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문화 가꿔가기2] 북에서 말하는 명곡의 기준
중국시민
기사입력: 2016/07/17 [01:36]  최종편집: ⓒ 자주시보

 

지난 7월 초에 한국 《통일뉴스》에서 “北 최고작곡가 김옥성 탄생 100돌 기념음악회 열려”라는 기사를 보았다. 주로 조선(북한)의《노동신문》이 2일 발표한 "작곡가 김옥성 생일 100돌 기념음악회가 동평양대극장에서 진행되였다"에 근거해 조선음악계 새 소식을 전하면서 덧붙여 김옥성의 일생을 간단히 소개하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김옥성을 최고의 작곡가로 가장 먼저 꼽았다는 설명도 넣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김옥성에 대해 그렇게 평가했는지 필자는 잘 모른다. 6월 30일에 진행된 기념음악회에 관한 조선중앙통신의 보도를 찾아보니 거기에는 그런 말이 없었다. 김옥성은 필자가 무척 좋아하는 작곡가이긴 하지만 명성이나 실력이나 작품들로 따져보면 광복 전과 광복 후에 다 걸작들을 내놓은 이면상(1908.4.8~ 1989.6.25), 북 최고의 음악대학에 이름이 붙여진 김원균 (1917. 1. 2~ 2002. 4. 5)에 비길 수 있겠느냐는 의문이 들었다.
“통일문화 가꿔가기”에서 다룰 만한 소재라고 생각되어 수중에 있는 자료들을 두루 찾아보면서 글을 썼다.
조선에서는 김옥성을 이렇게 소개한다.

 

“김옥성 (1916.6.30~ 1965.10.25)

 

작곡가이다.
황해남도 과일군 과일읍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초도의 해녀였던 어머니의 영향밑에 음악에 대한 애착과 감수성을 키웠으며 한편 마을의 학교선생님에게서 기타, 바이올린 등 악기를 다루는 법을 배웠다.
작곡가가 되려고 정열적으로 독학하였으나 일제의 암담한 식민지통치밑에서 그의 희망이 실현될 수 없었으며 광복 후에야 비로서 성취될 수 있었다.
광복직후 황해도음악동맹 봉산군지부에 망라되여 창작가로 활동하였다.
1945년 11월에 첫작품인 악극 《락랑공주》(합작)를 창작하였으며 그후 남녀평등권법령에 의하여 나라의 주인으로 된 조선녀성들의 애국심을 노래한 가요 《녀성의 노래》(1947년)을 창작하였다.
1947년 5월 보안간부훈련대대부 협주단에 입대하였으며 이때부터 작곡가의 음악창작활동은 보다 적극적으로 진행되였다.
특히 그는 가렬한 조국해방전쟁시기 종군작곡가로 활동하면서 혁명적인 음악작품들을 많이 내놓았다.
이시기 창작된 가요 《결전의 길로》(1951년), 《전호속의 나의 노래》(1951년)등은 그 대표작이다.
김옥성은 1955년 9월부터 조선음악가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으로, 1960년부터는 동맹 현역작곡가로 일하였다.
이시기 대표작으로 관현악과 합창 《청산벌에 풍년이 왔네》(1960년)를 들수있다. 조선적인 음악으로 생동하게 형상한 이 음악은 천리마시대를 반영한 특출한 작품이다.
이후시기 그는 가요《행복의 노래》(1961년), 《만경대의 노래》(1962년), 동요 《아름다운 만경대》, 《우리 집 토끼》등 여러가지 형식의 음악작품들을 창작하였다.
1958년에 《김옥성작곡집》(1)이, 1967년에 《김옥성작곡집》(2)이 출판되였다.
인민예술가(1961년)이다.
묘는 애국렬사릉에 있다.”

 

여기서 우선 주목할만 한것은 광복 후에야 음악활동을 시작했다는 점이다. 친일행위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으므로 아주 깨끗하다는 이 점은 나이가 비슷하면서 역시 광복 후에야 음악활동을 시작하여 1946년에 《김일성장군의 노래》로 이름을 날린 김원균과 비슷하다. 단 김옥성은 명작을 내놓은 시기가 김원균보다 늦다. 1947년에 내놓은 《여성의 노래》가 꽤나 큰 영향력을 낳았으나 필자가 알기로는 진정으로 거대한 영향을 끼친 작품은 1951년에 발표한 《결전의 길로》이다.

 

이번 기념음학회에서도 물론 무대에 올랐다. 조선의 아리랑협회가 운영하는 《메아리》사이트는 7월 3일에 기념음악회를 보도하면서 “그가 창작한 노래의 제목까지 몸소 고쳐주시며 천만군민을 원쑤격멸에로 불러일으키는 혁명적인 가요들을 더 많이 내놓도록 걸음걸음 이끌어주신 *** **의 세심한 가르치심이 그대로 곡이 되고 선률이 되여 가렬한 싸움터마다에 울려퍼진 피아노협주곡 《결전의 길로》”이라고 설명했다.

 

 

 

《결전의 길로》의 창작경위에 대해서는 《청년문학》 2008년 제6호에 실린 단편소설 《화선시인》(저자 김철이)가 문학적으로 그렸는데, 《돌격가》를 쓰려고 전선에 나갔던 시인 석광희가 중대장과 전사들의 희생적인 싸움에 감동되어 느낀 바롤 적다나니 결국 《섬멸의 노래》가 나왔다는 게 줄거리로서, 필자가 언젠가 들은 얘기와는 다르다. 6.25전쟁이 고지전으로 변해가던 시기 시인 석광희가 가렬한 전투를 목격하면서 따발총박죽(박죽을 한국에서는 개머리판이라고 하던가)에 종이를 대고 가사를 섰는데 그때까지 이렇다 할 작품을 내놓은 적 없는 석광희로서는 판단이 잘 서지 않을 때, 종군작곡가로서 그 부대에 왔던 김옥성이 좋다고 하면서 곡을 붙여 퍼졌다 한다.

 

김일성 주석을 주인공으로 하는 《불멸의 역사》중 장편소설 《전선의 아침》(박윤 지음, 문학예술출판사 2005년 11월 출판발행, 도합 423쪽)은 노래 《섬멸의 길로》가 어떤 풍파를 겪다가 김일성 최고사령관의 제의에 따라 《결전의 길로》로 변하는가를 생동하게 그렸다.

 

▲ 북 소설 '전선의 아침'     © 자주시보, 중국시민


소설에서 전선군사위원 김익은 종군작가 석강하(원형이 석광희)를 비롯한 종군문인들을 만난 자리에서 불만을 털어놓는다.

 

“전선군사위원은 너그럽게 머리를 끄덕이고나서 박한주곁에 서있는 체소한 사람에게로 돌아섰다.
《동문 누구더라?》
《석강하라고 합니다.》
《석강하?…》
《…》
석강하가 우울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자 김익은 대뜸 몸을 제끼고 두팔을 엇결고 서서 그의 아래우를 훑어보았다.
《동무였댔구만. 〈섬멸의 길로〉! 여보, 그 노래때문에 나도 어지간히 골치가 아팠소. 심봉운동무, 동문 어떻게 생각하나?》
《군사위원동지, 그 노래가 비록 좀 말을 들었지만 몇군데를 바로 잡아놓았더니 전선병사들속에서 보급속도가 정말 대단했습니다. 그리고…》
심봉운이 내친김에 《섬멸의 길로》에 대한 자기의 견해를 거들려하자 김익은 한손을 홱 내저으며 눌러버렸다.
《여보, 바로 그게 문제란 말이야. 전쟁은 곧 생사를 판가름하는건데 전호에 선 병사들에게 뭘 주자는건가? 혁명의 씨뚜아찌야가 절정에 이를 때 우리의 선동, 아니 예술은 혁신적이고 전투적이고 원칙적이여야 하는거요.
석강하동무, 찍어말하면 동문 전형화에서 탈선했단 말이요. 난 일부 사람들의 가혹한 의견처럼 염전적이라고까지는 하지 않겠소. 엥겔스동무는 일찌기 우리들에게 전형적환경에서의 전형적성격을 제기했소. 내 말을 알겠소? 석강하동무!》
《가르쳐주어 감사합니다.》”(61~ 62쪽)

 

소련에서 나온 김익은 소련의 군가를 숭상하면서 《섬멸의 길로》를 비하하는데, 염전적이라는 비판은 왜 나왔을까? 물론 가사 때문이다. 1절은 다음과 같다.

 

가렬한 전투의 저기 저 언덕
피흘린 동지를 잊지 말어라
쓰러진 전우의 원한 씻으러
나가자 동무여 섬멸의 길로
만세 만세 만세 높이 부르며
원쑤의 화점을 짓부시며 앞으로
원쑤의 화점을 짓부시며 앞으로
나가자 동무여 결전의 길로

 

희생된 사람부터 거들다나니 선율도 비장할 수밖에 없은 것이 비난을 불러왔다고 보인다. 어찌 보면 가사는 같은 시기에 반도의 남반부에서 특히 한국군이 많이 불렸다는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와 시작부분에서 유사성을 띄는데, 현실적으로 그런 비판은 나오지 않았던 모양이다. 반도 남북의 군가 특히 전쟁시기 군가들을 대조하면 가사로부터 선율에 이르기까지 흥미로운 연구결과가 나올 법 한데, 남북영화를 비교한 글들이나 많으니 좀 아쉽다. 혹시 이미 나왔으나 필자가 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만, 적어도 많지 않으리라는 건 짐작이 간다.

 

소설 《전선의 아침》에서는 김일성 최고사령관이 모란봉지하극장에서 당과 국가, 군대 지도간부 및 외국대사, 외교사절들과 함께 인민군협주단의 공연을 본 다음 노래제목을 바꾸자고 제의한다.

 

“《음… 우리 종군작가들이 정말 큰일을 해냈소. 지난해 만나보니 그들의 결심이 좋았소. 지금 전선 각 군단들에 나간 종군작가들이 좋은 글들을 써내고있거든. 그런데 말이요. 이 노래를 창작한 동무들이 전번에 비판을 받았다고 합니다. 노래가 너무 비장하고 어두워 전사들에게 염전사상을 줄수 있다는 론거였소.
요즘 이 종군작가들을 류경수동무네의 전선동부에 파견했는데 습격전투에도 함께 참가하고 전사들을 잘 고무하고있소. 어제도 류경수동무에게서 련락이 왔댔소. 류경수동무는 이 노래를 우리 전선병사들이 아주 좋아한다고, 이 노래를 부르면서 적진에 돌진한다고 흥분해서 말했소.
나는 오늘 노래를 다시 들으며 큰 힘을 얻었습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시련과 죽음을 헤치고 결전의 언덕으로 승리를 향해 나가는 우리 전사들의 심정이 진실하게 안겨오는 작품입니다.
일부 염전적이라는 의견이 더러 제기된다는데 무엇이 염전적이고 비장하단 말이요? 아니, 비장할수록 좋소. 그건 염전사상이 아니라 혁명적랑만이고 사실주의적힘이요.
제목은 바꾸는게 좋을것 같소. 〈섬멸의 길로〉는 좀 지엽적이고 실무적인 느낌이 듭니다.
〈결전의 길로〉라고 하면 어떻소?
김일동무가 많이 주관했는데 의견을 말해보시오.》
《의미가 깊습니다. 그렇게 되면 가사의 마감구도 뜻이 깊어져 더 완결감을 줍니다.》”(133쪽) 

 

사장될 뻔 했던 《섬멸의 길로》가 김일성 최고사령관의 판단에 따라 《결전의 길로》로 바뀌어 명작으로 인정되었다면, 김옥성이 평화시기의 삶을 그린 《청산벌에 풍년이 왔네》는 청년 김정일의 제의 덕분에 관현악으로 변신했다.

 

1960년대 말 국립교향악단이 유럽의 고전교향곡이나 그것을 본따서 만든 교향곡을 가지고 출연했기에 대중의 공감을 자아내지 못했는데, 일부 사람들은 그 원인을 군중의 문화수준이 낮은데서 찾으면서 그들의 교향곡감상능력을 키워준다는 《해설음악회》도 조직해보고 관객확보를 위해 미리 3개월분의 정기관람권을 팔기도 했으나, 관객은 줄어만 갔고 마침내 극장을 더는 운영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한다. 당에서 선전사업을 맡았던 청년 김정일은 교향악이 이 지경에 이른것은 사대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 인민이 무식하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교향악을 하는가에 있다면서 교향악을 우리 인민이 즐겨부르는 민요와 인민들에게 널리 보급된 명곡을 편곡하는 원칙에서 발전시켜야 한다고, 다시말하여 교향악도 우리 식으로 하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립교향악단이 그 주장에 따라 우선 기성곡들인 《그네 뛰는 처녀》와 《내 고향의 정든 집》을 교향곡으로 편곡해 공연했더니 연주가 채 끝나기도 전에 폭풍같은 갈채가 터져올랐다 한다. 청년 김정일은 그 기세로 밀고나가 더욱 심오하고 다채로운 교향악과 협주곡 작품들을 계속 내놓으라고 격려했고, 국립교향악단에서는 그후 수많은 조선식 교향악 작품들을 내놓았는데 성공작들 가운데 《청산벌에 풍년이 왔네》가 끼인다.

 

이처럼 김옥성의 작품들은 조선의 초대, 2대 수령들과 밀접히 관계되는바, 이번에 《메아리》의 보도에서는 김정은 위원장이 “불타는 창작적열정을 지니고 인민들의 사랑을 받는 시대의 명곡들을 수많이 남긴 김옥성의 공로를 잊지 않으시고 그의 생일 100돐을 맞으며 기념음악회를 열도록 뜨거운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면서 3대 수령과도 연결시켰다.
물론 《청산벌에 풍년이 왔네》의 변화와 기념음악회는 다 김옥성 사후에 벌어진 일이라 그 본인과는 상관이 없다. 헌데 여기에서 당년 음악계의 의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 북 소설 '그의 교향곡'     © 자주시보, 중국시민


황해도 출신 여성작곡가 문경옥(1920. 2. 1~ 1979. 3. 13)을 원형으로 하는 중편소설  《그의 교향곡》(최영학 지음, 문학예술종합출판사 2001년 4월 출판발행, 도합 252쪽)에서는 1947년 소련 레닌그라드에 가서 유학하던 주인공 라경은치 첫 관현악곡 교향시 《승리》(이는 문경옥의 실제작품이다)를 내놓아 1951년 12월 초에 모스크바에 가서 작품발표회에 참가하는 대목을 보자.

 

“쏘련작곡가동맹 제6차대회기념 작품발표회에 세계적으로 이름난 쏘련대가들의 작품과 함께 조선처녀의 작품이 입선되였던것이다. 그것은 《승리》였다.
경은은 동맹위원장을 만났다.
《쏘련작곡계가 동무와 같은 생신한 향기를 풍기는 녀성작곡가를 가지게 된것은 더없이 경사스러운 일이요.
지금까지 우리 동맹대회 발표회에 외국인들의 작품이 오른적은 없었소. 그리고 녀성작곡가의 작품을 올리는것도 처음이구… 아마도 동무는 내가 알고 있건대는 세계에서 첫 녀류작곡가일거요. 서방에는 아직 녀류작곡가가 없소.
동무의 <승리>는 조선에서의 승리를 노래하고 있을뿐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첫 녀류작곡가를 낳은 사회주의의 승리의 노래이기도 한거요. 그 의의는 크오. 우리가 훌륭한 지휘자를 소개해 줄테니 그와 함께 준비를 잘 하시오.》
그의 말에는 과장이 없었다. 그 당시에 음악계에서는 관현악교향곡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을 작곡가로 인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교향시를 발표한 녀성은 과거에도 없었고 당시에도 없었던것이다.”(133쪽)

 

여기서 묘사한 음악계의 기준에 따른다면 이면상도 김옥성도 작곡가로 못된다. 소련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꽤나 많았던 상황에서 조선에서는 어떤 음악인들이 작곡가이고 그것도 유명한 작곡가인가에 대한 쟁론이 있었던 모양이다. 문학예술출판사가 2006년 11월에 펴낸 음악일화집 《장군님과 노래》(중)에는 “유명한 작곡가에 대한 정의”라는 제목의 일화가 담겼다.

 

1969년 2월 11일에 청년 김정일은 조선예술영화촬영소에 나와 작곡가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동무들 생각에는 이 세상에서 어느 작곡가가 제일 유명한 것 같은가고 물었다. 작곡가들은 서슴없이 서유럽에서 제일 유명하다고 널리 알려진 작곡가의 이름을 말했다. 청년 김정일은 그런가고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거닐다가 이렇게 말했다.

 

《작곡가들의 기본사명은 *** ** 김일성**에 대한 우리 인민들의 다함없는 흠모의 정을 담은 노래를 짓는것입니다. ***에 대한 우리 인민들의 흠모의 정을 담은 명곡을 짓는 사람이 바로 훌륭한 작곡가입니다.

세계적으로 이름난 작곡가들이 지은 노래라 하더라도 인민들이 인정하지 않고 좋아하지 않으면 명곡이 아닙니다. 그런 곡을 지은 사람은 훌륭한 작곡가라고 말할수 없습니다.》(134쪽)

 

하여 작곡가들은 큰 충격을 받았고 깊이 자책하였다는데, 작곡가와 명곡에 대한 이런 정의를 놓고 이러저런 의견이 나올 건 뻔하지만, 조선에서 바로 그런 정의에 따라 숱한 작품들이 나왔다는 건 역사적 사실이다. “우상화작업”의 일환이라고 간단히 매도해버리기보다는 발생원인부터 창작과정 그리고 작품들의 효과에 이르기까지 진지한 연구를 하여 무게 있는 결론을 내놓는 게 바람직하겠다.

 

청년 김정일의 유명한 작곡가 정의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김옥성은 기준에 미치기 어렵다. 49세에 일찍 세상을 떠나다나니 1970년대에 급격히 늘어난 수령송가들을 지을 기회가 없었고, 그 전에 내놓은 작품들의 수량이 많지 않았으며 직접 수령을 찬양하는 작품은 더구나 찾기 어렵다. 이번 기념음악회에 올린 작품들을 보더라도 여성2중창과 녀성합창 《만경대의 노래》, 피아노협주곡 《결전의 길로》, 남성4중창 《정찰병의 노래》, 남성고음3중창 《전호속의 나의 노래》, 관현악과 합창 《청산벌에 풍년이 왔네》, 여성합창 《황금나무 능금나무 산에 심었소》, 여성고음독창 《강선은 천리마의 고향》 등인데 청산벌, 강선 등이 김일성 수상의 활동과 관계되는 고장들이나 직접 송가라고는 말할 수 없으니 엄격한 기준대로는 《만경대의 노래》만 수령송가자격이 있겠다.

 

우연한 일치랄까 김옥성과 문경옥은 모두 황해도 출신으로서 광복 후에만 북에서 활약했으므로 그 지위와 작품에 비해 남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지금까지 문학예술계 인물들에 대한 연구가 남에서 제법 이뤄지기는 했으나 고향이 이남이 아니거나 “월북작가”가 아니면 문학, 음악, 무용, 미술 등을 가리지 않고 연구가 잘 되지 않았고 특히 시장에서 유통되는 미술작품은 값도 제대로 받지 못한다.

 

김옥성이 최고의 작곡가이냐 아니냐를 젖혀놓고 《청산벌에 풍년이 왔네》를 비롯한 그의 작품들이 조선에서 오랫동안 인기를 유지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다는 점은 유의할 가치가 많다.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정취를 살린 작품들이기에 그렇지 않을까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물론 전문가들은 훨씬 깊이 있는 판단을 하리라 믿는다. 반도 남반부에는 이러저런 교향악단들이 꽤나 되는데(불행하게도 언론에 오르내릴 때는 서울시향처럼 지휘자와 악단이 충돌을 빚는 등 부정적 원인들 때문인 경우가 많지만) 조선의 교향악들을 연주한다면 조선국립교향악단의 해석과 차이가 제법 나기 마련이다. 작품해석의 그런 차이를 인정하고 지어는 즐기는 것 또한 통일문화 가꿔가기의 일환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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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시민 그런데 16/07/17 [10:20] 수정 삭제
  문학과 사회는 이미 정평이 났으니 그렇다치고 중국시민님의 깊이는 어디가 끝인 줄을 모르겠습니다. 음악에 문외한인 우리가 여러번 들어볼 기회가 있어던 작품에 대한 참으로 좋은 해설입니다. 다음에 들을 때는 더 음악 감상의 맛이 나겠습니다. 감ㅅ합니다.
인간은 정말 어떤 존재일까? 보다가 16/07/17 [23:19] 수정 삭제
  돈과 재물을 위한 죽음은 별로이지만, 이념과 사상을 위해선 초개처럼 자기의 생목숨을 건다. ㅎ 전장을 죽을 줄 알면서도 총을 힘껏 틀어쥐고 노래를 부르며 뛰어가는 생명은 이 지구상에선 오직 우리 인간밖엔 없을 것이다. 이런 인간을 어떻게 규명하면 적당할까? ㅎ 누구의 말마따나...우리 인간은 세련된 동물일 지도 모르겠다. 재밌는 존재!
전쟁터로 향할 대한민국 젊은이들 몇% 안된다. 이수다 16/07/18 [22:40] 수정 삭제
  한국의 노래 99%가 사랑의 노래이다 그 노래 가사를 들어보면 80% 사랑하다 해져서 설어워하는 가사들이 대부분이고 기뻐할만한 가사를 ?아보기 힘들다. 곡은 일제의 트로트 아니면 현 젊은이들이 부르는 흑인식 이아니면 미국식 춤역시 그러하다. 진짜 지 민족곡을 부르는곡은 옛곡 몇개박에 없다. 이런 정신으로 전쟁에 참전하겠다는 젊은이들 백에 둘도 적을것이다 기회만 있으면 전쟁에서 도피할 생각만 할것이다. 그렇다고 욕하는것이 아니다 한국 정세를보면 응당한것이다 외냐 국가에 멀해 처먹는 자들은 지자식은 절대 전쟁터로 안내모니 누가 전쟁텨로 나가 죽자고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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