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문화가꿔가기011] “흥남철수”, 뻥튀기가 오래 갈 수 있을까?
중국시민
기사입력: 2017/07/30 [21:05]  최종편집: ⓒ 자주시보

 

덩케르크에 대한 해석들 

 

군인들이나 군사애호자들이나 알던 명사 “덩케르크(Dunkerque)”가 대중이 잘 아는 단어로 떠오른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동명영화 덕분이다. 중국에서는 9월 1일 개봉 예정으로서 아직 큰 화제들을 만들지는 못했고 상영되더라도 특별히 유명해질 가능성이 적은데, 한국에서는 개봉 전부터 예매전쟁을 일으키더니 여러 날 흥행 1위를 차지했다 한다. 좀 늦게 개봉하여 폭발적인 인기를 끄는 한국영화 《군함도》에 밀린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흥행명단에 오르면서 기사들도 만들어낸다. 

 

필자는 워낙 영화와 군사를 좋아하다나니 《덩케르크》관련 글들을 부딪치는 족족 읽어보았는데 괜찮은 글들도 있었지만 황당한 오류를 포함한 글들도 있었고 불충분함으로 유감을 남긴 글들도 있었다.

 

1940년 5월 프랑스의 항구도시 덩케르크에 몰렸던 영국군과 프랑스군 40만명 가운데서 다수가 구출되었음은 “덩케르크 철수”의 사실인데, 그에 대한 해석들에 웃기는 내용들이 많았다. 

예컨대 어느 기자는 이렇게 썼다. 

 

“덩케르크의 기적은 여러 가지 우연이 겹치며 성공했다. 당시 독일의 최대 전선은 동쪽, 즉 소련과의 전쟁이었다. 거기에 전력을 투입하고 싶은 독일 측의 고려는 추격의 속도를 떨어트리는 빈틈이 됐다. 여기에 더해 덩케르크에 자주 생기는 안개도 도움이 됐다. 이런 우연은 최선의 노력과 겹쳤고 포위된 40만명의 연합군 중 약 33만명의 병사가 구출됐다.” 

 

독일이 소련을 기습하여 벌어진 전쟁은 덩케르크 철수 1년 뒤인 1941년 6월 22일에 일어났고, 1941년 5월 당시에는 독일과 소련이 1939년에 체결한 호상불가침조약에 의해 사이가 괜찮은 상황이었다. 적어도 직접 충돌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당시 독일의 최대 전선은 동쪽, 즉 소련과의 전쟁이었다.”라고 설명하니 웃기지 않는가. 

 

다른 한 기자는 처칠이 지휘한 철수를 히틀러가 도와줬느냐는 질문을 던지고 설들을 열거한 다음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수수께끼라고 했다. 덩케르크로 밀고나가던 독일군이 영, 프 연합군의 2배 쫌 되었으므로 이길 게 확실했으나 진격이 중지되었다는 건 사실이다. 관건은 그 원인에 대한 해석이다. 그 기자가 몇 가지 해석들을 전한 건 좋은데 필자가 본 적 있는 설을 빠뜨린 건 좀 유감이었다. “전격전”을 만들어낸 독일군이 전차를 중심으로 하는 기갑부대의 화력과 기동력에 주로 힘입어 유럽을 휩쓸었더니, 1차 세계대전시기의 공군영웅이었던 독일공군 지휘자 괴링이 서유럽에서의 마지막 전역으로 될 것 같은 덩케르크 전투에서 공군의 힘으로 전투를 마무리하겠다고 히틀러에게 제의하여 그런 실험이 진행되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는 설이다. 

 

당시 상당수 나라들에서 공군이 독립적인 군종이 아니라 육군이나 해군에 부속되었던 점을 감안하면 독일의 공군주도실험은 상당히 전위적인 행위였다. 허나 전투기가 생겨나서 100년이 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순전히 공군만으로 이긴 전쟁이 없다. 1999년 나토의 유고슬라비아폭격이 3개월가량 이어졌으나 그것만으로 전승을 거두지는 못했고 절반의 굴복을 얻어냈을 따름이다. 걸핏하면 “북폭”이나 미사일에 의한 “참수작전”을 들먹이는 한국인들은 미국의 힘을 미신하거나 정밀유도미사일 따위가 있으니 전쟁양상이 달라지고 세상도 바뀌리라고 환상하는 모양인데, 꿈꾸는 것까지는 자유라만 개꿈으로 끝나기 십상이다. 

이상한 꿈들이 왜 생겨나느냐 살펴보면 전문가들이나 기자들이 사실과 맞지 않는 혹은 일부 사실만 부각한 결론들을 씹어서 먹여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느 한국기자는 이렇게 썼다. 

 

“실제 이 덩케르크 철수작전은 흥남철수작전과 함께 현대전에서 가장 성공한 양대 철수작전으로 불린다. 특히 적군이 육, 해, 공 3면에 걸쳐 다각적인 파상공격을 행하는 현대에 철수작전이 성공하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기 때문에 더욱 부각된 측면이 있다. 덩케르크 철수작전은 30만이 넘는 병력이 영국으로 탈출에 성공, 연합국 반격에 기반이 됐다. 역시 10만명 이상이 탈출에 성공한 흥남철수작전 역시 크리스마스의 기적으로 불리곤 한다.” 

 

덩케르크 철수에서 독일군 주로 공중에서 타격한 건 영화에도 반영되었지만 “적군이 육, 해, 공 3면에 걸쳐 다각적인 파상공격을 행”했다고 평하기는 무리이므로 이 대목은 부정확한 정보가 독자들을 오도한다. “역시 10만명 이상이 탈출에 성공한 흥남철수작전 역시 크리스마스의 기적으로 불리곤 한다.”는 말도 앞의 “육, 해, 공 3면에 걸쳐 다각적인 파상공격” 영향을 받게 되니까, 독자들이 흥남에서도 입체적인 공격이 벌어졌고 그런 파상공격을 막아내면서 기적적인 철수가 이뤄졌다는 그릇된 결론을 얻어내기 쉽다만 사실과는 얼마나 거리가 먼가. 흥남에서는 공중공격과 해상공격이 전혀 없었고 육상공격도 제한되었다는 게 역사사실이니까, 보총과 소량의 포를 가진 육군에 밀려 육군, 해병대, 해군, 공군들을 보유한 미군 주도의 유엔군이 간신히 철수했다는 건 그 어떤 기준으로 따지더라도 자랑거리는 못된다. 

 

 

“흥남철수”과 구닥다리 배의 재조명 

 

헌데 흥남철수로 남하한 사람들이 뒷날 낳은 아기가 60여 년 뒤 한국 대통령으로 되어 금년 6월 말 미국에 가서 흥남철수에 앞선 “장진호 전투”를 들먹이자, 흥남철수에 쓰였던 미국 상선 “레인 빅토리”호의 한국 구입이 급격히 인기뉴스로 떠올랐다. 

 


흥남항에서 7, 000여명을 실어날랐다는 “레인 빅토리”호는 현재 미국 로스앤젤레스 인근의 항구에 정박해 역사박물관으로 쓰이는데 미국 정부의 지원이 끊겨 운영에 어려움을 겪는단다. 역시 흥남철수 작전에 투입됐던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1993년에 고철용으로 중국에 판매돼 사라졌다니까, “레인 빅토리호”도 폐기되면 어쩌냐고 걱정하는 한국인들이 있는 모양이다. 1993년 당시에는 이남출신 김영삼이 대통령이어서인지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구입이 별 화제를 만들지 않은 것 같으나, 2017년에는 “레인 빅토리”호를 타고 남하했다는 “실향민”들의 아들 문재인이 대통령이니 그야말로 마지막 절호의 기회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겠다. 50억 원쯤 들여서 “레인 빅토리”호를 사들이면 그저 먹고 살만한 정도가 아니라 잘 사는 나라로 성장했다는 한국이 미국에 보답하는 셈이 된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으리라. 그리고 기념공원을 만들어 “흥남철수의 기적과 평화”를 되새긴다거나 “한미동맹”의 상징으로서 청소년들을 교육시키겠다는 건 이미 공개적으로 나온 주장들이다. 

 

게다가 7월에는 《덩케르크》가 인기를 끌었으니 이러다가는 《흥남철수작전》이나 《레인 빅토리호》라는 제목의 한국영화가 만들어질지도 모른다. 박근혜 정부 시기 집권자의 구미에 맞는 《국제시장》, 《인천상륙작전》 따위 영화가 생겨나서 제법 흥행하였는데, 《흥남철수작전》이나 《레인 빅토리호》가 나온다면 “국뽕영화”라는 말을 듣는 그런 영화들과는 시각이 조금 다르겠지만 역시 정부나 대통령의 입맛이나 인기에 치중하지 않겠는가. 

 

조선(북한)은 여러 매체들을 내세워 “레인 빅토리”호 구입추진행동을 비난했다. 아니, “했다”는 과거형이 아니라 “한다”는 진행형과 “하리라”는 미래형이 보다 정확한 표현이다. “레인 빅토리”호를 “미제가 원자탄공갈로 북주민들을 남쪽으로 끌고가 수많은 흩어진 가족을 만들어낸 죄악의 배를, 민족에게 쓰라린 상처와 고통을 남긴 저주로운 배”라고 규정하면서 한국의 구입추진행동이 이산가족과 친척들의 뼈아픈 상처에 칼질을 해대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6. 25전쟁기간에 생겨난 민간인들의 대규모이동은 두고두고 쟁론을 불러일으킨다. 한국의 논리대로는 북으로 올라간 사람들은 다 “납북”되었고 남으로 내려온 사람들은 자유민주주의세계를 찾아 “발로 투표”했다. 조선의 설명대로는 북으로 올라온 사람들은 “김일성 장군님의 품을 찾아”왔고 남으로 내려간 사람들은 “원자탄공갈에 속아” 넘어갔다. 

 

“흥남철수작전”을 기적으로 표현하는 사람들도 그 수자를 크게 뻥튀기하지는 못하는데, 10만명이나 23만명 설을 그대로 받아들이더라도 전쟁기간 남하한 사람들의 총수자와 비기면 차지하는 비율이 얼마 되지 않는다. 1950년 말에 남하한 사람들 가운데서 차지하는 비중도 크지 않다. 단 서부전선에서는 민간인 철수가 산발적으로 진행된데 비해 동부전선에서는 흥남이라는 항구에 집중되었으므로 한국에서 부각되었고 이제는 기적 정도가 아니라 승리 수준으로 부풀려질 조짐이 보인다. 역사사실을 알고 보면 참으로 우스운 변화이다. 

 

왜 “흥남철수”였느냐? 한국에는 흥남철수의 원인을 장진호전투와만 결부시키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육상 퇴로가 끊어졌기 때문이라고 제대로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정확히 말하면 12월 9일 인민군의 제2전선 부대가 원산을 해방 혹은 수복하였기에 유엔군의 육로를 통한 남하가 불가능해졌던 것이다. 때문에 육로로 움직인 서부나 중부의 남하나 이듬해 일어난 “1. 4후퇴”와 달리, 1950년 12월의 동부전선에서는 “유엔군”에게 흥남이라는 숨구멍이 하나 남았고 그나마 중국인민지원군과 조선인민군이 당시 공중, 해상으로 타격할 수 없었으므로 여러 날 철수활동을 진행할 수 있었다. “기적”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도 초라하다. 

 

 

북이 그린 “흥남철수” 

 

“흥남철수”가 한국에서 《굳세여라 금순아》를 비롯한 문학예술작품들을 파생시킨 것과 달리 조선에서는 별로 거들어지지 않는다. 필자가 지금까지 본 문학예술작품들 가운데서 1950년 말의 흥남을 비중 있게 다룬 건 2012년 6월 30일 “통일문화 만들어가며” 131편 “‘악인’은 악인이 아니었다”(링크를 걸어주십시오)에서 소개한 장편소설 《불새》(윤원삼 지음, 문학예술출판사 2011년 9월 출판발행, 도합 381쪽, 사진) 하나 뿐이다. 

 

 

 

흥남 일대에서 “치안대” 완장을 두르고 활동했던 실존인물 김덕근의 이웃부락에서 살았던 저자 윤원삼은 전쟁시기 “유엔군”의 퇴각을 직접 목격했던 체험자로서 흥남철수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다. 패주하는 유엔군 속에 섞여서 남하할 임무를 맡을 주인공 김석근이 동료 오인범과 함께 청포 비행장에서 흥남시로 들어가는 군자교 근방에서 미 제1해병사단 패잔병들을 기습하여 혼란에 빠뜨린 다음날 아침 흥남항에 도착했을 때의 장면이다. 

 

“쌀쌀한 겨울날의 해풍이 불어치는 부두에서는 해상퇴각에 광분한 미10군단 잔여부대와 어울려 도주하는 《치안대》놈들로 혼잡을 이루었다. 그들속에는 적들의 원자탄선전에 남행선박을 타려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당시 미제는 멸망의 총퇴각을 개시하면서 우리 인민들을 원자탄으로 위협공갈하였다. 미8군의 제14심리전대 대장 웰슨대좌와 그의 부하 죠지중좌는 북조선에 원자탄을 투하한다, 살겠으면 남으로 나가라, 진달래꽃이 필 때 다시 미군이 오는데 그때 귀향하여 《자유세계》에서 살라는 삐라와 류언비어작전을 벌렸다. 놈들의 악선전에 《치안대》놈들과 가족들, 미제에 환상을 가진 사람들은 물론 일부 무고한 백성들마저 원자탄공포증에 사로잡혀 월남의 길에 올랐다. 

 

원자탄바람에 떠난 얼마 안되는 피난민들 중에는 갓난애기를 업었거나 아이들의 손목을 잡은 녀인들이 있었다. 자식들을 살리려고 할수 없이 괴나리보짐을 이고 나섰는가 하면 지어 부림소마저 끌고 나온 독실한 농사군도 있었다. 부두에는 한척의 미군군함과 세척의 어선들이 정박해있었다. 월남자들만 오르는 작은 어선에는 벌써 사람들이 승선하였다. 전부 《치안대》완장을 두른 놈들이였다. 그 배에 얼마 안되는 무고한 피난민들이 오르려고 하였다.”(219~ 220쪽)

 

오인범은 슬며시 소를 끄는 농민에게 “원자탄선전”에 속지 말고 돌아가라고 권한다. 그 무렵 피난민들 속에 끼이어 남하를 말린 조선의 간부들과 군인들이 상당수였다는 건 이미 여러 방면의 자료에서 알려진 바이다. 또한 오인범이나 김석근처럼 남하하여 적진에 침투할 임무를 맡은 사람들도 적은 수자가 아니었을 것이다. 소설에서 김석근은 군함에 올랐다가 우연한 돌발사건 때문에 배에서 뛰어내려 오인범과 갈라지는데, 미군 지프차를 타고 원산을 에돌아 갖은 고생 끝에 서울에 이른다. 그다음 근년에 한국에서도 제법 유명해진 영도에 가서 훈련을 받았고 재회한 오인범과 함께 북파되어 활동한다. 

 

 

1950년 말 북에서 퍼진 소문들과 결과 

 

여러 가지 자료들을 종합해 보면 당시 북조선 일대에서 퍼뜨려진 소문은 대체로 몇 가지였다. 

 

미군이 떠난 다음 원자탄을 투하한다. 

진달래꽃이 필 무렵에 미군 혹은 이 박사(이승만)가 되돌아온다. 

북의 인민군대는 모조리 죽었고 중국군만 나왔다. 

중국의 되놈 군대가 오면 여자들을 다 겁탈하고 재물을 다 빼앗는다. 

 

1966년 런던월드컵에서 조선축구팀의 8강진출에 커다란 기여를 한 인민체육인 박두익이 1050년 당시 10살 미만의 어린이로서 남을 따라 남으로 가다가 우연하게 대동강가에서 머무른 사례는 당시의 혼란함과 남하 무리의 복잡성을 말해준다. 누군가 이승만 치하를 “자유민주세계”라고 평한다면 길 가던 강아지마저 웃다 자빠질 터인데, 그 많은 사람들이 이남의 그 무슨 “자유세계”를 알면 얼마나 알고 동경하면 얼마나 동경해서 남하했겠는가? 얼마 지나지 않아 고향에 돌아가리라고 믿었던 천진한 사람들이 다수였겠지. 

 

좀 웃기는 게 원자탄 투하설을 그대로 믿지 않고 이듬해 미군과 이승만이 되돌아온다는 선전을 믿으면서 잠복했던 골수 반공주의자들도 꽤나 되었다는 점이다. 1951년 북반부 각지에서 숱해 잡혔는데 굴에 숨어살던 어떤 자들은 이박사가 돌아올 때까지 이발하지 않는다고 머리카락과 수염이 길게 자란 상태에서 체포되었다. 

 

 

미국인이 묘사한 “흥남철수"

 

미국인들이 쓴 6.25전쟁사들에서는 이른바 “흥남철수”가 간단히 언급되는 정도다. 참패 끝의 부득이한 철수로서 일껏 북으로 실어갔던 수많은 물자들을 파괴하지 않을 수 없었던 불쾌한 기억들도 끼이고 남으로 실어간 사람들에 대해서도 한국의 일부 사람들처럼 자유세계로의 이동으로 묘사하지 않은 게 다수다. 

예를 들어 죠세프 고든은 《KOREA The Untold Story of the War》(1982)에서 흥남철수를 이렇게 그렸다. 

 

“군대를 운수함에 실어 400마일 밖의 부산으로 실어가는 작업은 순조롭게 진척되어, 모든 해병대원들은 12월 14일에 선적이 끝났다. 남은 육군 부대들은 마지막 며칠 동안 방어권을 지켰다. 그 다음 스미스(해병대 사단장)는 가급적으로 많은 조선 평민들을 해변가 진지에서 실어내주겠다고 승낙했다. 그들 가운데는 소유물을 메고 진 영감과 노파들이 있나 하면 흰띠로 동여맨 아기를 업은 어머니도 있었고 호기심을 가진 젊은이도 있었다. 부모가 없는 어떤 사람들은 ‘큰 배를 타고’ 남방에 가려고 급급해하였다. 벌떼처럼 몰려들어 배에 오르는 과정에서 4, 000명이 탱크상륙함 1척에 올라가는 바람에 상륙함에 진펄에 빠져 꼼짝할 수 없었다. 한국 병사들이 자동총으로 허공에 사격하면서 모든 사람들을 배에서 쫓아낸 다음에야 선장이 배를 물 깊은 구역으로 몰아갔고 조선평민들은 다시 배에 올랐다. 다른 1척의 대형상선은 12, 000명 평민들을 실어갔다. 서울지역에서 한국군의 사형집행대는 700여명의 북한협조혐의자들을 죽였다. 서방 신부가 많은 처결이 제판을 거치지 않았다고 항의했으나, 군사지휘관은 총살이 교수형보다 ‘더 편리하다’고, 제지할 타산이 없다고 대답했다. 

 

그 다음에는 부산으로 날라갈 수 없는 보급품들을 체계적으로 파괴하기 시작했다. 육군 제175전투공병대대는 조선철도노동자의 도움을 받아 기관차와 차량으로 2, 100야드 길이의 철도교를 꽉 채웠다. 케롤 그루스 중위는 이렇게 말했다. ‘조선인들은 그 차량들을 파괴하게 된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달가워하지 않았고 재촉해야만 일을 했다. 반대로 공병들은 일이 무척 재미있음을 발견했고 무거운 짐을 던 것 같았다. 다리구멍 하나가 폭발되니 차량들과 기관차가 모두 끊어진 자리에 밀려들면서 골짜기 바닥으로 떨어졌다. 공병들이 일부 차량에 휘발유통을 잔뜩 밀어넣어 철저한 파괴를 기한다음 목제 교각에 불을 다니 다리가 깡그리 타버렸다. “불길이 굉장히 세차서 기관차 하나가 새빨갛게 타올라 기적소리가 길게 울렸다.’ 그루스의 말이다. 

 

크리스마스전야에 방어권 내의 부대들이 모두 철퇴했다. 미군은 중국인들에게 그 어떤 물건도 남기려 하지 않았다. 2척의 순양함, 7척의 구축함과 3척의 로켓발사함이 기슭에서 수백 야드 떨어진 곳에서 일직선으로 줄지어 포기된 도시에 맹렬한 포화를 들씌웠다. 근 34, 000발의 포탄과 12, 800기 로켓탄이 하늘땅을 뒤덮었으니 그 맹렬한 정도는 심지어 인천상륙전의 포화를 초월했다. 마지막 폭발음은 400톤 응고글리세린폭약과 500매 천 파운드 폭탄을 터뜨려서 터졌다. ‘흥남의 해변구역 전체가 화산폭발로 하늘로 날아오른 것 같았다. 화염, 진한 연기와 부서진 돌들이 공중에서 거대한 검은 버섯구름을 이루어 무너진 벽들을 뒤덮었다.’ 해병대의 한 목격자가 한 말이다.” (중국 해방군출판사가 1990년 6월에 발행한 중국어 역본 《朝鲜战争——未透露的内情》467~ 468쪽에 근거해 중역함) 

 

 

거짓으로 쌓은 빌딩은 무너지기 마련 

 

1950년 12월에 미군이 주도하여 반도 북반부에서 퍼뜨린 소문들은 하나도 현실로 되지 않았다. 원자탄은 떨어지지 않았고(한국에는 트루멘이 맥아더를 지지하여 원자탄을 던졌더라면 반도통일은 물론 만주까지 한국이 차지했으리라고 아쉬워하는 얼빠진 사람들이 있다만), 미군과 이 박사는 다시는 반도 북반부에 발을 들여놓지 못했으며, 인민군대는 정면전선과 제2전선에서 맹활약했고, 중국인민지원군은 규율을 제일 잘 지키는 좋은 군대라는 정평을 받았다. 중국인민지원군의 군기엄수는 반도 이남에서도 그들을 접촉했던 사람들은 거개 시인하는 바이다. 

 

이상 여러 가지 자료들을 종합하여 두루 살펴보았다시피, 이른바 “흥남철수작전”은 거짓말로 범벅되면서 시작했고 참혹한 파괴로 끝났다. 누군가 “흥남철수”를 소재로 영화나 드라마를 만든다면 한국군의 공포사격, 미군의 대규모 파괴 등을 넣어야 객관성이 충분히 보장된다. 

 

거짓말로 시작된 “흥남철수”가 “기적”으로 둔갑하고 “레인 빅토리”호가 평화와 “한미동맹”의 상징으로 상승한다면 새로운 거짓말로 포장되는 꼴이다. 그리고 “레인 빅토리”호나 “흥남철수”를 떠들면 떠들수록 이른바 “체제승리”가 부풀려지면서 조선의 반감만 자아내기 마련이다. 한국정부가 입으로는 부인하는 “흡수통일”을 실질적으로 하련다고 조선이 여기지 않겠는가. 

 

기초가 부실하면 빌딩이 한동안 아무리 높고 화려하게 쌓아지더라도 무너지는 법이다. 때문에 “흥남철수”나 “레인 빅토리”호의 기적 또는 신화는 장기간 유지할 수 없다. 또한 현실적으로도 분열만 조장하기에 통일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혹시 “레인 빅토리”호 기념공원이 만들어지고 “흥남철수”영화가 제작되더라도 《국제시장》이나 《인천상륙작전》보다 더 빨리 망신하리라고 필자는 감히 예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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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자민통 17/07/30 [22:29] 수정 삭제
  박정희 우표 유감을 제외하고 항상 읽고나면 즐겁습니다.
(닉네임 나그네로 모질게 반대글을 올렸네요)

남한에 살다보니 모르는 정보가 수두룩합니다.
특히, 현대사는 왜곡된 역사만 배울 수 밖에 없다보니 진실을 가늠할 수 없을 지경입니다.
한때(1988년부터 약 5년 정도) 북한의 서적이 해금된 적이 있었지요.
도서관에서도 읽을 수 있었는데, 지금은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시기를 바랍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또 배우고 있습니다 촛불하나 17/07/31 [00:35] 수정 삭제
  70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 또 다시 새롭게 알아가고 있습니다. 진실을 알면 알수록 마음은 더욱 아파만가네요. 오르면 머리를 숙여야하건만 모르면서 고집만 더 강해지는 사람들을 보면서 애달픈 한숨만 더 나오곤 합니다. 무식하면 곡괭이 들고 일에나 열중했으면 하련만 목에 핏대 세우면서 대드는 인간들을 보면 정말 답이 안나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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