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주의교양기지가 된 장울화열사릉원
[동북만주 항일유적지 취재]1.무송의 장금천 선생을 찾아서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08/04/16 [21:28]  최종편집: ⓒ 자주시보

편집자 주: 자주민보에서는 2005년 광복60주년기념 만주의항일유적지 취재를 진행했었다. 당시 취재결과 우리민족현대사에 있어서 중요한 사실들을 적지 않게 취재하였으며 특히 김일성 주석의 항일무장투쟁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에 독자들의 관심이 뜨거웠다.
그래서 매년 동북만주항일유적지를 취재하려고 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았는데 추울 때 항일전적지를 가보고 싶었던 바람대로 올 들어 가장 추웠던 지난 2월 동북만주의 무송지역을 찾아갔다.
무송은 백두산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김일성 주석 부친인 김형직 선생이 마지막 시기를 보낸 곳이며 김일성 주석이 소학교 고학년 시기를 보낸 곳이고 김일성 주석과 혁명적 우정을 나누었던 중국인 전우 장울화열사릉원이 있는 곳이다.
김일성 주석은 자신의 또 하나의 고향과 다를 것이 없는 무송에 가서 혁명전우의 묘역에 참배도 하고 옛 전우들을 만나보고 싶어 했지만 결국 그 꿈을 이루지 못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곳에 자주민보 취재단이 다녀왔다. 장울화열사의 아들 장금천 선생도 만나서 장울화 열사릉원과 기념관을 방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송 주위의 만강과 동강 등 항일전적지도 돌아보고 왔다. 이제부터 항일의 넋이 깃든 무송으로 떠나보자.



 

북에서

< 장울화열사릉원 기념관에 전시된 장울화열사와 김일성 주석의 우정을 그린 유화, 북에서 창작한 작품>


[김 주석의 만주 무송제1우급소학교 시절 급우인 장울화(張蔚華)라는 중국인이다. 그는 무송 일대 부호의 아들로 평소 김 주석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으며 김 주석과 연계된 지하조직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극약을 먹고 목숨을 끊었다는 인물이다.


김 주석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4권(1993)에서 무려 65쪽이나 할애해 각별했던 그와의 관계를 소상히 회고한 바 있다..... 김 주석은 회고록에서 사랑과 과학, 혁명에는 국경이 없다면서 노비첸코와 장울화를 "혁명을 위해 목숨 바친 국제주의자의 세계적 전형"으로 치켜세웠다.]- nk조선 김광인 기자 2001년 2월 28일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이렇게 김일성 주석과 장울화 열사에 관한 이야기가 적지 않게 소개되어 있다.


이제는 그 정도로 김일성 장군의 진위와 관련된 문제는 일단락되었으며 이제 김일성 주석의 항일무장투쟁관련 구체적인 세부들에까지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대 농장소유와 인삼장사 등을 통해 당시 무송에서 제일가는 부자였던 한족출신 장만정의 아들 장울화열사는 어떻게 해서 김일성 주석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자 자결까지 할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그리고 김일성 주석은 어찌하여 중국인 장울화 가문과 5대째의 교류를 해가며 그렇게 다심하게 보살피며 우의의 정을 이어가는 것일까?

 
 

 

이와 관련된 이야기는 김일성 주석이 소학교(초등학교)어린 시절에 이미 만주의 조선동포들뿐만 아니라 중국인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세부라고 판단되어 이번 취재기간 장울화 열사의 아들인 장금천 선생을 만나 관련된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취재하였다.


중국의 역사학자 리광인 선생이 안내를 해주었으며 연변대학교 최후택 중공당사 교수가 통역을 해주었다.
연변에서 무송으로 가는 8시간에 걸친 길은 참으로 험난했다. 도로도 좁았을 뿐만 아니라 의자의 간격이 무척 좁아 꼼짝달싹도 할 수 없는 버스에는 춘절기간이어서 그런지 좌석보다 두 배 정도 사람들이 타는 바람에 더욱 힘들었다. 

 
하지만 차창 밖으로는 줄기줄기 뻗어 내린 눈 쌓인 장백산맥은 절경이었다.

무송에 내려 물어물어 어렵게 찾은 장금천(75세) 선생의 집을 찾을 수 있었다. 대나무 화분이 놓여있는 장금천 선생의 집은 아주 잘 꾸려진 넓은 집이었다.


 

취재단에게

              <취재단에게 김일성 주석과의 인연을 다룬 책을 선물하는 장금천 선생 >

장울화

<릉원의 장울화열사 조각상, 2007년 릉원을 확건할 때 심양 노신 예술학원 교수가 친히 설계하고 제작, 장금천 선생은 장울화열사의 불굴의 기상을 잘 느낄 수 있는 조각상이라고 설명>

장금천 선생은 어버지인 장울화열사에 대해 이렇게 간략하게 소개해주었다.

“장울화열사님의 자는 압천이고 중국 한족으로 1913년 2월 13일 길림성 통화성에서 출생하였으며 원적은 산동이다.
장울화 열사는 성격이 아주 우아하시면서도 열의하시고 진리를 추구하시면도 숭고한 민족 기개를 가진 분이었다. 
장울화 열사님께서는 혁명 사업에서는 불요불굴의 의지를 가졌고 1929년 혁명사업에 참가 1932년 중국공산당 참가 동북항일연군 제2로군 지하사업단으로 있다가 1937년 11월 4일(음력 10월 2일) 내부역적의 반변으로 영용하게 희생 되셨다. 당시 나이는 25세였으며 장남이 나의 나이는 네 살이었고 여동생이 막 태어난 때였다.


당시 장울화 열사님은 계속 김일성 수령님과 같이 활동했다.
장울화열사님은 김일성 수령님과 함께 무장 대오에서 투쟁을 하고 싶어 했지만 당시 혁명사업의 필요성에 의해서 수령님께서 무장 대오에 오지 않고 지하에서 더 큰일을 할 수 있도록 분공을 주어 지하에서 목숨을 바치며 투쟁했다.
사랑의 감정에는 국경이 없고 과학에도 국경이 없듯이 혁명에도 국경이 없다. 장울화열사 사적과 이점을 설명하고 있다.


장울화열사는 국제주의 전형적인 모범으로 되고 있다.
여러 나라 공산주의자들의 에스파니아 인민에 대한 지원과 중국지원군의 조선에 대한 지원도 이런 국제주의 모범이다.
장울화 열사의 이름은 세계 영용한 혁명열사들 가운데서도 더 빛나는 사람이다.
현재 장울화 열사는 중조우의의 상징으로 되었다.
조선인민들은 조선혁명을 위하여 분투해온 장울화열사의 사적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러면서 장금천 선생은 영하 25도의 추운 날씨에 75세라는 연세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 장울화열사릉원 곳곳의 시설물 연원과 비문의 글을 읽어주는 등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처음에 건설할 때는 조그만 릉이 있었는데 지금은 기념관으로 확장 개건하였다.
2006년 길림성에서 장울화열사릉을 애국주의 교양기지로 선정했다.(리광인 선생은 이에 대해 성에서 이렇게 선정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고 설명하면서 이것은 중국정부에서도 장울화열사를 높이 평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2007년 반년이 넘는 시간을 들여 확건 준공하였다.


설계는 조선의 ‘평양도시건설연구소’ 소장이 했으며 평양에서 자재도 적지 않게 보내주었다. 릉원터는 현에서 주민들 이주비용까지 지불하여 마련해 주었고 건축비와 관련된 비용은 내가 부담하였다.”
 

이렇듯 장울화열사릉원은 조선과 중국 정부 그리고 장금천 선생의 합작으로 확건한 것으로 이 릉원 자체가 조·중친선의 상징으로 되었다.

장금천 선생은 한국에서 몇몇 학자들이 학술연구를 위해 방문한 적이 있지만 취재를 위해 기자가 온 것은 처음이라며 그렇게 우리 취재단을 반갑게 맞이하여 주었다.
첫날 취재를 마친 후에는 좋은 음식점에서 여러 가지 값비싼 중국 요리도 대접해주고 좋은 술도 권해 주면서 김일성 주석과 장울화 열사와 관련된 여러 가지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아무런 사전 약속도 없이 방문한 한국 취재단에게 그 바쁜 일정을 모두 미루고 흔쾌히 시간을 내어 연로한 나이에 영하 25도의 혹한에도 이틀 동안이나 무송 곳곳의 유적지를 직접 안내해준 장금천 선생은 기자에서 이 말을 몇 번이나 강조하며 말했었다.
 
“김일성 주석님은 제2차대전시기 장군이시다.
일제를 물리치는 전쟁 한 가운데서 큰 공로를 세웠고 중국혁명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김일성 주석님은 조선민족의 영웅이시다.
중국에서도 ‘김일성장군의 노래’가 대단히 유행했었다. 
가족과 모든 것을 다 받친 그런 영웅은 많지 않다. 김일성 주석은 영웅이다.
기자 선생이 한국에 이 진실을 알려 달라.”


아무런 선물도 준비해가지 못해서 사례도 하지 못하고 돌아서는 이름 없는 한국 기자에게 장금천 선생은 헤어지는 그 거리에서도 몇 번이나 우리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다음은 릉원의 사진이다. 따옴표(" ") 안에 들어 있는 말은 장금천 선생의 설명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장울화

            < 2007년 확건된 장울화열사릉원 >

길림성에서
<2006년 길림성에서 장울화열사릉원을 애국주의 교양기지로 선정했다는 표식 >

장울화열사릉원의

             <장울화열사릉원 옆의 기념비 >

 

장울화

            <장울화 열사릉원의 묘역 전경>

김일성



< 김일성 주석이 직접 쓴 친필 비문, 장금천 선생은 이 비문에 대해 "김일성 주석은 중국어 일본어를 아주 잘했다. 붓글씨도 서법가 수준으로 잘 썼다. 중국 사람들도 수령님의 필체를 흠모할 정도로 잘 쓴다.

당시 김일성 수령님께서 이 비문을 쓰신 후 조선에서 가장 좋은 화강암을 구하고 조선에서 가장 잘 새기는 석공을 찾아다가 조선에서 이 비석을 만들어 여기 중국까지 보내왔다. 

여기에 있는 비문은 1992년 김일성 주석님이 보내주신 것이고 
수령님 서거 후 틀과 돌사진 등은 2002년도 장울화 열사 희생 65돌을 맞이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께서 직접 평양에서 만들어 보내온 것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대를 이어 우의를 이어가고 있고 전반 조선 인민들의 장울화 열사에 대한 감정이 각별하다."라고 설명하였다.

비문의 내용은 "장울화 열사의 혁명적 업적은 조중 두나라 인민의 우의에 광휘적 모범이다.  열사의 숭고한 정신과 혁명업적은 영원히 인민의 마음에 살아 있으리라.”
김일성 1992년 10월 27일 >


 

기념비에

            < 김정일국방위원장이 비석에 새겨서 보낸 장울화열사 돌사진 >

장울화

   <장울화 열사릉원의 각계인사들의 기념글이 전시된 회랑, 릉원 양쪽으로 이런 회랑이 두 개가 있다.>

이런

< 이런 식의 수십개의 기념글비가 회랑벽을 따라 가득 부착되어있다. 이 글은 항일연군출신 헤이룽장성 성장 김계의 시이다.  이 외에서도 왕옥군 길림성 공산당 서기, 중국의 저명한 작가 위외, 길림성 선전부 부부장, 중국의 유명한 서법가, 유명인사들의 글, 시구 새겨져 있었다.> 

회랑의

<회랑의 제일 첫머리에 새겨진 김일성 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의 장울화열사 관련 내용 >

릉원

< 릉원 기념관에 전시된 중국의 유명한 서법가들과 각계 인사들의 시와 글들>

장울화

            <장울화 열사릉 기념관에 북 인민군 대표가 와서 남긴 글 >
 

장울화

            < 장울화 열사릉원에서 가운데 장금천 선생,  오른쪽 리광인 선생 왼쪽이 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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