대가 아주 박살을 내버렸다.

작은 보천보를 치느라 일제 군경들에게 크게 타격을 가하지 못한 한을 이 간삼봉전투에서 다 풀었다고 한다.


족히 수백명의 일제군경이 사살되었다. 하도 시체가 많아 일제는 머리만 잘라서 운반했는데 주민들은 알고서도 마대 속의 머리를 보고 뭐냐고 물으면 일본군들은 ‘호박풍년이 들어서 호박을 따간다’고 둘러댔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간삼봉 전투에서 자세히 다루도록 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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