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문화 가꿔가기12] 북에서 광복 후 바뀐 지명들 알아보기
중국시민
기사입력: 2017/08/13 [02:13]  최종편집: ⓒ 자주시보

 

조선(북한)이 7월 28일 깊은 밤에 대륙간탄도로케트(ICBM, 대륙간탄도미사일) “화성-14”형 제2차 발사시험을 진행한 후, 한국군은 발사지점을 자강도 무평리라고 찍었는데, 일부 언론들은 그 지명 뒤에 괄호를 치고 “구 평안북도 강계시 부근”이라고 설명했다. 조선이 개정한 행정구역명칭을 시인하지 않겠다는 동기 때문인 것 같다. 한국 일부 세력의 기준대로는 “국가관이 투철하다”고 할까? 

 

광복 이래 70여 년 세월이 흐르면서 남반부와 북반부에서 행정구역들이 변화했고 지명들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으니 이 역시 이질성의 하나로 꼽을 수 있겠다. 이질성 극복의 차원에서 이번 글에서는 반도 북반부에서 광복 후 지명들이 왜 어떻게 바뀌었고 어떤 문제들을 만들어냈느냐를 살펴보고자 한다. 

 

 

지명개변의 제1원인- 행정구역 변화 

 

제일 큰 변화는 물론 도급 행정구역들의 신설이고 이 변화는 한국에서도 잘 알려진 바로서 책자들과 인터넷에서 자료들을 찾아볼 수 있다. 

 

황해도가 황해남도와 황해북도로 갈라지고, 평안북도에서 강계군, 자성군, 후창군, 위원군, 초산군, 희천군과 함경남도 장진군 동문면이 떨어져서 자강도가 나왔으며, 함경남도에서 량강도(양강도)가 갈라져 나온 등은 조선이 주동적으로 개편한 것이고, 강원도가 남북으로 갈라진 건 광복 후의 분단과 전쟁의 결과로서 조선은 한국의 강원도를 가리킬 때 “남강원도” 혹은 “강원도(남)”이라고 표기한다. 

 

도급 행정구역들 가운데서 새로 이름을 지어야 할 게 2개였는데 하나는 옛법에 따랐고 하나는 새법을 만들었다. 즉 자강도는 도의 이름을 도안의 중요한 두개 고을이나 도시의 이름가운데서 한자씩 떼여서 부르던 전통에 따라 자성과 강계의 이름자를 따서 자강도라고 불렀고, 량강도는 도경내에 압록강과 두만강이 있다 하여 이름을 만든 것이다. 

 

행정구역에서 그 다음으로 큰 변화는 면의 취소이다. 이에 대해 필자는 2010년 1월 24일에 발표한 “통일문화 만들어가며” 7편 “200분의 1에서 전체를 보다”(www.jajusibo.com/jajuminbo_read.html?uid=5702)에서 이렇게 썼다. 

 

“조선에서는 군을 가리킬 때 《나라의 200분의 1》이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1952년 12월 22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가 정령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북반부지역에 있어서의 행정체계중 면을 페지함에 관하여》를 발포하여 종래의 군을 세분하고 리를 통합했다. 이듬해 초까지 행정체계개편이 진행된 결과 군은 종래의 91개로부터 168개로 늘어나고 리는 1만 120개로부터 3, 659개로 줄어들었다. 후에 이러저러한 변화를 거치면서 군에 해당되는 행정구역이 200개 정도로 굳어진 것이다.”

 

전시에 행정체계를 바꾸는 큰 결단을 내린 원인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들이 나오고 있는데, 필자 개인적으로는 적들을 혼란시키고 간첩들을 적발하려는 목적도 있었으리라 추정한다. 행정체계가 대규모로 변하면 적수들의 공격부담이 늘어나기 마련이고, 누군가 옛지명을 들먹이면 대번에 의심대상으로 부상하지 않겠는가. 

 

당시 조절상황을 살펴보면 이웃군들에 비해 면적이 지나치게 크거나 인구가 너무 많은 군을 쪼개는 게 중요한 변화였다. 새 군의 이름들은 크게 3가지 방법으로 지었다. 

하나는 면적이 줄어들더라도 원래 이름은 유지하는 것, 옛 황해도의 봉산군이 황해북도의 봉산군으로 변한 게 이에 해당된다. 

하나는 새로 생겨난 군에서 군소재지 즉 읍으로 되는 원래 이의 이름을 따는 것. 황해도 봉산군 은파리가 황해북도 은파군으로 승격한 게 이에 해당된다. 은파에 대해 조선자료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은파군 

 

《은빛같이 눈부신 물결》이라는 뜻이다. 

이고장에 있는 복덕소의 물결이 아름답기때문에 마을이름을 은파리라고 하였는데 군소재지가 이곳에 생기면서 은파군으로 이름을 달았다. ”

 

하나는 도 이름을 짓는 전통과 비슷하게 새로 생겨난 군급 행정구역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이들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오니 중기계(건설장비)제조로 유명한 평안남도 대안군이 이에 해당된다. 

 

“대안 

 

옛날 이곳에 있던 이안동(귀안처럼 생긴 산의 아래에 있는 마을의 한자식표기)과 대리(큰 마을)에서 한글자씩 따서 대안리를 내왔다.”

 

대안군은 뒷날 남포시의 대안구역으로 편입되었다. 군급 행정지역들의 변화는 지금도 그치지 않았고 이후에도 지속될 전망이다. 

 

지명변화의 제2원인- 외래적 요소 소멸

 

광복 후 북반부에서 제일 먼저 손을 댄 게 일본식 지명이나 일본과 관계되는 지명들이었다. 

도시들에 “명치정(明治町, 메이지마치), ”대화정(大和町, 야마도마치), “본정(本町, 혼마치)” 따위 거리들이 있었나 하면, 큰 제철소가 있던 고장이 일본인의 이름을 따서 “겸이포(谦二浦)”로 불렸다. 왜식지명들을 없앤 속도는 굉장히 빨랐다. 1946년에 “부(府)”는 “시”로 되고, “통(通り, 도오리)”, “정(町, 마치)”, “정목(町目, 죠메)”은 “동”, “리”로 바뀌어 전국적으로 지명들에서 왜색이 벗겨졌다. 

 

조금 복잡한 겸이포는 소나무가 많은 곳이라는 뜻으로 예로부터 “송림현”, “송림방”, “송림면”, “송림리” 등 지명들이 존재했던 점을 감안하여 송림(松林)으로 명명했으니, 뒷날 황해북도 송림시로 굳어졌고, 1916년 “겸이포제철소”로 시작했던 기업은 완전히 탈바꿈해 지금 황해제철연합기업소로서 조선의 경제와 국방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밖에도 얼핏 봐서는 일본과 상관없는 것 같지만 일제가 바꾼 지명들도 고쳤다. 예를 들어 일본군의 상륙을 기념하여 명명된 “진남포”는 옛 이름 “남포마을”을 참조해 “남포”로 고쳤고 점점 승격하여 이제는 남포특별시이다. 

 

뒤늦게 고쳐진 지명들로는 북부지방의 여진말 지명들이다. 1981년에 집중적으로 진행되었는데, 항경북도의 오로군- 영광군, 웅기군- 선봉군(선봉군이 나선으로 편입된 건 근년의 일이다), 동신군 아롱성리, 약수리, 웅기군 서수라리- 우암리, 덕성군 니망지리- 락원리, 성간군 오모로리- 신청리 등이다. 사라진지 오래지만 반공교육에 세뇌된 한국인들의 머릿속에서는 살아있는 아오지는 은덕군으로 개명됐는데, 2009년의 지도에서는 다시 경흥군으로 표기했으니, 약간 헷갈린다. 

 

지명은 아니지만 강물의 이름인 “독로강”도 여진말이라 하여 “장자강”으로 바꾸었는데, “장자”란 소년 김정일이 1950년 말 그 일대에서 활동했던 일을 기념한다니까, “장자”는 “장군의 아들”이라는 뜻인 것 같다. 한자로는 “장자(将子)”이다. 

 

지명개변의 제3원인- 역사와 인물 재평가 

 

역사인물들에 대한 재조명은 조선에서 줄곧 진행된 터이다. 김유신, 이성계 같이 오랜 세월 영웅으로 떠받들리던 사람들이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의해 매도됐는데, “3대역적”으로 꼽혔다는 김유신, 이성계, 이완용 가운데서 김유신과 이완용은 북반부와 직결되지 않지만 함경도에서 흥한 이성계는 유적이 많았다. 또 이성계만이 아니라 봉건왕, 봉건관료배들과 관련되는 지명들도 많았으므로 국가적으로 정리했는데, 그중 중요한 조치가 1977년에 취해졌다. 

 

이성계 및 그 일가와 관계되는 지명들로 영흥군은 금야군, 함흥의 반룡구역은 동흥산구역, 룡마동은 새별동, 치마1동은 해빛동, 치마2동은 정성동, 본궁1동은 은덕동, 본궁2동은 련못동, 본궁3동은 샘물동, 궁서동은 소나무동, 룡흥동은 흰실동, 구룡1동은 금빛동, 구룡2동은 은빛동으로 고쳐졌다. 여기서 흰실동은 합성섬유 비날론을 생산하는 공장을 가리켜서 김일성 주석이 직접 지은 이름이라 한다. 

 

또한 역사인물들과 관계되는 지명들로 신천군 석봉리는 새날리, 곡산군 병술리는 덕흥리, 박천군 형팔리는 대령리, 삼수군 왕가리는 회골리로 바뀌었다. 

 

지명개변의 제4원인- 종교요소와 성씨 

 

종교냄새가 진한 지명을 바꾼 사례로는 옹진군의 념불로(염불리)를 국봉리로 고친 것이 전형이고, 전국 여러 고장에 널려있던 행정지명이 아니라 자연부락이름으로 생겨났던 집성촌 이름들인 “최촌, 김촌” 따위도 언어생활에서 쓰지 않도록 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아버지가 함흥 부근의 문씨 집성촌에서 나서자랐다는데, 만약 문촌으로 불리였다면 사라진지 옛날일 것이다. 

 

지명개변의 제5원인- 혁명역사와 인물 기념 

 

조선은 자체의 혁명사에서 활약한 중요한 인물들이나 투사들을 지명으로 기념하는 방식을 비교적 선호한다. 제일 많이 쓰는 방식은 고향에 이름을 달아주는 것이고, 다음으로 투사가 활동했거나 희생된 장소를 그 이름으로 명명하는 방식이다. 

시로는 함경남도의 김책시가 지금까지는 유일하다. 군으로는 김형직군, 김형권군, 김정숙군 등이 있으며 이급으로는 안길리, 학송리 등등 적지 않다. 이런 항일투사들은 북반부에서 잘 알려진 반면 남반부에서는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 지명들에서 한국인들이 이질감을 가장심하게 느낄 수 있는 사례들이다. 

 

지명개변의 제6원인- 고유어사용 

 

이런 개변은 조선 특색이 진한 처사이다. 1960년대에 전국적인 조사를 거쳐 모든 마을과 골짜기, 산과 강, 호수와 굴, 바위와 언덕 등의 이름을 파악하고 유래들도 상세히 밝혔다. 집계해보니 행정지명들은 거의 다 한자어였고 자연지명들은 고유어가 한자어나 외래어보다 훨씬 많았다 한다. 그리고 특이한 게 고유어와 한자어를 함께 쓰는 지명들도 상당했다. 

결론인즉 양반들을 중심으로 하는 서사표기에서는 한자어를 많이 썼으나 절대다수 백성들의 언어생활에서는 고유어지명을 주로 썼다는 것. 

 

조선에서는 자연지명으로 왜소화되었던 고유어자연지명들을 행정지명에 반영하여 승격시키는 작업을 체계적으로 진행했다. 

자강도 희천시의 송우동은 솔로모동으로, 평양시 력포구역의 삼정리는 세우물리로, 평성시 사인동의 일부 지역은 두무동으로 고쳐진 등이 전형적인 사례이다. 

이런 사례들은 원래 고유지명이 있은 경우고, 고유어로 새로 만든 지명들도 많다. 평양시의 련못동, 세거리동, 소나무동, 샘물동, 금야군의 솔밭리, 신천군의 새길리, 새날리, 중화군의 물동리, 부전군의 늪리 등등. 

 

고유어지명짓기는 주로 리(이)급 혹은 그 아래급 지명들에서 일어났는데, 간혹 군급에서도 생겨났다. 

가장 전형적인 사례는 함경북도 두만강변의 새별군으로서 김일성 장군의 항일활동을 기념하여 고친 이름이다. 황해남도의 과일군 역시 고유어 지명이다. 

 

지명개변의 기타 원인들 

 

이밖에도 지명들이 바뀐 원인들은 여러 가지다. 

예컨대 전통사회에서는 수백 년 쓰면서 불편을 느끼지 못했으나 전국이 일체화되고 도로망, 철도망이 깔리면서 동명현상이 발견되었기에 고친 경우다. 자칫하면 엉뚱한 곳으로 가는 기차표를 사고 팔 수도 있으니까 지명개변은 필수였다. 

 

그리고 김일성 주석의 업적, 혁명사상과 연결되는 지명들로는 평양의 개선동, 영광거리, 강계시의 충성동, 나선의 은덕동, 서흥군의 은정리, 은률군의 은혜리 등등으로 아주 많다. 

 

지명들이 낳은 문제점 

 

지명들의 개변은 물론 제일 먼저 해외동포들이나 반도 남반부 “실향민”들의 고향확인을 어렵게 해준다. 또한 중국인민지원군 열사들의 희생지점과 매장장소 확인도 어렵게 해준다.

 

다음으로 한자표기에서 혼란을 조성한다. 예들을 들어보자. 

외부에서 첫 발사장소의 지명을 따서 제멋대로 이름을 붙인 조선 미사일이 “노동”인데 조선에는 지금 이런 지명이 없으니까, 지명정리와 개변에서 사라진 이름이겠다. 한자로는 “蘆洞=芦洞”이 되겠는데 오랫동안 “노동(勞動=劳动)”으로 잘못 알려져 “라오뚱다오딴(劳动导弹)”이 지금도 소문내면서 “芦洞导弹”과 병존한다. 

 

보다 큰 문제는 고유어지명들의 한자표기다. 새별군의 경우 새별을 “싸이베얼”이라고 음역한 “塞别儿郡”과 “赛别尔郡” 외에 의역한 “치밍씽쥔(启明星郡)”이 존재하고, 과일군은 의역한 “궈위안쥔(果园郡, 뜻은 과수원군)”과 음역한 “꽈이얼쥔(瓜饴儿郡)”이 병존한다. 이런 혼란이 이해의 부담을 늘이고 사건발생지점 파악에 불리함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지명을 통해 보는 지역변화 전망

 

조선에는 군급 행정구역이 200개 정도 되지만 전국적으로 유명한 고장들은 제한돼 있다. 필자의 인상으로는 공업이나 농업생산으로 소문난 경우가 제일 많고, 다음으로 역사사건 때문에 유명해진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황해도의 신천군은 워낙 특별히 유명하지 않았는데 1950년 말의 대학살 때문에 전국적인 명성을 누린다. 

 

▲ 북의 봉산군 지도     © 자주시보

 

또한 은파군은 봉산군에서 떨어져나와 봉산과 동격인 군이 된지 60년이 넘건만 아직도 뚜렷한 자체 개성과 모습을 갖고 전국적으로 국제적으로 소문내지 못한다. 이런 현상은 물론 유감스럽다. 봉산 또한 옛날에 생겨난 탈춤 덕분에 전국적인 명성을 유지하니 이런 현상도 썩 만족스럽지는 못하다. 

 

살펴보면 봉산탈춤은 봉산이 오랜 세월 공물짐이 오르내리고 사신들이 오가는 길목에 자리잡았기에 생겨나고 전해졌으니까, 옛 시절에는 탈춤의 확실한 시장이 존재했다. 일종 “길목문화”(이런 말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역사적으로는 길목에 자리잡은 덕분에 한동안 발달했던 경제나 문화들이 존재함)였다. 그러나 지금은 문화재보존차원에서 국가적인 투자를 해야만 탈춤이 명맥을 유지할 수 있다. 탈춤이 자신의 힘으로 먹고 살면서 발전해나가려면 반도정세가 풀려서 남북교류가 활발해지고 국제관광객들이 많이 오가야만 시장이 커져서 가능해진다. 

 

조선은 수십 년 동안 철벽방어를 위해 공업, 농업, 군사조치들을 취해왔으므로 경제유통에는 뒷전일 수밖에 없었다. 반도내부와 국제범위의 교류가 정상적으로 진행되면 북반부의 경제지도가 다시 그려지면서 특정지역들의 경제, 문화가 발전하기 마련이요, 지명에 따른 별명들도 새로이 생겨나면서 심지어 지명마저 바뀔 수 있으리라. 

 

첨부자료: 조선(북한)지명자료 

 

2000년대에 존재했던 “조선인포뱅크”사이트에서 내려받은 지명자료로서 “오늘 조선은 김일성주석의 은혜로운 품속에서 세계만방에 주체의 조국 -《맑은 아침》의 나라로 빛나고 있다.”는 내용을 보면 1994년 김일성 주석 서거 전에 만들어진 자료임을 알 수 있다. 낡기는 했지만 지명유래소개 등 흥미로운 내용들이 많아, 그대로 올린다. 

 

“은혜로운 품”부분은 한국의 실정법을 고려해서 첨부파일에서 삭제했지만 특정인물들에 대한 “아버님” ,“어머님” 따위 약간의 경칭은 하도 흔히 쓰는 터이라 그 이상한 법의 잣대로도 “위반”결론은 나올 것 같지 않아 그대로 유지한다. 일부 조선 특유 표현들도 다 고칠 수가 없으므로 그대로 둔다. 

 

 

조선(북한)지명자료

[조선인포뱅크에서]

 

차 례

 

1. 행정구역의 형성

2. 행정구역 구분

3. 행정구역도표

4. 지명유래

 

평양시평안남도평안북도자강도황해남도

황해북도강원도함경남도함경북도량강도

 

1. 행정구역의 형성

 

조선의 도는 지금으로부터 약 1000년전 나라의 전반적국토가 완성된 통일국가인 고려시기에 와서 비로소 전국적범위에서 일정한 구획으로 지어지게 되었다.

 

조선의 도는 처음 995년에 설치되였는데 북부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패서도(평안남북도), 삭방도(강원도와 함경남도의 일부), 관내도(경기도, 황해남북도), 충원도(충청북도), 하남도(충청남도), 령남도(경상북도의 북부), 령동도(경상북도의 일부), 산남도(경상남도의 서부), 강남도(전라북도), 해양도(전라남도) 10도제로 되였다.

그후 황해도지역을 차지하였던 관내도에서 서해도가 새로 나왔고 1018년에는 강남도와 해양도를 합하여 전라도로 고쳤다.

1036년에는 오늘의 강원도와 함경남도지방에 있던 삭방도의 북부를 동계로, 평안남북도에 두었던 패서도를 북계로 각각 개편하였다.

동계와 북계가 나온후 도로서는 서해도,삭방도, 관내도, 충원도, 하남도, 령남도, 령동도, 산남도, 전라도 등 9개 도가 있었다.

그후 1106년에 관내도, 충원도, 하남도를 합하여 양광충청주도로 하였고 령남도, 령동도, 산남도를 합하여 경상진주도로 고침으로써 5도량계제로 되였다.

그리고 그 밑에 목,,현을 두었다.

그후 양광충청주도는 양광도로, 령상진주도는 경상도로, 삭방도는 교주도로 다시 이름을 고쳤다.

1356년에는 충청도가 설치되였다.

결과 5도 량계제는 11세기부터 14세기 고려말기끼지 존속되여왔다.

 

1392년 리조가 성립되면서부터 나라의 이름을 첫 노예소유국가였던 조선(고조선)의 이름을 되살려 조선이라 불렀다.

1413년에 전국이 8개의 도로 기본적으로 확장되여 리도말기까지 8도제가 적용되였다.

이때부터 조선을 8도강산이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8도는 리조 500년간 존속한 행정구역으로서 북으로부터 함경도, 평안도, 황해도,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로 되여 있었다.

여기서 함경이란 도의 대표적인 큰 도시들인 함흥과 경성, 평안은 평양과 안주, 황해는 황주와 해주, 강원은 강릉과 원주, 충청은 충주와 청주, 경상은 경주와 상주, 전라는 전주와 라주 방면의 도라는데로부터 그 지방의 첫 글자들을 따서 붙인 이름들이다.

경기는 서울을 중심으로 한 지방이란 뜻이다. 즉 경기도를 기증,기호지방이라고도 하는데 란 왕성의 주위 500리이내라는 뜻이다.

함경도는 1413년에 영길도로, 1416년에 함길도로, 1467년에 영안도로, 나중에 함경도로 부르게 되였다.

1895년에는 23부제를 실시하였다.

 

리조말기인 1896년에 이르러 종전의 8도중에서 경기도, 강원도, 황해도를 제외한 나머지 5개도를 모두 남,북으로 갈라 13개도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광복전 조선의 행정구역은 13, 218개의 군, 2,202개의 면, 28,498개의 리()로 되여있었다.

 

광복된후 조선에서는 혁명발전의 매 시기에 인민정권앞에 제기된 과업과 지역들의 경제, 문화발전 및 생산력의 합리적배치의 요구를 고려하여 행정구역을 개편하여왔다.

하여 현재 공화국북반부의 행정구역은 9개의 도와 2개의 직할시, 26개의 시, 170여개의 군, 구역, , 지구, 4,000여개의 읍, , 로동자구, 동으로 되여있다.

오늘 남조선의 행정구역은 9개의 도와 1개의 특별시, 6개의 광역시(직할시), 71개의 시, 69개의 구, 91개의 군, 195개의 읍, 1,230개의 면으로 되여있다.

처음으로

2. 행정구역 구분

 

직할시 2

 

평양시 라선시

 

9

 

평안남도 평안북도 자강도 황해남도 황해북도

강원도 함경남도 함경북도 량강도

처음으로

 

3. 행정구역도표

 

공화국북반부

 

,직할시

,(구역,,지구)

평양시

중구역, 평천구역, 보통강구역, 모란봉구역, 서성구역, 선교구역, 동대원구역, 대동강구역, 사동구역, 대성구역, 만경대구역, 형제산구역, 룡성구역, 삼석구역, 승호구역, 력포구역, 락랑구역, 순안구역, 은정구역, 강남군, 중화군, 상원군, 강동군

평안남도

평성시, 남포시, 안주시, 개천시, 순천시, 덕천시, 대동군, 온천군, 증산군, 평원군, 문덕군, 숙천군, 성천군, 녕원군, 북창군, 맹산군, 양덕군, 회창군, 신양군, 대흥군, 은산군, 청남구, 강서군, 대안군, 천리마군, 룡강군

평안북도

신의주시, 구성시, 정주시, 창성군, 피현군, 룡천군, 염주군, 철산군, 동림군, 선천군, 곽산군, 운전군, 박천군, 녕변군, 구장군, 향산군, 운산군, 태천군, 천마군, 의주군, 삭주군, 대관군, 동창군, 벽동군, 신도군

자강도

강계시, 만포시, 희천시, 장강군, 시중군, 자성군, 중강군, 위원군, 초산군, 우시군, 고풍군, 송원군, 성간군, 전천군, 룡림군, 화평군, 동신군, 랑림군

황해남도

해주시, 벽성군, 강령군, 옹진군, 태탄군, 장연군, 룡연군, 삼천군, 송화군, 과일군, 은률군, 은천군, 안악군, 신천군, 재령군, 봉천군, 배천군, 신원군, 연안군, 청단군

황해북도

사리원시, 개성시, 송림시, 황주군, 봉산군, 연탄군, 은파군, 서흥군, 평산군, 금천군, 린산군, 토산군, 신계군, 곡산군, 연산군, 신평군, 수안군, 개풍군, 장풍군

강원도

원산시, 문천시, 천내군, 안변군, 고산군, 통천군, 고성군, 금강군, 창도군, 김화군, 회양군, 세포군, 평강군, 철원군, 이천군, 판교군, 법동군

함경남도

함흥시, 흥남시, 신포시, 단천시, 함주군, 락원군, 정평군, 금야군, 고원군, 요덕군, 장진군, 부전군, 영광군, 신흥군, 홍원군, 북청군, 덕성군, 리원군, 허천군, 수동구, 금호지구

함경북도

청진시(신암구역, 포항구역, 청암구역, 수남구역, 송평구역, 라남구역, 부윤구역), 김책시, 회령시, 부령군, 무산군, 경성군, 길주군, 화대군, 명천군, 화성군, 어랑군, 연사군, 온성군, 새별군, 은덕군

량강도

혜산시, 운흥군, 보천군, 삼지연군, 대홍단군, 백암군, 갑산군, 김형직군, 김정숙군, 김형권군, 풍서군, 삼수군

라선시

 

 

공화국남반부

 

,직할시

,(구역,,지구)

서울시

종로구,중구,룡산구,성동구,동대문구,성북구,강북구,도봉구,은평구,서대문구,마포구,강서구,구로구,영등포구,동작구,관악구,강남구,강동구,송파구,광진구,중랑구,양천구,금천구,서초구,로원구

경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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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지명유래

 

조선이라고 부른것은 조선의 첫 노예소유자국가인 고조선때부터였다.

원래 조선이라고 하였는데 후에 리조조선과 구별하기 위하여 고조선이라고 한것이다.

조선이라는 말은 맑은 아침이라는 뜻이다.

9세기의 시인 최영년은 우리 나라의 이름 조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긍지높이 노래하였다.

 

조선이라는 이름

하늘 땅 청명하고 백성들 화목하게 사는

여기 패강기슭에 새 도읍 마련했다네

봄빛 넘친 금수강산 그림같은데

아침해 밝게 빛나 조선이라 부른다네

 

맑은 아침의 나라 조선, 끝없는 민족적긍지감에 가슴부풀게 하는 이름이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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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시평안남도평안북도자강도황해남도

황해북도강원도함경남도함경북도량강도

 

평양시

 

평양중구역모란봉구역서성구역선교구역

동대원구역대동강구역사동구역대성구역만경대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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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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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강도

 

강계시만포시희천시자성군중강군

위원군고풍군성간군

 

황해남도

 

해주시벽성군강령군장연군송화군

은률군재령군배천군연안군

 

황해북도

 

사리원시개성시송림시황주군은파군

린산군평산군금천군토산군장풍군

 

강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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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남도

 

함흥시신포시단천시영광군장진군

정평군고원군홍원군북청군

 

함경북도

 

청진시무산군길주군화대군

화성군어랑군회령시

 

량강도

 

혜산시보천군삼지연군대홍단군

 

 

 

평양시

 

평양

 

고구려초기부터 평양이라고 불러왔는데 그 뜻은 큰 성시를 의미한다.

본래 큰 성시를 당시 조선말로는 부루나라고 불렀다. 그후 한문이 널리 글말로 쓰이게 되면서 부루나평양이라고 불리우게 되였다.

대내외적으로 평양이 차지하는 중요한 지위에 커다란 관심을 돌려온 봉건국가는 나라의 서쪽지역에 있는 서울서쪽지역의 수도라는 뜻에서 그 이름을 서경이라고도 하였다.

또한 평양을 류경이라고도 불렀는데 그것은 대동강을 따라 늘어선 능수버들이 평양의 특색있는 풍치라고 해서 부른것이다.

리조시기에 와서는 옛날 이름대로 다시 평양이라고 하였다.

광복후 평양은 혁명의 수도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활짝 꽃펴났으며 영웅의 도시로 세상사람들속에 널리 알려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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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구역

 

오탄동

 

오탄은 평양대극장의 동쪽 양각도우에 있는 대동강여울의 이름이다. 이 여울과 마주한 마을을 오탄동이라고 부르고있다. 옛날엔 이 여울을 까마귀여울(오탄)이라고 했다. 지금은 물오리떼가 하얗게 덮여 놀고있는데 왜 까마귀여울이라고 불렀는가? 그 여울을 까마귀여울이라고 부르게 된것은 1592년 임진조국전쟁때부터였다.

1592413일 왜적들은 대군을 내몰아 우리 나라를 침략하였다. 동평양일대까지 쳐들어온 왜놈들은 감히 평양성을 공격할수가 없었다. 이때가 바로 68일이였다. 견고하게 쌓은 성벽도 성벽이려니와 우선 대동강을 건널수가 없었다.

그것은 평양성사람들이 왜놈들이 오기전에 대동강의 배들을 모조리 거두어 숨겨놓았기때문이였다. 왜적의 선봉장 고니시 유끼나가란 놈은 대동강을 사이에 두고 평양성을 탐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때 석양이 깃든 하늘가에서 까마귀떼가 날아예더니 그중 세마리가 물우에서 성큼성큼 걸어서 건너가는것이 아닌가?

이것을 한참이나 바라보고있던 적장놈은 대번에 정신이 버쩍 들었다. 그의 입가에 느슨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면 그렇겠지. 하느님이 나를 도와주신것이다.

그놈은 못내 흡족해하면서 자기 장막으로 돌아가자 바람으로 자기 사위인 소 요시도모란놈을 불렀다. 그놈에게 고니시 유끼나가놈은 오늘밤 군사를 거느리고 아까 본 그 여울로 건너가 맞은편기슭에 있는 배를 모조리 가져오라고 했다. 그것은 여울로는 대군이 일시에 건너갈수 없으니만큼 배를 가져다가 배도 타고 여울도 리용하여 대군이 일시에 건너가 평양성을 공격하려는것이였다.

소 요시도모놈은 장인이 자기를 사랑하여 큰 공을 세울 일을 맡겨주는것이 고마와서 대가리를 갑삭갑삭 조아리더니 강가로 달려나가는것이였다.

그날밤 10시경 소 요시도모는 자기 부대를 몽땅 거느리고 강물에 들어섰다. 같이 따라나온 고니시놈은 매우 흡족한 마음으로 대렬을 바라보았다.

이날밤은 몹시도 어두웠다. 그믐가까운 밤인데 금시 비가 쏟아질듯이 구름이 낮게 드려서 코앞을 분간할수 없었다. 고니시놈은 자기네 은밀성을 보장해주는 좋은 밤이라고 생각하였다.

구령에 따라 부대는 일렬종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병정놈들은 아래도리만 걷어올리고 강물로 들어섰다. 뒤의놈은 앞의놈의 절버덕소리를 따라 걸었다. 대렬이 깊이 들어갈수록 절버덕소리가 더욱 크게 들리였다. 이따금 앞쪽에서 물에 자빠지면서 찌르는듯한 비명이 들렸다. 아마 물속에서 발을 헛디디여 자빠지는놈이 지르는 소리일것이다.

대렬은 캄캄한 동굴속으로 빨리워들어가듯이 절버덕소리를 내면서 어둠속으로 삼키워들어갔다.

강가에 홀로 남은 고니시놈은 건너간 대렬이 돌아올 시간만을 애타게 기다렸다. 그런데 날이 밝아도 돌아와야 할 부대는 돌아오지 않았다. 초조해진 고니시놈은 안전부절 못하였다. 동산우에 아침해가 솟아올랐다. 갑자기 양각도 동쪽기슭에서 까마귀떼가 까욱까욱 소리치며 떠들어댔다. 고니시놈은 놀란 눈으로 까마귀떼가 뒤덮인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섬기슭에 내려앉은 까마귀떼는 게걸스럽게 무엇을 쪼아먹으며 소란스럽게 까욱까욱했다.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 고니시놈은 강기슭으로 달려가며 양각도기슭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거기서 그는 끔찍스러운 광경을 보게 되였다.

버들이 듬성듬성 자란 섬기슭에는 꺼먼 시체들이 즐비하게 한벌깔렸는데 까마귀들이 시체의 눈알을 파먹으며 고아대고있었다.

사태를 짐작한 고니시놈은 그만 기절하듯 쓰러지고말았다.

평양성을 가로타고앉을 생각에만 급급했던 그가 어찌 대동강에 밀물과 썰물의 단순한 조화가 있는줄 짐작이나 할수 있었겠는가.

졸개놈들에게 맞들리여 자기 군막으로 돌아온 고니시놈은 공포심에 들떠 헛솔만 쳤다.

가라스, 가라스(까마귀, 까마귀)

가위눌린 그놈의 헛소리는 까마귀까지 제놈들을 저주하는 이 나라에서 살아서 돌아갈것 같지 못하다는 절망감에서 나오는 비명소리였다.

숱한 군졸들을 강물에서 죽인 그놈은 대동강의 밀썰물이 귀신의 조화처럼 생각되여 감히 강을 건늘 용단을 내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런 일이 있은 때로부터 이 여울을 까마귀여울(오탄)이라고 하였으며 오늘도 왜놈들을 수장시킨 이곳 여울기슭마을을 오탄동이라고 부르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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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봉구역

 

청류벽

 

아득한 옛날부터 대동강은 비만 오면 물이 불어 사람들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어느해 설모라는 사람이 대동강물이 불어나는 바람에 손쓸새도 없이 논과 집가산을 다 읽고 한지에 나앉게 되였다.

그는 강녘에서 강물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살아갈 앞길이 막막하여 한숨만 쉬고있었다.

그런데 대동강 물녘 진탕에 다 죽게 된 큰 잉어한마리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간신히 뒤채이고있었다. 설모는 잉어가 몹시 불쌍해보였다.

그래서 그는 강녘으로 달려가 잉어를 깨끗이 씻어서 물속에 도로 넣어주었다. 그랬더니 그날밤에 잉어가 어린 사내아이로 되여 나타나서 설모를 룡궁으로 데리고 가는것이였다.

룡왕앞에 나타난 설모는 당황하여 어찌할줄 몰랐다. 룡왕은 아들을 살려준 그에게 은혜갚음을 하고싶다면서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한동안 입을 다물고 서있는 그에게 룡왕은 갖가지 보석을 안겨주었다. 보석을 본 설모는 눈이 휘둥그래지며 뒤로 한발자국 물러서더니 룡왕앞에 끓어 엎드리는것이였다.

룡왕님, 저에게는 이 번쩍거리는 보석보다도 더 귀한 소원이 있사오니 바라건대 그걸 풀어주기 바라나이다.

보석보다 더 귀한 소원이라니?

전 대동강물이 범람하지 않도록만 해주신다면 더이상 바랄것이 없게나이다.

그 이튿날 대동강가에서는 폭풍우가 일더니 갑자기 병풍같은 바위가 불쑥 나타났다. 그토록 기승을 부리던 대동강물도 이 병풍처럼 막아선 바위들앞에서는 끔쩍못하였다. 이때부터 해마다 큰 해를 주던 대동강물은 머리를 숙이게 되였고 사람들은 이 바위를 청류벽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월향동

 

월향동은 1592년 임진조국전쟁때 천한신분의 기생이였으나 조국땅에 기여든 왜놈들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을 안고 왜놈의 우두머리를 처단한 계월향의 이름에서 유래되였다. 또한 월향동에 있는 가루개라는 고개도 그가 배를 갈라 죽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흥부동

 

고구려의 어느 한 왕이 수도를 남쪽으로 옮길것을 생각하고있었는데 평양이란곳이 산천도 아름답고 땅이 비옥하여 살기 좋은 고장이라는 말을 듣게 되였다.

그리하여 하루는 평양이 과연 수도로 될만한 지세를 갖추고있는가를 알아보도록 관리를 파견하였다.

행장을 갖춘 관리가 험산준령을 넘어 어느 한곳에 이르니 넓고 푸른 강이 흘러내리는 기슭에 북쪽으로는 련련 산발들이 둘러있고 그앞으로는 탁트인 넓은 벌이 펼쳐져 아름다운 절경을 이루고있었다.

관리가 강가의 오붓한 농가에 들려 로인에게 이곳의 지명을 물었더니

이곳은 예로부터 평양이라고 불러오는 지방이올시다.라고 대답하는것이였다.

평양을 찾아낸 기쁨을 금치 못하며 관리가 집주인에게 물 한그릇을 청했더니 로인은 큰 술잔 하나를 가지고 나와 빈채로 주면서 그처럼 귀하신분을 달리 대접할 길이 없으니 이 잔으로 저 샘터의 물을 떠잡수시기 바라옵니다.라고 하였다.

관리가 집옆의 샘터에 가서 잔에다 물을 떠서 마시니 그것은 물이 아니라 온몸에 상쾌한 기분을 돋구어주는 향기로운 술이였다.

피로를 말끔히 가시고 새 힘이 부쩍 솟은 관리는 왕에게로 돌아가 사실대로 아뢰였다.

왕은 매우 기뻐하며 평양이야말로 수도로 될만한곳이로다.라고 경탄을 금치 못해하며 곧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였다.

그후 로인이 큰 술잔을 주었던 마을을 흥배(흥을 돋구어주는 술잔이라는 뜻)라고 하였는데 그것이 전해지는 과정에 흥부로 번하여 흥부동(재부가 흥하는곳이라는 뜻)으로 부르게 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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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구역

 

와산동 와산동은 이고장에 있는 고개이름과 관련된다.

와산이란 한자로 누운산이란 말인데 고개의 생긴 모양이 밋밋하여 마치 산이 누운것과 같다고 하여 그 고개를 누운고개라고 불러왔으며 그 고개를 낀 마을을 누운고개마을이라고 하여 한자로 옮겨 적은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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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구역

 

등메동

 

등메산등성이라는 고유한 조선말로서 오래전부터 씌여온 마을이름인데 이 일대가 산등성이로 되여있다는데로부터 붙은것이다.

 

무진천

 

평양시 선교구역에는 그리 크지 않은 무진천이 흐르고있는데 대동강과 합류된다.

아늑한 옛날 이곳에는 아담한 마을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비가 억수로 쏟아지면서 탁류가 이쪽으로 밀려들었다. 삽시에 마을이 물에 잠겼고 키높이 자란 곡식들이 뿌리채 뽑혀 떠내려갔다.

하늘이 들리고 장마철이 지났지만 좀처럼 물은 찌지 않았을뿐만아니라 대동강의 밀물과 썰물의 영향까지 받아 제법 콸콸거리며 흐르는 강으로 되고말았다.

바로 이해가 어느 무진년이였다. 그래서 그때부터 사람들은 무진년에 큰물이 나서 생긴 강이라하여 무진천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민간에서는 이 강을 구불구불 돌아흐르는 강이라 하여 돌개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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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원구역

 

동대원

 

예로부터 평양은 대내외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그리하여 고려봉건국가는 평양에 커다란 관심을 돌려 견고한 성을 쌓았을뿐만아니라 성안에 여러가지 통치기구들을 정연하게 세워놓았다.

당시 성안 동쪽에는 주로 공무로 려행하는 벼슬아치들이 묵는 큰 집이 있었는데 이것을 원집이라고 불렀다. 원은 흔히 역과 역사이에 두었다.

동대원은 평양성 동쪽에 큰 원집이 있었던곳이라하여 붙은 이름이다.

 

삼마

 

본래 이고장은 서씨성을 가진 사람들이 대대로 내려오면서 살던 마을이라 하여 서마을혹은 서말이라고 하였다.

그것이 후에 한자로 옮겨 적히면서 삼마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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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강구역

 

탑제동

 

옛날 이고장에 탑이 있었다고 한다. 탑이 있던 고개라 하여 탑재마을이라고 불러왔다. 현재 쓰이는 이름 탑제가 변한것이다.

 

의암동

 

의암동과 관련하여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있다.

훙배라는 사람이 하루는 산에서 나무를 해지고 대동강 기슭을 스적스적 걷고있었다.

한낮이 되여 그는 땀도 들일겸 강기슭에 면한 바위우에 지게를 벗어놓은채 퍼더버리고앉았다.

그런데 바위짬에서 맑은 샘물이 흘러나오는것을 보게 된 훙배는 대뜸에 달려가 그 물을 실컷 들이켰다. 그런데 그만 그는 술에 크게 취하여 해가 기울도록 그 바위에서 잠을 자고말았다.

그가 깨여보니 저녁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고 있었다.

깜짝 놀란 그는 주위도 살필새없이 집으로 향하였다.

그의 말을 들은 마을사람들이 몰려와 바위짬에서 흘러나오는 샘물을 떠서 마셔보았다. 그것은 분명 입맛을 돋구는 술이였다.

이때부터 마을사람들은 훙배가 술에 취하여 옷까지 벗어놓고 잠을 잔 바위를 옷바위라고 불렀고 그것을 한자로 고쳐 적어 의암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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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동구역

 

미림동

 

미림은 아름다운 수풀이 우거졌던 고장이라하여 붙인 이름이다. 항간에서는 옛날 숯을 구워 먹을 만들던 먹장사가 사는 마을이라고 하여 먹골이라고도 불렀다.

송신동 오래전부터 이곳을 솔아리라고 불렀다. 솔아리솔가리가 변한것이다.

옛날부터 이곳에는 소나무가 많았다. 그래서 소나무가 있는 거리라는 뜻으로 솔가리라고 불렀는데 송신은 소나무가 있는곳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뜻에서 붙은 이름이다.

 

휴암동

 

휴암은 이곳에 있는 쉴바위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이곳에는 오래전부터 큰 바위가 하나 있었는데 여기를 오고가는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듯이 그 바위우에서 쉬고갔다고 한다.

그 쉴바위를 한자로 옮긴것이 휴암이다.

 

오류리

 

지금으로부터 수백년전 이 마을에 한 어진 선비가 살았다. 그는 하루해가 다 지나도록 밖에 나오는 법이 거의나 없었는데 가끔 마을길에 나타날 때면 부지런히 버드나무를 심군하였다. 그런데 그 나무가 해를 지나면서 키를 넘게 크더니 한그루두그루 뿌리가 썩어 넘어졌다. 그중 다섯그루만은 수백년세월 아름이 넘게 푸르싱싱 잘 자랐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다섯그루의 큰 버드나무가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오류리라고 불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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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구역

미산동

 

미산은 이 지역에 있는 산이름 아미산에서 유래한것이다. 아미산의 아미는 산모양이 마치 눈섭처럼 생긴 높은 산이라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아미산에서 를 떼여버린것이 미산이다.

리조말기부터 아미산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미산동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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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경대구역

 

만경대

 

만경대는 우리 인민의 마음의 고향이며 혁명의 요람이다.

만경대는 예로부터 이름있는 명승지의 하나로서 매우 아름다운 경치를 이루고있는 고장이다.

만경대라는 이름은 리조시기 불리워오던 만경대마을에서 유래되였다. 만경대는 만경봉에 있는 정각이름과 관련된다.

온갖 아름다운 경치와 풍치를 한눈에 다 볼수 있는 봉우리라 하여 만경봉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그 봉우리에 있는 정각이름을 만경대라고 하였으며 그 이름을 따서 마을이름도 만경대라고 지은것이다.

 

선내동

 

옛날에는 강물이 이 지대까지 들어와 배까지 나들었다고 한다. 그 나루터의 안골마을이라고 하여 선내라는 말이 붙었다.

 

칠골동

 

칠골은 리조때부터 불리워온 마을이름이다. 일곱번째 골 마을이라는 뜻이다.

칠골은 김일성주석의 어머님이신 강반석녀사께서 탄생하시고 자라신 고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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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산구역

 

두개의 산이 나란히 솟은것이 마치 형제와 같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이 구역안에 아우산이 있는 리라 하여 제산리와 형의 산이 있는 리인 형산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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룡성구역

 

옛날 이곳에는 도룡골과 능세이마을이 있었다.

도룡골마을에는 골짜기로 콸콸 흐르는 내물이 많았는데 거기에는 도룡룡이 많았다고 한다.

또 능세이마을은 낮은 산줄기로 성처럼 둘러막힌 마을이라하여 그렇게 불렀는데 사실은 릉성이가 어음변화되여 능세이로 되였다고 한다.

두 마을에서 자와 자를 따서 룡성이라고 부르게 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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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호구역

 

승호동

 

승호승리한 호수라는 뜻인데 옛날 고구려의 을지문덕장군이 수나라 침략자들과의 싸움에서 대승리를 거두고 이곳 못가에서 쉬였다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화천동

 

화천은 오래전부터 불리워온 이 고장의 한마을이름인데 재물이 솟는다는 뜻이다. 옛날 이 고장 사람들이 독구이와 누에고치장사를 잘하여 재물이 샘솟듯이 생겼다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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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포구역

 

력포동

 

력포는 이곳에 있었던 마을이름 검포리에서 유래한다. 검포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있다. 옛날 고구려때에 어떤 장수가 적장의 목을 베고 피가 묻은 검을 개울에서 씻었다고 하여 그 개울을 칼개또는 한자로 칼검자와 개포자를 써서 검포라고 불렀다.

그런데 리조말기에 와서 잘못 써서 력포가 되였다고 한다.

 

장진동

 

오래전부터 씌여온 마을이름인데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임진조국전쟁때에 어떤 장군이 왜놈들을 물밀듯이 밀고 나갔다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자는 장수장, 자는 나아갈 진자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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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안구역

 

룡복리

 

이 마을에 큰 샘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룡이 엎드려있다가 어느해 갑자기 하늘로 날아올랐다고 한다.

룡이 엎드려있던 샘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단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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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군

 

195212월 행정구역개편에 의하여 새로 나온 군으로서 강남이란 대동강 남쪽지역이란뜻이다.

 

마정리

 

평양시 강남군 마정리에는 본래 박마정이라는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옛날 박가성을 가진 사람이 말먹이는 우물을 파놓고 말을 길렀는데 그 말이 매우 좋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 우물이 있는곳이라 하여 마을을 박마정이라고 불렀는데 후에 은 빼고 마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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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군

 

중화1136년에 처음으로 현이름으로 쓰이였다.

1136년 묘청이란 사람이 란을 일으켰다. 이 란은 묘청을 비롯한 서경출신 량반관료들이 서경에 수도를 옮기고 금나라에 대한 사대외교를 반대하고 금나라를 징벌하자고 주장하였으나 개경 량반들이 반대하였으므로 일으킨것이다.

이 란을 평정하고 6개현으로 나누었는데 그중 하나가 중화현이다.

중화현으로 되기 이전 고구려때에는 가화압이라고 불렀고 그후에는 당악이라고 불렀다.

중화는 묘청의 란이 평정되여 이일대가 평화롭고 고르롭게 되였다고 하여 고로화자를 쓰고 그러한 지역의 가운데 위치한다고 하여 자를 써서 만든 이름이다.

처음으로

상원군

 

고구려 시기는 식달이라고 하여 그후는 토산이라고 하였다.

식달흙산의 옛날말인 시리다리를 리두로 표기한것이다.

옛날 이곳에는 나무가 적고 흙으로 된 산이 있어서 흔히 흙산이라고 불리운것 같다.

고려시기에 와서는 상원군이라고 하였다.

상원은 좋은 언덕이라는 뜻인데 이 말이 군이름에 붙게 된데는 고려때의 공신인 조인규라는 사람과 관련된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조인규의 고향이 이 고장이므로 고을이름을 그렇게 붙였다고 한다.

조인규는 충렬왕때 사람으로서 학식과 수완이 능란하였다. 특히 몽골어를 잘하여 몽골과의 관계에서 고려때 많은 공로가 있었다.

그는 원나라가 강점하고있던 땅을 탈환하는데도 공로가 컸다.

이러한 공로로 하여 그는 평양 부원군칭호를 받았다고 한다.

처음으로

강동군

 

강동이란 대동강의 동쪽지역이란 뜻이다.

 

봉화리

 

봉화리는 김일성주석의 아버님이시며 조선민족해방운동의 지도자이신 김형직선생님께서 벌리신 반일민족해방투쟁의 빛나는 사적이 깃들어 있는곳이다.

김형직선생님께서는 이곳에서 조선국민회를 조직하시고 투쟁하시였으며 마을뒤의 봉화산에 오르시여 조선국민회의도 하시고 명신학교학생들에 대한 애국주의교양도 하시였다.

옛날 봉화를 올리던 산이라는데서 붙은 산이름 봉화를 따서 리이름으로 삼았다.

처음으로

 

평안남도

평안도는 평양의 자와 안주의 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리조시기는 도의 이름을 지을때에는 도호부나 큰 고을의 이름에서 한자씩 따서 붙이는것이 상례로 되고있었다.

평안도는 리조말에 전국을 13도로 나눌때 평안남도와 평안북도로 나뉘였다.

청천강을 기준으로 청천강북쪽지역은 평안북도로 하였고 청천강이남지역은 평안남도로 하였다.

처음으로

평성시남포시안주시대동군온천군

평원군문덕군개천시양덕군북창군

맹산군녕원군강서군천리마군대안군

 

평성시

 

김일성주석께서 평양의 위성도시라는 뜻에서 평성이라고 친히 이름지어주신곳으로서 평안남도의 도소재지이다.

 

배산동

 

이전시기 배가성을 가진 사람들이 살았다고 하여 배촌, 배가골이라고도 불렀고 배산점이라고도 불렀다.

배나무가 많은곳이여서 배산점이라고 하였다는 설도 있다.

광복후 리를 동으로 개편할 때 배산점이라는 이름을 따서 배산동으로 하였다.

처음으로

남포시

 

리조시기에는 룡강군의 중남포, 남포마을이라고 불리우는 자그마한 어촌마을이였다.

시루와 같이 생긴 산이라는 뜻의 증산, 그 남쪽의 서해바다를 낀 포구마을임을 의미하여 중남포였는데 리조말기에 진남포부로 되였다.

일제시기에는 왜놈들이 상륙하였다고 하여 누를진자를 써서 진남포라고 불렀는데 광복되면서 진자를 빼버렸다.

 

상대두동

 

지난날에는 큰 마을이라는 의미로 한머리 (한은 크다는 뜻이고 머리는 마을이 변화되여 이루어진 말이다)라고 불렀고 후에 한자로 쓰면서 대두리라고 하였다.

대두동을 둘로 나누면서 웃쪽지역은 상대두동, 아래쪽 지역은 하대두동, 가운데 지역은 중대두동이라고 지었다.

 

와우도

 

와우도는 섬의 모양이 소가 누운것과 같다는데로부터 생긴 이름이다.

 

화도리

 

지난날에는 산을 끼고 앉은 마을이라 하여 산동마을이라고 했는데 리조말기에 와서 화도리(나무가 많아 저절로 불이 나군 하는 불섬이 있는 마을)라고 고쳤다.

1952년에 화도리, 사천리, 매산리를 합쳐 그 이름을 화도리라고 불렀다.

처음으로

안주시

안주시의 고구려때 이름은 식성이다.

이것은 옛날말 시리구루를 리두표기한것인데 넓은 벌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후기신라때는 중반이라 하였는데 역시 매우 평안함을 나타내는 한문투의 말이다.

초기에는 들이 많고 넓다는 뜻에서 팽원이라고 하였다.

그 이후에는 안부, 녕주, 밀성 등으로 불리웠는데 모두 평안한 지대임을 나타낸 말이다.

리조시기에 부른 이름 안주, 안릉도 모두 우와 같은 의미를 가진다. 17세기말에 와서 안주로 고착되였다.

처음으로

대동군

 

대동강을 끼고있는 고장이므로 군이름에 대동이라는 이름을 달았다.

 

순화리

 

이고장에 흐르는 강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이다. 순화강은 물흐름이 순하고 고르롭다는 뜻의 이름인데 원래는 순애강(물흐름이 유순하고 쑥이 많은 강이라는 의미인것 같다)이였다.

처음으로

온천군

 

유명한 온천이 있는 군이라 하여 온천군이라고 이름지었다.

 

룡월리

 

옛날에 달밤에 룡이 하늘로 올라간곳이라 하여 룡월리라고 하였다.

처음으로

평원군

 

오랜 옛날에는 맑은 시내라는 뜻에서 청개라고 하였는데 이 고을 복판으로 흐르는 청계천에서부터 유래된 이름이다. 1910년대에 몇개 군을 합쳐 평원군을 내왔는데 넓은 벌지대라는 의미에서 평원이라고 하였기때문에 그 이름을 새로 내온 군에 붙인것이다.

 

원화리

 

이곳은 그 옛날 원집이 있던 화평한 마을이라고 하여 원화마을이라고 불러왔다.

1910년대에 이곳에 있은 원화리, 산음리, 암적리 등 리들이 통합과 분리 과정을 거쳐 원화리라는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여왔다.

처음으로

문덕군

 

고구려 애국명장 을지문덕의 이름을 따서 광복후 새로 내온 군의 이름을 문덕군이라고 하였다.

 

마산리

 

말과 같이 생긴 산이 있는 마을이라는데서 생긴 이름이다.

서산대사가 그 산에서 칼을 갈았다고 하여 갈마자를 써서 마산이라고 한다는 설도 있다.

처음으로

개천시

 

개천시는 11세기초엽에 련주라고 불리웠다.

여러 고을과 이어져있는 고을이라는 뜻이다.

후에 련주를 아침해빛이 잘 드는 양지바른곳에 설치한 진이라는 뜻의 이름인 조양진이라고 고쳤다.

그후 다시 련주라고 불렀다가 익주라고 고쳤는데 평양의 한쪽고을 즉 평양성을 호위하는 고을이라는 의미이다.

고려말기에는 개주, 리조초에는 개천으로 고쳤다.

는 크다는 뜻이므로 대동강과 청천강 큰 강사이에 있는 고장이라는 지대적특성을 반영한 이름이다.

처음으로

양덕군

 

이 군의 고려때 이름은 동양 즉 평안도에서 동쪽에 있는 양지바른 고장으로 불리웠다.

14세기에 이곳에 두개의 진을 설치했는데 양암진이 있는곳은 양암(양지바르고 바위가 많은곳), 수덕진이 있는곳은 수덕(수림이 무성하고 덕지대로 되여있는곳)이라고 하였다.

리조때 두고장을 합쳤는데 양암에서 자를 수덕에서 자를 따서 양덕현으로 부르다가 후에 양덕군으로 되였다.

처음으로

북창군

 

이군은 광복후에 새로 나온 군이지만 북창이란 이름은 오랜 유래를 가지고있다.

리조봉건국가는 인민들로부터 긁어모은 세금과 환자곡을 보관하기 위하여 순천군에 창고를 두었다.

그러나 덕천, 맹산, 녕원 등 산간지방의것을 이곳에 집결시키기 불편하게 되자 인화방(지금의 북창군지역)에 림시창고를 지었고 그 고장을 가창이라고 하였다.

그래도 늘어나는 세금과 환자곡을 다 보관할수가 없게 되자 두개의 창고를 더 설치하였다.

옥정창고는 가창의 북쪽에 있으므로 북창, 학전창고는 가창의 동쪽에 있으므로 동창이라고 하였는데 북창은 입말을 통하여 행정구역명칭으로 굳어지게 된것이다.

광복후 새로 내오는 군에 옛날 이고장의 이름을 그대로 살려 북창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처음으로

맹산군

 

맹산군은 고려초기에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철옹성 같은 고장이라는 뜻에서 철옹현이라고 하였다.

그후 외적을 막기 위해 쌓은 여덟개의 성가운데서 제일 큰 성이 이곳에 있었으므로 이고장을 맹주라고 하였다.

여러차례의 변천과정을 거쳐 1415년에 맹산현으로 되였고 행정구역이름에서 자 대신 자를 쓰게 되여 맹산으로 부르다가 리조말 평안도를 남, 북 두개 도로 가를 때 평안남도 맹산군으로 되였다.

처음으로

녕원군

 

이 군의 이름은 고려시기 이곳에 있은 녕원진에서 유래된것이다.

편할녕자는 이 일대가 편안하다는것을,멀원자는 수도 개경에서 먼 북쪽의 군사요충지라는것을 의미한다.

수도로부터 먼곳까지 성을 쌓고 진을 쳐서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나라의 안전을 도모한데서 지은 이름이다.

리조초에 이곳에 영원진과 유원진이 들어오면서 자와 자를 따서 영녕현으로 고쳤고 15세기에 녕원군으로 개편하였다.

처음으로

강서군

 

1136년에 서경(평양)의 몇개 고을을 합하여 강서현을 새로 내왔는데 강서란 대동강서쪽지역이란 뜻이다.

 

청산리

 

청산리는 푸른 산밑에 있는 마을을 의미한다.

처음으로

천리마군

 

보산

 

보산은 력사적으로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평양을 보호한 산이라는뜻이다.

이 산이 있는 리의 이름을 보산리라고 지었다.

처음으로

대안군

 

대안

 

옛날 이곳에 있던 이안동(귀안처럼 생긴 산의 아래에 있는 마을의 한자식표기)과 대리(큰 마을)에서 한글자씩 따서 대안리를 내왔다.

처음으로

평안북도

 

신의주구성시피현군룡천군철산군

동림군정주시녕변군구장군향산군

운산군태천군의주군삭주군창성군

동창군

처음으로

신의주

 

신의주라고 한것은 의주군에서 분리되여 새로 내온 고장이라 하여 새신자와 의주군의 이름을 따서 붙인 이름이다. 군이름 의주는 외래침략자들을 물리친 의로운 고을이라는 뜻이다.

 

압록강

 

압록강에 대하여 동국여지승람에는 물의 빛이 오리머리빛처럼 푸르다 하여 지은것이라고 전하고있다.

한편 압록강은 앞에 있는 강이라는 뜻의 옛날말 아리나리를 리두로 적은것인데 그후 다시 한자음으로 읽은것이라고 한다.

 

송한리

 

송한리는 오래전부터 불리워오던 이름이다. 옛날 이곳에는 외래침략자들의 침입을 급히 알리기 위하여 통신문을 새의 발에 달아 서울로 보낸곳이 있었다고 한다. 은 편지같은것을 보낸다는 뜻이고 은 편지나 알리는 글을 의미한다.

 

백토리

 

이 고장은 예로부터 흰흙이 나와서 유명하였다.

이 흙으로 도자기를 많이 구워 널리 팔면서 백토리라고 불리워졌다고 한다.

처음으로

구성시

 

구성

 

고구려시기에는 만년군이라고 하다가 구주라고 하였고 리조시기에는 구성군이라고 하였다.

만년, 구주, 구성은 다 외래침략자들을 여러차례나 물리친 구주성인민들의 투쟁과 관련되는 이름이다.

고려시기 강감찬장군은 쫓겨가는 적들의 길목을 구주성에서 막고 발악적으로 달려드는 놈들을 맞받아나가 족치였다.

이때 강감찬장군의 지휘하에 구주성인민들은 때마침 불어오는 비바람을 리용하여 적들에게 무리죽음을 주고 성을 지켜냈다.

이 구주싸움에서 고려군의 된벼락에 적군 10만가운데서 겨우 살아돌아간것이 몇천명밖에 안되였다고 한다.

그후 다시 원나라 침략군이 쳐들어왔을때 구주성안의 인민들은 박서의 지휘밑에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하여 쳐들어오는 적들과 한달이상이나 싸워 끝내 성을 지켜냈다.

그후부터 만년토록 오래갈 성이라는 뜻에서 만년군, 거북이처럼 오래갈 성이라는 뜻에서 구주, 구성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조양리

 

리조말에는 오봉, 둔산부락으로 나누어져있었다.

오봉마을은 봉우리가 다섯개로 된산이라 하여 오봉산으로 부르는 산밑에 있는 마을을 가리키고 둔산부락은 옛날 외적을 물리치기 위하여 군사가 주둔하였다 하여 둔산이라고 하는 산아래마을을 가리키였다. 1910년대에 두 마을을 합쳐 조양리라고 하였다.

아침부터 해빛이 잘 드는 양지바른 고장이라 하여 양지마을로 부르던 작은 부락을 중심으로 리가 구성되였다.

 

중방리

 

중방은 리조시기 방의 가운데지역마을이라는데서 온 말이다.

일부 사람들은 이곳에서 살던 한사람이 과거를 두번 보아 중지방이라는 벼슬을 얻었으므로 그 벼슬이름을 따서 이곳을 중방리라고 했다고 한다.

처음으로

피현군

 

피현은 이전부터 피나무고개라고 불리워왔다.

이 이름을 한자로 옮긴것이 피현이다.

 

충렬리

 

충렬리는 외래침략자들과의 싸움에서 방어사 김해암과 그의 처 백유가 공을 세운 마을이라 하여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처음으로

룡천군

 

룡천군은 고려시기에 안흥군, 룡구, 룡만부리라고 불러왔다.

리조초기에 룡천군이라고 하였다.

룡천군은 고려때에 자 달린 이름에서 일부는 천자 또는 산자를 붙이는 규례에 따라 지은 이름이다.

안흥은 이 고장에 벌이 많고 농사가 잘 되여 편안하고 흥하는 고장이라는 뜻으로 지은것으로 보이며 룡만, 룡주, 룡천은 다 옛날부터 물이 많은 고장이라 하여 자를 붙인 이름이다.

은 옛날에 흔히 물을 나타냈다.

처음으로

철산군

 

철산은 고려시기에 장령현이라 하고 일명 동산이라고도 하였다.

그후 철주로 고쳐부르다가 리조시기에 철산군이라고 하였다.

장령현은 길이 편안한 고을이 되라는 의미이고 동산은 구리쇠가 나는 산이라는 뜻이다.

자는 철이 나는 고을이라는 뜻에서 붙인것이다.

처음으로

동림군

 

동림이라는 말은 이 고장에 동림산성, 서림산성으로 불러오는 산성이 있는것으로 보아 동쪽숲이라는 뜻으로 지은것으로 보인다.

처음으로

정주시

 

고구려시기에는 의주였고 고려때에는 구주군이였다. 한때는 정원이라고 하였고 또 한때는 정주목, 오천이라고도 하였다.

리조시기에는 고려때의 이름을 그대로 써서 정주목으로 불러오다가 리조말경에 정주군이라고 하였다.

익주, 구주군, 오천은 자세히 알수 없으나 정주는 정원에서 자를 따고 행정구역단위인 자를 붙여서 지은 이름이다.

처음으로

녕변군

 

이전에 아초라는 이름으로 불러왔다. 고려시기는 연주, 무주로 나뉘여져있었다. 연주는 본래 밀운또는 안삭이라고 하던것을 고쳐지은 이름이다.

그후 고려말기에 연산부로 고쳤다.

무주는 본래 운남 또는 고청산이였으나 그후에 고친 이름이다.

그후 리조시기에 다시 무산으로 고쳤다가 다시 연산, 무산을 합하여 녕변이라고 하였다.

녕변은 변방을 안정시켰다는 뜻이다.

처음으로

구장군

 

구장이란 말은 옛날 룡산면 소재지였던 신흥마을과 시장부락을 합치고 이곳으로 면을 옮기면서 옛날부터 장이 서던 리라는 뜻에서 구장리라고 부른데서 유래되였다.

1910년대 행정구역개편때 옛구자를 공구자로 소리같은 한자를 바꾸어씀으로써 뜻은 바뀌였으나 옛이름 그대로 쓰이였다.

광복후 새롭게 녕원군에서 분리되여나온 군이다.

 

불무리

 

오래전부터 불리워온 이름이다.

리조시기 마을에는 큰 절간이 있었는데 부처가 있어 일년에도 몇번씩 여러지방에서 중들이 많이 모여들군하였다.

이 중들은 절간에 와서 며칠씩 묵으면서 정성스럽게 공양도 드리고 산발도 탔으며 해저물때까지 놀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 고장사람들은 중들이 놀던 마을이라하여 부처불자와 춤출무자를 써서 마을이름을 불무리라고 불렀다고 한다.

처음으로

향산군

 

천하절승의 명산인 묘향산을 끼고있는 군이다.

묘향산은 층암절벽으로 기묘하게 생긴 산세와 함께 향기로운 향나무로 풍치를 더욱 돋군다 하여 부른 이름이다.

처음으로

운산군

 

오랜 옛날 이 고장은 그리 번창하지 못하였다.

고려시기에 와서 북방개척사업이 활발하였는데 수많은 인민들을 동원시켜 성까지 쌓고 군을 두면서 운중군으로 불렀다.

리조시기에 와서 다시 운산군으로 개칭하였는데 그것은 지리적으로 보아 산이 높고 구름이 자주 끼는 높은 지대에 자리잡고 있는 고장이라는 뜻에서 지은 이름이다.

 

니답리

 

평안북도 운산군에 있는 이 리는 진흙이 많기로 유명한 고장이다.

비만 오면 찰진흙이 신발에 묻어 떨어지지 않아서 걷기가 여간만 힘들지 않았다.

또 조금만 가물어도 땅이 갈라지면서 곡식들이 마르기가 일쑤였다.

진흙을 밟는다는 뜻에서 니답리라고 불렀다고 한다.

 

봉지리

 

이 마을은 옛날에 숭충촌으로 불러왔다. 민간에서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옛날에 이마을에 충신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이름을 따라 숭충촌으로 불렀는데 그 충신이 병으로 죽자 왕의 봉서가 내려왔다고 하여 봉지라는 이름을 달았다고 한다.

 

좌리

 

평안북도 운산군에 있는 이 마을에는 옛날부터 한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중에서 여러명이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자리에 올랐는데 그중에서 좌정의 벼슬을 한사람까지 있었다고 한다.

그 사람의 관직에서 자를 따서 마을이름을 지었는데 그것이 좌리로 되였다고 한다.

처음으로

태천군

 

태천군은 고려초에 광화현, 녕삭(북쪽을 편안하게 하는 고을이라는뜻), 련삭(녕삭과 비슷한 음의 글자로 바꾸어쓴것 같다)으로 불렀다.

970년에 청천강이북의 큰 고을이라는 의미로 태주로 부르다가 고려말기에 자를 자로 바꾸어 태천으로 되였다. 1896년에 평안도를 두개도로 나눌때 평안북도에 속하게 되였다.

 

래하리

 

옛날 이 고장에는 심보 사나운 지주가 살았다고 한다.

해마다 지주놈은 작인들에게서 엄청난 소작료와 함께 뢰물을 받아먹었으며 그것도 성차지 않아 빈번히 문안인사까지 할것을 요구하였다.

지주놈의 요구에 조금이라도 반항하는 농군들에게는 가차없는 형벌이 들씌워지군한다는것을 잘알고있는 농군들은 농사일도 뒤로 미루고 빈번히 지주놈의 으리으리한 대문안에 들어서지 않으면 안되였다.

래하리는 바로 지주놈에게 매여사는 농군들이 자주 하례하러 오는 마을이라 하여 지은이름이라고 전한다.

처음으로

의주군

 

이 군은 고려때 룡만현 또는 화의 그리고 보주, 포주, 파주로 불리였다.

룡만은 룡이 있는 물굽이라는 뜻이고 보주에서 을 의미하는 고유한 우리 말 미리를 대신하여 쓰인것이고 포주, 파주는 보주의 와전된 발음으로 보인다.

화의에서 자를 따고 여기에 를 붙여 의주로 지은것 같으나 화의의 뜻과 정확한 유래는 알수 없으나 나라의 국경을 방어하는 의로운 고을이라는 뜻이라고도 한다.

1910년대에 의주군은 1개 읍, 15개 면, 185개리를 가지고있었다.

 

연무리

 

이 마을에는 예로부터 전해오는 정각이 있었다.

이 정각에서 옛날부터 군사들이 창던지기, 칼 다루기 등 여러가지 무술훈련을 맹렬히 하였다고 한다.

군사훈련이 한창일때에는 남녀로소 가림없이 구경을 하군했는데 이때 흥이 난 군사들의 훈련이 마치 춤추듯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 정각을 연무정이라고 불렀고 후에 고장이름으로 되였다고 한다.

 

연하로동자구

 

이곳에는 연두봉이라는 높은 산이있다.

일명 연대봉이라고도 하는데 옛날 우리 인민들이 외적의 침입을 각곳에 알리기 위하여 이 높은 산봉우리에 홰불을 올렸다.

그 산의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연하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연하로동자구로 되였다.

처음으로

삭주군

 

고구려때에는 좌물촌이라고 불렀다.

좌물촌은 압록강의 흐름을 따라 강 왼쪽에 자리잡은 고장이라는 뜻에서 왼좌자와 압록강을 말하는 자를 붙여서 부른 이름이다.

그후 1019년에 삭주로 고쳐졌는데 이렇게 이름을 붙인것은 청천강이북지대이며 압록강상류쪽에 있는 북쪽고을이라는 뜻에서 북쪽을 의미하는 자와 고을주자를 합쳐부른것이다.

 

구곡리

 

지난날에는 전나무가 많다 하여 전나무골이라고도 하고 가마를 붓던 골이라 하여 가마골이라고도 불러왔다.

그후 경치가 좋고 소나무가 무성하여 정각을 세우고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면서 이름을 송정동이라고 불렀다.

1952년에 송정리와 송신리를 합치고 그 이름을 구곡리라고 불렀는데 구곡은 이 고장에 아홉구비를 감돌아 흐르는 강이 있기때문이다.

 

당목리

 

옛날부터 이 고장 주변에 아가위나무가 많았으므로 그 이름을 그대로 따서 부른것이다.

당목은 아가위나무를 말한다.

 

판막로동자구

 

오래전부터 이 고장을 판막동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이 고장사람들이 오랜 옛날부터 주로 널판으로 막을 치고 살아왔기때문이였다.

그래서 예로부터 널막골이라고 하였는데 한자로 옮겨 써서 판막으로 되였다.

 

청성로동자구

 

리조시기에 이곳은 국방경비의 요충지대로서 성을 쌓고 청성진(일명 광평보라고 불렀다)을 두었다.

이때부터 압록강의 맑은 물이 흘러넘치는 강기슭에 자리잡은 성지라하여 청성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그것이 곧 고장이름으로 되였다.

처음으로

창성군

 

본래 장정현이라고 부르다가 자전땅에 성을 쌓고 여기에 주민들을 이주시키고 창주방어사를 두었으며 후에는 니성만호부를 두었다.

그후 창주와 니성을 합쳐서 창성군으로 이름을 고쳤다.

창주는 창고가 있던 고을을 의미하고 니성진흙성을 의미한다.

처음으로

동창군

 

예로부터 나라에서 관리하는 창고가 몇개 있었는데 그 방위에 따라 동쪽지대에 있는 창고는 동창으로, 남쪽지대의 창고는 남창으로 부른것이 점차 행정구역 이름으로 되였다.

 

대유로동자구

 

옛날 이 고장에는 느릅나무가 많아 느릅골로 불렀는데 주변에 부락이 늘어나면서 큰느릅골과 작은 느릅골로 부른 마을들이 생겼고 그후 한자로 옮겨쓰면서 대유리와 소유리가 되었다.

처음으로

자강도

 

리조때는 평안도에 속하였다.

이 도의 많은 지역이 강계도호부의 관할밑에 있었다.

청천강과 묘향산을 경계로 평안도가 평안남북도로 갈라지면서 이 지방은 평안북도에 속하게 되였다.

당시의 평안북도 강계군, 자성군, 후창군, 위원군, 초산군, 희천군과 함경남도 장진군 동문면을 합하여 자강도를 내왔다.

옛날부터 도의 이름은 도안의 중요한 두개 고을이나 도시의 이름가운데서 한자씩 떼여서 불렀으므로 새로 나온 이 도의 이름도 자성과 강계의 이름자를 따서 자강도라고 불렀다.

처음으로

강계시만포시희천시자성군중강군

위원군고풍군성간군

 

강계시

 

고려말에는 이곳에 진변, 진안, 진성, 진녕 등 4군을 두었다.

립석(오늘의 전천군 운송리 지역)과 이언 (오늘의 강계시 고영동 지역)을 합쳐서 석주라고 하였다. 돌이 많고 고을이라는 뜻이다.

그후 석주를 강계부라고 고쳤다. 장자강과 북천, 남천의 어구에 있는 지역이라는 뜻이다.

 

향로동

 

리조시기에는 강계부 공귀방에 속해있었다.

평안북도 강계군 공북면 향하동이라고 하였다.

향나무가 많이 자라는 청계물이 흐르는곳이므로 향하동이라고 한것이다.

자강도가 새로 나온 때에는 자강도 강계군 공북면 향하동(그후에는 향하리)이라고 하였다.

향하리를 분리하여 향로리를 새로 내왔다.

향하리와 로동(갈골;갈이 잘 자라는곳)의 일부가 합쳐서 조직된 리이므로 그 이름을 향로리라고 한것이다. 향로리의 은 향하리에서 온것이고 는 로동에서 따온것이다.

 

야학동

 

광복전에는 평안북도 강계군 동면 동부동이라고 하였다. 면동쪽에있는 동이라는 뜻이다.

그후 동면이 읍내면, 강계면으로 고쳐졌다.

자강도가 나오고 강계면이 시로 되면서 이곳은 강계시 동부리로 되였다.

강계시 동부리 일부를 분리하여 야학동을 새로 내왔다.

왁새가 많이 날아오는 등판(왁새등이라고 한다)이 있는곳에 자리잡은 동이므로 야학동이라고 한것이다.

야학은 왁새나 두루미를 의미하였다.

처음으로

만포시

 

만포라는 말은 한자뜻 그대로 배들이 가득한 강 또는 포구라는 뜻이다.

옛날부터 이곳에는 압록강을 따라 오르내리는 배가 많이 와서 머물러있었으므로 이고장을 배로 가득찬 압록강가에 있다 하며 만포라고 한것이다.

 

세검정

 

세검정은 자강도 만포시 만포읍 압록강기슭 절벽우에 있다.

압록강 수면에서 90m나 되는 절벽우에 솟아있는 세검정은 유유히 흐르는 2천리 장강을 발아래에 굽어보며 그 주위 경관이 뛰여나게 아름다와 예로부터 관서 8의 하나로 유명하였다.

세검정은 일명 복호정이라고도 부르는데 다른 나라 군대가 조선을 침입해왔을때 박남여장군이 지휘한 조선군대가 이곳에서 적들을 모조리 격멸소탕하고 피묻은 칼을 강물에 씻었다하여 후에 여기에 루정을 세워 세검정이라고 불렀다.

이후 세검정이라는 이름은 건물이름일뿐만아니라 이 일대의 수려한 경치를 말하는 대명사로 되였었다.

그러나 이와 같이 귀중한 유적인 세검정은 일제강점자들에 의하여 불에 타버리고말았다.

지금 여기에는 세검정 건물(복호루)터 바로 곁에 옛날부터 복호루와 함께 있던 망미정정자만이 아담한 모습으로 앉아있으며 그 밑 절벽에는 큰 글자로 락화암이라고 새긴것이 있다.

락화암은 불관이라는 어여쁜 녀성이 봉건관료배들의 모욕에 반항하여 이곳에서 압록강 푸른 물에 몸을 던져 죽음으로써 절개를 지켰다고 하여 후세에 그를 기념하는 비를 세우고 절벽에 락화암이라는 글자를 새겨놓았다고 한다.

 

남상리

 

리조말에는 평안북도 강계군 고산면 호린개(허린개라고도 한다)였으며 한자로는 허인포라고 써왔다.

호린개(허린개)라고 불리워온 강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호린개(허린개, 허인포)호린(허린)은 그 뜻이 명백치 않다.

그후 이곳에는 남산동과 마시동이 나왔다.

남산동은 남산령의 웃쪽에 있는 마을을 가리키고 마시동은 옛날에 룡마가 울부짖은적이 있는 마을을 가리키였다. 그후 2개 동을 합쳐 남상리로 하였다.

 

봉화동

 

옛날 봉화를 올리던 봉우리가 있는 동이므로 그 이름을 따라 동이름을 봉화동이라고 하였다.

지난날 외래침략자들이 쳐들어올때 통신수단의 하나로 봉화를 올리던 연두봉이 있다.

이것이 동의 특징으로 된다 하여 그 이름을 딴것이다.

 

희천시

 

이 고장의 이름이 기록에 나타나는것은 고려시기부터이다.

고려시기 처음에는 위성이라고 하였는데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위엄있는 성이 있는 고장이라는뜻에서 붙은 이름이다.

그후 진을 설치하고 청새진(청천강 맑은 물이 흐르는곳에 설치한 방위진)이라고 하였다.

고을이름에 자를 붙이면서는 위주라고 하다가 다시 희주라고 고쳐불렀다.

위주는 위성의 자를 딴것이고 희주는 외적을 물리친 공로로 하여 빛나는 고을이라는 뜻을 나타내였다.

리조시기에는 이곳에 군을 내오고 희주군이라고 하였다가 희천군으로 고쳤다.

고을이름에 붙인 자 대신에 자를 쓴것이다.

처음으로

자성군

 

자작마을의 성을 중심으로 군을 내왔으므로 자성군이라고 한것이다.

자성의 는 자작마을 즉 자작나무가 많은 마을을 중심으로 하는 고장이라는것을 나타내고 은 이곳에 쌓은 성 또는 고을을 의미한다.

 

대남리

 

리조말에는 자성군 관동면 평상동이라고 하였다.

웃쪽에 있는 벌마을의 뜻이다.

이곳에는 평상동과 삼형제동이 있었다.

옛날 어떤 삼형제가 벌을 개척하고 살기 시작한곳이라 하여 삼형제동이라고 하였고 그후 광복되기 직전에 삼형제동은 평상동에 편입되였다.

그후 큰 들메나무가 많다 하여 마을 이름을 대남리라고 하였다.

처음으로

중강군

 

압록강의 중간에 자리잡고있는곳이라고 하여 중강이라는 면이름이 있었는데 광복후 자성군의 중강면과 장토면을 통합하여 중강군을 내왔다.

지역적으로 보면 이곳은 리조시기에는 함경남도 삼수군에, 후에는 평안북도에 속했다가 1896년 전국을 13도로 나눌때 평안북도에 들어갔었다.

 

장흥리

 

리조시기는 함경도 삼수군 려연촌이였다. 그후 려연군이 나오면서 거기에 속하였다. 리조말에는 평안도 후창군 하산면 리평동, 상장, 중장으로 갈라졌다.

리평동은 배나무가 많은 벌마을을 의미하고 상장은 노루가 많은 골의 웃쪽에 있는 마을을 의미하며 중장은 노루가 많은 골의 가운데에 있는 마을을 의미하였다.

세개 마을을 합쳐 장항동이라고 하였다.

그후 장흥동으로 고쳤다.

노루가 많은 골이라는 뜻이다.

처음으로

위원군

 

위원군이란 이름은 위수 (오늘의 위원강)류역의 언덕진 지대에 자리잡은 군이라는데서 지은 이름이다.

이 군은 1440년대에 생겼는데 1450년대에 없어졌다가 1460년대에 다시 나왔다.

평안북도에 속하여있다가 광복후 자강도에 들어왔다.

 

룡탄리

 

리조시기는 평안도 (후에 평안북도) 리산군(후에 위원군) 창평리라고 하였다.

옛날 창고가 있던 벌마을이라는 뜻이다.

리조말에 이곳에는 피목동(피나무가 많은 마을), 동동 (동쪽마을), 석포동(돌이 많은 개울이 있는 마을), 창평리, 갑고개리(겹고개 즉 고개가 겹쳐있는 산밑의 마을)등이 있었다.

그후 창평, 피목동이 합쳐져 룡탄동으로 되고 갑고개리가 갑령동으로 되였으며 석포동과 동동이 석포동으로 개편되였다.

룡탄동은 룡이 살다가 하늘로 올랐다는 여울이 있는 마을임을 가리키고 갑령동은 갑고개가 있는 동임을 의미하였다.

자강도 위원군 위송면 룡탄리, 갑형리, 석포리를 합하여 위원군 룡탄리를 내왔다.

본래의 룡탄리가 새 리의 중심부락으로 되였으므로 그 이름을 따른것이다.

처음으로

고풍군

 

지난날 초산군안에 있던 고면, 풍면의 이름에서 자와 자를 따서 광복후 새로 조직된 군이름이다.

 

월명리

 

리조말에는 평안북도 초산군 백면 영풍리와 월악리가 있었다.

영풍리는 땅이 좋아 자주 풍년이 드는 마을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고 월악리는 달이 뜨는 산밑의 마을이라는 뜻이다.

고중면이 고면으로 개편되면서 이곳은 고면 영풍리와 고면 월악리로 되였다.

그후 초산군 고면 월악리와 영풍리가 합쳐져 고풍군 월명리로 되였다.

달이 떠올라 온 마을을 밝게 비친다 하여 리이름을 월명리라고 하였다.

처음으로

성간군

 

성간이란 말은 성성자와 방패간자를 써서 성앞에 흐르는 강들이 외적의 침입을 막는 방패로 된다는 의미를 담고있는데 리조때부터 불리여오는 이름이다.

 

무선리

 

지난날 이곳에는 무선동, 적포동 등 여러 마을이 있었다.

무선동은 선녀들이 내려와 춤추었다고 하는 무선골의 어구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며 적포동은 붉은 쇠돌물이 흐르던 골 (적포골)의 어구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이 마을들은 리조말기에는 평북도 강계군 간북면 북동에 속하였다.

북동은 북리로 되였다가 전천군 간북면 북리의 일부 지역을 분리하여 새로운 리를 내오고 그 이름은 지난날 불러오던 무선마을의 이름을 그대로 따라 무선리로 하였다.

 

백암리

 

지난날 이곳에는 백암동과 적목동 등 마을이 있었다.

백암동은 흰 바위가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고 적목동은 적목나무가 많은 마을이라는 뜻이다.

이 마을들은 리조말기에는 평안북도 강계군 간북면 남동에 속하였다.

그후 전천군 간북면 남리를 분리하여 새로운 리를 내오고 그 이름은 지난날부터 불러오던 백암마을의 이름을 그대로 따라 백암리로 하였다.

처음으로

황해남도

 

고려시기에는 자비령을 관문으로 하여 그 안쪽지역의 도라는 의미에서 관내도라고 하였다.

그후 전국을 5개 도로 나눌때에는 서해도 (서쪽으로 바다를 낀 도)였다.

리조초기에는 풍주의 자와 해주의 자를 따서 풍해도라고 불렀다.

1417년에 풍주의 도호부를 황주로 옮기면서 황주의 자와 해주의 자를 붙여 황해도로 고쳤으며 광복후 이 도를 두개 지역으로 나누면서 남쪽지역을 차지한 도라는 의미에서 황해남도라고 하였다.

처음으로

해주시벽성군강령군장연군송화군

은률군재령군배천군연안군

 

해주시

 

오랜 력사를 가진 도시이다.

고구려때에는 못이 있는 고을이라는데서 유래된 이름인 내미훌이라 하였고 후기신라때에는 폭포못이라는 뜻에서 폭지로, 고려때에는 바다에 림한 고을이라는 의미로 해주로 불렀다.

그밖에 못성이라는 뜻에서 지성, 긴못이라는 뜻에서 장지, 나라의 서쪽지역을 안정시킨다는 의미에서 안서라는 이름도 가졌었다.

 

선산동

 

선녀산의 준말인데 산의 모양이 선녀들이 내려와 춤추듯하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전한다.

리조말에 선산동이라 지은 이름이 그대로 쓰이고있다.

처음으로

벽성군

 

벽성군의 은 푸른 돌이라는 뜻이고 은 성이나 성시를 의미하므로 푸른 돌이 많은 고을이라는것을 나타내는 이름이다.

리조시기에는 해주군에 속해있다가 그후 해주부와 벽성군으로 갈라져나왔다.

처음으로

강령군

 

강령군의 고구려때 이름은 부진이, 고려때 이름은 영강현, 백령현이였다.

리조시기에 장연현에 소속되였다가 백령도와 영강현이 합치면서 영강현의 자와 백령도의 자를 따서 강령군이라 하였다.

낮은 언덕과 펑퍼짐한 벌로 된 평지대인 이 군의 지대적특성과 관련하여 옛날에 솔벌, 솔밭, 솔골이나 긴재라고도 불리였다.

강령은 리조시기까지 군으로 존재하고 없어졌다가 광복후 다시 강령군으로 되였다.

처음으로

장연군

 

장연군의 이름은 고구려때부터 쓰이여오는 이름이다.

이고장이 석회암지대로서 길고 큰 못과 소, 자연동굴이 있는 자연지리적특성을 지니고있는것과 관련된 이름이다.

글자 그대로는 긴 못이란 뜻이다.

처음으로

송화군

 

고구려때에는 마경이 또는 판마곶이라고 불렀다.

리조시기에는 푸른 소나무숲이 우거진 지대임을 나타내는 청송현과 곶의 옛날말인 가수에서부터 변천된 가화현에서 자와 를 따서 송화군이라고 지었다.

처음으로

은률군

 

고구려때에는 밤곶이라는 의미의 한자말인 률구, 밤내라는 의미의 한자말인 률천으로 부르다가 고려초에 은률현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은률과 풍주가 합쳐지면서 풍률이라고 부른적도 있다.)

률구의 자와 은정현의 자를 따서 붙인 이름으로서 군의 자연지리적특성이 반영되여 있다.

처음으로

재령군

 

이 군은 고구려때에는 큰성이라는 뜻으로 나라의 수도를 가리키는 옛날말의 리두표기변종으로서 한성군, 한흘이라고 불렀고 땅성, 넓은 벌판이 있는 성이라는 뜻의 옛날말을 리두로 표기한 식성군, 내흘이라고도 불렀다.

식성은 또한 ()가 나는 땅이라는 옛날말의 리두표기로서 식성과 유래가 같다고 본다.

한때 중반, 안주로 불리우다가 다시 재령으로 고쳤다.

처음으로

배천군

 

배천군은 고구려때에는 도랍현, 치악성이라고 불리웠고 후기신라때에는 구택이라고 하였다.

치악이란 꿩산을 의미하고 구택은 꿩이 우는 못이라는 뜻이다.

고려초에는 백주, 개흥 등 여러가지 이름으로 씌였고 리조시기에는 배천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고려시기에 고을이름에 붙은 자 대신 자나 자를 달게 된것과 관련하여 생긴 이름이고 어음탈락현상에 의하여 백천이 배천으로 된것이다.

처음으로

연안군

 

연안군의 고구려때 이름은 동음흘, 동삼흘, 시염성이고 후기신라때의 이름은 해고이다.

해고라는 이름에는 바다와 언덕이라는 말로 이 지대의 지리적특성을 나타내고있다.

고려초에는 고구려때의 시염성에서 자를 따서 염주라고 했는데 고기와 소금이 나는곳을 의미한다.

염주를 영웅, 석주, 복주, 온주 등 여러가지로 불렀으며 고려말경에 연안이라고 고쳐지었다.

역시 이고장의 지대적특성과 관련된 이름이라고 볼수 있다.

처음으로

황해북도

 

사리원시개성시송림시황주군은파군

린산군평산군금천군토산군장풍군

처음으로

사리원시

 

사리원이라는 이름은 리조초부터 불리여졌는데 사리라는 마을이름에서 유래되였다.

광복전에는 봉산군에 속해있다가 1947년에 사리원시로 되였다.

 

구룡리

 

본래 이곳에 옛날부터 구새몰이라고 하는 마을이 있었는데 구새몰은 9개의 샘이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이것을 한자로 옮기면서 구룡리라고 고쳐지은것이다.

 

철산동

 

동이름 철산은 옛날부터 한철산이라고 불러오던 이름에서 따온것이다. 한철산은 큰 철산이란 말인데 전해오기를 옛날에 산에서 철성분의 물이 흘러내렸다 하여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처음으로

개성시

 

개성시는 오래동안 고려의 수도였다.

이고장은 고구려시기에는 동비홀과 부소압이라는 두개의 지역으로 나뉘여져있었다.

후기신라때에 동비홀은 개성, 부소압은 송악이라고 그 이름을 고치였다.

동비홀의 동비, 을 각각 나타내는 옛날말들의 리두표기라고 볼수 있다.

개성은 성을 연다는 뜻을 가진 이름으로서 동비홀로 표기된 본래이름과 관련되여있다고 볼수 있다.

부소압은 소나무산이라는 뜻을 가진 옛날말의 리두표기이다.

송악의 뜻은 소나무산인데 부소압으로 표기된 본래이름의 뜻을 한자로 옮긴것이다.

고려사에는 강충이라는 사람이 바위로 된 산에 소나무를 심어서 송악이라고 하였다고 씌여있다.

고려시기에 송악산 양지바른곳에 수도를 옮기면서 개성과 송악을 합쳐서 개주라고 불렀다.

개주에서 자는 개성자를 가져온것이며 는 행정구역단위이름이다.

수도라는 뜻에서 개경, 황도등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리조시기에 와서는 송도, 개성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불리웠는데 송도송악, 수도를 뜻한다.

 

고려동

 

고려라는 말은 본래 고구려라는 말이 줄어든것인데 자는 고주몽의 성이며 자는 구려가 생략된것으로서 구루를 뜻한다.

구루란 산, 성을 이르는 옛날말이다.

 

송악동

 

송악산아래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이산의 이름을 붙이였다.

송악이라는 마을은 고구려때에 부소압(부소누또는 보소누)이라고 불러오던 말을 한자로 옮겨놓은것인데 여기서 보소는 소나무를 뜻하는 옛날말이며 는 산을 뜻하는 옛날말이다. 소나무가 많은 산을 뜻하는 말이다.

 

만월동

 

정월보름에 달맞이를 하던 만월대가 있는곳이라고 하여 만월동이라고 불렀다.

지난 시기에는 이곳을 리정리(배우물골을 이르는 이름이다)라고도 하였다.

고려시기 이곳에 고려의 왕궁이 자리잡고있었다.

 

선죽동

 

이전에는 태묘동으로 불러왔다. 태묘동이라는 이름은 태묘의 사당이 있는곳이라 하여 붙인 이름이다.

선죽동은 선죽교가 있는곳이라 하여 붙인 이름이다.

선죽교라는 다리이름은 정몽주가 리성계의 아들 리방원이 보낸 자객의 철퇴에 맞아 다리에서 죽었는데 그후에 다리옆에 정몽주의 절개를 상징하는 참대가 자라났기때문에 다리이름을 선죽이라고 불렀다는 전설과 관련된다.

 

판문점

 

이전부터 이고장을 판문점이라고 불렀다. 판문점은 옛날 역참의 하나였다고 한다.

판문점에서 판문은 널문을 뜻하는 말로서 옛날에 널문만 만들어놓고 객주집으로 사용한것과 관련된다고 한다.

처음으로

송림시

 

송림이란 말은 세종실록지리지에 송림현이 나오는것으로 보아 리조시기부터 전하여온다고 볼수 있다.

그후에 송림방, 송림면, 송림리 등의 행정구역지명이 있던것으로 미루어보아 송림시의 이름 송림은 마을이름에서 유래된것이다.

송림이란 말은 한자말로서 소나무수림이란 의미인데 그고장에 옛날부터 푸른 소나무가 무성한데서 생긴 이름이다.

 

오류동

 

오류는 그전에 오리골이라고 부르던 고장이름이다.

오리는 이 마을 중심에 있는 산의 모양이 오리같다 하여 붙인 이름에서 따온것이다.

오리골을 한자로 옮기면서 오류동이 되였다.

지금은 다섯그루의 버드나무가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라고도 한다.

처음으로

황주군

 

넓은 들판이란 뜻과 누른땅이라는 뜻을 나타낸다.

고구려때에는 동흘이란 이름을 가졌었는데 들판을 의미하는 리두표기이다(웃들골, 웃들판골을 의미하는 우동어흘이라고도 하였다.)

후기신라때에 도리와 관련되는 말인 취성이라고 고쳤으며 고려시기 처음에는 땅빛과 관련하여 검다는 말로서 고령으로 부르다가 황주로 고쳐불렀다.

 

흑교리

 

옛날부터 불러오던 흑천이라는 내의 이름에서 유래된것이다.

흑천은 옛날에 검은개라고 불러오던것을 한자로 옮긴것이다.

검은개는 비가 오면 누른 진흙물이 흐른다 하여 생긴 이름이다.

흑천에 다리가 있는곳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다리이름을 따서 붙인것이 흑교리이다.

처음으로

은파군

 

은빛같이 눈부신 물결이라는 뜻이다.

이고장에 있는 복덕소의 물결이 아름답기때문에 마을이름을 은파리라고 하였는데 군소재지가 이곳에 생기면서 은파군으로 이름을 달았다.

 

적성리

 

리이름 적성은 적성동이라고 불러오던 마을이름을 따온것인데 붉은등즉 붉은 고개라는 뜻이다.

원래 붉은등이라고 불러오던것을 한자로 옮겨서 적성이 되였다.

이 지대에는 붉은 흙으로 된 산등성이가 많은것이 특징이다.

처음으로

린산군

 

린산이란 말은 리조시기에 있은 방의 이름인 기린방에서 유래한것이다.

리조말기에 방을 면으로 고치면서 기린방에서 자를 따고 이 지대에 산이 많다 하여 자를 붙여서 만든 이름이다.

린산이란 말은 옛날 고장이름들에서 기린 자가 메돼지나 노루, 사슴과 같은 산짐승들이 많은곳을 가리킬때 쓰인것으로 보아 산짐승이 많은 산이라는 뜻으로 쓰인 이름으로 보인다.

마을뒤산의 동굴에서 기린이 나왔다는 전설에 의하여 생긴 이름이라고도 전한다.

처음으로

평산군

 

고구려때에는 대곡군(큰 골짜기의 성이라는 뜻)혹은 다지흘(앞의 이름에 대한 옛날말의 리두표기)이라 하였고 후기신라때에는 영풍군(길이 풍년든다는 뜻)으로, 고려때에는 평주로 불렀다.

리조시기에 이곳에 있는 평나산의 이름에서 유래하여 평주라고 하다가 고을이름을 자 대신 또는 자로 바꾸면서 평산으로 고쳤다.

 

청수리

 

리조말에 청수동이라 부르던 마을이름에서 따온것이다.

이 고장은 옛날 검은 우물이라고 불러오던것인데 청수동으로 고쳐지었다.

검은 우물이라고 한것은 굴에서 나오는 물이 검게 보인다 하여 부르는 이름이고 청수동이라고 한것은 맑은 내가 마을앞으로 흐른다 하여 고쳐지은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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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천군

 

이 고장에 있는 금교역에서 자를, 오도천에서 자를 따서 지은 이름인데 17세기 중엽에 내온 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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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산군

 

미당리

 

미당은 미륵당의 준말인데 리조말 미륵동에서 따온것이다.

미륵은 돌부처를 의미한다.

현재의 미당리의 소재지마을은 군량동인데 군량산에서 온것이다.

둥근 산에 이영을 덮어 곡식낟가리처럼 보이게 하여 군량이 많은것처럼 적군을 속였다 하여 군량산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처음으로

장풍군

 

장풍이라는 이름은 장단군의 자와 개풍군의 자를 가져온것이다.

장단군은 고구려때에 장천성혹은 야야, 야아라고 썼으며 고려때에는 장단이라고 하였다.

장천은 긴 벼랑아래의 옅은 물이라는 뜻을 나타내는 옛날이름이며 장단은 길고 빠른 여울이라는 뜻을 나타내는 한자말이다.

고려사에는 장단도에 대하여 강의 량안에 청석이 벽처럼 서있는것이 수십리인데 그것을 바라보면 마치 그림과 같다고 씌여있다. 야야, 야아는 멀다는 뜻을 가진 옛날말이다.

 

월고리

 

옛날부터 불러오는 이름으로서 달고개를 한자로 표기하여 쓰는 과정에 변한것이다.

여기서 은 달을 나타내며 는 고개가 줄어든 말로서 소리같은 한자로 옮긴것이다.

월고(달고개)는 달이 뜨는 동쪽고개를 나타낸다.

민간에서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고장에 고개가 많아 친척집에 갔다가도 눈이 오면 여러달을 묵어야 한다고 한데서 달고개(달을 묵어야 넘어오는 고개)라는 이름이 붙었다고도 한다.

처음으로

강원도

 

강원도는 강릉의 자와 원주의 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처음으로

원산시고산군통천군고성군김화군평강군

철원군판교군법동군

 

원산시

 

고려때에 마늘처럼 둥근 산이라는 의미에서 원산이라고 지었다.

리조시기에 와서 원산 또는 원산포라고 불렀는데 이것들도 역시 마늘처럼 둥근 산을 낀 고장이라는 뜻의 이름이다.

 

와우동

 

와우란 한자로 소가 누운것 같다는 뜻인데 산의 모양이 누운 소와 비슷하다고 와우산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그 산을 끼고있는 마을이라하여 와우리라고 하였다.

 

학천리

 

송학리의 자에다 남대천의 자를 붙여 지은 이름이다.

원래 널리 만든 다리를 놓고 다니는 고장이라 하여 널다리라고 고유한 조선말로 불러왔는데 후에 소나무가 많아 학이 날아드는 고장임을 표현하여 송학이라고 부르게 되였다.

사철푸른 기상 안고 꿋꿋이 서있는 소나무와 오래 사는 학은 조선인민이 사랑하는 나무와 새의 하나이다.

소나무와 학이 많은 제고장에 대한 자랑과 긍지, 마을을 감돌아 흐르는 남대천에 대한 애착이 학천이라는 이름속에 슴배여있는듯 하다.

처음으로

고산군

 

1952년에 정식 군의 이름이 되였다.

리조시기부터 높은 산이라는 의미에서 고산을 붙여 리와 면의 이름을 지어왔었다.

 

연호리

 

옛날 이고장을 즈늪이라고 불렀는데 이 이름을 한자로 옮긴것이 연호리이다.

처음으로

통천군

 

고려때에 와서 이곳이 이 일대에서 교통의 중심지라고 하여 통주라고 불렀다.

그후 리조시기에 주자가 달린 고을이름을 모두 천이나 산자로 고치게 된것과 관련하여 통주의 통자에 천자를 붙여 통천이라고 지었다.

 

자산리

 

마을에 있는 자산산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이다. 왜적을 쳐이긴 자산이라는 사람의 위훈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하여 산의 이름을 자산산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처음으로

고성군

 

고성군은 옛이름을 변함없이 이어부르는 군의 하나이다.

고성은 높은 지대의 고을이라는 뜻이다.

고려시기에도 리조시기에도 고성군이였다.

 

온정리

 

더운물샘이 있는 마을임을 나타내는 온정리, 온정리는 금강산, 외금강, 온정령 등의 이름과 함께 금수강산 조선의 절경을 자랑하며 어린이들의 노래에도 높이 불리운다.

온정리에는 양진리옛성과 신계사터를 비롯한 귀중한 력사 유물과 유적들이 많다.

 

월비산리

 

마을에 있는 월비산의 이름을 딴것이다.

산뒤에서 달이 날아오르는것처럼 보이는 산이라고 하여 월비산이라고 하였다.

 

삼일포리

 

예로부터 관동8의 하나로 이름높은 삼일포가 있는곳으로서 1952년에 고성군 량정리와 사평리를 합하여 삼일포리라고 이름지었다.

김일성주석께서는 옛날 어떤 왕이 하루동안 놀려고 이곳에 왔다가 삼일포의 경치가 너무도 황홀하여 3일동안 놀고갔다는 내용으로 그 유래를 밝혀주시였다.

 

운곡리

 

운곡리는 내운리(구름골 즉 구름이 많이 끼는 마을의 안쪽)와 만곡리 (너럭바위가 많은 골)에서 각각 두번째 글자들을 따서붙인 이름이다.

운곡리에는 임진조국전쟁시기 이 고장에 쳐들어온 왜놈들이 골짜기에 자욱히 낀 구름때문에 이 마을을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쳤다는 전설이 전해지고있다.

처음으로

김화군

 

고려때에 와서 금이 나는 벌이라는 금벌이라는 리두표기를 잘못써서 김화로 바뀌여졌다.

그후부터 계속 김화군으로 불리여왔다.

처음으로

평강군

 

 

고려시기에 이름을 평강으로 불렀는데 벌판에 강이 있는 고장이라는 뜻에서 평강이라고 하다가 그와 음이 같은 평강이라고 쓰인듯하다.

 

옥동리

 

옥동리는 옥녀봉의 옥자를 딴 마을이름이다.

옥녀봉에는 그 옛날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도 하고 즐기였다는 전설이 있다.

처음으로

철원군

 

철원군은 고구려때 쇠가 나는 오목한곳이라는 뜻에서 철원군으로 불리였다.

고려말경에 철원이라 고쳤는데 써오는 과정에 글자가 바뀐것이다.

철원군은 리조시기를 거쳐 지금까지도 그대로 쓰이는 이름이다.

 

밀암리

 

리조말기에 생긴 동네이름인데 옛날부터 바위에서 꿀을 떠낸 마을이라는 뜻에서 꿀바위로 부르던곳이다. 한자식표기로 밀암리라고 하였다.

바위에서 꿀이 흐를 정도로 꿀이 많은곳으로 이름난 고장이다.

조선의 고장이름의 유래를 말해주는 전설들에는 바위에서 꿀이나 술, 쌀 등이 솟아났다는 내용이 많다.

여기에는 예로부터 보배로운 조국산천의 혜택을 받아 잘살기를 바라는 조선인민의 소박한 념원, 풍요한 강산에 대한 자랑과 긍지가 반영되여있다.

처음으로

판교군

 

1952년에 이천군과 곡산군의 몇개 리를 떼내여 판교군을 새로 내왔다. 이 고장에 있는 다리이름인 너더리는 고유한 우리 말 널다리가 바뀌여 쓰인것인데 그것을 다시 한자로 옮겨 판교라고 하였다.

강원도 일대에는 계곡을 흐르는 개울이 많고 옛날에는 기본적인 건설재료가 나무와 돌이였던것만큼 이고장의 풍치를 론할 때 널다리가 주요한 요소의 하나였음을 말하여주는 이름이다.

처음으로

법동군

 

마전리

 

이 고장은 옛날 고유한 조선말로 말굴리라고 하였다.

이 이름은 공납물을 싣고가던 말이 굴러떨어진 마을이라는데서 나온 이름인데 마을의 지형이 험준함을 의미한듯하다. 말굴리를 한자로 옮긴것이 마전리이다.

처음으로

함경남도

 

함흥의 자와 경성의 자를 따서 함경도라고 하였으며 후에 남도와 북도로 갈랐다.

처음으로

함흥시신포시단천시영광군장진군

정평군고원군홍원군북청군

 

함흥시

 

함흥이라는 고장이름은 리조초기 함주의 , 번흥하는 고장이 되라는 자를 붙여 지은것이다.

고려시기 이 지역은 큰벌이 있는 고장이라 하여 큰벌이라는 뜻의 한자말로 함평이라고 불렀다. (크다, 의 옛날말, 을 비슷한 한자음으로 표기한것이고 은 들과 벌을 나타내는 한자이다.)

고려말에 다시 함주로 고쳤다가 리조시기에 이르러 함흥으로 지은 이름이 지금까지 쓰이고 있다.

 

삼일동

 

3.1봉기때 함흥에서 제일 선참으로 반일시위가 벌어진곳이라는 의미에서 광복직후 동의 이름을 삼일동이라고 부르게 되였다.

 

부민리

 

이곳은 옛날부터 보름골이라고 불리여졌는데 유명하게 곱고 가는 보름새베를 짰기때문이라고 한다.

리조말기와 그 이후 여러번 행정구역이름이 개편되였으나 부민리라는 이름은 베낳이를 잘하여 사람들이 부유해지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오늘까지도 계속 그대로 쓰이고있다.

예로부터 길쌈의 하나인 베낳이는 순수 수공업적인 천짜기방법에 불과하지만 방직기 못지 않게 가늘고 질긴 천을 짜내는 조선인민들의 재능, 특히 조선녀성들의 근면성과 섬세성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생산활동이였다.

 

* 보름새란 날실을 15새로 하여 짠 천이라는 뜻으로서 올이 썩 가는 날실로 짠 고운 베나 모시 같은것을 말한다.

여기서 란 천의 날을 세는 단위인데 날실 마흔올을 한새로 친다.

처음으로

신포시

 

신포는 시신개라는 고유한 조선말 지명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시신개는 이고장을 흐르는 개울이름인데 그것은 개울물이 장마때마다 마을일대를 씻어내리기때문이였다.

1910년대에 시신개신개를 한자로 옮겨 신포라는 이름이 생겼다.

 

오매리

 

오매리의 지난날 이름은 오미촌이였다.

오미오구미의 준말인데 이 마을이 속후에서 다섯번째 구미에 있다는데서 붙인 이름이다.

여기서 는 다섯, 구미는 바다물에 패인 곳을 말한다.

리조말기에 오미를 비슷한 한자음인 오매로 옮겨썼고 그후 오매리로 되였다.

처음으로

단천시

 

이고장의 삼국시기 이름은 오림금촌이였다.

한것은 오씨, 림씨, 김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살았다는데서 유래된것이다.

고려때에 인민들은 복을 주는 개울이 있는 고장이라는 의미에서 복주라고 부르다가 고려말기에 단주라고 고쳤다.

리조초기 큰 고을에만 를 주도록 행정구역단위를 정리하는데 따라 단주의 자에 이고장에 큰 강이 있다는 지리적특성을 반영한 자를 붙여 단천이라고 고쳤다.

그전에 이고장에 시루같이 생긴 산 시루메(증산)가 있다는데로부터 시루메(증산)라고 불리운적도 있었다고 한다.

 

직절동

 

직절동이라는 이름은 다음과 같은 전설로부터 유래된것이다(리조시기에는 서상동이라고 하였다).

18세기 이 고장에 살던 한사람이 열심히 무술을 련마하여 무관벼슬에 올랐다.

그러나 량반통치배들은 그 사람의 신분이 비천하다 하여 시기하고 멸시하던 끝에 죽여버렸다.

놈들은 격분하여 항거하는 그의 안해마저 죽였다.

후에 사람들은 남자는 충직하고 녀자는 절개가 높다는 뜻으로 남직녀절을 칭찬하면서 마을이름에 직절이라는 말을 붙였다고 한다.

예로부터 부패한 봉건통치배들을 미워하며 충직하고 절개있는 사람들을 찬양하고 후세에 전하려는 인민들의 소망이 어려있는 고장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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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군

 

옛날 삼을 많이 심고 베낳이를 많이 한 이고장을 을 의미하는 녀진말 오로를 붙여 지었던 군이름 대신에 새로 지은 이름이다.

김일성주석께서 여러차례 걸쳐 현지지도의 거룩한 자욱을 남기신 영광스러운 고장이라는 뜻을 담고있다.

 

풍상리

 

풍년이 드는 고장의 웃마을이라는 뜻의 이름이다.

이 리의 옛이름은 만석곶치(만석의 곡식을 낸다는 고장의 산이름)였는데 이것은 이고장이 예로부터 농사가 잘되는곳이였음을 의미한다.

리조시기 고유어로 된 마을이름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풍자를 달아 농사가 잘되고 언제나 풍년이 온다는 뜻을 담았다.

 

흥봉리

 

흥봉은 리안의 한 마을이름인데 흥하는 봉우리라는 뜻이다.

마을이름이 흥봉으로 된것은 옛날 여기에 봉우리 일곱개가 있었는데 후에는 모두 농사짓기 좋은곳으로 변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되였다고 한다.

처음으로

장진군

 

장진이란 이름은 1667(리조 현종8)에 이곳이 독자적인 행정단위로 되면서 생겼다.

그러나 이 이름의 유래는 훨씬 이전부터이다.

옛날부터 이곳은 하가루(큰강이라는 뜻)로 불리웠다.

크다의 옛날말이고 가루또는 나루의 옛날말이므로 하가루를 한자로 옮겨 장진이라고 한것이다.

이렇듯 장진군은 조선에서 오랜 군의 하나이며 옛날부터 쓰던 이름을 그대로 가지고있는 군이다.

처음으로

정평군

 

정평은 1413년 리조때 지은 이름이다.

고려이전 옛날에는 파지, 선위라고 불렀고 고려시기에는 천정으로 부르다가 정주로 고쳤다.

그후 정주에는 성을 많이 쌓고 진을 쳐서 국경경비를 강화함으로써 안정된 고을로 알려졌는데 평안도의 정주와 이름이 같다 하여 정평이라고 불렀다.

처음으로

고원군

 

고원군은 높은 지대의 벌이라는 뜻의 이름이다.

이고장의 원래이름은 고주와 흥원에서 유래되였다.

높은 지대를 나타내는 자와 행정구역의 한 단위인 고을을 나타내는 자를 붙여 고주라고 부르다가 리조초기에 고원으로 고쳤다.

이고장의 지대적특성을 반영한 자는 그대로 두고 종래의 이름 흥원에서 자를 갖다달았던것이다.

처음으로

홍원군

 

홍원군의 이름은 14세기부터 생긴 이름이다.

고려이전시기에는 홍긍 (크게 즐긴다는 뜻), 고려시기에는 홍헌(크게 착하다, 크게 좋다는 뜻)이라고 하였고 리조시기에는 홍원(크고 넓은 벌이라는 뜻)이라고 하였다.

력사적으로 내려오면서 이고장의 이름들은 벌이 크고 넓어 살기 좋은 고장이라는데서 유래된것이다.

 

북청군

 

고려때 이곳 이름은 삼살이였고 후에 안정된 북쪽지방이라는 의미로 안북이라 불렀다.

그후 지명들의 일부를 고치면서 안북에서 자를 따서 바다를 낀곳이라 하여 자를 붙여서 북청주라고 지었다.

다음 북청주를 다시 청주로 고쳤는데 충청도 청주와 음이 같다고 하여 북청(북쪽에 있는 청주)이라고 하였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리조시기 관리 리지란이 자기가 받은 지역을 청해라 하였다가 종래의 안북에서 자를 청해에서 자를 따서 북청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처음으로

함경북도

 

청진시무산군길주군화대군화성군

어랑군회령시

처음으로

청진시

 

리조 전기간에 청진이라고 불렀다.

산에 푸른 빛의 바위가 있었다고 하여 부르게 된 청암산앞에 자리잡고있는 나루가마을이라 하여 청진이라고 부르게 되였다.

청진에서청암산을 가리키고 은 바다가의 나루를 뜻하였다.

푸를청자를 쓰다가 후에 글자가 바뀌여 소리같은 한자인 맑을청자로 쓰이게 되였다.

 

포항동

 

포항동은 강이나 내에 밀물이 드나드는 개목이라는 뜻을 가지고있다.

바다가의 개목으로 되여있던 고장이라는데로부터 개목마을 또는 여울마을이라고 불러왔는데 후에 한자말로 표기하면서 포항동이 되였다.

처음으로

무산군

 

수림이 울창하고 산이 많은곳이라는 지대적특성을 반영한 이름이다.

무산이라는 이름은 한때 부령에 속했던 무산보, 무산선의 이름을 그대로 고을이름으로 옮긴것이다.

 

차유리

 

차유리는 수레넘이라고 하던 조선말고장이름을 한자로 옮겨놓은것이다.

이곳에 차유령이라는 높은 산이 있다고 하여 부른 이름이다.

옛날 이고장을 개척할때 처음 이곳으로 수레가 넘었다고 하여 차유령이라고 하였다.

새로 개척한 마을이라고 하여 옛날에는 새참, (새마을)이라고도 불렀다.

처음으로

길주군

 

녀진족을 물리쳐 길한 운수가 들게 된 고을 또는 길하게 될 고을이라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다.

이곳에는 고려시기에 녀진족들의 침입을 물리치고 북방지역을 개척할 때에 쌓은 길주성이 있으며 그밖의 성들이 있다.

 

홍수리

 

홍수리는 과일나무가 많아 꽃피는 계절이 오면 붉은 비단속에 있는듯하다 하여 형상적으로 지은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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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대군

 

화대군은 더부고을 (덧붙어있는 고을)이라는 말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이고장 마을이 길주, 명천과 같은 큰 고을에 붙어있는 고을이라는데로부터 이렇게 불렀다.

더부고장을 한자로는 가부사라고 썼으나 더부사라고 읽었다.

가부사는 더한다는 뜻을 가지고있기때문에 라고 읽다가 후에 한자의 음대로 가부사라고 읽었다.

리조시기에 와서 더부고장은 내륙지대와 해안지대로 갈라서 부르게 되면서 내륙지대는 상데라고 하고 해안지대는 하데라고 하였다.

한자를 그대로 읽으면서 상데상가라고 하고 하데하가라고 하였는데 지금도 상가지구, 하가지구라고 하는것은 이와 관련된것이다.

리조말기에 와서 새로 면이 나올때에 상데, 하데로부터 상대면, 하데면이 설치되였으며 후에 상가, 하가로부터 상가면, 하가면으로 바뀌기도 하였다.

화대라는 이름은 바로 하데를 비슷한 음의 한자로 바꾸어쓴것과 관련된다.

하데화대라고 부름에 따라 민간에서 화대라는 말을 국화꽃이 많이 피는 국화대라는 언덕이름과 관련시키기도 하였다.

 

무수단리

 

무수단이라는 마을이 리의 중심부락을 이루고있다고 하여 그 이름을 따라 무수단리라고 부르게 되였다.

무수단이라는 말은 무쇠끝이라는 조선말을 한자로 옮긴것이다.

무수무쇠를 비슷한 음의 한자로 옮긴것이며 을 뜻하는 한자로 옮긴것이다.

바로 무쇠끝이라는 말은 무쇠()를 뽑던 마을의 끝을 이른다.

다른 해석으로는 이곳 바다가에 가장 큰 파도가 밀려오는것과 관련하여 물이 춤추다는 뜻으로 춤출무자와 물수를 써서 무수단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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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군

 

대규모의 화학으로 번성하는 고장이라는데로부터 화학의 자와 형성되였는데 자를 따서 화성군이라 부른다.

 

하월리

 

옛날에는 이고장을 달구비라고 하였는데 달같이 생긴 후미(포구)라는 말이다.

바로 마을앞에 있는 포구가 반달같이 호를 그린것같기때문에 고장이름을 달구미라고 불렀다.

그후에 달구미가 아래, 우 두 지역으로 나뉘여지면서 웃달구미를 한자로 상월동. 아래달구미를 하월동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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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랑군

 

어랑이라는 말은 고려시기부터 쓰이였다.

동해바다를 끼고있으며 또한 장연호. 무계호, 동연호와 어랑천과 같은 크고작은 못과 강이 많은곳이기때문에 물고기잡이를 하는 사람이 많이 살았다.

여기로부터 어랑이라는 이름이 생기였다.

바로 한자말인 어랑에서 는 고기를 뜻하며 은 젊은 사람을 나타낸다.

다른 설에 의하면 임진조국전쟁시기 란을 막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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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령시

 

고려시기에 이르러 이곳을 오산또는 회산이라고 고쳤는데 강뿐아니라 산도 특징적이기때문에 자를 붙였다. 오산자는 본래의 오무하 (큰 강또는 성의 강)라는 이름에서 따온것이지만 산의 생김새가 자라와 같다고 하여 자라오자를 갖다쓴것이다.

리조때 지명을 고치면서 회령으로 되였다.

종전의 회산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