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이야기78] 고구려 안장왕의 사랑이야기 5
이용섭 기자
기사입력: 2017/12/22 [16:25]  최종편집: ⓒ 자주시보

 

▲ 백제 중흥의 발판을 마련한 무령왕     © 자주시보

 

단재 신채호선생은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지으면서 백제 동성대왕의 위대한 업적에 대해 그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고 그저 일기나 조공에 관한 서술을 함으로서 임금으로 전락시켰다는 데 대해 통렬하게 비판을 가하였다. 동시에 단재 선생은 화하족의 기록들을 철저히 비교분석하였다. 비록 화하족들의 역사필법으로 <춘추필법>, <상내약외>, <위국휘치> 등에 의한 백제사 기록이었지만 그 가운데 매우 중요한 기록들을 찾아낼 수가 있다. 그나마 아예 기록을 남기지 않은 것보다는 그 안에서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찾아낼 수가 있기 때문이다. 동성대왕에 대한 기록 마찬가지이다.

 

동성대왕의 위대한 업적에 대해 단채 신채호 선생은 아래와 같이 고증을 하였다.

 

“동성대왕 때는 근구수왕 때보다 더욱 광대하였다. 때문에 ‘구당서(舊唐書)’ 백제전에서 백제의 지리를 기록하여 이르기를 ‘西渡海志越州 北渡海志高麗, 南渡海志倭(서도해지월주, 북도해지고려, 남도해지왜)-> 서로는 바다를 건너 월주에 이르고 북으로는 바다를 건너 고구려에 이르고 남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에 이르렀다’라고 하였는데 월주는 지금의 회계(會稽)이니 회계는 모두 백제의 소유였다.”

<조선상고사, 단재 신채호, 박기봉 옮김, 비봉출판사 338쪽>

 

 위 인용문의 <해(海)>를 현대 해석방법인 <바다>로 보아서는 안된다. 고대 화하족들의 사서를 보면 비단 백제, 신라, 고구려 등과의 관계된 기록 뿐 아니라 화하족의 나라들에 관한 기록에서도 <해(海)>를 많이 썼다. 즉 <도해(渡海)>라 하여 “바다를 건넜다”라고 고대사서의 기록들을 해석하면 안된다. 화하족들이 기록하였거나 이를 인용한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의 기록도 모도 “바다를 건넜다”라고 해석해서는 안되며 “넓은 땅(벌)을 지나서”라고 해석을 하는 것이 당시 대륙 혹은 조선반도 -만주-대륙-중앙아시아 등에 존재했던 나라들 사이의 역사적 관계를 정확하게 고증하는 것이다.

 

인용문에서 백제의 강역이 “西渡海志越(서도해월)->서로는 바다, 넓은 땅을 건너, 지나 월주에 이르고”에서 월주는 현 신강성 지역에 있었던 지역이다. 동성대왕이 서쪽으로 강역을 넓힘으로써 대륙에서 감숙성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개척하여 지배를 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단재 선생은 계속하여 아래와 같이 고증하였다.

 

“<문헌비고>에서 ‘월왕 구천의 고도(古都)를 둘러싼 수천 리가 다 백제 땅’이라고 한 것은 이를 가리킨 것이다. 고려는 당나라 사람들이 고구려를 부른 이름으로, 고구려의 국경인 요수(遼水) 이서(以西), 곧 지금의 봉천(奉天-현 요영성 심양, 이에 대해서는 많은 이설들이 존재한다. 후일 상세할 예정이다.) 서부가 다 백제의 소유였다.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 ‘금주, 의주, 애혼 등지가 다 백제’라고 한 것은 이를 가리킨 것이다. 왜는 지금의 일본(이에 대해서는 다른 설들이 있다-추후 상세 예정)으로, 위에서 인용한 <구당서>의 상기 구절에 의하면 당시 일본 전국이 백제의 속국이 되었던 것을 의심의 여지가 없다.”

<조선상고사, 단재 신채호, 박기봉 옮김, 비봉출판사 338쪽>

 

위 인용문의 해석에서 단재 신채호 선생은 “백제는 조선반도 충청도, 전라도, 경기남부 지역에 있었다.”라는 확고한 가정하에 이루어짐으로서 ‘서로는 바다를 건너 월주에 이르고, 남으로는 바다를 거내 왜에 이르렀다.’를 백제가 동성대왕 당시 해외 식민지를 경영하였다고 하였다. 즉 단채 선생 역시 <도해>를 “바다를 건넜다”라고 해석을 하였다. 따라서 단재 선생은 위 인용문에서 한발 더 나아가 “그렇다면 백제는 위의 식민지를 어느 때 있었는가?”라고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논리적 모순을 가질 수밖에 없다. 참고로 15세기에 만들어진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세종실록지리지가 작성되었던 당시 충청도와 전라도의 인구는 “11만 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15세기 초·중반 즉, 1400~1450년에 충청도와 전라도의 인구가 11만 명이었다면 동성대왕이 즉위하던 시기인 서기 479~501년, 세종실록지리지가 작성되기 약 900여 년 전의 인구는 과연 얼마나 되었겠는가 상상을 해보기 바란다. 이렇게 우리 겨레의 역사는 비단 상대사{上代史-한국(桓國)-신시(神市)-단군조선(檀君朝鮮)}만이 아니라 우리가 비교적 잘 알고 있으며 역사적으로 제대로 고증이 되었을 것이라고 믿고 있는 고대사(古代史)마저도 이렇게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다. 본 문제는 후일 여러 사서들을 비교·분석하여 고증하고 논증할 계획이다. 따라서 일단 여기서 그친다. 다만 동성대왕 시기 백제는 대 전성기를 맞이하기 시작하였다는 사실만을 알고 있었으면 한다.

 

이 시기 고구려와 백제는 극도의 갈등을 겪으면서 치열한 대결전을 펼치게 된다. 

고구려 문자명왕 11년(502년), 벡제 제25대 무령왕(501년 즉위, 23년간 재위, 501~523) 2년 백제는 군사를 동원하여 고구려의 국경변경을 침입하였다. 이에 대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제7 문자왕 11년 조와 벡제본기 제4 무령왕 2년(502)조에 “겨울 11월 벡제가 국경을 침범하였다.”, “겨울 11월, 군사를 보내어 고구려의 변경을 침입하였다.”라고 간단히 기록하였다.

 

이와 같은 삼국사기의 간략하기 이를데 없는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백제 군사들이 당시의 고구려를 침입하여 전투를 벌였지만 인명이나 재산상의 커다란 손실을 가져온 것은 아닌 국경 근방에서 벌어진 작은 전투가가 아니었나 하는 추론을 해본다.

 

하지만 당시의 전투가 비록 인명이나 재산상이 커다란 손실을 초래한 전쟁은 아니었다 해도 당시는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첨예한 갈등과 대결이 벌어지던 민감한 시기, 백제 무령왕이 즉위 2년 만에 군사를 보내 고구려의 변경을 침입한 것은 이후에도 두 나라 간에는 화해와 평화의 시기가 쉽게 도래하지 않고 당분간은 대결 상태가 지속되리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사건이라고 해석할 수가 있다.

 

백제 무령왕 즉위 2년에 군사를 보내 고구려 국경변경을 침입한 바로 다음 해인 무령왕 3년(503), 고구려 문자명왕 12년(503), 백제는 또 다시 군사 5,000명을 보내 고구려 수곡성(水谷城)을 공격하였다. 이에 대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제7 문자명왕 12년 조에는 “겨울 12월, 백제가 달솔(達率:백제의 관명으로 16관등 중 제2품) 우령을 보내 군사 5,000명을 거느리고 와서 수곡성을 침범하였다.”고 기록하였다. 한편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4 무령왕 3년 조 기사를 보면 “가을 9월, 말갈이 마수책(馬首柵)을 불사르고 나아가 고목성(이두로서 곰성·검서으로 신성한 섬이라는 의미이다-필자주)을 공격하자 왕이 군사 5,000명을 보내어 이를 물리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 문자명왕 12년(503)조와 백제 무령왕 3년(503)조의 기사가 삼국사기에서 위와 같이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 것은 동일한 사건, 즉 백제가 고구려를 침략한 사실이 서로 다르게 기록된 듯하다. 백제본기의 기록과 고구려본기의 기록을 종합하여 해석해보면 먼저 “무령왕 3년 9월, 말갈이 백제를 침입하여 마수책을 불사르고 고목성을 공격하자 무령왕은 달솔 우영에게 군사 5,000명을 주어 말갈의 침입을 물리친” 다음 내친 김에 “겨울 12월, 고구려 수곡성을 공격하였다.”고 선·후차만 정리하면 당년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발생했던 충돌과정이 명확해진다. 물론 이 같은 해석은 필자의 해석이니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한편, 이 충돌에 대해 단재 선생이 조선상고사에서 고증한 사건의 전말을 아래에서 간략히 인용해 보기로 한다.

 

“백제의 동성대왕이 비록 반란을 일으킨 신하-伴臣(반신), 苩加(백가)-에게 암살당했으나 그 아들 무령왕이 또한 영무(英武)하여 곧 백가의 난을 평정하여 그 해에 고구려 방비가 허술한 틈을 타서 달솔 부영우영을 보내어 정예병 5,000명으로 고구려의 수곡성을 습격하여 깨뜨리고 그리고 수년 뒤에는 장령(長嶺:지금의 서흥 철령-원주)을 차지하여 성책(城柵)을 세워 예(濊)의 침범을 방비하니, 이에 백제의 서북 지경이 지금의 대동강까지 이어저 근구수대왕 시대의 옛 모습을 회복하였다.”

<조선상고사, 단재 신채호, 박기봉 옮김, 비봉출판사 356쪽>

 

-계속

 

2017년 11월 22일

서울구치소에서 이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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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2/23 [01:47]
복건성, 광동성, 광서성,강서성등지의 남부지역을 말합니다. 그러니 바다건너 월주에 이른다고 했지요. 현 신강성이라면 바다건너라는 말을 쓸 필요가 없지요.고구려는 백제와 닿아있었기도 하지만 바다건너서도 닿아있고 갈수 있으니 그런 말을 썼을듯...신강성이라면...이것은 바다건너라는 말이 전혀 통하지않습니다.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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