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이야기77] 고구려 안장왕의 사랑이야기3
이용섭 기자
기사입력: 2017/11/20 [18:53]  최종편집: ⓒ 자주시보

 

▲ 역사스페셜에서 백제 개로왕 역 

 

 

이후 백제는 고구려와의 관계가 멀어지고, 양국의 건국 이후 줄곧 앙숙관계로서 서로 침략을 일삼으며 으르렁거리던 신라와 급격하게 가까워진다. 백제는 제20대 비유왕(427년 즉위, 29년간 재위, 427-456) 7년(433) 가을 7월 사신을 신라에 보내 화친을 청했으며, 8년(434) 봄 2월 사자(使者)를 신라에 보내 좋은 말 두 필을 선사하고, 또 다시 가을 9월 희귀한 매(흰 매)를 선사하니 신라는 양금과 명주를 보내 보답하였다.(삼국사기 권 제25 백제본기 제3 비융왕조)

 

이와 같이 서기 407년 이후론 백제와 신라는 급격하게 가까워지면서 백제와 신라, 신라와 백제의 대 고구려동맹을 맺게 된다. 이를 흔히 라제동맹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때 맺어진 백제-신라의 대 고구려동맹에 대해 단재 신채호 선생은 아래와 같이 고증을 하였다.

 

“눌지 니사금(니사금은 ‘임금’을 뜻글자를 빌어 이두로 표기한 것이다.-필자 주)이 이처럼 고구려 덕택에 왕위를 얻었으나, 고구려가 백제를 병탄하면 신라도 홀로 견디지 못할 줄 알았기 때문에 박제상을 보내어 신라의 고구려에 대한 성의와 신의가 일개 인질(人質)의 유무에 달려있지 않다는 말로써 고구려의 임금과 신하들을 꾀어서 눌지의 사랑하는 아우 복호를 돌려오고, 비밀리 백제와 서로 통하여 고구려를 막으려고 하였다. 백제 또한 왜는 멀고 신라는 가까우므로 왜와는 관계를 끊고 신라와 사귀어 고구려를 막기로 결정하여 신라-백제 양국의 동맹이 이에 성립되었다.(조선상고사, 단재 신채호, 박기봉 옮김, 329-330쪽, 비본출판사) 

 

이렇게 맺어진 백제와 신라의 대 고구려동맹에 의해 신라 제17대 눌지마립간(마립간은 ‘말한’을 뜻글자를 빌어 이두로 표기한 것이다.) 39년(455) “겨울 10월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자 왕은 군사를 보내어 백제를 구원하였다.”라고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3 눌지마립간 39년 조에 기록되어 있다. 이는 앙숙관계에 있던 백제와 신라가 화해의 단계를 넘어 본격적인 대 고구려동맹관계에 있음을 말해주는 사실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내용이 서기 455년도에 해당하는 고구려본기 제6 장수태왕 42년 조나, 백제본기 제3 비유왕 28년 혹은 29년 조에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서기 407년 이후 고구려와 백제와의 관계는 양국이 서로 상대국을 수시로 침범을 하게 되는 단계에로까지 악화일로를 걷게 된다. 백제는 제21대 개로왕(455년 즉위, 21년간 재위, 455-475, 단채 신채호 선생은 근개루왕이라고 하였다.) 15년(469) 고구려의 남변을 침범하였다. 이에 대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제6, 장수태왕 57년 조에도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다. 

 

반면 고구려는 장수태왕 63년(475)“가을 9월, 왕이 친히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침략하여 왕도 한성을 함락시키고 그 왕 부여경을 죽이고 남녀 8,000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제6 장수태왕 63년 조)고 하며 고구려는 백제에 맞서 적극적이고도 맹렬하게 공격하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장수태왕이 직접 군사 3만을 거느리고 백제의 왕도인 한성을 함락시키고 백제 개로왕을 죽이고, 남녀 8천여 명을 사로잡아 온 큰 전쟁사를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3, 개로왕 21년 조(475)에는 “고구려 왕 련(장수태왕의 휘이다,)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와서 왕도 한성을 포위하였다. 왕은 성문을 닫고 능히 나가 싸우지 못하였다. 고구려 사람들이 군사를 네 길로 나누어 협공하고, 또 바람을 이용하여 불을 질러 성문을 태우니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나가 항복하려는 자도 있었다. 왕은 궁벽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수십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문을 나서 서쪽으로 달아났으나 고구려 사람들이 쫓아가 살해하였다”고 기록하였다. 당시 전투 상황이 백제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긴급한 위기였는지를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3, 개로왕 21년(475) 조는 상세하게 전해주고 있다.

 

개로왕(근개루왕)이 왜 고구려군에게 처참하게 패배를 당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후일 상세할 것이다. 또 개로왕 시기 왕도를 삼국사기에서는 한성이라고 하였지만 이에 대해서도 여러 사료와 자료들을 통해 당시의 한성이 어디에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고증을 할 것이다. 

삼국사기에서는 한성이라고 하였고,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신위례성’이라고 하였다. 단재 선생은 신위례성이 현 경기도 직산(禝山)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고구려, 백제, 신라, 여섯가라으 나라들은 조선반도와 만주에 억지로 우겨넣고 당시의 역사적 기록들을 해석하면, 그 어떤 올바른 해석도 불가능하다. 이 역시도 후일 상세할 계획이다.

 

한편 고구려 장수태왕이 군사 3만을 이끌고 백제의 한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킬 때 백제 개로왕은 태자 문주에게 외국에 도움을 요청할 것을 명하여, 문주를 신라로 보냈다. 신라에 도착한 문주는 백제의 급란을 고하였고, 급보를 받은 신라의 자비마립간은 동맹의 의리만이 아니라 자위적 차원에서 군사 1만 명의 병사를 보내어 백제를 구원하게 하였다. 하지만 신라의 구원병이 도착하디고 전에 백제의 오아도인 한성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개로왕은 이미 전사한 뒤였다.

이에 대해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3 자비마립간 17년(475) 조에는 “가을 7월, 고구려왕 거련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하니 백제 왕 경(개로왕)은 아들 문주를 보내어 원조를 청하므로 왕은 구원병을 보냈는데 미처 당도하기 전에 백제가 이미 함락되고 경도 역시 살해당하였다.”고 기록하였다.

 

백제는 개로왕 21년(475) 왕동인 한성이 고구려 장수태왕에게 함락되고, 개로왕은 전사를 하는 등 나라가 붕괴 직전에 몰릴 정도로 큰 타격을 받았다. 이와 같이 나라가 거의 붕괴될 위기에 빠진 백제는 제22대 문주왕(475) 즉위, 4년간 재위, 475-478)이 즉위한 원년(475)에 도음을 한성에서 웅진으로 옮겼다. 이때 도음을 웅진으로 옮긴 것은 고구려 장수태왕의 공격에 의해 왕도 한성이 붕괴되었기 때무이다. 이에 대해 감국사기 백제본기 제3, 문주왕 원년 조에는 “겨울, 10월 도음을 웅진으로 옮겼다.”고만 기록되어 있어 삼국사기만 보면 왜 도읍을 옮기게 되었는지 그 원인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다. 아래에서 단재 신채호 선생의 백제 도음 천도 분석글을 보기로 하자.

 

“자비마립간이 1만의 병사를 보내어 달려가 구원하게 하였으마, 근개루(개로)왕은 이미 죽고 신위례성은 벌써 잔파(殘破)되었기 때문에, 문주왕이 이에 구도를 회복하지 못하고 물러나와 웅진에 도읍하니 ‘웅진’은 광개태왕의 비문에서 ‘고모나라’라고 한 것으로, 양자를 다 ‘곰나루’로 읽어야 할 것이다. 전자는 뜻으로 쓴 이두문자이고 후자는 음으로 쓴 이두문자이니 지금의 공주가 당시의 곰나루이다.”(조선상고사, 단재 신채호, 박기봉 옮김, 330쪽, 비본출판사) 

 

위 단재 선생의 고증 글 가운데 ‘곰-웅(熊)’을 동물 ‘곰’으로 오해해서는 절대 안 된다. 여기서 곰은 동물 곰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삼신사상(三申思想)에 의한 천신, 지신, 인신의 삼신 가운데에서 지신 즉 땅신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 조상들은 신을 ‘검, 감, 곰, 금’으로 불렀다. 신의 고갱이 우리말이 ‘검, 감, 곰, 금’이다. 따라서 ‘곰나루’는 ‘신성한 나루터’라는 말이다. 

이는 후손으로서 조상들에 대한 불효의 대명사인 소위 ‘단군신화’에 나오는 ‘웅녀’ 역시 동물‘곰녀자=아곰’ 또는 ‘동물 곰을 숭배하는 곰토템족의 여자’를 말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단군기에 나오는 웅녀는 곧 환웅 즉, 처닌에 대응하는 땅신족의 여인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환웅이 웅녀와 혼인을 하여 단군을 낳았다는 것은 우리의 전통사상이자 종교교리인 삼신사상에 의해 ‘하늘신이 땅신과 합하여 인신인 단군을 낳았다.’는 말이다. 이를 다시 정립하면 ‘환웅=천신, 웅녀=지신, 단군=인신이 되며, 이는 하늘+땅=사람’의 관계가 성립된다. 

 

삼신사상에 대해서는 필자가 이전에 연재했던 ‘우리역사이야기-삼신오제본기’에서 상세히 다루었으니 여기서 그친다. 중요한 것은 단재 선생의 글이나 역사서들에 기록되어 이쓴 웅진의 웅은 동물 곰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성함’을 의미한다고 이해를 해야한다. 결론적으로는 ‘곰나루’를 말하며 “신성한 또는 신령스런 나루터”를 말하는 것이다. 또 위 단재 선생이 고증한 웅진을 현재 충청남도 공주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서도 후일 상세할 예정이다. 다만 역사서들에 기록되어 있는 백제의 웅진은 현재 충청남도의 공주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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