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문화 가꿔가기3] 정성이 지극하면 소금도 꽃이 핀다
중국시민
기사입력: 2016/07/24 [02:07]  최종편집: ⓒ 자주시보

 

 

 

▲ 북의 기행문을 쓰기 위해 북을 자주 드나들었던 재미동포 홍정자 여사, 홍동근 목사의 아내이다.     ©자주시보


월초에 재미동포 홍정자 여사가 1일 벨리지역의 한 병원에서 지병으로 운명했다는 소식을 보고 비감에 잠겼다. 향년 72세라는 걸 알게 되어 80객이 흔한 지금 세상에 어쩌면 이리 일찍 떠나는가는 생각에 한결 서글퍼났다.

 

홍정자 선생은 1988년부터 조선(북한)을 방문하면서 많은 글을 써서 책들도 냈는데 필자는 미술가의 섬세한 감수성으로 북과 북 사람들을 그려낸 《내가 만남 북녘 사람들》(1992년)을 제일 흥미진진하게 보았었다. 헌데 수중에는 조선의 평양출판사가 2004년에 출판한 조선탐방기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만 있기에 펼쳐들었다.

 

▲ 홍정자 선생의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     © 자주시보, 중국시민

 

여러 해 전에 볼 때는 “아오지 탄광”방문이 가장 인상적이었고 후에 글에서도 써먹었는데 홍정자 여사에게 감사의 마음을 품었으나 그 맘을 알릴 기회가 없었고 이후에도 없게 되었다, 아오지탄광이 1967년에 이미 오봉탄광과 6.13탄광으로 개명되었건만 지금까지도 반도 남쪽에 아오지탄광 타령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한결 한심하다. 심지어 옛날의 아오지탄광 지금의 새 이름 탄광에서 탈북했다는 사람들이 그 탄광들의 실정을 말해도, 북을 까기에 급급한 사람들은 여전히 걸핏하면 누가 아오지탄광에 가게 됐다는 식으로 무식함을 자랑한다.

 

아오지는 그 이름이 조선말 같지 않다는 김일성 주석의 의문에 따라 민족학연구소가 어원을 캤고 결과 여진족의 말로써 “불타는 돌”이라는 뜻이어서 탄광소재지역을 1977년에 “은덕군”으로 개명했는데, 그 즈음 여진족말 지명들을 바꾸는 게 국가적 시책으로 되었으니, 북변의 독로강(여진족말로는 앞강이라는 뜻이라던가)도 장자강으로 바뀌는 식이었다. 지명바꾸기 혹은 지명바로잡기는 언어부문의 문제로서 이후에 기회가 있으면 다룰까 한다.

 

▲ 아오지(현 샛별) 탄광 광부들과 홍정자 여사     ©자주시보

 

본론으로 돌아와 이번에는 아오지탄광보다는 광명성제염소의 건설을 그린 “용서하시라 안해여”가 연상을 불러일으켰다. 함경남도 금야군 동해기슭에 자리잡은 광명성제염소는 동해안에서 역사상 처음 생겨난 제염소로서 가장 어려웠던 “고난의 행군”시기에 자연조건이 굉장히 불리한 곳에서 건설되었다는 정도는 이미 알려졌다. 그 덕에 예전에는 서해안에서 실어오던 소금을 먹던 함경남도사람들이 가까이에서 나는 소금을 먹게 되었다 한다.

 

홍정자 선생의 글에 의하면
“일제강점시기 이름난 재벌 ≪노구찌≫란 놈만 해도 몇번이고 동해안의 제염소건설을 시도해보았으나 실패만을 거듭, 손을 들고 나앉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하기때문에 함경남도의 수요량인 1만t의 소금은 언제나 서해에서 운반해와야 했고 그러려면 200차량이 동원되고 산악지대를 넘어다녀야 하는 곤난을 겪어야 했다. 뿐만 아니라 때에 따라 서해에서도 소금농사가 원만치 못할 경우에는 그나마도 공급이 중단되여 고통을 당해왔다.

 

그리해서 도내 인민들은 비록 몇번의 실패를 거듭해왔으나 다시금 기어이 함경남도에 소금밭을 건설할것을 결의했고” 최고지도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보고를 올리니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996년 7월 11일 “전적으로 지지합니다. 좋은 의견입니다. 한번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라고 비준하여 “7월11일청년전위결사대”가 조직되었고, 시, 군별로 청년돌격대들이 조직되어 1996년 8월 15일 시공을 시작했다.

 

1999년 10월 12일 총 면적 1,000정보, 연산 수만t능력의 현대적인 소금생산기지를 건설되었는데 홍정자 선생이 주목한 건 건설자체가 아니라, 1999년 8월 4일 폭우로 인하여 일어난 사건이었다. 일 때문에 강경식, 최시남 부부와 평소 최시남이 친동생처럼 사랑하고 아끼던 19살 소녀 윤명주가 물이 불어난 강을 건너다가 거의 다 건너갔을 때 윤명주가 발을 헛디디면서 웅덩이에 빠졌고, 최시남이가 구하고저 뛰어들었다가 거센 물결에 밀려 떠내려가기 시작했다. 강경식이 “사람 살리라”는 웨침을 듣고 달려와 먼저 안해를 구하고저 헤엄쳐가는데, 최시남이가 허우적거리며 “명주, 명주” 하고 웨치는 바람에 강경식은 윤명주에게로 방향을 바꾸었다. 윤명주를 기슭으로 끌어내놓고 급히 뒤돌아다보니 최시남이 사라졌다.

 

“용서하시라 안해여”라는 글의 제목은 그래서 생겨난 것이었다. 홍정자 선생이 2001년 7월의 어느 날 강경식을 만나 직접 확인한 사실이다. 건설기간에 가정을 이룬 류승국, 우영옥부부는 소금밭에서 낳은 첫딸이름을 “소금이”라고 지었는데 1999년 10월 13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광명성제염소를 시찰하면서 기념사진을 찍을 때 특별히 소금이를 불러오라고 하여 적지 않은 시간을 기다린 끝에야 기념촬영이 이뤄졌다 한다.

 

홍정자 선생은 “소금이네 집에는 봉선화가 소담하게 피여있었다.”고 글을 마무리했는데, 그 소금이가 이제는 10대 후반이다. 강경식을 비롯하여 홍정자 선생의 인터뷰를 받았던 조선사람들이 비보를 들으면 무척 슬퍼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홍정자 선생의 책을 다시 읽으면서 광명성제염소 건설을 다룬 장편소설을 찾아보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해 유감스럽다. 그러다가 지금껏 본 염전소재소설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중편소설 《소금꽃》(리화 지음, 문예출판사 1984년 6월, 183쪽)을 찾아내어 다시 읽었다.

 

▲ 북 소설 '소금꽃'     © 자주시보, 중국시민

 

 

중편소설은 서해북변에 자리잡은 남동제염소의 지배인 리영택이 소금공업총국 처장으로 승진하여 평양으로 떠나가게 되면서 지나간 20년 가까이 되는 세월을 돌이켜보는 형식으로 이뤄졌다. 일인칭소설은 자칫하면 따분해지기 쉬운데 《소금꽃》은 1959년 주인공이 군에서 제대하여 염전에 배치되어서부터 1973년에 제염소가 첫 소금생산날짜 새 기록을 만들기까지(그 뒤는 “여러 해가 지났다”(182쪽)면서 제염소와 사람들의 변화를 간단히 언급했다.) 여러 인물과 여러 사건들을 통해 시대상과 인간상, 지역상을 생동하게 그려냈다.

 

리영택이 처음에 본 염전은 일할 재미가 없고 물마저 쯥쯜해 살 맛이 없었으나, 소금판에서 버리는 깔깔이라는 폐물을 석고로 만들 방도를 찾은 뒤에는 염전을 독특한 정취가 있는 곳이라고 여긴다.

 

“세상에 좋은 고장, 그렇지 못한고장이 있는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게 중요한것은 아니다. 제아무리 황무한고장에 사는 사람이라고 해도 심장을 불태울만한 생활이 있다면 두려울것이 없다고 본다.
나무 한그루 풀 한포기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웅뎅이마다 고기 한마리 없는 죽은물(짠물)만이 고여있는 바다가 소금밭을 결코 살기 좋은고장이라고 말할수는 없을것이다.
그러나 이때 나는 남동염전이 나쁜가 좋은가 하는 생각은 하지조차 않았다. 구태여 누가 염전이 어떤가고 물었다면 소금밭은 류다른고장이며 다른데서는 맛볼수 없는 독특한 정취조차 느낄수곳이라고 대답할수 있었을것이다.
염전마을은 짠물수로며 저수지를 휘감고있어 국가마에 물을 부어놓고 낚시대를 들고나가 잠간사이에 망둥어를 꿰미로 잡아다 생선국을 끓일수 있는곳이다. 저수지에는 신짝굴이며 가리맛이 또 얼마나 많이 깔려있겠는가. 동너머 갈밭에는 봄가을 도요새며 기러기가 떼지어 내린다. 날새중의 제일미라고 하는 도요새료리를 맛볼수 있는것도 소금밭 사람들의 자랑의 하나이다.“(60쪽)

 

제대배치된 초기인 추운 날에 리영택은 동료들과 함께 신을 벗고 염판밟기를 하게 되는데 얼음이 갓 풀린 소금판에서 짠물이 빠지니 죽같이 흐들흐들한 염판이 드러났고, 그걸 메주 밟듯이 잘 밟아서 풀기를 내고 감을 바싹 내어 연자돌로 땅땅 다져야 하는 게 일거리다. “봄여름내 소금을 거두어 낼 판이기때문에 잘 밟아서 손톱이 들지 않게 다져아 한다”(5쪽)는데, 10여년 뒤 리영택이 지배인으로 될 때에는 이미 소금판마다 밤빛타일을 촘촘히 깔아놓아 염판밟기라는 말자체가 사라졌다. 염전에는 시시해보이는 잔손질이 많고 위훈을 세울 기회가 적어서 젊은이들이 왔다가는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는 따위 구실을 대서 빠져나가곤 하는 판인데, 전쟁고아인 리영택은 구차한 구실을 댈 것도 없고 대기도 싫어 그럭저럭 일하다가 깔깔이문제를 발견한 것이다.

 

“한낮이 기울자 비는 멎었다. 그러나 하늘은 여전히 찌뿌드하게 흐려있고 차고 눅눅한 바람이 불어왔다. 반원들은 비옷들을 입은채 증발지에 눌어붙은 깔깔이를 거두어낸다. 참대곰배로 껄껄한 염판바닥을 벅벅 내밀 때마다 나무껍질부스러기같은것이 일어난다. 그래서 염전사람들은 이것을 깔깔이라고 하는것 같다.
이 깔깔이는 짠물의 염도가 17도~22도가 되면 염판에서 떨어져내린다. 이것을 그대로 둬두면 증발에 장애가 되기때문에 말끔히 긁어내깔리는것이다. 나는 작업반장아바이가 가져다준 《제염공》이라는 자그마한 소책자를 보면서 이 깔깔이란것이 바다물속에 포함되여있는 천연석고라는것을 알았다.”(46쪽)

 

동료 리순금이에게 알아보니 지금껏 깔깔이를 이용하려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단다. 아마 양이 얼마 안돼서 그럴 거란다. 리영택이 따져보니 반에서 연중 잡아들이는 바닷물에 포함묀 석고를 다 얻어낸다면 수백 톤은 잘 될 터이고, 현재 천일염생산공정에서 작업판염판에 앉는 깔깔이라도 말끔히 거두면 1년에 서너 톤은 문제없다. 그러면 소금을 생산하는 한편 부산물까지 모조리 이용하게 되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게다가 염전 진료소에 가서 물어보니 석고가 넉넉치 못하여 진료소에서 부목을 대고 석고땜을 하여 치료할 수 있는 환자로 군병원으로 후송하는 판이고, 전국 적으로는 보건부문에서 쓰는 석고를 외국에서 수입하기에 푼푼히(넉넉히라는 뜻) 쓰지 못한단다. 하여 리영택은 깔깔이로 석고를 생산하자고 제의하고, 작업반장 강우천 아바이의 찬성을 받으나 지배인 한무용에게 거절당한다. 염전에서 고작 몇 달 일한 청년이 엉뚱한 발기를 한다고 대수롭지 않게 여길 뿐 아니라 리영택이 직접 석고를 만들어 가져다 보여도 “산토끼 잡으려다가 집토끼 놓친다는 말이 있소. 제염공이 소금생산최성기에 한눈을 팔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단말이요.”(54쪽) “염판에 쇠녹처럼 눌어붙은 깔깔이를 긁어모아서 생산지표로 물릴것 같소? 품값도 안된단말이요. 다 타산해본 일이요.”(55쪽)라고 부결한다.
크게 실망했던 리영택은 리순금과 강우천의 격려를 받아 자체로 문제를 풀려 애쓴다. 김일성 수상의 노작들을 연구발췌하고 대학용 《공업경영학》을 열심히 읽으면서 한무용 지배인이 깔깔이활용을 달가와하지 않는 이유를 드디어 해명한다.

 

“그가 원가타산이요 뭐요 하지만 실은 소금생산지표 이외의 다른 제품생산은 원하지 않고있었던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새로운 계획지표는 시끄러운 부담으로만 되고있는게 분명했다. 소금생산계획을 다달이 넘쳐 수행하여 칭찬을 받고 있는데 그에게 무엇이 더 요구되였겠는가.”(58쪽) 

 

강우천은 그뿐이 아니라 한무용이 아주 교만해져서 소금생산에 대해서는 자기이상 아는 사람이 없다고 여기기에 아랫사람들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분석한다. 리순금은 깔깔이 긁어내기가 품값도 안될 리 없다면서 직장 민청원(민주청년동맹원의 준말. 민주청년동맹은 지금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임)들의 힘으로 긁어모으겠다고, 소금생산에 털끝만치도 지장을 주지 않겠다고 제의한다. 그 말대로 민청원들은 사날 사이에 직장적으로 20여 톤의 깔깔이를 거두어 소금창고 옆에 쌓아놓는다. 리영택은 휴일에 깔깔이 한 가마니를 소금운반차에 싣고 군소재지로 올라가 군뼁기(페인트)공장 지배인실에 찾아간다. 《공업경영학》을 보고 소화한 지식을 동원하여 중년의 여지배인을 설득하는 대목은 1950년대 말의 조선사회경제구조를 알게 하므로 여기에 그대로 따온다.

 

“《이 공장에선 원료가 떨어져 생산을 중지하게 됐다죠?》
《동문 누굽니까? 무슨 일로 찾아왔어요?》
그제서야 나는 제 용무에만 골똘하던 나머지 초보적인 례의도 지키지 않고 남의 공장 지배인실에 뛰여들어 동에 닿지 않게 말을 건늬고있다는걸 알아차렸다. 나는 녀지배인이 권하는 의자에 앉아 더운 물을 마시며 찾아온 용건을 터놓았다.
《… 지방산업공장들에서는 원료가 떨어지면 임의의 지방원료들을 가지고 제품을 생산하여 액상계획을 수행할수 있는 경제적공간이 있다지요?》
《그래요.》
《옳긴 옳군요. 그럼 내가 한달동안에 3만원을 벌수 있는 원료를 보장해줄테니 그렇게 해보겠습니까?》
《3만원이요?》
녀지배인은 놀람에 차서 부르짖듯이 반문했다. 그것도 그럴것이 그 금액은 뼁기공장 년간총생산액의 절반이나 되는 액수였던것이다.
나는 밖으로 나가 문옆에 내려놓았던 깔깔이를 지배인실에 들여다놓고 그에 대해서 설명을 했다. 그런데 녀지배인은 나무껍질같은 깔깔이를 만져보더니 미심쩍은 눈초리로 나를 건너다보는것이였다.
《제기랄, 내 말을 믿지 못하겠으면 실험실루 건너갑시다. 간단한 실험을 할수 있는데가 있겠지요?》
《있구말구요.》
녀지배인은 나를 이 공장 실험실로 안내해주었다. 나는 녀지배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깔깔이를 농축통에 넣고 곤로스위치를 넣었다. 깔깔이는 곧 눈같이 흰 석고로 변했다. 그것을 물로 반죽하여놓았다가 굳어진 다음 실험실바닥에 메따쳐보았다. 자, 이래도 내 말을 믿지 못하겠느냐고.
녀지배인은 대번에 나에 대한 태도를 달리했다. 그는 나를 자기 공장의 구원자처럼 반겨모시면서 묻는것이였다.
《그래 그 직장에 이런 깔깔이가 몇톤이나 있다구요?》
《스무튼은 될겁니다.》
《제염소에서 쓰겠다구 하지는 않을까요? 제 쓰지도 않으면서 남한테 주지도 않는 그런 사람이 있지요.》
녀지배인은 뜻밖의 횡재를 놓치고싶어하지 않았다. 나는 그와 마주앉아 우리가 거두어놓은 깔깔이를 몽땅 고급석고로 만들 방도를 의논했다. 물론 깔깔이가 나오는 우리 제염소에서 생필작업반을 꾸리고 석고를 생산하도록 했다면 더없이 좋았을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할수 없는 조건에서 이렇게 해서라도 버림받고 있는 깔깔이를 나라의 재부로 전환시키지 않을수 없게 되였던것이다.
이렇게 되여 군뼁기공장에서는 우리 직장에서 소금내는 짬짬이 긁어모은 깔깔이로 고급석고 이십여톤을 생산하여 보름동안에 상반년액상계획을 넘쳐수행하게 됐다.
염전으로는 소금운반차들이 무시로 드나들었으므로 뼁기공장 화물차가 나타나 얼핏 보매 감탕같은 깔깔이른 싣고가는데 대해서 누구도 관심을 돌리지 않았다. 구태여 이에 대하여 한무용지배인에게 알리려고 하지도 않았다.
우리에게는 제 속심이 있었다. 계획적으로 운영되는 기업소이니만큼 여러말 할것없이 다음해 인민경제계획지표를 토론할 때 강한 투쟁을 벌려 깔깔이를 국가계획에 포함시킬 작정이였던것이다.
우리는 그 투쟁에서 목적을 달성하리란걸 의심치 않았다. 우리에게는 그 무엇으로써도 부인할수 없는 위력한 증거, 한개 직장에서만도 소금생산에 아무런 지장도 주지 않으면서 이십여톤의 깔깔이를 거두어보내서 국가에 3만여원의 리익을 준 엄연한 사실이 있었던것이다.
그런데 이 일은 우리가 예견했던것과는 전연 다른 정황에서 해결을 보게 되였다.“(60~ 63쪽)

 

9월 말에 강우천 작업반이 제염소의 첫 천리마작업반으로 되어 상을 받은 이튿날 저녁, 제염소 당원들이 문화회관 2층 소회의실에 모이고 군당위원장이 회의에 참석한다. 책상 위에는 군벵기공장에서 생산한 석고가루와 석고조각, 고급액틀, 분필들이 놓여있다. 군당위눤장은 강우천작업반이 깔깔이를 모아서 뼁기공장에 보낸 사실을 이야기하고, 자기가 공장에 가보니 설비란 것도 4각형 큰 가마하고 세척장 뿐이던데 그저 깔깔이를 세척하여 가마에 넣고 탄불을 때어 200도로 끓이면 훌륭한 석고로 되더라고, 그런데 왜 남동제염소에서 만들지 못하고 30여 리 밖의 뼁기공장에서 만들었느냐고 질문한다. 군당위원장과 당원들이 한무용의 잘못을 날카롭게 지적했으나 한무용은 그후에도 사업작풍을 고치지 못하여 기술과의 기사가 만든 새로운 기계를 거부한다. 결국 다른 큰 염전의 부지배인으로 동급조동하는데, 그 자신은 독립기업소책임자의 직책에서 물러나는 걸 아쉽게 여기는 모양이다. 강우천은 한무용이 일제 때는 자기와 같이 염부군노릇을 하던 사람인데 간부로 돼서 너무 변했다면서, 리영택에게 이후에 지배인이 되면 그렇게 행동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리영택은 엉뚱한 소리로 간주하면서 절대 그럴리 없다고 장담하지만 강우천은 너무 큰 소리를 치지 말라고 신중하게 얘기한다.

 

그런데 10여 년이 지나 작업반장, 직장장을 역임하고 통신수업으로 화학공대를 졸업하여 기사자격을 받은 리영택이 과연 지배인으로 임명된다. 이즈음 남동제염소에는 수도물을 끌어와 살기가 훨씬 좋아졌고 화학분공장이 생겨났으며 그 분공장 뒤에는 생활필수품작업반이 있어 석고, 서슬을 비롯한 많은 제품들을 생산한다. 리영택의 아내 리순금이 작업반장인데 깔깔이를 시멘트생산에 쓰는 군건재공장은 그런데 쓰기는 아깝다면서 나무라면서 2톤만 주고, 군뼁기공장은 신용있는 오랜 고객이라면서 5톤을 더 드리겠다고 통화하는 등 사업가의 풍모를 보인다. 생필작업반은 또 군내 학교들에 깔깔이를 실험용으로 보내주고 학생들 자체로 석고를 만들어 조각품도 만들고 분필도 만들게 하는데 소문이 퍼져 인접군 학교들에서도 요구한단다.

 

이러한 변화가 흐뭇한 리영택은 염전에 내려가 직접 일하면서 문제를 풀고 새로운 고안도 내놓으며 300여 정보 간석지를 둘러막아 예지증발지로 써서 1년 사이에 소금생산량을 2만여 톤이나 늘이는 등 일 잘하고 인정 많은 지배인으로 소문나지만 저도 모르게 자기가 제염을 제일 잘 안다고 자부하면서 독선적으로 일하여 큰 손실을 빚어낸다.

 

여러 해 동안 궁리해온 싸리발의 의한 짠물증발방법을 행정일군협의회에서 내놓아 뭇사람의 찬양을 듣는 바람에 강우천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행했는데 이론적으로는 가능했으나 실제 도입해보니 효과성이 없었던 것이다. 리영택이 그렸던 청사진을 보기로 하자.

 

“지금 우리는 양수기로 짠물을 퍼올려 염판도랑으로 빙빙 잡아두르는 이른바 순환식짠물돌리기라는것을 하여 증발을 촉진시키고있다. 나는 이 방법을 한계단 더 발전시키자고 한다.
매 작업반 짠물판들에 싸리발을 층층이 얹은 집들을 세우자, 그런 다음 순환식을 하여 얼떨떨해진 짠물을 싸리지붕우로 퍼올려 수천갈래의 싸리발을 타고 흘러내리게 하자 그러면 짠물은 안개처럼 흘날리면서 둥둥 날아오를것이다. 이렇게 되면 증발이 몇배로 촉진되는것은 더 말할것 업소 염판마다에 아름다운 무지개가 일어서게 될것이 아닌다.
내가 말을 마치자 몇사람이 《아 그것첨 기발한 생각이다.》, 《우리 지배인이 환상이 있다.고 하면서 찬동해나섰다. 더는 시간을 끌며 론의할 필요도 없을것 같닸다.》”(109쪽)

 

결국 참패로 끝나나 리영택은 “이것도 일을 새롭게 해보려다가 저지른 우연한 실수로 생각”(152쪽)하기에 1973년에 자기 지식과 생각과 어긋나는 주장을 내놓고 햇소금을 내는 날짜를 앞당기겠다고 나서는 청년노동자 윤진형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으면서 반대한다.
집계에 의하면 일제시대 남동염전이 생겨난 1922년에는 4월 10일 전에 소금을 내본 적이 없고 해방 부부터 햇소금생산이 앞당겨지기 시작했는데, 4월 1일, 3월 중순, 3월 1일로 변하여 10여 년 유지해왔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주객관조건들을 헤아리고 시험을 거쳤기에 더 앞당길 수 없다고 여긴다.

 

“소금을 내자면 그에 앞서 간기가 충만된 소금물을 만들어내야 하지 않는가.
소금이 맺혀 떨어지기 직전의 염도 높은 짠물을 겨울에는 증발량이 극히 적기때문에 이런 염도 높은 소금물은 만들어낼 재간이 없다.
그런데 정 억지로라도 겨울에 소금을 내자고 하면 지난해 마가을에 소금을 내다가 짠물웅뎅이에 몰아넣어두었던 묵은 소금물을 퍼내여 염판에 앉히는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
이렇게 앉힌 묵은 소금물을 닦아먹으면 소금을 몇바가지 낼수는 있을것이다.
그렇게 해서 낸 소금도 어쨌든 소금임에는 틀림없으니까 《햇소금을 냈소.》하고 공포는 할수 있을것이다.
그런데 그 묵은 소금물을 말짱 닦아먹은 다음에는 어떻게 하겠는가.
별수없이 소금생산을 걷어치우지 않을수 없다.
이렇게 묵은 소금물을 모조리 날려보내면 정작 햇소금을 낼수 있는 제철이 돼도 퍼앉힐 소금물이 없어 생산에 지장을 주게까지 된다.
그렇다면 이렇게 억지로 소금을 일찍 내는것이 무슨 의의가 있단말인가. 그리하여 3월 초하루는 햇소금생산에서 더는 넘어설수 없는 한계점처럼 되고있었던것이다.“(118~119쪽)

 

여기서 “바가지”란 집에서 쓰는 바가지가 아니라 밀물 때 저수지에 바닷물을 하나 가득 잡아넣으면 한 바가지라고 부르는 염전의 특수개념이다.
그런데 왜 햇소금생산앞당기기라는 제의가 나왔을까? 제염소문화회관 2층소회의실에서 1973년의 연간소금생산계획을 성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행정일군협의회가 열렸는데 작업반장 이상 일군들이 모두 참가했고 또 소금공업총국에서 남동제염소를 담당한 노동처장이 참가했다. 바로 이 노동처장이 리영택과 작업반장들의 햇소금생산계획을 들은 다음 앞쪽(남쪽)염전들의 기세가 대단하다고 한 가지 일을 해도 뭔가 전해보다 새롭게 해보려 노력한다면서 남동염전이 제자리걸음을 해서는 되겠는가고 햇소금생산을 좀 더 대담하게 앞당겨볼 동무가 있으면 말해보라고 하여, 대리반장으로 일하는 2년차 새내기 윤진형이 일어났고 1월 25일에 생산해보겠다는 그의 주장을 리영택은 황당한 소리로 받아들인다.

 

사실 식료화학공장에서 액체향료를 결정체로 만드는 실험을 하다가 비싼 물자들을 낭비한 탓으로 지배인인 어머니에 의해 염전으로 자리를 옮겨 단련하게 된 윤진형은 소금생산에 대해 아직도 모르는 것이 아는 것보다 훨씬 많다. 하여 수두룩한 허점을 드러내는데 1950년대 고지전에서 희생된 중기분대장이며 중대세포위원장의 아들로서 강우천에게 찾아가 말했듯이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다. “영명하신 지도자”라고 불리는 청년 김정일이 김일성 주석의 뜻을 받들어가는 “이 성스러운 때에 혁명의 피줄을 이어받은 새세대로서 2월의 명절을 빈손으로 맞이할수 있습니까?!”(166쪽)

 

리영택은 강우천에게서 그 말을 전해듣고 큰 충격을 받는다. 소설에서 한 번도 잘못하는 일이 없는 강우천은 해방 전에 사람취급을 받지 못하면서 설음을 많이 받았는데 1947년에 앞쪽의 광량만제염소로 찾아간 김일성 장군이 무연한 소금밭을 바라보면서 《조국의 바다가에 산처럼 쌓인 소금을 보니 백두밀림에서 싸울 때 소금때문에 고생하던 일들이 생각납니다.….》(42쪽)라고 말하다가 손수 거둔 소금을 두 손으로 떠받들고 “이건 금입니다. 동무들은 금을 내는 참으로 귀중한 사람들입니다.”(같은 쪽)라고 말한 다음 제염공들이 제일 애타하는 집문제를 해결해주라고 지시하여 여러 염전들에 집들이 지어졌고 평생 처음 집을 쓰고 살게 되었으므로 70살이 가까워오도록 소금생산에 열중한다. 1984년에 출판된 소설은 이와 같이 2대 수령과 2세대 노동자들의 인연을 엮어 노동자들의 행동에 동기를 부여한다.

 

소설에서는 결국 강우천과 리영택이 일하던 모범작업반에서 2중얼구어짠물만들기법으로 겨울철 소금생산난제를 푼다. 현 작업반장 김옥숙 아주머니가 윤진형이 밤을 새우며 애쓰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실험한 끝에 염도높은 짠물을 가지고 밤에 얼구어 짠물을 뽑고 낮에는 햇볕으로 증발시키기를 두번세번 반복하니 소금물이 된 것이다. 결국 혹한을 이용하는 방법이 생겨났다. 김옥숙이 햇소금은 윤진형이 먼저 내게 해야 된다고 공로를 양보하여, 윤진형은 굉장히 감동되고, 남동제염소는 역사상 처음으로 2월 5일에 햇소금을 생산한다.

 

여러 해 후에 윤진형은 함흥화학공대를 통신으로 졸업하는데 졸업논문 《우리 나라 천일염전에서의 겨울철소금생산》은 실천적의의가 큰 매우 가치 있는 논문이라는 높은 평가를 받았고 제염소에서는 직장장으로 일한다. 또한 남동제염소가 김정일 지도자의 발기로 시작된 3대혁명붉은기쟁취운동에 적극 참가하여 칭호를 받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리영택이 총국으로 올라가게 된 것이다. 소설은 지도일꾼들이 대개가 어젯날의 노동자, 농민, 병사 출신들인데 자신의 이야기가 그들이 지난날을 잊지 않고 자기를 떠밀어준 사람들과 영원히 혼연일체가 되는데 좀이라도 이바지 하게 된다면 더없이 기쁘겠다는 말로 끝난다.

 

중편소설 《소금꽃》에서는 다른 제염소로 귀성이 얼핏 나온다. 김정은 위원장이 5월 하순에 현지지도한 그 귀성인데, 원래부터 그런지 아니면 근년에 변했는지 지금의 귀성제염소는 인민군이 운용하는 모양이다. 적어도 그 일부는 군대의 몫이 된 것 같다. 그리고 생산방법도 조선에서 근년에 큰 성과로 뽑는 지하초염수에 의한 생산방식이다.
보도에 의하면 인민군 생산자들은 “올해 3월초부터 현재까지 150여정보의 소금밭에서 7, 000여t의 소금을 생산하는 놀라운 기적을 창조하였다.”는데, 김정은 위원장은 지하초염수소금생산법의 여러 가지 이점을 꼽았다.

 

“바다물에서 소금을 얻어내자면 저류지, 예비증발지, 증발지, 결정지를 거쳐야 하지만 지하초염수는 바다물보다 농도가 몇배나 높은것으로 하여 증발지와 결정지만 거쳐도 소금을 생산할수 있으므로 지금 리용하고있는 소금밭면적의 절반정도만 소금생산에 리용하고 나머지면적에서는 바다가양식을 할수 있다.
지하초염수로 소금을 생산하면 종전에 비해 소금밭면적은 물론 생산주기를 대폭 줄일수 있고 생산원가를 낮출수 있을뿐만아니라 정보당 생산량을 몇배로 장성시킬수 있다. 우리의 귀중한 자원에 의거하여 큰 실리를 얻는 새로운 소금생산방법이야말로 소금생산의 집약화를 실현할수 있는 혁신적인 방법이다.
지하초염수로 생산한 소금은 바다물로 생산한 소금에 비하여 서슬이 적으므로 쓴맛이 거의 없고 맛이 좋으며 칼리움과 요드함유량이 많고 중금속함유량이 적으므로 사람들의 건강증진과 식료품생산, 화장품을 비롯한 생활필수품생산에서 리용가치가 매우 높다.…“

 

김정은 위원장은 소금더미에 다가가 소금맛을 보고는 맛이 참 좋다고, 부드럽고 쓴맛이 전혀 없다고 하시면서 이곳은 보물을 생산하는 곳이라고 웃었다 한다. 이는 김일성 장군이 금을 낸다고 한 말과 일맥상통하는데, 김정은 위원장은 뒤이어 규모 있게 쌓인 소금더미들을 보고 또 보면서 정말 흐뭇하다고, 소금더미들이 백금산으로 보인다고 기뻐했다 한다.
최고지도자의 말이 기사들과 문학작품들에 쓰이는 관례에 따라 얼마 전에 “소금산, 백금산을 쌓아간다”는 제목의 글자+사진보도가 나온 적 있다.

 

5월 하순 조선보도의 마지막에서는 김정은 위원장이 소금생산은 식량생산 못지않게 중요한 문제이며 마음먹고 달라붙어 투쟁한다면 능히 자급자족할 수 있다고, 소금생산부문에서는 소금을 더 많이 생산하기 위한 투쟁을 힘 있게 벌림으로써 인민경제 여러 부문에서 절실히 요구하는 소금을 원만히 보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다.

 

이 말 특히 “인민경제 여러 부문”부분 또한 중편소설 《소금꽃》에서 강우천의 인식과 맥락을 같이한다. 앞에서 소개했듯이 김일성 장군의 지시로 삶이 크게 변한 강우천은 “평생에 제 집 한간 쓰구 살아보디 못한 이녁이 하루아침에 왜놈감독이 쓰구살던 관사보다두 더 얼싸한 새집을 받게 되구 소금이 나디 않는 겨울철에두 다달이 생활비를 받으면서 뜨뜻한 제집에서 자고일며 소금밭으루 일을 나가게 됐”(42~43쪽)다면서 제염공으로서 보답하는 길이란 소금내는 것밖에 더 있겠는가고 리영택에게 말한다.

 

“그래서 나라에 더 많은 소금을 보내주자구 애를 쓰는데 화학공장들이 와짝 일어서면서 소금을 엄청나게 먹어대는통에 이젠 다른 나라에서까지 소금을 가져다가 쓰지 않으면 안되게 됐다는구만. 삼면에 바다를 끼구 사는 나라에서 타국의 소금을 사다 쓴다는게 말이 되나?”(43쪽)

 

소금과 관련하여 필자가 제일 놀랐던 일이 있다. 언젠가 중국의 유명한 염전에 가보았는데, 현지 사람들이 타지방에서 소금을 사다 먹는다지 않는가! 알고보니 그 곳에서 나는 소금은 무슨 성분이 많아서(마그네슘이던가?) 식용으로는 적합하지 않아 공업용소금만 생산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공업용소금은 물론 공장에 들어가므로 상표가 따로 없는 법이다. 헌데 식용소금도 중국에서 지금까지는 명품이 나오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죽염이니 무슨 염이니 특정된 명칭이 붙고 상표도 붙은 소금들이 제법 많이 나와 중국에서도 죽염치약이 팔리는 등 영향력을 행사한다. 조선에서는 질이 괜찮은데 마케팅의식이 부족한 제품들이 나오는 경우가 적잖은데, 남북교류가 활성화되어 남쪽 경제인들의 상표의식, 마케팅의식이 북쪽 우질제품들과 결합되어 윈윈결과를 낳기를 바란다. 정성이 지극하면 소금도 꽃이 피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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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하다.. 궁금 16/07/24 [09:25] 수정 삭제
  한국의 시장경제 체제 국가가 북한식 경제 구조를 가진 쪽으로 통일이 된다면
지금의 한국 경제보다 더 큰 경제국가가 가능 할가? 더 좋아질까, 나빠질까?
이러한 경제를 과연 운영 가능 할까?
더 풍요로운 자유를 누릴수 있을까? 여행의 자유도 있고, 정권의 잘못에
성토 가능한 집회도 가능 하고, 방송도 사건 사고도 방송 가능 할가?
자동차사고,화재사고, 강도 살인사건사고, 폭력사고등 이런것도
방송 뉴스가능 할까? 최고지도자를 보조 하는 보좌진에 대한 사퇴요구도 가능 할까? 최고지도자를 비판 하는 일도 한국 처럼 가능 할까?
원조를 받는 국가가 될까? 원조를 주는 국가가 될까?
북한이 한국에 아직도 3조원 이라는 차관도 못주는 입장이 과연 규모가
큰 국가를 운영 가능할지
정말 궁금하다
사람 사는 세상 크개 다를것없지 오직 정치에 이용해먹을려고 헐뜻는것뿐 이수다 16/07/24 [14:02] 수정 삭제
  궁금하다는분 한데 한가지 말해줄것이있는데 남한의 선전을 들어보면 북은 인간이 못사는 고장입니다 반대로 북조선의 선전을 들어보면 남한은 인간이 못사는 아주 추악한 독제 집단이 정권을 잡고있어 생활고애 허득이다 세계 자살 1위 국가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모든것은 자신이 정권을 잡을려고 상대방을꼬집고 국민을에게 상대방이 자기보다 못하다고 선전하는것뿐 지금은 세계화 시대입니다. 정치에 이용할려는 선전은 믿을것이 안됩니다. 오직 내눈으로나 아니면 인트넷으로 세계를 보는눈을 가지고 사고방식을 가져야만 올바른 판단을 할수있습니다. 남이건 북이건 미이건 중이건 어디나 사람사는 세상입니다 . 나머지는 혼자서 생각하기 바람.
올해는 미지수이나 2017년과 2020년 련석회의 통일대회합은 빛나리 분석 16/07/24 [16:28] 수정 삭제
  류길재 "보수세력 북한관 반성해야..입장 변화 필요"

숭실대 통일학술대회서 20대 국회 '통일 특별위원회' 설치 두고 토론

2016/05/30 18:52 | 연합뉴스

류길재 "통일편익론은 제국주의적 발상이다" 2016.07.08 20:04:38 통일뉴스

통일부 장관을 지낸 류길재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의 발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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