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이야기77] 고구려 안장왕의 사랑이야기4
이용섭 기자
기사입력: 2017/12/20 [16:05]  최종편집: ⓒ 자주시보

 

▲ 백제의 중흥기를 이끌었던 왕들

 

서기 475년 백제 제22대 문무왕이 즉위한 후, 고구려 안장왕 재위 말년까지 약 55년여 간에 백제는 무령왕, 성왕 7년까지이며, 고구려에서는 장수태왕 63년부터 문자명왕이 재위에 있었다.

 

즉 고구려에서는 장수태왕(65년 이후)-문자명왕-안장왕 말년까지이며, 백제에서는 문무왕-무령왕-성왕 재위 7년까지 약 55년 동안 양국간에는 격변기가 지속되었다. 물론 안장왕 이후에도 두 나라 사이의 갈등은 멈추지 않고 서기 455년까지 지속되었다.

 

안장왕의 사랑이야기가 싹 트게 된 시기를 전후하여 고구려와 백제, 백제와 고구려 사이에 벌어졌던 군사적 충돌 상황에 좀 더 상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고구려 장수태왕 즉위 65년부터 마지막 79년까지의 약 15년 간은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벌어진 전투나 국경을 넘어 변경을 공격하였다는 기록이 삼국사기나 기타 사서들에 없는 것으로 보아 두 나라가 약 15년 여간 평화를 유지했다고 보아진다.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가 약 15년 여간 평화를 유지했던 시기 백제에서는 삼근왕(477년 즉위, 3년간 재위, 477~479)과 동성대왕(479년 즉위, 23년간 재위, 479~501) 재위 14년(492)까지이다.

 

그러나 약 15여 년 간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해왔던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는 고구려 장수태왕을 이은 문자명왕(492년 즉위, 28년간 재위, 492~519)이 즉위하면서 상황이 달라진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제7 문자명왕조를 보면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직, 간접적인 전투가 7차례나 있었다. 문자명왕 재위 28년 기간 평균 4년에 한 번 꼴로 두 나라 사이의 전쟁이 있었다. 반면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4 동성대왕 14년 조 이후 무령왕(501년 즉위, 23년간 재위, 501~523) 조를 보면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6차례의 전쟁을 벌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럼 이시기 고구려와 백제, 백제와 고구려 사이의 벌어졌던 전쟁 및 충돌상황에 대해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보도록 한다. 

 

문자명왕이 즉위하고 3년 되던 해에 첫 충돌이 일어나게 된다. 이 충돌에 대해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문자명앙 3년(494) 가을 7월, 우리 군사가 신라와 살수(撒水)벌에서 싸운 결과 신라가 패하여 견아성(犬牙城)을 지키니 우리 군사가 포위하였다. 백제가 군사 3,000명을 보내어 응원하므로 우리 군사는 물러났다.”고 되어 있다. 반면 이 전투에 대해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4 동성대왕 16년 조에는 “가을 7월 고구려가 살수벌에서 싸웠는데 신라가 이기지 못하고 퇴각하여 견아성을 지키자 고구려가 이를 포위하였다. 왕은 군사 3,000명을 보내어 구원하니 이윽고 고구려가 포위망을 풀었다.”라고 동일한 전투상황을 기록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3 소지마립간(479년 즉위, 22년간 재위, 479~500) 16년조 “16년 가을 7월, 장군 설죽 등이 고구려와 살수의 들에서 싸워 이기지 못하고 물러가 견아성을 지키니 고구려 군사가 포위하였는데 백제왕 모대(동성대왕)가 군사 3,000명을 보내어 구원하여 포위망을 벗어나게 되었다.”고 기록하였다.

 

문자명왕 3년(494), 무령왕 16년(494), 소지마립간 16년(494)조에 고구려와 신라가 살수벌에서 전투를 하였고, 신라 군사들이 패배하여 물러나 견아성으로 후퇴하여 성을 지키니, 고구려 군사가 성을 포위하여 신라 군사들이 위기에 빠져 있었고, 이에 백제 동성대왕이 백제, 신라, 임라, 아라아라 사이에 맺어진 대 고구려 4국 동맹에 의거 군사 3,000명을 보내어 고구려 군사를 물리쳐 신라군을 구원해주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삼국사기는 고구려본기, 백제본기, 신라본기 동년(494) 조에 모두 똑같은 내용을 기록하여 놓았다. 따라서 당시의 사건은 실재했었다는 사실을 확증할 수가 있다.

 

위에서 살펴본 고구려, 백제 사이의 간접(지원) 충돌 이후 이듬해 고구려는 문자명왕 4년(495), “가을 7월, 군사를 보내어 백제의 치양성(雉壤城)을 포위하니 백제가 신라에 구원을 청하였다. 신라왕은 장군 덕지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구원하므로 우리 군사가 후퇴하여 돌아왔다.”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제7 문자명왕 4년 조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로 미루어 이는 바로 전 해 고구려가 신라와 살수벌과 견아성 싸움을 벌일 때 백제가 신라를 도와 승리를 하지 못한데 대한 보복적 성격의 공격이라고 보여 진다. 

 

이 사건에 대해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4 동성대왕 17년 조에는 “고구려가 와서 치양성을 포위하므로 왕은 사자를 신라에 보내어 구원을 청하였다. 신라왕은 장군 덕지를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게 하니 고구려 군사를 물러갔다.”라고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반면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3 소지마립간(479즉위, 22년간 재위, 479~500) 17년 조를 보면 “가을 8월, 고구려가 백제의 치양성을 포위하니 백제는 우리에게 원조를 청하므로, 왕은 장군 덕지를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가 구원하여 고구려 군사를 물리쳤다. 백제왕은 사신을 보내 감사를 포위하였다.”고 기록하였다.

 

고구려 문자명왕 4년(495) 살수벌에서 신라와의 전투, 뒤이어 신라가 견아성으로 물러나자 견아성 포위, 백제가 군사 3,000명을 동원하여 신라를 구원하였고, 이듬해 문자명왕 5년(496)에는 이에 대한 보복적 성격의 백제 치양성을 포위, 압박하니 위기를 느낀 백제 동성대왕은 신라에 구원을 요청하였고, 그 구원요청을 받은 신라 소지마립간은 장군 덕지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가 백제를 구원하도록 하니 고구려가 패퇴하여 돌아갔다. 이를 보아 이 시기 백제와 신라, 신라와 백제 사이에는 굳건한 대고구려동맹이 유지되고 있었음을 알수가 있다. 이렇게 굳건한 “라제·제라동맹”이 유지된 배경에는 고구려의 강대함이 있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고구려 광개토경호태열제(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광개토태왕) 이후부터 고구려에대해 절대적 약세에 있었던 백제는 백제 제 24대 동성댕왕이 즉위한 이후 대등한 관계로 변했으며, 벡제 제25대 무령왕(501년 즉위, 23년간 재위, 501~523)이 즉위하면서 고구려에 대해 백제가 근소한 차이지만 우위에 서게 된다. 

 

여기서 동성대왕이 재위 중 얼마나 위대한 업적을 쌓았는지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동성대왕이 재위 중 이룩한 위대한 업적에 대해서는 추후 상세하기로 한다. 동성대왕이 이룩한 위대한 업적에 대해서 삼국사기에서는 한 줄의 문장은커녕 단 한글자도 언급하지 않았다. 동성대왕이 이룬 위대한 업적에 대해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이 전혀 언급을 하지 않은데 대해 단재 신채호 선생은 아래와 같이 강력하게 비판을 하였다.

 

  “그런데도 <삼국사기>에는 다만 당시 천재(天災)인 한 두 차례의 홍수와 가뭄, 그리고 대왕이 사냥한 일만 기록해 놓았을 뿐, 그 나머지는 전부 빼버렸는데도 이는 아마도 신라 말엽 문사(文士)들이 삭제한 것일 것이다.”

                                      <조선상고사 단재 신채호 원저, 박기봉 옮김, 비봉출판사, 334쪽>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4 동성대왕 조를 보면 단재 신채호 선생의 비판이 전혀 근거 없는 비판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먼저 동성대왕 23년간의 재위에 대한 기록을 보면 기후 즉, 가뭄, 홍수, 눈 내림, 폭풍, 일식 등에 대해 12회, 동성대왕이 사냥 및 유희를 즐겼다는 기록이 10회, 궁실의 증, 개축 및 성의 개축 등이 7회, 곡식의 풍·흉이 들었다는 기록 3회, 외교관계 기사가 4회, 고구려, 말갈, 위와의 전쟁 관련 기사 5히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은 삼국사기 동성대왕 조의 기사만 보면, 그저 평범한 백제의 임금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동성대왕을 오히려 백성을 돌보지 않고 사냥과 유희를 즐기고, 궁실을 화려하게 증·개축하는 모진 임금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이 동성대왕의 업적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을 하지 않고 오히려 지독히 폄하를 하고 있는 지에 대해 살펴보고, 위대한 업적을 논해 보기로 한다. 

 

“21년 여름. 크게 가물어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을 지경이었고, 도적이 일어남으로 신료들이 창곡을 풀어 나눠주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22년 봄, 대궐의 동쪽에 임류각(臨流閣)을 지었는데, 그 높이가 다섯 길이었고, 또 못을 파고 진귀한 새를 기르므로 간언하는 시하들이 상소하여 항의하였다. 그러나 왕이 받아들이지 않고 다시 또 간하는 자가 있을까 염려하여 대궐 문을 닫아 버렸다.”

 

라고 기록하면서 이에 대한 시신의 말을 아래와 같이 곁들여 동성대왕을 더욱더 폄하를 하였다. 

 

“‘좋은 약이 입에는 쓰지만 병에 이롭고, 충성의 말이 귀에 거슬리지만 행동에 이롭다.’고 하였다. 이러므로 옛날 밝은 임금은 자기를 낮추어 정사를 물으며 안색을 화평히 하여 간언을 받아들였으니 오히려 사람이 말하지 아니할까 염려하여 감간(敢諫)의 북을 달고 비방(誹謗)의 표목을 세우는 것으로도 만족하지 않았다. 하물며 지금 모대왕(동성대왕)은 간서(諫書)가 올라와도 살펴보지 않고 다시 문을 닫아 버리니 장자의 말에 ‘허물을 보고도 고치지 아니하고 간언을 듣고도 더욱 심한 것을 잔인하다고 말한다.’고 하였다. 그 말은 모대왕을 두고 이름인가.”

 

라고 동성대왕에 대해 모진 임금으로, 백성들을 돌보지 않고 신하들의 충언을 듣지 않는 악독하기 이를 데 없는 임금으로 혹독하게 폄하를 하였다. 이렇듯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대왕 조만 보면 동성대왕은 그 어떤 업적도 없고 백성들과 신하들에게 모질게 굴면서 자신은 사냥이나 하고 유희나 즐기는 못된 임금으로 오해를 할 수가 있다. 우리는 삼국사기를 대할 때 이 점을 충분히 고려하여야 하며, 다른 관련 사서들을 동시에 비교 분석하면서 당시를 해석하고 이해를 해야만 한다.

 

-계속

 

2017년 11월 15일, 

서울구치소에서 이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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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천하 17/12/20 [16:49]
구치소에서 이런 글 쓰기가 쉽지 않을 텐데 고생하셨습니다.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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