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반석묘 이장 때 토기점골은 꽃바다
[동북만주 항일유적지 취재] 4. 1932년 반일인민유격대 창건한 소사한 토기점골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09/02/03 [23:12]  최종편집: ⓒ 자주시보

필자 주: 지난해 동북만주 항일유적지 취재 당시 자료가 부족해서 추가자료수집에 시간을 보내던 중, 총선과 광우병 촛불시위 등 시급하게 제기된 기사를 쓰느라 미처 기사를 작성하지 못했던 내용을 정리하여 다시 연재를 시작한다.
김일성 주석이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했다고 하는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골과 피바다 공연 장소, 조국광복회 창건 회의 장소 등을 연재할 계획이다. 

  

▲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골 김일성 주석 집터와 강반석어머니 묘가 있던 자리, 나무토막이 서 있는 곳이 집터 자리이고 맞은편 언덕에 강반석 김주석 어머니 묘지가 있던 자리이다.     © 자주민보

 

▲ 안도현 지도     © 자주민보


김일성 주석이 첫 무장투쟁대오인 반일인민유격대의 창건식을 진행한 소사하 토기점골은 안도현에 있는 농촌마을이다.


안도는 우리나라 북부지대와 잇닿아있으며 두만강연안의 연길, 화룡, 성청, 훈춘 지구와 무송, 화전, 돈화 지구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이 지구는 또한 백두산줄기와 영액령산줄기에 에워싸여있는 산악지대로서 산세가 험하고 1920년와 1930년 초 당시에는 일제의 마수가 덜 미치고 있어 무장투쟁을 준비하고 조직 전개하는 데서 매우 유리한 곳이었다고 한다.


1926년 6월 5일 김형직 아버지가 옥고를 치른 후유증으로 세상을 뜨자 김일성 주석은 바로 독립군 양성소인 화성의숙에 입학하였다가 1926년 12월 초 길림 육문중학교에 편입하면서 활동무대를 길림으로 옮기게 된다.

그 후 김일성 주석의 강반석어머니와 두 동생은 거처를 안도로 옮기게 되고, 세상을 뜨게 되었던 1932년 여름까지 강반석어머니는 이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골에서 두 동생과 생활하며, 부녀회를 조직하여 군복을 짓는 등 김일성 주석의 유격대 창건을 도왔다고 한다.

한편 길림에서 청년학생운동을 전개하던 김일성 주석은 1929년 가을 반동경찰에게 체포되었다가 1930년 5월초 감옥에서 나오자, 감옥에서 구상한 당창건 사업과 항일무장투쟁 준비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결과 김일성 주석은 1932년 4월 25일 토기점골 등판에서 100여명으로 구성된 반일인민유격대의 창건식을 진행하게 되었고 그것을 본 후 몇 달 뒤 강반석어머니는 세상을 떴던 것이다.


▲ 안도현 소사하는 이후 일제의 강제이주 정책에 의해 무주마을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 무주소학교 건물이다.     © 자주민보


강반석어머니 이장할 때 토기점골은 꽃바다


연길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그 안도현 소사하를 찾아갔다.

다행히 안내해준 리함 선생이 과거에 소사하를 답사해본 적이 있어 그리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소사하에서 우리를 제일 먼저 반겨준 건물은 무주소학교였다.

동북만주지역에 남한 지명과 똑같은 지명이 많은 것은 일제의 집단이주 정책 때문이었다. 일제에게 떠밀려 집단적으로 이주해온 사람들은 거의 무인지경의 밀림등판을 개간하여 마을을 개척하면서 고향땅 이름을 그대로 가져다 붙였던 것이다.

소사하가 무주로 된 것은 1930년대 후반 전북 무주지역 사람들이 집단이주해오면서부터라고 한다. 근처에 장수툰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이곳은 남한 장수지역 사람들이 대거 이주해 와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그 이전에는 이 밀림지역에서 몇몇 사람이 토기를 구워팔아 유명해진 곳이라고 해서 '토기점골'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지난해에 가본 토기점골은 밀림은 거의 사라지고 일대가 모두 개간되어 콩과 옥수수를 심는 밭으로 변해있었다. 과거에는 꽤 물이 많이 흘렀다는 개천도 수림이 사라지다보니 물이 많지 않아 얼음이 언 개울로 쉽게 걸어다닐 수 있었다.

이 개울물과 같이 사람들의 이농현상도 심해서 집집마다에는 나이든 할머니 할아버지가 대부분이었다.

무턱대고 연기가 나는 아무집이나 문을 두드리니 마을 할머니들이 모여서 화투를 치고 있었다.

그 중 김양순(81세) 할머니가 강반석 여사에 대해 알고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김양순 할머니(27년생)는 12살 때 즉 1939년도에 토기점골로 이주해왔다고 한다.

작은아버지가 먼저 연변에 와있었는데 개간해서 농사지을 땅이 많다고 해서 가족들이 모두 기차를 타고 명월구까지 와서 마차로 여기 토기점골로 들어왔는데 이후 일본의 집단이주정책으로 전라도 무주사람들이 많이 와서 여기 지명을 무주라고 정했다고 한다.

김양순 할머니는 일본놈들은 여기와서도 집단부락을 설치한 후 식량이며 뭐며 다 빼앗아갔다. 숨겨 놓아도 기어이 찾아내서 빼앗아가 가고 사람들 때리고 못살게 굴었다고 분해하였다.

"50년대 중반 경에 강반석 여사의 묘를 북한에서 이장해 갔다. 당시 주변 마을 사람들이 다 모여서 제사도 지내고 정성스럽게 환송을 해 주었으며 유해를 꽃가마에 태워 보내주었다. 당시에 묘지와 마을길은 온통 꽃바다였다."


"왜 그렇게 환송해주었나?"


"우리도 모두 조선사람인데 조선의 항일독립영웅 김일성 장군의 어머니의 유해가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나서서 환송하지 않을 수 있나!"


 

▲ 소사하의 조선족 할머니들, 오른쪽 할머니가 김양순할머니     © 자주민보


강반석어머니 묘자리마저 개간

김양순 할머니는 강반석 여사가 세상을 뜬 후에 토기점골에 왔기 때문에 사실 강반석 여사에 대해 잘 모른다고 했다.

대신 김일성 주석의 반일유격대를 창건을 도와주던 김순옥여사(현하균-독립운동가 현하죽선생의 아들-의 아내로 추정)가 김일성 주석의 초청으로 북한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직접 들려준 몇 가지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이웃 마을에 사는 김순옥의 남편은 조선사람이었는데 한번은 독립운동 하는 사람들을 여럿 데리고 와서 소고기를 주면서 끓여달라고 했다.
신발짝을 세어보니 7켤레정도였다. 아마 김일성장군님도 왔던 것 같다. 남편은 떠나면서 이 사실을 죽을 때까지 말하지 말라고 했다.
이후 중국이 문화대혁명 진행할 때 북이 수정주의를 한다며 북과 친한 사람들은 마구 잡아들였다. 김순옥의 아들 현중산이도 조선사람 특무라는 혐의로 토끼굴에 갖히는 등 수모를 당했다.
이후 김순옥은 김영주가 찾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북에 편지를 보냈다. 김영주가 즉각 답장을 보내와서 결국 김순옥은 북으로 이주해갔다.
그 김순옥이 조선에 간다고 해서 환송해주러 그 집에 갔다가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강반석 여사가 돌아가시게 되자, 김일성 주석의 동생인 영주, 철주를 김순옥이 돌보았다고 한다. 입힐 옷이 없어 자신의 속치마를 뜯어 옷을 만들어 입히기도 했다고 한다.
김순옥은 강반석 여사의 묘지도 정성들여 돌보았다.
강반석 여사의 묘지는 김순옥뿐만 아니라 어느 한족 중국인도 이장할 때까지 정성을 다해 관리했다. 아마 김일성 주석과 친분이 있던 한족이었던 모양이다."


김양순 할머니에게 부탁을 하자 김일성 주석 집터와 연자방앗간, 강반석어머니 묘지가 있던 장소, 김일성 주석이 회의했던 장소, 반일인민유격대창건식이 진행되었던 언덕 등을 직접 안내해주었다.  (사진을 다 찍었었는데 컴퓨터로 옮기는 과정에 실수로 많은 사진을 날려버려 몇 장만 여기 소개한다. )

무주소학교에서 약 10분 정도 눈길을 걸어가자 강반석어머니와 김일성주석 동생들이 살던 집터가 있었다.

집터는 김일성 주석과 북한의 여러 문헌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개울 다리(옛날에는 징검다리) 바로 앞에 있었다. 지금은 밭으로 개간이 되었고 우물도 메워졌지만 우물터가 있을 법한 곳임은 분명했다.


집터에서 개울을 따라 15분 정도 더 가면 강반석어머니 묘소자리가 있었다.

원래 강반석어머니 묘소자리는 마을에서 잔디가 잘 깔려있고 숲이 우거지고 또 경치가 좋아 사람들이 음식을 장만해서 소풍을 많이 왔던 곳이라고 했다.

김양순 할머니 말에 따르면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강반석어머니 묘소자리는 그대로 보존되고 있었는데 집체농업방식이 개인농업방식으로 바뀌면서 개간 바람이 일어 강반석어머니 묘자리도 결국 개간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가장 최근에 개간되어서 그런지 묘지를 개간한 밭에는 아직 썩지 않은 나무 등걸과 굵은 나무뿌리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

항일독립운동 유적지도 제 나라 땅에 없다보니 이렇게 파헤쳐져도 어쩔 도리가 없다.
그래도 중국에서 유해는 북으로 이장하게 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가장 가보고 싶었던 반일인민유격대창건식이 진행된 언덕은 시간이 늦어 가보지 못했다.

저 멀리 망원렌즈에는 기념비까지 서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지만 눈도 많이 쌓여있고 또 그 지역은 아직 밀림이 살아있어 갔다 오는데 한 나절이 걸릴 수 있다는 것이다.


김양순 할머니 말에 따르면 가끔 중국주재 북쪽 사람들이 유격대창건식기념비를 찾아와 꽃다발을 놓고 가기도 한다고 했다.

그러께도 북쪽 사람들이 길 안내를 부탁해 가까이까지 안내해주었는데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가버렸다고 내심 섭섭한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조선족 동포들은 김일성 장군에 대한 존경심은 여전한데 북녘에 대한 인식은 썩 좋은 편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고, 한 젊은 부부가 차려준 맛있는 토장국과 갖가지 음식으로 점심을 배불리 먹었다.

점심을 정성껏 차려준 집에는 고등학교를 가야할 나이의 딸과 과년한 조카딸이 카드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왜 공부를 하지 않는가' 물었더니 고등학교를 보내려면 도시로 보내야 하는데 그럴 돈이 없어 집에서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같은 동포가 왔다고 부끄러워하면서도 엄마를 도와 음식도 장만하고 설거지도 하던 그 어여쁜 딸에게 공부도 시킬 수 없는 형편이라는 말에 가슴이 아팠다.

중국 농촌은 여전히 가난의 멍에를 벗지 못하고 있었다.


어서 통일이 되고 동북만주도 발전해서 다 같이 잘 살 날을 꿈꾸며 음식을 마련해주고 안내를 해준 분들에게 작은 정성을 표하고 아쉬운 마음 추슬러 차를 돌렸다.
 
 

▲ 김양순 할머니의 증언에 따르면 김일성 주석은 1930년초 토기점골의 이런 산기슭의 외딴 집에서 동지들과 자주 회의를 하며 반인유격대창건을 위해 열정을 다했다고 한다.     © 자주민보



 

▲ 무주마을의 한가한 풍경     ©자주민보



 

▲ 소사하에는 아직 말을 키우고 있었다. 저런 말을 타고 다니며 항일전사들은 일제와 싸웠을 것이다.     ©자주민보

 

▲ 소사하 지역은 추운 곳이어서 그런지 부엌과 방이 일체형 구조였다. 물론 옆에는 방이 또 있었다.     ©자주민보

광고

트위터 페이스북
 
 
이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의견쓰기 전체의견보기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 용
사랑방
최근 인기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