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들 김주석 존경어린 남호두기념비
[동북만주 항일전적지] 남호두 회의 기념비를 찾아서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1/06/29 [07:02]  최종편집: ⓒ 자주시보

 

▲ 남호두회의 기념비에 대한 설명문, 리송덕 역사학자는 이는 전에 없었는데 최근 영안현에서 부착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는 이 유적을 중국 정부에서 중시하고 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고 했다.     © 자주민보

 
위 사진 설명문 해석 

이곳의 소위 남호두 회의 소개

1, 1930년대 초 항일전쟁을 치르고 있던 만주형세는 매우 열악하였다. 1936년 2월 5일 일찍 모스크바에 중국공산당 국제대표단에게 사업보고를 간 동만특위 서기이며 2군 정치위원인 위증민 동지는 소련으로부터 동북으로 돌아와 이곳에서 반일인민혁명군 제2군, 제5군 상무위원 연석회의를 열어 공산국제당 7차대회 정신과 중공대표단의 지시를 전달하고 이후 협동작전을 잘할 데 대한 문제, 인민혁명군을 동북항일연군으로 다시 건립할 때 대한 토의를 했다.(필자 주: 관련 자료를 확인해보면 남호두회의는 사실 김일성 장군을 중심 조선인 부대가 독자적으로 백두산 지구 즉,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한다는 결정을 채택한 회의이다. 이 회의에 따라 보천보전투, 무산지구 전투 등 국내에서 일제를 족치는 전투를 벌렸던 것이다. 이 회의에 중국연군지휘관들이 참관하기는 했지만 국제당 방침에 따라 그들과 연합문제 등은 남호두 회의 전에 이미 다른 회의에서 합의를 보았다. 이 기념비는 그런 회의까지 다 기념하자는 차원에서 중국인들이 건립한 것으로 보인다.)

2. 1936년 2월 27일부터 3월 8일까지 김일성 동지는 전체 대원들에게 공산국제제7차대회 정신을 전달하였다. 주보중, 진한장, 방진생, 번덕림, 손명인 등이 회의에 열석하였다. 회의에서는 김일성 동지가 공산주의자들이 반일민족해방투쟁을 발전시킬 데 대한 보고를 하였다. 

▲ 큰 봇나무 아래 세워진 남호두 회의 기념비     © 자주민보

 
위 사진의 붉은색 안내문 해석

이곳은 조중양국인민들이 공동의 항일을 한 혁명사적지로서 아주 큰 국제적 의의인 국가중점홍색여유(혁명관광유적)지구로서,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는 인민들은 이에 대해 영광과 자부심을 갖고 이곳 주변의 나무 한 그루, 풀 한포기라도 보호할 책임이 있다.
-흑룡강성 당사반, 흑룡강성 민족사무위원회, 목단강시역사관리처 씀
 

▲ 중국인 송덕보 씨와 마을 주민들이 세운 남호두회의 기념비, 김일성 사령관이 중국동지들과 회의를 진행했다는 설명이 담겨있다.     © 자주민보

 

▲ 남호두 회의 기념비를 찾아가는 진창길, 최근 새로 낸 길도 이렇게 험한데 길도 없던 이런 밀림속을 조선족과 중국인민들이 달빛도 없는 밤에 쌀과 물고기 등을 지고 들어가 김일성 항일혁명군을 적극 도와주었다고 한다.     © 자주민보

 

▲ 두개의 산마루 사이에 깊은 골짜기에 남호두 회의 장소가 있다. 지금을 밭으로 개간된 이곳도 당시는 밀림이었다. 저 산마루에 망원초를 세우면 잘 감시를 할 수 있어 안전하게 회의를 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자주민보

 

▲ 송덕보 씨 등 남호두촌 마을 사람들은 매년 때때로 이 기념비를 찾아와 웃자란 관목을 정비하고 돌본다고 한다. 몇년전에 새로 줄지어 심은 만년송(가문비나무의 한 종류로 보임)이 청신한 새싹을 피웠다. 새롭게 싹트는 북중친선의 생신한 기운처럼     © 자주민보

 

▲ 남호두회의 장소에서 발원하여 경박호로 흘러들어가는 소자지하 계곡과 나무다리, 현무암지대라서 그런지 물빛이 검었다. 목마른 김에 마셔보니 탕약처럼 약초냄새가 많이 났다. 항일혁명군은 이 물로 밥을 지어 먹으며 일제와 싸웠을 것이다.     © 자주민보

 

▲ 남호두 밀영 옆의 산맥의 정상에서 바라본 인근 마을, 밀영에서 소자지하를 따라 내려가면 큰 목재소가 있던 일제 성시가 나오고 이렇게 옆의 영을 넘어서면 작은 산간 마을이 나온다. 항일유격대는 이런 영을 넘나들며 주민과 교류하고 또 일제를 타격했다고 한다.     ©자주민보

 

▲ 김일성 주석이 소집한 남호두 회의 밀영으로 올라가는 밀림 초입, 리송덕 역사학자(왼쪽)와 지프를 운전하여 안내한 중국인의 뒷편에 전봇대 있는골짜기로 4-6시간 밀림속을 걸어가면 밀영이 있다. 이번에 비가 와 진창길이어서 이 길로 가지 못하고 옆길로 가서 영을 넘어갔다.     © 자주민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연이이 두번이나 방문한 목단강 경박호전장터기념비와 영안역 항일열사기념비를 취재한 후 필자는 영안현 남호두촌에서 지프를 구해 남호두회의 기념비를 찾았다.

 
북만주에서 활동했던 김일성 주석의 항일혁명활동 증거로 연변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가장 공인을 받고 있는 유적지가 바로 영안현 남호두촌(혁명로구성자촌) 소자지하 상류 깊은 밀림 속에 세워진 남호두회의 기념비이다.


기념비가 있는 바로 앞까지 밭으로 개간되어 트랙터가 오갈 수 있는 길이 깊은 밀림 속에 뚫려 있었지만 워낙 밀림이 우거지고 골짜기에 난 길이라 비만 오면 진창으로 변하기 때문에 기자가 타고 간 4륜구동 지프도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해 인근 마을까지 가서 높은 영을 가로질러 넘어가 진창길을 뚫고 기념비를 찾아갈 수 있었다.
가면서 내내 이런 밀림 속을 달빛도 없는 밤에 주민들이 드나들며 항일유격대를 적극 도와주었다니 정말 쉽지 않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소자지하 맑은 계곡을 따라 오르다보니 계곡물이 도랑물로 변하였고 좀 더 오르자 그마저도 사라지고 습지대가 펼쳐졌다. 그 습지대를 지나 200여미터 올라가니 깊은 밀림 속 봇나무(자작나무 일종) 아래 남호두 회의 기념비가 하얀 울타리에 둘러싸인 채 당당하게 서 있었다.

기념비에는 김일성 장군의 이름이 명백히 찍혀 있었다.

기념비에 새긴 글씨 한자한자를 누군가 정성드려 깨끗이 닦아 놓았고 비 앞엔 꽃다발도 놓여있었다.


길 안내를 해준 중국인은 이 기념비를 세운 중국인 송덕보 씨의 중학교 동창이자 친구라고 했다. 그도 송덕보 씨와 함께 1997년에 이 기념비를 세우는데 힘을 보탰다고 했다.

그땐 트랙터 길도 없어 반나절 거리의 밀림 속을 뚫고 이 무거운 기념비를 여러 명이서 번갈아 가며 어깨에 메어 옮겼다고 한다.
가장 힘든 일은 엄정한 고증을 통해 기념비를 세울 회의터를 찾고 보니 봇나무와 관목들이 꽉 들어차 있어 그걸 뿌리째 뽑아내는 일이었다고 한다.
베어내면 또 싹이 나기 때문에 뿌리째 뽑았는데 여러 명이 달라붙어 정말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힘을 써야 했다고 한다.

몇 년 전에도 비 주변에 나무가 너무 커져서 여러 그루 또 뽑아냈다고 한다. 그리고 자리에 김일성 주석의 이름과 조중친선이 천대만대 길이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만년송(가문비나무의 일종으로 보임)을 여러 그루 줄을 맞추어 심었다고 했다.


하지만 이런 육체적 고통은 이겨내면 보람과 긍지가 생기지만 문화대혁명 당시 북과 친했던 사람들이 조선의 특무라고 투쟁을 맞았던 기억이 생생히 남아 있는 조건에서 혹시 중국정부에서 문제시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의 부담은 아직도 다 내려놓지 못한 짐이라고 했다.
물론 어렵게 설득해서 영안현의 비준을 받고 세운 것이지만 정세가 변하면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도대체 김일성 주석으로부터 이 중국인들은 무슨 은혜를 입었기에 이다지도 절절한 마음으로 흠모하고 기리는 것일까?
리송덕 역사학자가 제공한 관련 김일성 주석 회고록의 내용과 해당 지역 증인들의 이야기를 비교해보면 김일성 주석은 매우 겸손하게 표현한 부분이 많았고 간추려 쓴 내용도 적지 않아 중국인들의 그 마음을 다 알 수는 없었다.

그래서 영안현 남호두촌의 당비서를 역임했던 조선족 공영귀 선생(76)을 만나 조선인은 물론이고 중국인들까지 김일성 주석을 이렇게까지 흠모하는 이유를 들어보았다.

송덕보 씨는 북과의 무역을 위해 단둥에 나가 있어 만날 수 없었다.

▲ 공영귀(76세)와 부인     ©자주민보



✦여기 북만주엔 언제 왔는지?

공영귀: 43년 말에 왔다. 아버지가 장성군 북위면에서 머슴살이 하다가 1912년에 여기 북만주에 오면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가족을 데리고 왔다.

처음엔 연길 마반산 산골에 땅을 파서 감자 심고 옥수수 심고 해서 밥은 배불리 먹었다. 땅이 너무 좋아 거름 안 해도 농사가 잘 되었다.

그런데 일본놈들이 항일혁명군을 잡는답시고 그런 심심산골까지 들락거리더니 감자도 뽑아서 큰 것만 뜯어가고 나머지는 다 짓뭉개 버렸다. 필요한 만큼만 캐가면 그래도 낫겠는데 온통 밭을 다 망쳐놓았다.

일제 말기엔 주변에 사는 남자들은 아무나 잡아다가 무조건 쏴 죽였다. 아버지도 처형 직전에 조선인 출신으로 통역을 맡았던 일제 경찰이 아버지 손을 일본 장교에세 보여주며 총을 잡은 손이 아니라 일을 한 손이라며 만류해서 겨우 살아났다.


✦김일성 장군과 항일혁명군의 활동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고 하던데?

공영귀: 조그만 마을을 책임지는 작은 직책이기는 하지만 당 사업을 하다 보니 혁명역사를 수집하는 일을 하게 되어 항일 역사를 좀 알게 되었다.

또 나는 원래 해방 후 주위에 항일전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많아서 그들에게 항일이야기 듣기 좋아했다. 김일성 부대에서 활동했던 혁명군 출신이 해방 후에도 남호두에 7명이 있었다.

남호두 회의 기념비를 세운 송덕보 씨의 할아버지도 40대 때 김일성부대를 위해서 싸웠다. 총을 들고 싸운 것은 아니지만 못지않게 많은 기여를 했다.

남호두 회의를 할 때 김일성 부대 선발대가 중국인 송덕보 씨의 할아버지를 찾아와서 먹을 것을 보장하는 후방사업조직, 회의장소로 이용할 귀틀집 짓는 일 등을 부탁했는데 그 일을 책임적으로 수행했다.

송덕보 씨 할아버지 등은 그 일대를 잘 알기 때문에 누구보다 그 일을 잘 할 수 있었다. 아마 김일성 주석이 오래 전부터 이 마을에 ‘반일회’라는 비밀단체를 조직해놓았던 것 같다.

송덕보 할어버지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그 때 중국인 한족들은 경박호에서 잡은 물고기 중에서 제일 맛있고 값비싼 물고기만 고르고 자신들은 밀가루와 옥수수밥을 먹어도 김일성 부대엔 흰쌀밥을 먹을 수 있게 쌀을 찧어 올려보냈다고 한다.

일제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해 비가 오거나 달도 뜨지 않는 아주 어두운 밤을 이용하여 후방물자를 옮겼는데 송덕보 씨의 할아버지는 큰아들 등 가족들과 마을 사람들을 동원하여 짐을 옮겼다. 그러다가 늑대 같은 산짐승을 만나 깜짝 놀란 적도 있었다고 했다.

사실 대낮에도 밀림을 헤치고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깜깜한 밤에 승냥이가 울부짖는 밀림 속으로 무거운 짐을 지고 간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그러다가 밀정들에게 발각이 되면 일제는 온 집안 식구를 학살하였다. 실제 남호두에서 한 한족 가정은 항일혁명군의 후방사업을 도와주다가 밀정을 신고를 받고 출동한 일제 경찰에게 8명이 한 날 한시에 학살당하였고 몇 명만 살아남았다.


✦당시 이 마을엔 조선족이 없었는가?

공영귀: 남호두는 원래는 한족들이 살던 곳인데 일본이 조선사람 개척단을 데라고 와서 남호두촌이라는 600여호의 큰 마을을 이루었다.

김일성 장군부대가 와서 활동하던 30년 중반만 해도 한족들이 많았다. 따라서 중국인들인 한족들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면 사실상 여기서 항일을 할 수 없었다.


회고록에도 나오지만 김일성 주석이 일제 군경에게 쫓기는 위험한 상황에서 경박호를 건네 주었던 채화라는 할아버지(당시 50이 넘었을 것-그땐 50만 넘어도 할아버지 소리를 들음 지금도 한족은 50대면 손자를 보는 경우가 많음-,1970년경에 사망함)도 한족이다.

30년대 중반 즈음 채화 로인에게 직접 들은 바에 따르면 김일성 주석 부대가 일제 토벌대에 쫓기는 상황에서 경박호를 건너가야만 안전하게 빠져나갈 수 있었는데 노를 젓는 고기잡이 배로 부대를 먼저 보내고 김일성 주석과 3명의 대원이 마지막에 건너갔다.(김일성 주석이 대원들을 먼저 보내고 자신은 나중에 건넌 것을 보면 대원들을 얼마나 챙겼는지 짐작이 간다.) 

거의 다 건널 즈음에 일제 총알이 날아와서 배에 구멍이 3개 뚫리자 김일성 주석이 배에서 뛰어내려 보니 물이 목 바로 아래까지 찼다. 그래서 호수를 걸어서 건너갔다.

채화 로인이 배를 다시 저어 건너왔는데 그 때까지 일본군들이 혹시 김일성 부대가 다시 건너올까 해서 매복하고 있었다.

채 로인은 그물 등을 보여주며 고기잡이하는데 왜 총을 쏘는가 하면서 따졌다고 한다.


해방 후 59년 박영순 단장이 이끄는 북의 항일전적지 답사단이 6개월간 남호두를 조사하고 갔다. 이 때 김일성 주석이 중절모까지 선물로 보내며 답사단에게 채 로인을 꼭 찾아 잘 대해주라고 했다고 한다.

답사단이 채 로인을 찾았다고 김일성 주석에 보고한 후 매년 조선에서 채 로인에게 선물도 보내오고 극진히 대접했다.

그러다 문화대혁명 당시에 채 로인이 조선의 특무라고 해서 투쟁을 맞았다. 나이가 많아 때리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홍위병들이 하루 종일 엎드리게 하고 비판도 가했다.

그 때 채 로인은 “우리 같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좋은 세상 만들려고 한 김일성 장군을 백성이 따르고 받드는 것은 응당한 일인데 왜 문제시하는가”라며 당당하게 맞섰다고 한다.

그 문화대혁명 후 2년 만에 채 로인은 유명을 달리했다.

죽을 때 꼭 김일성 주석이 선물로 보낸 중절모를 무덤에 함께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겨 그렇게 해 주었다고 한다.

남호두에서 돈화로 30리 가면 복흥촌이 있는데 거기에 가면 채 로인의 무덤이 있다.

중국 한족들도 김일성 장군을 이렇게 흠모하고 적극 도와나섰던 것은 김일성 부대와 한족의 마음이 통했기 때문이다. 김일성 부대는 진심으로 인민을 위하는 혁명군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한족들이 가지고 있었으며 특히 싸울 때마다 백전 백승을 떨쳤기 때문에 반드시 일제를 쳐몰아내고 인민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들어 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채화 로인이 홍위병과 싸우면서 했던 말과 행동만 봐도 이를 잘 알 수 있다고 본다.


✦김일성 부대가 그렇게 잘 싸웠는가?

리송덕 연변역사학자: 김일성 주석은 길림육문중학교에서부터 길회선철도반대투쟁을 승리로 이끄는 등 이름을 날렸었고 1930년 초 만주국 장학량 군벌이 일제에 투항하자 반일로 돌아선 구국군을 쟁취하여 공산당 혁명군과 손을 잡고 싸우는 연합의 길을 개척하는데 공로가 컸다. 특히 구국군과 연합하여 동녕현성 전투들을 승리로 이끌면서 만주 전역에 김일성 주석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1차, 2차 북만원정 시기에 일제 관동군에서도 가장 악질적이고 싸움을 잘한다는 정안군들을 만나는 족족 경박호반에 수장시키거나 로야령 밀림 속에 무주고혼 신세로 만들어버렸다.

김일성 부대는 이렇게 싸우면 백전백승을 했기 때문에 한족이건, 조선족이건 모두다 전설적 영웅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군중적 기반이 좋았고 늘 군중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흥미 있는 점은 일제가 후에 항일혁명군 지휘관들에게 포상금을 걸었는데 양정우나 주보중과 같은 중국의 전설적 영웅들보다도 김일성 장군 값이 제일 높았다는 사실이다. 일제도 김일성 장군의 이름을 인정한 셈이다.


공영귀: 실제 김일성 주석이 축지법을 쓴다는 등의 전설들이 많이 퍼졌었다. “김일성 장군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한다”. 이런 말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고 “일본군이 한번은 분명히 김일성 장군이 들어간 집을 확인하고 바로 포위해서 수색을 했는데 들어가 보니 없었다. 이래서 일본군들이 김일성 장군을 산신이라고 하면서 벌벌 떨다가 엉치에 불달린 양 꽁무니를 뺐다.”이런 줄거리가 있는 이야기도 자주 들었다.


✦김일성 부대에서 직접 싸운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으면?

공영귀: 항일에 참가했던 김일성 부대 출신 혁명군에게 들은 이야기이다.

베이후토우(북호두) 일본군 주력본부가 있었다. 밤에 김일성 부대가 본부에 은밀히 침투하여 부대를 공격하고 여기저기 불을 질러버렸다. 탄약고랑 다 폭발하고 난리가 났다.

공격했던 김일성장군 부대는 80리 떨어진 곳으로 신속히 이동했다.

그런데 다리를 다친 사람이 걷지 못해서 대오에서 떨어졌는데 조선여성 4명이 부상당한 한족 지휘관을 보호하며 이동하다가 더는 못갈 것 같으니 이 다친 한족이 가지 않겠다는 여성들에게 명령을 내려 모두 보내고 홀로 남아 일본 토벌대의 추격을 막으면 끝까지 싸워 여성들의 탈출 시간을 확보해준 후 탄알 한 알 남겨 자결하였다.

얼마 후 일본군들이 와보니 이미 숨진 상태였다. 일본은 이 항일연군의 목을 잘라 산 아래 마을에다가 걸어놓았다.
(필자주: 공영귀 선생은 해방이후 50년 경에 참전했던 혁명군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라고 하는데 한족 지휘관이 있었다는 말이 특이하다. 아마 김일성 부대가 한족 부대와 연합해서 공격작전을 폈는데 그 연합했던 한족부대에 속한 병사의 증언인 것 같다.)-대담 끝


모 인터넷 방송국에서 소개한 북한 제작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중국화동지역방문 기록영화를 보니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배를 타고 경박호반을 따라 주변 산줄기를 둘러보는 장면이 나왔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이런 김일성 주석과 중국인민의 피로 맺어진 동지애가 어린 산발들을 둘러보고자 바쁜 일정 속에서도 경박호 시찰 일정을 낸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꿈꾸는 대를 이어가는 조중친선의 앞날이 어떤 모습으로 펼쳐질지 자못 궁금하다.


방문한 남호두 촌은 600여호의 주민이 살고 있었는데 400여호가 한족, 200여호가 조선족이라고 했다. 지금 조선족은 8가구만 남고 다 한국으로, 대도시로 떠났다고 한다. 이제 거의 중국인들만 살고 있는 마을로 된 것이다.

그 남호두 새벽시장에 나가보니 경박호반에서 잡아올린 물고기들은 예나 지금이나 크고 먹음직스러웠다.

주민들이 사는 골목을 돌아보니 생활형편도 퍽 좋아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아직 더 발전시켜야할 부분이 적지 않았다.


피로써 맺어진 북중친선이 새롭게 다시 꽃피어 동북지역의 경제발전을 가져와 조국을 찾는데 피를 많이 흘렸던 남호두 주민들이 잘 사는 날이 빨리 오기를 바라며 필자는 다음 취재길에 나섰다.✍

▲ 남호두회의 기념비와 필자     © 자주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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