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박호는 동지애로 뭉친 북중혈맹의 상징
[집중취재] 김정일, 연이은 경박호인근 유적지 방문 배경과 전망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1/06/23 [08:10]  최종편집: ⓒ 자주시보
▲ 경박호가 있는 영안시 영안역 앞 공원의 항일열사기념비, 김정일 위원장이 지난해에 이어 지난 5월 20일 이곳을 다시 찾았다.     © 자주민보

 

▲ 김정일 위원장이 올해 5월 중국방문시엔 영안역 기념비 뿐만 아니라 이 경박호까지 처음 방문했다.     © 자주민보

 

▲ 경박호공원 안에 있는 경박호전쟁터기념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이 비를 방문하였다.     © 자주민보

 

▲ 경박호 공원 안에 있는 경박산장 이정표     © 자주민보

 

▲ 경박산장으로 가는 길의 이름이 항연로 즉, 항일연군의 길이다. 걸어서 약 한시간 거리의 이 길을 따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경박산장으로 갔다고 한다.     © 자주민보

 

▲ 산 정상의 건축물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중국 간부들과 오찬과 담화를 나눈 경박산장, 들어가는 초입부터 출입금지구역이었다. 귀한 손님이 올 때만 문을 연다고 한다. 경박호반을 굽어보면 김 위원장은 무슨 상념에 잠겼으며, 중국 간부들과 무슨 담화를 나누었을까?     © 자주민보

 

▲경박산장 앞 경박호반의 저녘노을, 경박호는 곳곳이 절경이었다.     © 자주민보

 

▲ 드넓은 경박호반의 저녘노을, 첩첩산맥 연봉 너머로 잠겨드는 태양의 아름다운 빛.    © 자주민보

 

▲경박호의 밤, 깊고 푸른 이런 어둠을 이용하여 김일성 주석은 이 드넓은 경박호를 고기잡이 쪽배로 건너다니며 민중을 항일로 불러일으키고 일제와 전투도 진행했다. 그 과정에 추격하던 일제 총탄에 배에 구멍이 뚫린 적도 있다고 한다. 불빛은 경박호를 남호두, 북호두로 나누는 다리의 가로등과 차량 불빛이다.      ©자주민보

 

▲ 경박호공원에서 우리 동해쪽을 바라보며 찍은 아침 해돋이     © 자주민보

 

▲ 떠오른 아침해가 다시 구름에 가렸지만 구름 속에서도 여전히 태양은 타오르고 있었다.     © 자주민보

 

▲ 구름을 뚫고 찬란한 아침해는 기어이 떠올랐다.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역사가 숨쉬는 바로 그 땅,  동지애에 기초한 조중친선의 새 역사가 창조된 경박호반을 환히 비추며 그렇게 태양은 떠올랐다.     © 자주민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년 사이 3번의 중국방문과 그 때마다 중국정부의 대대적인 환영행사는 전에 없던 일이며, 세계 외교사에서도 있어보지 못한 초유의 일이었다.

그 배경과 의도가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지난해에 이어 이번에도 두 번이나 연속 방문했던 흑룡강성 영안시 항일기념탑과 인근 경박호 항일전적지를 직접 찾아가 보았다.

결과 무단장과 영안시 경박호 일대는 김일성 주석이 항일대전의 시기 자신의 친솔 부대를 이끌고 2차에 걸친 북만원정을 단행하여 뜨거운 국제주의적 동지애로 중국의 항일혁명군을 적극적으로 도와준 장소였다.
이 과정에 김일성 주석은 촉한(독감인듯)과 일제 관동군 토벌대의 추격이 겹쳐 절체절명의 죽음의 위기도 어렵게 넘기기도 했다고 한다.


결국,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이번에 방문한 북만주는 동지애로 맺어진 북중혈맹의 상징적인 곳이었다.


✦ 김정일 국방위원장 경박호 시찰

먼저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록된 경박호를 찾아 공원관리인으로부터 5월 20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여러 중국 영도(고위간부)들과 함께 경박호를 찾아와 대수루폭포 앞 경박호전역비(경박호전쟁터기념비)를 참관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경박호전역비는 항일연군이 경박호 주변에서 일제에 대항하여 벌린 치열한 전투를 기념하는 비였다.

비문 중에는 일본 관동군이 항일연군과 싸워 막대한 피해를 보자 비열하게 화학무기까지 사용하여 항일혁명군이 많이 희생되었다는 사실도 기록되어 있으며 이렇게 피로써 싸워 되찾은 나라에서 살아가는 후대들은 선열들의 희생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적혀있었다.


공원관리인은 이후 김정일 국방위원장 시찰단 일행이 경박산장에서 식사를 했다는 사실도 확인해 주었다.

경박호전역비에서 항일연군 투쟁이 집중적으로 벌어진 항연로(抗聯路-항일연군의 길)를 따라 1시간 정도 걸어가자 싱싱한 6월의 신록이 짙어가는 깊은 숲 속에 경박산장이 자리잡고 있었다.
경박산장은 경박호반이 한 눈에 들어오는 산 정상에 연갈색 대리석으로 외벽을 마감한 현대식 건축물이었는데 귀한 손님이 올 때만 문을 여는 귀빈용 산장이라 들어가서 취재를 할 수 없어 멀리서 사진만 찍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중국 간부들과 식사를 할 때는 5월의 신록이 다투어 막 피어나는 시기였을 것이다.
경박호는 화산 폭발로 흘러나온 용암이 백두산에서 흘러나오는 목단강을 막아 만들어진 천연화산댐 호수이다. 주변 산줄기도 결국 백두산맥에서 뻗어나온 것들이어서 깊은 밀림으로 에워싸여 있으며 현무암이 풍화하여 만들어진 검은 땅을 흘러온 목단강 물이라 좀 검은 빛을 띠고 있었지만 물도 아주 맑았다.

그 경박호 호반을 바라보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어떤 감회에 젖었을까.

그리고 중국 간부들과 어떤 대화를 나누었을까.

그것까지 말해줄 증견자는 만날 수 없었지만 분명한 사실은 곳곳이 절경인 1,400제곱킬로미터나 되는 거대한 경박호 호수 중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찾았던 곳은 조-중 항일연군 전적비와 항일연군로였다는 사실이다. 특히 그 ‘항일연군로’라고 이름을 붙인 길을 따라 시찰의 길을 이어갔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연변박물관 혁명역사부 주임을 역임했던 리송덕 역사학자는 항일연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동북3성 일대에 살던 조선족과 한족(중국인)들은 총을 들고 무장투쟁의 길에 서슴없이 나섰다. 민족주의 계열의 구국군 반일부대병사들과 주로 공산주의자들이 조직한 무장부대들이 함께 무장투쟁을 전개하는 연합을 성사시키는 데 청년 김일성 장군의 역할이 컸다.

1936년 국제공산당 7차대회에서 조선족과 한족이 연합하여 통일전선적인 항일혁명군을 조직하고 연대, 연합하여 싸우라는 결정에 따라 체계적인 항일연군을 조직했는데 3개방면군 아래 총 11개 군이 조직되었고 각 군은 여러 개의 사단과 독립사단으로 구성되었다.

이 중 일부는 일제에 투항하거나 와해되기도 했지만 전성기에는 수만~수십만의 대오를 이루어 100만 관동군과 유격전법으로 맞서 싸워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총을 든 병사들의 구성원을 보면 김일성 주석이 실질적 책임자였던 2군(초기엔 2군 6사 사장이었다고 한다.)의 경우 대다수가 조선족이었고 나머지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이끌었던 군들도 절반 이상이 조선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특히 이런 부대들의 지휘관들은 80% 이상이 조선족들이었다.

이중 김일성 주석이 이끈 부대의 전투력이 막강했는데 백전백승이었다. 단 한번도 실패한 전투가 없을 정도로 일제가 세계 최정예라고 떠들던 100만 일제 관동군을 완전 공포에 몰아넣었다. 30년대 후반과 40년대엔 일제의 대대적인 토벌과 중국 간부들의 무모한 열하원정으로 혹심하게 와해되어가던 다른 군들을 추스리는 역할도 김일성 주석이 적지 않게 했다.

주보중, 양정우, 리현록, 왕덕태, 위증민 등 중국의 공산당 간부들이 이끈 항일혁명군보다 김일성 주석이 이끈 항일혁명군의 위력이 대단했다는 것은 일제가 공표한 항일 지도자들 현상금 액수 중에 김일성 주석의 금액이 월등하게 높았다는 사실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김일성 주석이 이끈 항일혁명군이 이렇게 가는 곳마다에서 일제를 족치는 총포성으로 주민들의 가슴에 독립의 희망을 심어주었기 때문에 조선족이건 한족이건 만주의 모든 주민들이 김일성 주석을 전설적 영웅으로 찬양하였고 김일성 주석이 위험한 상황에 처할 경우 주민들이 나서서 목숨까지 바쳐가며 지지 원호하고 도와주었던 것이다. 여기 경박호도 중국 한족 어부들이 건네주어 김일성 주석이 이를 넘나들며 영용하게 싸울 수 있었다.”
참조:
http://ko.wikipedia.org/wiki/%eb%8f%99%eb%b6%81%ed%95%ad%ec%9d%bc%ec%97%b0%ea%b5%b0
 

경박호 공원 관리원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5월 20일 경박호를 오기 직전에 먼저 흑룡강성 영안역 광장 앞 공원에 있는 '혁명열사기념비'도 시찰했다는 사실을 알려주어 다음날 바로 취재의 길을 떠났다.

이 혁명열사기념비 주변 상인들의 말을 들어보니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지난해에도 와서 보고 간 혁명열사기념비를 이번에도 또 보고 이어 자동차를 타고 떠났다고 말했다.
즉, 인근 목단강 역에서 내려 자동차로 영안역 기념비를 다시 보고 경박호를 향했던 것 같다. 당일날 새벽부터 중국 공안요원들이 돌아다니며 상점문을 닫으라고 해서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고 했다.

지난해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이 영안역 기념비만 보고 기차에 올랐었지만 올해엔 경박호까지 가서 관련 유적지를 돌아본 것이다.

경박호 남호두 지방을 취재하는 과정에 경박호 주변 마을의 중국공산당 당원들에게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오기 며칠 전 영안에서 경박호로 가는 길 주변의 풀을 깎고 도로를 보수하는 등의 임무가 떨어져 마을 별로 할당된 인원이 동원되어 그 일을 했다고 한다.

영안역 광장 앞의 혁명열사기념비의 문구를 자세히 살펴보니 여기에도 항일연군의 피어린 투쟁사를 후대들이 잊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그중 주보중 당시 5군장이 쓴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왜구가 창궐하여 횡포하게 금수강산을 짖밟아놓아, 우리 영웅건아들이 전선에 나가 피로 물들이며 용감히 싸워 목단강에서 뒤엎어 쫓아버렸다. 이어 장개석을 반대하여 싸운 당과  인민혁명의 빛나는 혁명열사들의 투쟁업적은 영원히 잊을 수 없다.” -주보중(항일연군 5군 군장, 88연단 여단장, 길림성 성장)
 

▲ 영안역 공원의 항일열사기념비에 새긴 주보중 항일연군 5군장의 기념글     © 자주민보



✦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왜 북만 유적지를 연이어 방문했을까?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중요시한 중국 동북지역 항일유적지는 더 많이 있다. 
김일성 주석의 집이 있었고 강반석 어머니의 묘소가 있었으며 북한에서 조선인민군 창건의 효시로 삼고 있던 항일유격대를 창건한 소사하의 등판이 있는 안도현 무주촌이나, 김일성 주석이 소학교 시설을 보냈으며 조중친선의 상징으로 양국이 공히 인정하는 장울화 열사 묘소와 큰 규모로 잘 갖추어진 기념관이 서 있는 무송, 그리고 일제 관동군에게 무리죽음을 안겼던 안도현의 홍기하, 올기강 전투 유적지도 무척 가보고 싶은 곳일 것이다.
특히 지난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직접 가보고 만단정회를 금치 못했다고 했던 김일성 주석이 주체사상을 창시하고 조선노동당의 뿌리인 공산주의청년동맹을 결성했던 길림 육문중학교나 약왕묘는 다시 찾고 싶은 장소임에 틀림 없다고 본다.

이 외에도 중국 동북지역에 김일성 주석 관련 뜻 깊은 유적지가 많고 많은데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연이어 김정일 국방위원장 방문한 곳은 바로 북만주 항일연군 유적지였다.

그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김일성 주석이 북만주에 항일역사를 남기게 된 1차, 2차 북만원정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김일성 주석이 직접 이끌었던 부대는 당시 조선족이 많이 살던 간도라고 불리던 길림, 연길, 안도, 돈하, 무송 등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주로 활동하였고 나머지 중국인 주보중 등이 이끌었던 부대는 조선족과 함께 한족들도 많이 살던 북만주 쪽에서 활동했었기에 항일연군 유적지가 이 북만주에 속하는 경박호 일대에 많다.

즉, 김일성 주석 부대는 독자적으로도 충분히 잘 싸워 중국부대들이 지원하러 올 필요가 없었던 반면 중국 지휘관들의 부대들은 김일성 주석의 도움이 때마다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 도움을 주기 위해 김일성 주석은 두 차례 북만원정을 단행했다고 한다.


리송덕 학자의 증언과 제공한 자료를 종합해 보면 1차 북만원정은 그 지역 일부 공명심에 사로잡힌 공산주의자들이 무리한 5.30폭동을 일으키는 바람에 일제로부터 숱한 탄압과 희생을 당한 영안지역 주민들이 공산주의와 혁명군대로부터 등을 돌리는 일이 벌어졌으며 그 결과 생존이 막막해진 반일부대 병사들이 일제에 투항을 하거나 투항하지 않은 부대는 강력한 일제의 정안군이란 토벌대에 공격을 당해 심각한 피해가 발생하던 상황에서 그 지역에서 활동하던 중국인 항일혁명가이자 전우인 주보중으로부터 긴급한 도움을 요청받고 김일성 주석이 1934년 10월 부대를 끌고 가서 도와준 활동을 말한다.

당시 김일성 주석은 3개 중대  160여명의 병사들을 데리고 로야령을 넘어 경박호 주변 영안 일대에서 일제에 투항하지 않은 그 지역 혁명군들과 연합하여 수십차례 전투를 벌여 모두 승리로 이끌어 사그러져 가던 북만지역의 항일무장투쟁의 불꽃을 되살렸다고 한다.

정안군이라는 그 지역의 일제 토벌대는 자주독립의지가 낮고 전투경험이 적은 중국 반일부대를 손쉽게 격파해오다가 갑자기 김일성 주석을 중심으로 강하게 뭉쳐 많은 승리한 전투를 통해 단련된 김일성 부대를 만나 겁 없이 덤볐다가 몰살을 당했던 것이다.

때로는 경박호반을 배를 타고 건너오던 일제 정안군 200여명의 토벌대를 기관총 몰사격으로 호수 속에 모조리 수장시키기도 했고, 유인 매복전과 협공작전으로 기병이건 정예부대건 골짜기와 밀림 속에 몰아넣고 무리죽음을 안겼던 것이다.

김일성 주석은 북만원정 기간 항상 영안지역의 부대와 연합하여 싸움으로써 그들에게 유격전 비법도 전수해주고 또 일제 정예부대도 얼마든지 깰 수 있다는 신심을 불어넣었다고 한다.


특히 김일성 주석은 5.30폭동과 5.1시위 이후 혁명군으로부터 등을 돌린 주민들의 마음을 돌려놓기 위해 경박호 주변 일대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며 연예공연도 열어 마을사람들을 모아 아무리 들판이 넓어 식량이 풍족한 영안일대라고 해도 일제가 통치하는한 노예와 죽음을 면할 수 없으며 일제를 몰아내야만 이국 땅에서 떠돌지 않고 다시 고향이 있는 조선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호소하여 그들을 혁명군 편으로 돌려세우는데 성공하였다고 한다.

그렇게하여 마을마다 반일회 등을 조직하여 영안지역 혁명군을 도와나서게 했던 것이다.

주보중 등 중국인 간부들이 마을 주민들에게 아무리 호소해 보았지만 마음을 열지 않던 영안주민들이 김일성 주석의 호소에 마음을 열었던 것이다.

연변 역사학자들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김일성 주석이 민족주의 계열 구군국과 중국 공산당 유격대와의 합작을 성사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고 북만원정을 오기 전부터 동녕현성전투나 라자구전투, 소왕청방어전투 등에서 연전연승하여 그 이름을 이미 북만까지 날렸기 때문이며 북만원정을 와서도 하는 전투마다 일제 관동군을 박살내버리고 연전연승하여 영안지역 주민들의 가슴을 후련하게 해주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일성 주석이 북만에서의 활동할 때 물고기와 식량 등을 공급했던 송덕보 한족 집안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김일성 주석부대는 싸움도 잘했지만 특히 인정이 깊고 예의 바르며 주민들에게 피해를 절대 주지 않았음은 물론 마을 청소도 해주고, 장작도 패주고 일손도 도와주는 등 모범적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모든 주민들이 마음을 열고 김일성 주석의 항일을 도와나섰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김일성 주석의 1차 북만원정 후 와해되어가던 중국 반일부대와 혁명군들에 다시 참군자들이 늘어 결국 주보중을 군장으로하는 5군을 창설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큰 성과를 가져온 북만원정이었지만 김일성 주석은 아끼던 전령병과 여러 지휘관, 그리고 끌끌한 병사들을 잃어야 하는 아픔을 겪지 않을 수 없었으며 김일성 주석 자신도 돌아오는 과정에 심하면 사망에까지 이를 수 있는 촉한에 걸려 정신을 잃고 쓰러진데다가 100여 배나 되는 병력이 동원된 일제 토벌대의 추격까지 겹쳐 죽음 직전의 위기를 겪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북만원정을 위해 160-170명이 출발했는데 영안에서 2개 중대는 미리 돌려보냈고 남은 한 개 중대 60여명을 데리고 김일성 주석은 북만에서 귀로에 올랐는데 이중 살아남은 사람은 16명뿐이었다고 했다.

실제 전투에서는 몇 명밖에 희생되지 않았는데 귀환도중에 심각한 타격을 입은 것이다.


2차 북만원은 이듬해 1935년 6월에 단행되었다. 1차 북만원정 성과로 주보중을 중심으로 5군이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아직 각 예하 부대에 단련된 지휘관들이 많지 않은 관계로 여러 어려움을 겪고 있는 영안지역 항일혁명군을 다시 지원하는 것이 중심 목적이었다.

특히 국제당(코민테른) 7차당대회에 대표로 참가했던 중국인 위증민이 영안으로 돌아오기로 되어 있어 국제당에 제기한 민생단 문제, 조선인민혁명군의 독자적 조선독립투쟁 문제 등에 대한 답도 들어야 했고 북만에서 활동하던 최용건, 김책 등의 조선인 부대들을 만나 공동전선을 형성하는 문제도 논의하고자 2차 북만원정을 단행한 것이었다.

규모는 1차 때보다 훨씬 컸다. 말이 끌고 가는 박격포부대와 중기관총부대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김일성 주석은 산동툰전투에서 이 박격포와 중기관총 부대를 앞세워 조-중 연합군보다 훨씬 많은 1만여 명이나 되는 일제 관동군과 그 앞잡이 위만군 혼성 토벌대를 산산이 부셔버렸다고 한다.
이때부터 일제관동군과 토벌대는 항일혁명군에 포와 중기관총까지 있다며 비명을 지르며 더욱 벌벌 떨기 시작했다고 한다.
 
결국 2차 북만원정도 1차원정과 마찬가지로 대중 속에서 들어가 주민들을 반일투쟁으로 불러일으키고, 주보중의 5군 등 영안지역 혁명군과 함께 일본 토벌대를 쳐 일제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으며 동시에 중국혁명군의 전투능력을 높이고 사기를 진작시키는 큰 성과를 안아왔다고 한다.

특히 국제당 7차대회 방침에 따라 중국 지휘관들과 상의하여 이때 항일연군체계를 새로 세워 질서정연하고 합리적인 공동연합전선을 구축한 것도 큰 성과라고 한다.
이 때 국제당에서는 위증민을 통해 '만주에 조선인 자치주를 내오고 조선인들은 조선인들끼리 따로 부대를 만들어 중국 부대와 협력하여 일제와 싸우라'는 방침을 결정하고 제안했다고 한다.
아마 국제당에서는 다시는 중국인들이 같은 부대 안에 있는 조선인들을 간첩으로 오인하여 대량학살했던 민생단사건과 같은 참극을 막고, 조선인들에게 더 자유롭게 마음껏 항일투쟁을 전개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주고자, 그리고 그것이 일제에게 가장 심대한 타격을 줄 방법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국제당에서도 만주에서는 조선족 혁명가들이 얼마나 잘 싸웠는지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그 이전까지 중국 공산당 동만주특별위원회에서는 조선인이 중국 경내에서 싸울 경우엔 중국의 항일혁명만 해야지 조선의 독립을 위한 혁명투쟁을 하는 것은 협애한 민족주의라며 비판하고 못하게 해왔었다.

물론 그럼에도 김일성 주석은 독자적인 당조직을 내오고 초지일관 조선의 독립을 기본사명으로 항일혁명투쟁을 전개해왔었다. 하지만 이런 동만특위의 결정이 그 활동에 심각한 장애를 조성했던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면 중국 공산당 동만특위에서는 30년대 초반 일제의 이간책에 속아, 조선족 출신 간부들이 일제와 손잡고 간도를 중국에서 떼어가려는 간첩질을 한다고 무조건 의심하여 가혹한 고문으로 혐의를 뒤집어 씌워 2,000여명을 처형할 때도 김일성 주석이 직접 이를 막을 수 있는 길이 없었다. 
중국 공산당과 대결할 군사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인도주의적 견지에서도 그렇고 정말 일제가 바라는 골육상쟁과 같은 것이어서 힘을 이용한 대결방식은 아예 배제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동만특위 공산당 당원이었던 김일성 주석은 결국 중국 공산당 체계 안에서 회의와 논의를 통해 중국 간부들을 설복 교양하여 어렵게 그 좌경적 민생단 사건을 중단시키는 방식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 회의 과정에 억지를 부리는 중국인 지휘관들에 대응하여 주먹으로 회담 탁자를 내리치며 민생단 숙반을 중단하라고 언성을 높이기까지 했다고 하니 당시 김일성 주석의 마음에 얼마나 큰 아픔이 응어리졌었겠는지....
김일성 주석이 관련 회의를 제안하고 소집하고 진행하는 동안 손가락 총에 의한 숙반의 회오리바람이 몰아쳐 그 과정에 2,000여명이나 되는 조선족 항일 일꾼들, 특히 성과를 많이 내어 공산당 고위 간부 임무를 수행하던 끌끌한 사람들이 주로 희생되었던 것이다.
사실 이 사건 때문에 중국항일혁명군의 능력있는 지휘관 부족사태가 발생했고 그것을 메워주기 위해 김일성 주석이 북만원정의 길에 나섰으며 가서 가르치고 도와주는 것으로 부족해 데리고 간 끌끌한 간부들을 대다수를 중국 부대에 또다시 넘겨주었던 것이다.

따라서 국제당 7차대회에서 민생단 사건을 좌경적 오류라 결정하고 시급히 그 피해를 복구할 것에 대한 결정과 함께 만주에 조선인자치위원회를 만들어 근거지를 삼고 조선인들은 조선인부대를 만들어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우면서 중국 부대와 연합 작전도 전개하라는 결정을 채택하여 동만특위 대표로 참가한 위증민을 통해 통보해 온 것은 김일성 주석을 중심으로 뭉친 만주 조선인 항일혁명군에게는 환희에 넘칠 중대한 소식이었다.

하지만 김일성 주석은 중국항일혁명군에서 조선인들을 다 빼내오면 그들은 심각한 전력 상실로 제 역할을 수행하기 힘들다며 그 결정을 실행에 옮기지 않았고 조선인자치주도 중국 주민들에게 불필요한 경계심만 유발할 수 있다며 권고로만 듣고 말았다고 한다.

오히려 주보중 등 중국 지휘관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데리고 간 단련된 숱한 병사들과 지휘관들을 북만의 부대에 거의 모두 파견하는 조치를 취해 중국항일혁명군 강화에 큰 도움을 주어 중국항일혁명군을 감동시켰다고 한다.
위증민도 한때는 조선인들이 간도를 욕심낸다는 의심을 품었었는데 이 때야 김일성 주석의 진심을 바로 깨닫게 되었고 김일성 주석의 동지애적 국제주의 혈맹 정신이 얼마나 뜨거운 사랑으로 가득차 있는 것인지 알게 되었다고 고백했다고 한다. 그래서 중국인인지만 김일성 부대에서 싸우겠다는 의지까지 피력했다고 한다.

이런 김일성 주석의 진심어린 허심한 국제주의적 신념과 실천이 있었기에 한국전쟁 당시 소련도 미국이 무서워 엉덩이를 뺄 때 중국은 지원군을 조선에 보냈던 것 같다.
물론 '모안영'이란 중국 영화에서는 북을 지원하려는 것도 있었지만 미국이 북한을 먹은 다음엔 중국을 노릴 것이라며, 경제건설을 다 해놓은 후에 미국과 전쟁으로 폐허가 되는 것보다. 어렵지만 경제건설을 하지 전에 미국과 한판 붙는 것이 더 낫다는 중국 자신의 이해관계도 많이 작용했음을 밝히고 있다.
 
어쨌든 최근 북중관계에서 피로써 맺어진 조중친선은 바로 이런 역사를 배경에 두고 나온 말인 듯하다.


이 때 중국부대 파견 명령을 받은 부대원들은 이제 김일성 주석과 함께 백두산 지대로 진출하여 꿈에도 그리던 국내진공작전을 보란듯이 전개하자는 남호두 회의 결정이 나온 후라 김일성 주석과 함께 조국에 들어가 싸우고 싶은 욕심에 제발 중국부대에 자신을 보내지 말아줄 것을 애절하게 부탁했지만 김일성 주석은 조선과 중국의 항일연군 공동전선 구축을 위해서는 북만부대들에 대한 지원이 꼭 필요하다며 대원들을 밤을 세워 설복했다고 한다.

김일성 주석은 이때의 이별에 대해 살점을 떼 네는 것보다 더 아파했다고 한다. 특히 그렇게 이별한 파견 지휘관들과 전령병, 그리고 병사들을 다시 보지 못하게 된 경우가 많았고 그렇게 중국 부대에서 싸우다 희생된 전우들의 경우 그 시체마저 어디에 묻혔는지도 알 수 없어 공화국을 세운 훗날에도 그렇게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그래서 김일성 주석은 생전 이곳 경박호 주변 북만주 땅을 그렇게 다시 찾고 싶었지만 국경선이 가로막고 있어 결국 그 간절한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고 한다.


바로 그 역사의 현장인 경박호 주변 북만 영안 땅의 항일연군유적지를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방문한 것이다.
엄밀히 따진다면 북한 김일성 주석이 중국의 항일혁명군을 목숨을 걸고 찾아가 아무 대가 없이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도와준 유적지를 찾아간 것이다.


리송덕 역사학자가 전해준 자료를 보면 그 중국 항일영웅 주보중이 김일성 주석을 중심으로 한 조선족 항일혁명군의 지원활동에 대해 큰 감사의 뜻을 표했다고 나와 있다.

[주보중은 기회가 생길 때마다 동북혁명을 위해 바친 조선사람들의 로고와 업적을 격찬하였다.

《1930년 당시 동북 각 지방의 현당위원회 비서들과 구당위원회 비서들은 대부분 조선동지들이였소. 연변의 여러 현들은 말할것도 없고 녕안, 발리, 탕원, 요하, 보청, 호림, 의란 등 북만 여러 현의 당위원회 비서들과 현당위원들도 거의나 조선족간부들이였단 말이요》

항일혁명이 최후단계에 돌입하고 있던 어느해 봄날 나와 함께 아무르강이 지척에 바라보이는 하바롭스크주변의 북밀영모래터를 산책하던 그는 항일련군시절의 공동투쟁의 나날을 감회깊이 돌이켜 보면서 이런 말을 하였다.

《조선동지들의 업적을 떼놓고서는 항일련군의 발전력사도 운운할 수가 없소. 2군의 90%이상이 조선사람들이라는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고… 1군, 3군, 4군, 6군, 7군의 시초를 열어 놓은 주인공들도 리홍광, 리동광, 최용건, 김책, 허형식, 리학만과 같은 조선동지들이 아니겠소. 로위와 양정우가 희생된 다음부터는 김일성사령이 여러해동안 2군은 물론, 1군까지 통솔하면서 항일전쟁을 령도해 오고 있는데 … 동북혁명의 주인들인 우리로서는 사실 머리를 숙이고 절을 하고 싶은 때가 많소. 우리는 항일전쟁이 끝난 다음 동북땅에 조선족출신렬사들의 기념비를 꼭 건립하려고 결심하였소.》

주보중은 항일전쟁이 끝난후 실지로 길림성당위원회를 통하여 길림과 연변지구에 조선족출신렬사들의 기념비를 세울데 대한 결정을 채택하였다.]-
김일성 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중에서


물론 주보중의 이 꿈을 실현되지 못했다. 이전 중국 공산당 지도부들이 만주에서의 이렇게 유명했던 김일성 주석의 항일 전적을 기념하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김일성 주석의 동지애적 국제주의 진심을 실천으로 체험한 주보중과 같은 북만주의 항일영웅들도 이전 중국 지도부들의 의해 좌천되어 관직도 없이 쓸쓸히 생을 마감해야 했다.

이런 소식을 들었던 김일성 주석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그리고 곁에서 그런 김일성 주석의 지켜보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그 주보중 영웅이 친히 쓴 글발이 새겨진 영안역 공원의 혁명열사기념비를 두 번이나 찾은 이유도 또, 중국 중부지대 시찰을 가기 전에 머나먼 길을 에돌아 다시 목단강 영안시에 들러 기어이 경박호 유적지까지 시찰했던 이유도 이런 역사적 배경을 알고 보니 조금은 잡힐 듯도 하다.


✦ 김일성 주석과 다른 나라 공산주의 혁명가들의 차이는 동지애

리송덕 역사학자가 전해준 김일성 주석의 항일혁명활동 관련 자료를 분석종합해본 결과 김일성 주석과 중국 공산주의자들과의 하나의 뚜렷한 차이가 느껴지는 부분이 있는데 바로 ‘사랑’과 ‘진심’ 즉, 동지애였다..

김일성 주석은 부자를 만나건 가난뱅이를 만나건 인간으로서의 양심을 믿었다. 그리고 일단 사랑과 믿음으로 관계를 맺으면 항상 그 믿음 끝까지 변치 않았다. 이해관계를 따진다거나 일시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관계를 맺는다는 생각은 아예 머릿속에 없었던 것 같다.

개인적 관계이건, 조직적 관계이건 손익을 따지려는 개념 자체가 머리에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김일성 주석이 조직한 항일혁명군의 전우애는 다른 부대의 전우애와 차원이 달랐다. 동지의 가슴을 겨누는 총구를 발견하면 무조건적, 자동적으로 동지에게 몸을 날리게 프로그램화 되어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김일성 주석 스스로도 전투에서 늘 그러하였다.
라자구전투에서는 민족주의계열과 공산주의계열이 함께 했던 조-중 항일혁명군 연합부대가 서산포대의 강력한 기관총 공격으로 상황이 악화되어 패배의 갈림길에 들어섰다는 판단이 들자마자 김일성 주석은 ‘나를 따라 앞으로’를 외치며 과감히 몸을 날려 서산포대로 진격하면서 숱한 적들을 싸창으로 쏴갈기며 내달렸다고 한다. 그러자 부대원들이 일시에 서산포대로 달려들어 순식간에 제압하고 라자구전투를 승리로 결속했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 김일성 주석은 총알이 모자를 관통하고 숱한 총탄이 귓전을 스쳐지나갔다고 한다. 이 전투의 승리로 중국 민족주의계열 반일부대들은 공산주의자들과 힘을 합쳐 싸우면 일제를 타승할 수 있다는 신심을 가질 수 있었다고 한다.

중국 항일혁명부대의 신심을 높여주기 위해 김일성 주석은 생명마저도 아끼지 않고 온몸을 던졌던 것이다.

물론 많지는 않았지만 이런 사랑과 믿음을 배반한 사람들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김일성 주석은 어느 개인이나 개별 부대 지휘관, 개별 국가 지도자의 행동이 아니라 민중 일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이런 김일성 주석의 가치관은 언제나 변함이 없었던 것 같다.


“인민의 심장속깊이에로 침투하는 길은 여러갈래가 있다. 하지만 그 심장이 받아 들이는 통행증은 단 한가지밖에 없으니 그것이 바로 진심이다.” -김일성 주석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중에서

진심으로 대하면 민중은 언젠가는 알아주게 된다는 말인 것 같다. 그러니 일시적 우여곡절에 실망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중국의 공산주의자들은 중국의 민족주의 반일부대와의 연합에 있어서 진심이 아닌 그것이 가져올 효과와 유불리를 더 많이 따진 것 같다.

뿐만 아니라 국가 관계에서는 더 심한 편향도 많았다. 일제의 이간 책동에 놀아나 조선인 간부들을 민생단으로 몰아 무리로 처형한 것만 봐도 진심으로 사람을 믿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잘 알 수 있다.

사실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도 통일전선을 전술적 차원에서 일시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강하다. 종교인이나 중농 등 일시적 시기엔 굳이 적으로 만들 필요가 없기 때문에 공격을 하지 않는다는 언급 등이 나오는 것을 보면 유불리와 손익을 따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국가 간에는 사실 국제주의적 우의나 친선보다 유불리와 손익이 더 절대적인 힘을 발휘했다.

자본주의진영은 국제사회란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사회라며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이 국제관계의 고유한 특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자국에 이익이 된다면 하루 아침에 어제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된다고 해서 문제될 것이 없다고 내놓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사회주의 진영에서도 정도는 달리했지만 그런 측면이 없지 않다. 짜르 제국주의 시기 군사적으로 빼앗아간 블라디보스톡, 하바롭스키 등 외만주 지역을 중국에 기어이 돌려주지 않았던 소련은 이후에도 아무르강 위의 섬을 하나 두고도 중국과 서로 죽이는 전투를 벌렸다.

중국의 마오쩌뚱도 좀 다르기는 했지만 근본적으로 새로운 관점을 가지지는 못했던 것 같다. 베트남과 영토문제로 전쟁까지 한 것을 봐도 그렇고, 문화대혁명을 무조건 다 비판할 일은 아니지만 그 과정에 숱한 좌경적인 우를 범한 것만 봐도 그렇다.

이런 국제관행이 옳다 그르다 논하자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통상적인 일이었다는 것이다.


김일성 주석의 관계는 애초부터 이런 관행과 차원이 달랐으며 그 새로운 차원의 관계로 맺어진 항일혁명군은 다른 부대와 비교할 수 없는 막강한 전투력을 발휘하였다.
허망한 세계 지배 야망을 가슴에 품고 상급의 명령 지시로 움직이는 일본 관동군이 전투기와 탱크까지 동원하였지만 번번히 이렇게 뭉친 김일성 주석 부대와의 교전에서는 대패를 면치 못했다.

김일성 주석 부대는 동지애로 똘똘뭉친 바로 그 힘으로 북만의 중국전우들을 돕기 위해 죽음이 도사리고 있는 로야령과 천교령을 넘어 북만원정길에 올랐던 것이다.

지금 북한이 세계 최강이라고 하는 미군도 한 방에 쳐 물리칠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것도 핵무기보다 더 강력한 일심단결의 위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경제강국건설을 위한 최첨단 돌파의 기적도 경쟁과 이익의 논리가 아닌 지도자의 사랑과 믿음에 보답하려는 북한 주민들의 창조적 열의열정이 만들어내고 있다고 북한은 자랑하고 있다.

북한을 직접 가보지는 못했지만 인터넷에 공개된 영상만 봐도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로 보인다.


마르크스-레인주의는 물론 세계 혁명사를 깊이 비교연구하여 김일성 주석의 사상을 정리하고 집대성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그 과정에 바로 그 차이를 가장 명확히 인식하게 되지 않았나 하는 판단이 든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동지애의 노래’라고 한다. 혁명동지들 간의 순결하고 절대적인 사랑을 노래하고 있는데 그 동지애의 최 정수에 김일성 주석의 동지애가 놓여있다는 노래이다.
돌 우에도 꽃이 피어나게 할 정도로 지극했던 것이 김일성 주석의 정성이고, 영원히 죽지 않는 전사들의 영생도 김일성 주석의 사랑이 만들어 준 것이기 그 김일성 주석을 우러러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생사를 함께 하며 김일성 주석을 동지애로 받들어 간다는 노래이다.

모 인터넷 방송에서 공개한 ‘조선의 별’이란 영화에서 김일성 주석 혁명조직원이었던 차광수가 최후을 맞이하여 남긴 말도 “동지애로 한이 없으신 그이(김일성 주석)”라며 의무감이 아닌 양심과 신념으로 김일성 주석을 옹위해가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 영화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직접 창작지도하여 만든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점을 떠올려 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사심 없는 김일성 주석의 국제주의적 사랑과 동지애가 어려있는 경박호반 항일연군유적지 방문을 통해 중국 최고 지도자들에게 이 점을 환기시키고자 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것을 체득시키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아무리 설명해도 철학적 사유의 깊이가 없다면 납득이 쉽지 않는 고차원적 정신세계이다.
특히 현실 체험을 통해 느껴보지 못한다면 영영 그 진수를 이해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기 쉽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료를 분석해보면 양정우, 위증민이나 주보중도 김일성 주석과 오랜 시간 함께 실천투쟁을 하는 과정에서야 김일성 주석의 국제주의적 깊은 전우애를 느끼고 그 진심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 측면에서 김일성 주석과 함께 활동도 해보지 않은 주은래 전 총리가 김일성 주석과 절친한 우의를 나누었던 점을 놓고 보면 주은래 전 총리의 안목과 가슴의 깊이를 어느 정도 느낄 수 있다고 본다.
중국의 영도 중에 유일하게 북한에 동상이 세워진 이가 주은래 전 총리하고 한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의 경박호방문과 세계정세 전망

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두 번이나 연이어 영안 땅을 찾아갔으며 지난 5월엔 영안역에서 1시간도 넘게 차를 달려 가, 거의 하루 품을 다 들여가며 경박호 항일연군전적지 여러 곳을 방문했는지 이제 필자가 제시할 수 있는 수준에서의 답은 거의 찾은 셈이다.


새롭게 진행되고 있는 조중친선은 바로 그런 김일성 주석의 진심이 담긴 국제주의적 전우애에 기초해서 발전해가야 한다는 점을 중국 공산당 지도부와 공유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 김일성 주석과 항일혁명활동시기 주보중을 중심으로한 중국의 노세대 영웅들이 이미 체현하고 개척한 전례가 있다는 점을 상기시켜 현 중국의 영도자들이 그 경지를 조금이라도 빨리 체득할 수 있게 하자는 의도에서 그런 방문일정을 잡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았을 것이며 중국이 먼저 손을 내밀기를 기다리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김일성 주석이 그랬듯이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중국이 지금 처한 어려움을 알아보고 사심 없이 진심으로 먼저 도와줄 것이 없는지 생각하고 중국에 도움이 되는 것을 먼저 전폭적으로 지원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그리고 중국의 영도들도 주보중 등 중국의 항일의 선배 전사들이 그랬듯 손익을 먼저 앞세우지 말고 진심어린 국제주의적 우의에 기초해서 이루 조중친선을 발전시켜가기를 당부했을 것이다.


물론 미국의 봉쇄로 경제적인 어려움은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전 주민이 사랑과 믿음 즉 동지애로 뭉친 북한이 얼마나 막강한 힘을 갖추게 되었는지는 북미대결전에서 미국이 북한에 대해 꼼짝도 못하는 것만 봐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고 본다.

북중관계가 그런 동지애에 바탕을 둔 혈맹관계로 발전해간다면 그것이 미칠 세계사적 파괴력은 계산 불가할 정도로 클 것이다.
따라서 미국과 그 동맹국들은 이를 막기 위해 백방으로 방법을 찾고 중국에 대한 갖은 압박을 가할 가능성이 높다.

구소련과 중국은 동지애가 아닌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우의를 맺었었기 때문에 결국 미국의 이간책에 관계가 깨졌으며 구소련이 해체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미국의 대소련 봉쇄가 집중될 때 중국은 미국 시장 최혜국 대우를 받기 위해 그 봉쇄 정책에 동참한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북한 봉쇄에서는 그런 중국의 역할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동지애로 북중관계가 뭉친다면 압박을 가하면 가할수록 두 나라의 관계는 더욱 더 강해지게 된다.
만약 중국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뜻을 이해했다면 미국의 대중국압박은 오히려 타오르는 북중혈맹의 불길에 기름을 끼얹는 역할만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중국이 어려울 땐 북한에서 모든 것을 던져 중국을 도와주고 막아주려 할 것이며 북한이 필요한 것이 있다면 중국도 아낌없이 퍼주고 도와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김일성 주석도 항일혁명과정에 자주 언급했지만 동지애는 부부애나 혈육애와 비교할 수 없이 강한 힘을 발휘한다고 했다.
그리고 자본주의 진영 학자들도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은 정치적 신념과 의지이며 이는 종교적 의지도 도저히 따르지 못한다고 했다.

남한이 같은 핏줄이기 때문에 중국과 경제교류를 하더라도 남한과 함께 할 부분은 남겨둘 것이라는 무조건적 낙관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사상 의지적으로 뭉친 우의는 핏줄의 연대감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강한 법이다.
결국 우리도 북과 공유할 수 있는 공동의 이념을 합의하고 그를 통해 굳게 뭉치는 것이 하나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현재는 6.15남북공동선언의 기초이념인 '우리민족끼리' 정신을 굳게 공유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판단된다.


지금 언론보도를 보면 주로 중국이 북에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것처럼 보이는 조건에서 '간부들만이 아닌 중국 국민들까지 이런 북중혈맹관계에서 구현될 동지적 우의를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겠는데, 앞서도 언급했지만 김일성 주석은 국민의 마음으로 통하는 길은 오직 ‘진심’이라고 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중국 국민을 대하는 진심이 진실로 국제주의적인 것이고 동지애에 충일한 것이라면 중국 국민들도 언젠가는 이해하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특히 요즘은 통신과 미디어가 발전한 시대이기 때문에 북중관계의 내막을 공개할 시기가 되면 순식간에 중국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중국 정부가 마음만 먹는다면 며칠 만에도 중국 분위기는 확 바뀔 수도 있다.
다만 중국인을 감동시킬 그런 내막 즉, 북의 진심과 구체적 도움이 무엇인지가 관건일 것이다.

특히 중국 현지에서 취재하고 직접 접하면서 느낀 중국인의 가장 자랑할만한 좋은 기질은 한 번 친구와 우정을 나누면 배신을 좀처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친구가 위기에 빠졌을 때는 자신에게 불이익이 올 수 있어도 무조건 친구를 돕는다.


지금은 북한의 부탁 등 여러 사정이 있어서인지 그 내막을 공개하지 않고 있어 도대체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북이 중국 국민들의 위해 김일성 주석의 2차에 걸친 북만원정과 같은 큰 동지적 도움을 이미 제공했을 수도 있다고 본다.

북에 달러가 많은 것도 아니고 자원이야 넘어가는 단둥과 도문 등 몇 개 관문에서 뻔히 보이는 것이어서 아예 그럴 가능성이 없고, 있다면 북한의 뛰어난 국방과학 기술력과 그것을 개발한 인재들밖에 없다고 본다.

지난해부터 중국에서 탄도미사일을 이용한 신형 대함미사일을 공개실험발사하면서 미국 항공모함도 얼마든지 깨버릴 수 있다고 공개적으로 선포하고 있는데 그런 것들이 북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추정을 해볼 뿐이다.


세계 2위 경제대국에 올라선 중국이지만 항상 미국에게 결정적으로 힘들어했던 부분이 군사분야였다.

그래서 미국 군용기가 중국 상공을 날아다녀도 요격도 하지 못했으며 잡아서 중국 땅에 불시착 시켜 놓고도 미국의 사죄를 받기는커녕 오히려 중국이 유감을 표시한 적도 있었다.

대만이 미국 무기를 마구 사들이는 것을 보면서도 중국 외교부에서 분노의 논평은 발표해도 정작 중국 군부는 유구무언 자세만 취해왔다.

등소평의 화평굴기 이후 수십년간 줄곧 그런 자세를 취해온 중국 군부가 지난해부터 내놓고 미국에게 한 판 붙자고 큰소리를 치고 중국 영토를 넘보는 일본에 대해서는 희토류 수출 금지라는 초강경 외교 공격을 가해 완전 항복까지 받아내었다.

이것이 북의 도움에 의한 변화인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분명한 점은 중국이 이렇게 당당한 외교 국방 노선을 표방했던 지난해부터 북한과의 혈맹관계가 급속하게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경제가 발전해도 전쟁에서 지면 일장춘몽으로 끝난다.
발전된 도시일수록 전시에는 더 큰 불이 나게 된다. 현대 발전된 도시는 샤시부터 단열이 뛰어난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져 아예 석유화합물 덩어리이다. 이는 부산 초고층 아파트 화재와 중국에서 건축중이던 초고층 빌딩 화재에서 여실히 목격할 수 있었다. 거기에다 수많은 주유소에 가스저장소, 거미줄처럼 얽힌 가스관이 폭발한다면 원자폭탄이 아니더라도 잿더미신세를 면할 수가 없다.
많은 돈과 시간을 들여 건설한 상하이와 같은 대도시가 잿더미로 된다면 그 손해와 충격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것이다.

군사력은 그래서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침략과 전쟁의 위험성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국가의 제1중대사로 국민의 생명과 운명을 좌우하는 문제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중국이 북의 도움으로 어떤 강적의 공격에서도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확고하게 지킬 수 있게 되었다면 그것은 사변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도 대가를 바라지 않고 중국 국민들의 안녕과 행복을 걱정하여 인류애와 동지애적 견지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지원을 결단한 일일 경우, 나아가 사심 없이 한 일이기에 굳이 중국 국민에게 밝혀질 것을 바라지 않아 지금 다만 내막이 드러나지 않고 있는 것일 경우 그것이 이후 중국 국민에게 알려졌을 때 가져올 감동은 예측하기 힘들 수 있다고 본다.
 
정녕 그랬다면 중국도 북에 대해 동지애로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 확실하다.

뿐만 아니라 북한과 중국이 손을 잡고 세계자주화를 신속하게 추진할 것은 자명하며 그에 따라 세계 곳곳에서 반미반제진영이 급속하게 성장할 것이며 미국과 유럽 등 서방제국주의 진영의 설자리는 점점 좁아지게 될 것이다.
결국 그들도 제국주의를 버리고 정상국가로 거듭나지 않는다면 전쟁이 아니더라도 자멸을 피할 수 없게 될 가능성이 높다.

물론 그 전에 전쟁을 일으켜 북한과 중국을 먹어치우면 제국주의는 계속 승승장구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체코가 나토에서 탈퇴를 결정했고 프랑스, 영국 등이 그 능력을 확신할 수 없다며 미국의 요격미사일체계 도입을 반대하여 결국 좌절 되는 등 이상 징후가 연속 포착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나토가 거의 해산단계에 돌입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우려까지 표하고 있다.
최근엔 미국의 f-35 스텔스 전폭기 도입도 유럽 등 친미국에서 예상보다 적게 할 것으로 전망되어 대당 가격이 높아져 사업성 자체가 불투명지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는 등  유럽과 미국의 공조가 삐거덕거리는 모습도 보여주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도, 유럽의 여러 국가도 결국 아프간에서 미군을 철수하겠다도 공표를 하는 것을 보면 미국과 동맹국들이 북한과 중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일 힘이 있는지 심각한 의문이 든다.
 
그렇다면 북-중이 손을 잡으면 무서울 것이 없게 될 가능성이 높다.

지난해 미국이 중국에게 그렇게 대 이란 제재를 요청했지만 중국은 오히려 이란에 여러 개의 석유정제시설을 지어주겠다며 미국에 정면대응했던 이유도 이제는 좀 납득이 된다.
그 이란이 최근에도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했고 내년 2월까지 4개의 정찰위성을 쏘아올리겠다고 기염을 토하고 있다.
이란의 군사력 강화에는 북한의 기술지원이 결정적이었다는 것은 미국과 일본 그리고 우리 국방연구원에서도 인정하는 바이다.
http://www.jajusibo.com/sub_read.html?uid=7181

만약 북이 중국에 국방분야 기술 인재를 파견하는 등 중국의 첨단 무기 개발에도 도움을 주었다면 그것은 오래 전의 일일 것이며 이미 그 성과가 확고해진 상황일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중국이 대미강경정책을 들고 나올 수가 있는 것이다.


거기다가 이번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5월 중국방문 시에는 중국과 경제협력문제를 깊이 논의하였으며 방중 직후 바로 압록강 하구 북한 황금평과 나진선봉 지역에 북중경제협력특구 개발에 착수하였다.

이것은 북중경협이 본격화된다는 말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방중 직후 전광석화같은 속도로 추진되고 있다.
 
북한은 동지애로 국제관계를 풀어가는 새로운 차원의 외교관점을 제시한 나라이다. 결코 중국의 도움만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와 같은  민족인 북도 뛰어난 두뇌를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북에는 최첨단국방무기를 만들어 낸 뛰어난 과학기술을 수없이 보유하고 있는 것 같다.
이란의 무기만 봐도, 그리고 북이 당창건 65돌 기념 열병식에서 공개한 무기만 봐도 이를 잘 알 수 있으며 최근엔 김관진 국방장관도 그것을 정확하게 인정한 바 있다.
그 국방과학에 쓰인 cnc 기술 등 일부는 지금 북한 경제분야로 전용되어 눈부신 성과를 창출하고 있다는 보도가 줄을 잇고 있다.

북이 그런 첨단 기술을 중국 민간경제분야에도 지원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북중경협은 세계적 판도에서 새로운 차원의 경제질서를 만들어내는 일에 착수한 것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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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과 중국의 관계는 남한의 외교안보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북핵문제를 둘러싼 6자회담의 역사에서 익히 확인하였다.

나아가 갈수록 대중국 수출 의존도가 높아가고 있는 상황이기에 한국의 경제도 북중관계에 심각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지금 현재 흐름을 놓고 보면 중국과 미국은 돌이킬 수 없는 군사 외교적 대결 관계로 접어든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나라가 친미일변도 외교정책을 고집할 경우 중국과의 마찰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될 가능성이 높다.

지난해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한미공조는 구시대의 유물'이라고 일갈했었다. 그 말의 의미도 이제야 확실하게 잡힌다.

중국은 지금 미국과 군사공조를 통해 중국을 압박하려는 베트남, 필리핀에 대해 강한 군사적 압박을 가하고 있다. 일전불사란 말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일본에 대해서는 지난해 단호하게 경제제재를 가해 바로 항복을 받아내었다.

한미군사공조로 중국을 압박할 경우 한국에 대해서 그러지 말라는 보장이 없는 상황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북한이란 변수가 있어 북이 말리면 그러지 못하겠지만 어쨌든 중국 자체로는 그럴 힘과 의지를 지금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방중을 그래서 단순한 쌀지원을 위한 것이나 6자회담 재개를 위한 것으로만 봐서는 안 될 것이다.
정부와 민간연구소들의 더 깊은 조사와 연구가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북중혈맹관계 강화로 동북아는 물론 세계정세가 급변하고 있어 시간이 없는데 너무나 그 연구가 없고 결과물은 더욱 부족한 형편이다.

이 글이 그런 연구에 시발점이라도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아는 것이 없고 부족한 취재 내용이어서 부끄럽지만 이렇게 공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 경박호의 절경 중 하나인 조수루 폭포 앞에서 리송덕 연변 역사학자 와 필자(오른쪽), 조수루 폭포는 여름 우기 땐 폭포의 폭이 300미터에 이르게 되어 장관을 연출한다고 한다. 그 폭포처럼 항일의 그날 수만 수십만 전사들은 죽음도 불사하며 항일대전에  뛰어들어 영웅적으로 싸웠다.  © 자주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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