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들고도 싸울 수 없었던 광복군의 양심선언
[연재] 1. 미처 쓰지 못한 취재 수첩!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3/06/12 [19:57]  최종편집: ⓒ 자주시보


[다음은 국가보안법으로 2012년 2월 9일 구속 수감된 후 항소심에서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서울구치소에 수감 중인 이창기 자주민보 대표가 편지로 보내온 기사입니다._ 편집자]

(작성일 2013.6.10) 

너무 잘 쓰려고 머뭇거리다가, 또는 불의의 사고가 발생하여 취재를 해 놓고도 보도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어 늘 가슴에 맺혀 있었는데 옥중의 한가한 틈을 타 취재원과 제보자들에게 속죄의 마음을 담아 연재를 하려 합니다. 취재 수첩도 없이 옥중에서 오직 기억에 의존해서만 쓰는 기사라 구체성이 떨어 질 수도 있지만 출소해 바쁜 생활에 쫓겨 영영 가슴에 묻게 될 것 같아 이렇게라도 글을 올려 봅니다.(필자 주)

▲ 광복군 시절 윤영무 선생     ©자주시보

 

2001년 민족을 위한 염원을 가슴에 품고 조국의 자주와 통일을 위해 애쓰는 해외동포 취재를 위해 민족통신의 도움으로 미주 취재의 길에 올랐는데 그 당시 뉴욕 교외에서 만난 광복군 출신 윤영무 선생 이야기가 기억에 생생히 남아 있다.


너무 잘 쓰려고 추가 자료 조사 등을 하는 도중에 그만 자주민보에 대한 1차 구속 사건이 발생하여 기회를 놓쳐 지금까지 보도를 못했지만 그 뜻 깊은 이야기는 늘 가슴에 빛으로 새겨있었다.

광복군 출신 윤영무 선생은 독립군의 기상이 어린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당신의 삶을 들려주었었다.

“사나이로 태어나 강도 일제가 나라를 강탈했는데 어찌 가만히 있겠는가. 그래서 목숨바쳐 나라 되찾을 각오로 임시정부를 찾아 조국을 떠나 그렇게 바라던 광복군에 들어 갈 수 있었다. 아무리 힘든 군사 훈련도 힘들지 않았고 어서 일제와의 전투에 참여하여 내 손으로 일본군을 잡아 족쳐 조국에서 쫓아 낼 생각만 하면 의기가 화산처럼 온 몸에서 솟아올랐다.”

그러면서 광복군 군모를 쓰고 군복을 입은 명함판 사진을 보여주었다. 다부지게 각진 얼굴, 부리부리한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영채, 쏙 다문 큰입의 입술, 일본군 100명이 덤벼들어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기관단총으로 모조리 쏴 눕힐 기상이 도도한 사진이었다.

“그런데 매일 훈련만 시키고 임시정부에서는 전투를 할 생각을 안하는 거야. 나와 전우들은 어서 싸우러 가자고 성화를 부렸는데 임정에서는 중국정부와 합의가 되어야 싸울 수있다며 기다리라고 하는데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지”

“그럼 매일 훈련만 했나요?”

“나중엔 주로 군자금과 임정 운영자금 모금하러 다녔지. 조선 동포들이 많이 사는 곳으로 조를 짜서 돌아 다녔는데, 광복군이라고 하면 아무리 어려워도 다들 성의껏 돈을 내 도와주었지. 그래서 싸움도 없이 양식만 축내는 생활이 더욱 못 견디게 괴뢰웠던 거야!” 

“동포들과 사업하며 돌아 다닐 때 특별히 기억나는 일은 없었나요?”

“많았지 한번은 술집에서 누구를 만나기로 해서 기다리는데 그 술집에서 일하는 여성이 우리 동포 처녀였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믿음이 생겨 광복군이라며 군자금 때문에 이 지역에 왔다고 하니 글쎄 이 여성이 접선을 끝내고 나가는데 술집 밖에 따라나와 적지 않은 돈과 패물을 건네주는 거야. 더 주고 싶은데 가진게 그거 밖에 없다며... 그래 이 돈을 주고나면 여성 몸으로 어떻게 살려고 그러느냐 안 받겠다고 하니 그 여성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천한 일을 해서 번 돈이라고 그러느냐며 얼마나 서러워하던지... 결국 그 돈을 받고서야 그 여성이 환히 웃더군! 정말 가슴이 뭉클했지. 아! 이게 우리 동포들의 마음이구나. 정말 그럴 땐 어서 총을 들고 일제와의 격전장에 뛰어 들 생각뿐이었지”

하지만 결국 그는 총 한번 쏘아 보지 못하고 광복을 맞이했다고 한다. 그런 그와 전우들이 박정희 정권 때 다시 나라의 부름을 받고 청와대로 달려가게 되었다.

“일본 관동군 장교 출신이란 친일 경력을 가리려고 그랬는지 박정희 대통령이 어느 해인가 갑자기 임정의 광복군들을 다시 불러모아 독립의 영웅들이라며 돈과 상을 주고 방송에도 내 보내고 내세우기 시작한 거야. 사실 김일성 주석과 북의 주요 간부들이 만주에서 일제 관동군과 십년도 넘게 치열한 전투를 벌렸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거든. 우리와 이념은 달랐지만 그들은 정말 일제와의 써움에서 큰 승리와 성과를 많이 거두었지. 소문이 자자했어.

북에서 그걸 세우니까 일본관동군 장교출신 박정희 대통령도 광복군을 내세운거지! 그런데 사실 우리가 뭐 싸운게 있어야 대접을 받아도 마음이 편안할텐데 동포들이 애써 모아준 자금만 축낸걸 생각하면... 

그래서 내가 전우들에게 ‘이건 너무 부끄러운 노릇이다. 이래선 안된다. 나라에서 불러도 나가지 말자’ 고 말했지. 난 기자들 마이크 앞에서도 그렇게 부끄럽다고 말했고 대통령께도 대접 받는 일 양심에 걸려 못하겠다고 했지. 그런데 일부 전우들은 계속 나가는 거야 나에게도 자꾸 나오라고 하고 그래서 미국으로 나와 버린 거지“


윤영무 선생은 임정이 장개석 중국정부에 기대고 있었기에 끌끌한 청년들로 광복군을 조직해 두고 일제에게 총 한번 쏴 보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면 자주가 얼마나 중요한지 뼈에 사무친다고 강조했다.

사실 김일성 주석이 이끌었던 조선인민혁명군도 초창기엔 중국공산당의 간섭 때문에 심각한 피해를 입기도 했었다. 중국공산당 세력들에게 끌끌한 조선 혁명군들이 일제 간첩 즉 민샌단으로 몰려 억울하게 죽어 갈 땐 청년 김일성 주석도 중국간부들과 담판 회의에서 주먹으로 방바닥 내려치며 계속 이렇게 탄압하면 더는 곁방살이를 하지 않을 것이라며 폭탄 같은 결별 위협 선언까지 했었다고 한다.

나라를 완전히 강탈당해 독립군 투쟁마저도 남의 나라로 옮겨 가서 해야했던 선조들이 얼마나 가슴아픈 일을 겪었을지는 아무리 상상하려해도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북이 저렇게까지 자주를 외치고 미국의 핵위협에 대항하여 중국 러시아가 반대하는데도 기어이 핵무장까지 하고 나서는 데는 이런 역사적 아픔과 무관치 않은 것 같다.
남측도 경제 발전은 많이 이루었지만 여전히 미국의 정치, 경제, 군사, 외교적 간섭을 심하게 받고 있고 이젠 중국에 경제적으로 심각한 영향을 받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었다고 해도 영원히 이렇게 휘둘리며 살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 문제없이 갤럭시S4와 아티브랩톱(노트북)을 잘팔고 있는 삼성을 골드만 삭스 미국투자회사에서 향후 부정적인 전망보고서 한 장 나오자 외국인 투자가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미국 융단폭격을 가하여 6%넘게 주가를 폭락시켰다. 거의 외환위기 수준이다. 언제까지 이렇게는 살 수 없지 않은가. 이제 점차 자주적인 힘을 키워가야 할 것이며 그것은 오직 남과북 통일을 통해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10여년전 그 광복군 선배도 대담 말미에 마지막 소원은 통일이라고 했던 것이리라 

                                              2013년 6월 10일
                                    청계산 사무실에서 이창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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