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석 약왕묘지하실은 천혜의 비밀장소
[기획연재] 동북항일유적지 취재- 김정일 위원장이 지난해 방문한 약왕묘 지하실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1/04/27 [00:46]  최종편집: ⓒ 자주시보
▲ 북산공원 입구에서 바라본 절간, 약왕묘는 저 절간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있었다.     © 자주민보
▲ 약왕묘 오르는 산길에서 만난 중국 한족 노인들과 리송덕 전 연변박물관 혁명사적부 주임(오른쪽)     © 자주민보
▲ 약왕묘가 있는 절간 입구에서 내려다본 길림시 전경     © 자주민보
▲ 약왕묘에서 내려다본 절간, 약왕묘는 이렇듯 절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어 주변을 감시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 자주민보
▲ 약왕묘 뒷편 작은 건물에 김일성 주석이 비밀회의장소로 이용했던 지하실이 있었다.     © 자주민보
▲ 약왕묘 지하실이 있는 건물 내부에 걸린 안내문     © 자주민보
▲ 약왕묘 김일성 주석 유적 안내문     © 자주민보
▲ 약왕묘 지하실로 들어가는 입구, 아마 절에서 음식물을 보관하기 위해 만든 곳인 듯 하다.     ©자주민보

 

▲ 약왕묘 지하실을 내려다보며 찍은 사진     © 자주민보

 

▲ 약왕묘 지하실에 내려가 안에서 찍은 사진, 깊이는 3미터 정도로 꽤 깊어 서늘하고 청신한 기운이 감돌았으며 넓이는 10여명이 둘러앉을 만한 크기로 조용히 예기하며 회의하기에 맞춤한 장소였다.      © 자주민보
▲ 중국의 승려 과한(왼쪽)이라는 이름의 여성관리인과 리송덕 역사학자 , 뒷편 동그란 문을 열고 들어가면 지하실 건물이 있다.    © 자주민보
▲ 약왕묘 문 앞에 선 필자, 약왕묘는 절간을 통해서도 올라갈 수 있지만 이렇게 산 정상에서 직접 들어가는 문이 따로 있었다. 김일성 주석 비밀회의 장소였던 지하실은 이 문 바로 오른쪽에 있었다.    ©자주민보
▲ 약왕묘 관리인 과한 승려, 친절한 설명에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 자주민보


◐ 천혜의 비밀회의 장소 약왕묘지하실!

김일성 주석의 청년활동 유적지 약왕묘가 있는 4월의 길림 북산공원은 파릇파릇 돋아나는 버들잎들로 생신한 기운이 약동하고 있었다.


중국에서 ‘묘’란 무덤이 아니라 절간과 비슷한 곳으로 불교의 묘는 부처상을 세워놓고 복을 기원하는 곳이고 약왕묘는 도교적인 절간으로 화타, 편작, 이시진, 장중경 등 10명의 중국의 명의들의 힘을 빌어 병을 고치기 위해 기도를 하는 곳이다. 그래서 대웅전엔 부처상 대신 중국의 명의들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김일성 주석이 육문중학교 시절 반일단체 비밀회의를 하던 장소는 약왕묘 절간 뒤편의 음식물 보관용 지하실이었다.

그 건물 입구엔 ‘김일성주석 혁명활동지하실’이라는 깨끗한 문패가 걸려있었고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이 사적지에 대한 간단한 해설이 걸려 있었다.

“1927년부터 1930년까지 조선인민의 위대한 수령, 중국인민의 친밀한 벗인 김일성 주석께서 길림육문중학교에서 공부하는 기간에 청년학생들을 조직하여 일본제국주의와 중국반동정부를 반대하는 투쟁을 적극적으로 조직하였으며 이 지하실에서 여러 번 비밀회의를 조직하였다.”-지하실 정황소개

지하로 들어가는 곳에는 사다리가 놓여있었는데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니, 깊이는 3미터 정도였고 넓이는 10제곱미터 정도의 직사각형으로 10명이 앉아서 조용히 회의를 하기에는 안성맞춤한 곳이었다.


4월 25일 함께 약왕묘를 방문한 리송덕 연변박물관 전 혁명사부 주임은 김일성 주석이 1927년 8월 28일 약왕묘 지하실에서 최창걸, 김원우, 계영춘, 김혁, 차광수, 허률, 박소심, 박근원, 한영애가 참가한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 (이하 ‘공청’)을 결성하는 등 여러 차례 비밀회의장소로 이용하였다고 말했다.

특히, 1928년 10월엔 공청과 반제동맹회의를 이 지하실에서 여러 차례 진행하여 조직강화 사업을 진행하는 한편 ‘길회선철도부설반대투쟁’ 등 대중투쟁을 조직 지도한 것도 중요한 역사 기록으로 남아있다고 말했다.

공청이라면 핵심 중에 핵심 성원들이다. 20년대 왕성했던 민족주의 운동이 퇴조하고 30년대 들어 주류를 이루었던 사회주의계열의 반일독립운동가들 중에서도 공청원들이 가장 완강한 독립의지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김일성 주석이 꾸린 조직의 다수는 조선청년들이었으며 중국청년들도 함께 했었다고 한다.
이 공청원들은 김일성 주석이 초등학교를 마치고 들어갔다고 하는 민족주의계열의 군사간부양성학교였던 '화성의숙'에서부터 함께 학습도 하고 반일투쟁도 전개하면서 발굴 육성한 가장 믿음직한 핵심들을 주축으로 조직한 성원들이었으니 회의 장소는 최고로 안전한 곳이어야 했을 것이다.
회의하는 중에 만약 일본제국주의 앞잡이 장학량 군벌들이 들이닥친다면 ...

북산공원에서도 가장 높은 지대에 있는 이 절간은 그리 크지는 않지만 여러 채의 건물이 촘촘히 겹쳐 있어 자못 미로와 같은 길이 형성되어 있었다.

특히 약왕묘 지하회의실은 이 절간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사면팔방이 다 보이는 곳이어서 누가 오르는지 한 눈에 감시할 수 있어 감시요원 한 두 명만 배치해도 아주 안전하게 회의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비상시 퇴로로 이용할 수 있는 연결 능선과 골짜기도 많았다.

리송덕 주임도 북산공원은 몇 번 왔지만 매번 약왕묘 지하실이 잠겨있어 들어가보지 못했는데 이번에 와서 살펴보니, 김일성 주석이 매사에 주도면밀하며 판단에 있어 천재라는 명성이 높은 이유의 하나를 알겠다며 '과시 대단하다'며 감탄사를 터트렸다.


◐ 중학생 김일성 주석이 일으킨 ‘길림바람’

김일성 주석은 1912년생이니 현재로 하면 중학교 3학년 나이에 차광수처럼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더 많은 20대 청년들이 포함된 이런 비밀조직을 결성하고 일본제국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한 것이다.


리송덕 주임의 증언 따르면 1931년 만주사변을 앞두고 있던 이 시기 일제는 동북만주를 통째로 집어삼킬 준비를 착착 진행하고 있었다.

러-일 전쟁 이후 길림부터 대련까지의 철도권리를 장악했고 장작림을 협박해서 길림-회령 철도부설권을 장악하고 완전 연결을 앞두고 있었다.

그 길회선철도가 연결되면 그 길을 따라 일제 침략군이 실려오고 강탈당한 금은보화 오곡백과가 일본으로 실려갈 것이라며 김일성 주석이 청년들과 동맹휴학, 시위 등을 완강하게 전개하자 점차 시민들도 동참하여 일본상품 구매반대운동에 나서고 노동자 농민들까지도 반대 시위에 참가하여 결국 일제도 이에 굴복, 잠시 철도부설사업을 중단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길림의 경우 이때는 중국공산당 중앙의 영향이 아직 적극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어서 사실상 김일성 주석의 투쟁 지도가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리 주임의 조사연구에 따르면 김일성 주석은 청소년시기 이런 투쟁을 전개하는 과정에 세 번 구속되었는데, 길림에서 두 번 반동군벌에 체포 투옥되어 반일 애국지사 손정도 목사 등이 힘을 써 구출하였고 또 한 번은 방학 때 강반석 어머니가 있던 무송에서 반일활동을 하다가 구속되었는데 세력가이자 장울화의 아버지로 유명한 장만정 애국지사가 힘을 써 구원하는 등 총 3차례 구속되는 시련을 겪었다고 한다.
당시 일제는 장학량 군벌이 체포한 애국지사들을 넘겨받아 자신들이 직접 처형하기도 했으니 얼마나 아찔한 위기였는지 모른다고 했다.

약왕묘에 오르는 산길에서 좌판을 벌려놓고 작명 소일거리를 하는 76살의 한 한족 노인은 “김일성 주석이 저 약왕묘 지하실에서 혁명사업을 하면서 회의를 했다. 들은 말에 의하면 그때 김일성 주석은 육문중학교 학생이었는데 전체 학생들의 반일 혁명활동을 그가 주도했다고 한다.”라고 말했다.

중국 동북지역의 요즘 젊은이들은 김일성 주석의 항일운동에 대해 잘 모르지만 나이든 사람들의 경우 조선족은 물론 한족들까지 이렇게 김일성 주석의 항일 업적에 대해 소문을 들어 잘 알고 있었다.


지난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이 길림에 와서 김일성 주석이 다녔던 육문중학교와 함께 이  작은 약왕묘 유적지를 방문한 것도 이 유적지가 바로 김일성 주석이 조선혁명가들의 핵심을 육성한 곳이기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작고 소박한 곳이지만 뭔가 중요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김일성 주석은 육문중학교 도서관 사서 일을 보며 세계 진보적 사상을 모두 섭렵하였으며 변화된 현실에 맞게 새로운 시대적 요구를 해결하기 위해 창조적으로 사색하는 과정에 주체사상을 창시하였다고 한다.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정통했던 차광수와 같은 진보적 청년들도 노동자 계급을 중심으로 혁명을 추진하는 막스-레닌주의를 아무리 공부해도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못한 조선의 경우엔 이렇다할 노동계급이 없는 조건에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답을 얻을 수 없어 답답해하고 있었는데 중학생 김일성 주석이 명쾌하게 답을 주었다고 한다.
조선에 노동자 계급이 충분히 형성되지 못했다고 해도 일제에 반대하고 지주, 자본가의 착취와 압박을 반대하는 농민과 빈민, 노동자, 지식인 등 민중들의 열망만은 뜨겁게 분출되고 있기 때문에 이 힘을 조직적으로 묶어세우면 얼마든지 일제를 타도하고 민중이 주인 되는 진보적인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주체적인 사상관점에 입각한 이론과 방도들을 내놓아 길을 찾지 못해 헤매던 청년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것이다.

최근 탈북자들이 운영하는 모 북한 관련 인터넷 사이트에서 공개한 북한 영화에서 김 주석 아버지인 김형직 일대기 영화에서도 '강대국이나 국제회의에 가서 조선독립을 탄원이나 할 것이 아니라, 자기 나라의 독립과 혁명은 자기 나라 민중들의 힘을 모아 자기나라 실정에 맞는 방법을 찾아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는 식의 이와 비슷한 내용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타고난 것도 있겠지만 아버지의 영향으로 김일성 주석이 일찍 새로운 사상을 창시할 안목을 갖게 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김일성 주석보다 나이가 썩 많은 차광수는 당시 막스-레닌주의를 열심히 공부하여 많은 청년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당시 공산주의 여러 분파들과의 이론 논쟁에서 지는 법이 없을 정도로 세계 진보적 이론에 밝은 사람이었으며 인기가 많아 늘 많은 청년들을 몰고 다녀 ‘차광수패’라고 할 정도로 유명했던 진보적 청년이었다고 한다.

그런 그가 중학생이었던 김일성 주석과 교류를 가진 후 김 주석을 "조선청년들의 영도자로 높이 모시기 시작했다"고 하니 길을 찾지 못해 얼마나 고심을 많이 했었으며 또 김일성 주석을 만나 얼마나 큰 격정과 환희에 휩싸였던 것인지 다는 알수 없지만 조금은 미루어 짐작이 간다.
실제 차광수, 김혁 등 당시 많은 핵심 조선공청원들은 청소년이었던 김일성 주석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자신들의 목숨마저 초개처럼 서슴없이 던졌다고 한다.
 
김일성 주석이 이끄는 대오의 조직원이었던 중국인 장울화와 같은 당시 무송현의 최대 갑부의 아들까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을 때 혹시 고문과 회유, 유도심문에 실수로 넘어가 김일성 주석 거처에 대한 암시를 조금이라도 주게 될 것을 우려하여 아버지에게 돈을 써서 자신을 1주일만 경찰서에서 꺼내달라고 부탁, 아내에게 김일성 주석과 조직에 '일제가 김일성 주석을 찾고 있다며 시급히 김일성 주석의 거쳐를 옮겨달라' 유언을 남기고 자결을 할 정도였으니 김일성 주석에 대한 조선청년들의 심정이야 오죽했겠는지 미루어 짐작을 해볼 뿐이다.
참조: http://www.jajusibo.com/sub_read.html?uid=4466

당시 길림은 민족주의계열의 삼민회와 막스-레닌주의 여러 분파들이 거점으로 삼고 있던 곳으로 안창호 선생도 여기에 와서 연설을 하는 등 당시 조선 독립운동의 중심으로 부상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중 김일성 주석을 중심으로한 청년들이 일으킨 바람이 매우 거세고 또 새로운 것이어서 ‘길림바람’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는 것이다.


리송덕 주임은 "김일성 주석이 투쟁지도도 매우 능란하게 전개하여 하는 투쟁마다 대부분 대성공을 거두었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길회선반대투쟁 선동도 사월초파일을 계기로 대대적으로 전개했는데 당시 길림에서는 이날 많은 불교 신자들이 절간을 찾아 복을 기원하는 등 큰 명절로 축제처럼 보냈는데 군벌경찰들도 총동원되어 절간에서 질서 유지에 바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그때 김일성 주석이 경찰들이 없고 절간을 다녀온 사람들과 시민들이 명절을 즐기고 있던 시내 한 복판에서 학생들을 동원하여 길회선 반대 시위를 벌여 길림 시내를 들었다 놓았다는 것이다.

특히, 김일성 주석이 대중연설도 그렇게 잘해서 선동연설에 학생들뿐만 아니라 길림시민들도 뜨거운 지지와 성원을 보냈다고 한다.


북에서는 이때 김일성 주석이 제시한 사상적 관점과 입장이 현재 주체사상의 핵심으로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한다.

북한에서 말하는 그 주체사상이 막스레닌주의 한계를 넘어 미래 진보적 인류의 영원한 사상적 등대가 될 것으로 확신했던 조-중공산주의자들과 그 핵심 성원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고 그 사상적 지침에 따라 투쟁을 개척하고 실천을 논의했던 곳이 바로 이 약왕묘 지하실이었던 셈이다.

어쨌든 지금에 와서 보면 막스레닌주의에 입각한 사회주의 혁명을 했던 나라들 사회주의는 다 망했지만 북한만은 90년대 고난의 행군을 하면서도 여전히 사회주의 기치를 내리지 않았다.
북과 유대가 깊은 쿠바 등도 미국과 서방의 철통같은 봉쇄에서도 자기식의 사회주의를 고수하고 있으며 나아가, 중남미 전역으로 의사, 교사를 파견하여 사회주의 이념을 확산시키는 핵심 거점역할까지 하고 있다는 점은 세계 언론 보도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즉 김일성사상이 지금 현실 실천으로 그 생활력이 확인되고 있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게 되어가고 있다.
 
만약 이런 공간이 북한에 있다면 작고 소박한 집이지만 세계적인 주체의 성지로 성역화하여 방문하는 외국 손님들을 가장 먼저 안내하는 김일성 주석 생가처럼 가꾸고 기념했을 것이 분명하다.


◐ 김정일위원장을 시진핑부주석, 원자바오총리 동행

약왕묘를 돌아보고 나오는 길에 이 약왕묘에서 10여 년 간 승려로서 종교활동과 약왕묘 중에서도 딱 김일성 주석 사적지하실만을 책임지고 관리해온 한족의 과한(果翰, 60)이라는 이름의 여성 관리인을 만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방문했던 당시 상황과 경험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님께서 약왕묘를 방문하기 약 반 년 전부터 위에서 특별지시가 내려와 대대적으로 청소, 정리정돈을 다시하고 주위환경을 잘 꾸미는 등 준비를 진행했다.
그리고 그날 김정일 국방위원장, 시진핑 부주석, 원자바오 총리 등 40여명 주요영도들께서 시찰하셨다.
당일 날 특급 경비를 펼쳤고, 아무도 얼씬하지 못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께서 약 40분간 약왕묘를 돌아보았는데 주요하게 김일성주석 혁명활동지하실을 보는데 많은 시간을 보내셨다.”

이 여성 관리인에게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방명록을 쓰지 않았는지 묻자, “쓰셨다. 하지만 위에서 바로 가져갔기 때문에 여기에 없다.”고 말했다.

당시 우리 sbs 뉴스에서 후진타오 주석이 직접 안내했었다는 북산공원관리인 인터뷰를 보도한 적이 있는데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방문을 곁에서 지켜본 이 약왕묘 관리인의 말과는 좀 다른 것 같다.

다만 분명한 점은 후진타오 주석이 길림 인근 장춘까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방문을 환영하러 예술단까지 대동하고 찾아왔으며, 이 길림 약왕묘 김일성 주석 유적지 방문을 시진핑 부주석과 원자바오 총리가 직접 안내했다는 사실이다.

즉, 중국의 최고층이 총동원되었으며, 이미 반년 전 그러니까, 지난해 5월 김정일 위원장 1차 중국방문 당시 이 일정에 대해 합의를 보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지난해 과시된 북-중 우호관계는 충분히 사전 논의되고 준비된 전략적인 것이었으며 그것도 북-중 최고 지도자들의 합의로 이루어진 것일 가능성이 높다.
특히 북이 세계 진보진영의 축으로 자부하는 핵심 근거인 주체사상의 한 발상지로 볼 수도 있는 길림 육문중학교 도서관과 약왕묘 지하실을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중국이 처음으로 안내했다는 사실과 이 최고위층 총동원 환영을 종합해서 고찰한다면 북-중 후호가 단순한 경제적 교류나 북핵문제 등의 외교문제만을 풀기위한 차원이 아닌 더 근본적인 정치사상적 차원 즉, 전략적 우호관계 강화가 논의된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이제 미국이 아무리 중국에 북한의 경제를 압박하라고 요구해도 중국은 그것을 들어줄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전망까지 추리해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미국의 대북 봉쇄정책은 이제 실효를 거두기 어려울 가능성이 높고 남은 것은 미국이 직접 군사적으로 북과 한 판 뜨거나 아니면 직접 대화를 통해 타결을 보는 길 외에 다른 길은 점점 좁아지고 있다고 판단된다.
 
 
세계 경제의 중심국으로 부상하는 중국, 그리고 주체사상 즉, 북한식 사회주의 등 반제자주이념과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세계 반제자주진영의 보루이자 축으로 갈수록 영향력과 발언권을 높이고 있는 북한이 강력한 동맹을 실현한다면 세계 정치사에 미칠 영향은 만만치 않을 것이다.

지난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길림 방문은 새로운 시대의 출현을 암시하는 중대한 사건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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