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이야기79] 고구려 안장왕의 사랑이야기6
이용섭기자
기사입력: 2017/12/26 [18:02]  최종편집: ⓒ 자주시보

 

▲ 단재 신채호 선생은 삼국사의 저자 김부식의 사대주의를 강하게 비판하였다.     © 자주시보

 

서기 503년에 있었던 고구려와 백제, 백제와 고구려 사이에 벌어진 전사(戰史)에 대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제7과 백제본기 제3 문자왕, 무령왕 초 기록과 단대 신채호 선생이 고증한 기록을 종합해보면 필자의 해석이 크게 어긋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단재 신채오 선생이 고증한 지리 문제에 대해서는 후일 상세할 계획이니 일단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신라 및 6가야 그리고 왜가 현재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 같이 조선반도와 일본 열도가 역사의 주 무대가 될 수 없다는 사실만 인지하면 된다. 이는 사서들의 기록을 치밀하게 비교하고 분석·연구해보면 조선반도와 일본 열도가 당시 역사의 주 무대라는 사실이 얼마나 비논리적이고 사실과 어긋나는지 알 수가 있다.

 

우리가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그리고 왜 등의 역사에 대해 기록한 삼국사기, 삼국유사와 화하족의 기록들을 전문적이고도 깊게 연구를 하면 할수록 역사의 무대가 현 조선반도와 일본 열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물론 아직까지도 강단이라는 학교에서는 당시 우리 겨레의 역사 무대가 현 조선반도와 만주라는데 대해서는 고정불변이요, 신성불가침으로 여기고 있다. 강단에서는 자신들과 다른 이론 또는 주장을 하는 역사연구에 대해 소우 ‘유사사학’이라는 딱지를 붙이며 터부시하고 있다. 한발 더 나아가 “역사를 전공하지 않는 사람들을 역사에 대해 말 하지 말라.”는 주장까지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도 도저히 해명을 하지 못하는 부분들이 숱하게 많다. 그러다보니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믿을 수 없다.”느니 뭐니 하면서 자신들의 조상들을 욕되게 하고 있다. 우리는 열린 자세를 가지고 조상들이 살아온 발자취를 밝혀야 할 것이다. 사회과학에서 절대 불변의 법칙은 존재하기 어렵다. 

 

고구려와 백제의 충돌은 계속된다.

고구령 문자명왕 15년(506) “겨울 11월, 장수를 보내어 백제를 쳤는데 큰 눈이 내리어 군사들의 손발이 얼어 터져 돌아왔다.”라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제7 문자왕 조에 기록되어 있다. 한편 동일 사건에 대해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4 무령왕 6년(506)을 보면 아무런 기록은 없고, “가을 7월, 말갈이 와서 고목성(검성-필자주)을 침범하여 깨뜨리고 600여 명을 죽이고 잡아갔다.”는 기록이 있다. 일ㄹ 다르게 해석해보면 당시 고구려가 백제의 변경을 침범하였지만 날씨가 너무 추워 전투를 할 수 없기에 본격적인 격렬한 전투는 벌이지 못하고 후퇴를 하였기에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기록되어 있고, 백제본기에는 그에 대해 아무런 기록이 없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당시 고구려가 백제의 변경을 침범하여 본격적인 전투를 벌이지 않았지만 이는 고구려와 백제 사이의 첨예한 갈등관계를 보여준다.

 

고구려는 506년 백제에 대한 공격이 실패를 했음에도 바로 이듬 해인 고구려 문자명왕 16년(507), “10월, 왕은 장수 고로(高老)를 봬어 말갈과 함께 모의하고 백제의 한성을 치려고 횡악(橫岳)아래 진주하니 백제가 군사를 내어 맞아 싸우므로 드디어 후퇴하였다.”고 삼국사기를 기록하고 있다.

반면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4 무령왕 7년(507) 조에는 “겨울 10월, 고구려 장군 고로가 말갈과 공모하여 한성을 칠 목적으로 횡악산 아래 나와 주둔하니 왕이 군사를 내어 격퇴시켰다.”라고 기록하여 고구려본기와 똑같이 내용을 전하고 있다. 이 충돌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은 정확하며 당시 고구려가 말갈 병사와 연합하여 백제의 한성을 치기 위해 횡악산 아래 진을 쳤으며, 이를 안 백제 무령왕은 군사를 동원하여 물리쳐 전쟁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확증하여 준다고 볼 수 있다.

 

고구려는 이 충돌 이후 4년 여 간은 백제를 공격하지 않았다. 

하지만 고구려는 문자명왕 21년(512) “가을 9월, 백제의 가불(加佛), 원산(圓山) 두 성을 쳐서 함락하고 남녀 1,000며 명을 사로 았다.”라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이에 대해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4 무령왕 12년(512) 조에는 “가을 9월, 고구려가 가불성을 습격하여 빼앗고 군사를 이동하여 원상성을 깨뜨려 약탈과 살상을 매우 많이 저질렀다. 왕은 날랜 기병 3,000명을 이끌고 위천(葦川)의 북쪽에서 싸웠다. 고구려인들이 왕의 군사가 적음을 보고 업신여겨 진도 만들지 않으므로 왕은 기계(奇計)를 써서 급히 쳐서 이를 대파하였다.”라고 같은 사실을 좀 더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이와 같이 삼국사의 오류, 왜곡에 대해 단재 신채호 선생은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이 중국의 사서들을 무비판적으로 맹신하여 그대로 전재한 데 그 원인이 첫째이며, 다음은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가 붕괴된 후 백제와 고구려사를 심각하게 왜곡을 한 데 주요한 이유가 있다. 그런 자료들을 치밀하게 대조·비판적으로 삼국사기를 저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라고 강력하게 비판을 하였다. 특히 단재 신채호 선생은 “김부식이 조선 민족의 자주적 사상을 버리고 극악한 사대주의 사상에 젖어들어 삼국사기를 저술했기에 신뢰를 보낼 수 없다.”라고까지 비판을 하였다. 단재 선생은 김부식 이후 조선이 자주성을 잃고 근데 조선에서 명->청에 극단적인 사대주의를 했다면 김부식을 강력히 비판하였다. 

 

한편, 단재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백제 무령왕의 업적에 대해 논하면서 아래와 같이 고증하였다. 

 

“기원 505년에 고구려 문자왕이 그 치욕(고구려 문자명왕 12년 백제 달솔 우영에게 패배한 전투)를 씻으려고 대병을 거느리고 침입하여 가불성(지금 어디인지 미상-원주)에 이르렀다. 이에 무령왕이 정예병 3,000으로 출전하니 백제의 군사수가 적음을 보고 방비조차 하지 않았으므로 왕이 기계를 내어 이를 급습하여 대파하니 이후 10여 년 동안 고구려가 다시는 남쪽을 침범하지 못하였다. 

왕이 그 틈을 타서 내외에 떠돌아다니며 놀고먹는 자들(도망병, 유랑자, 거지 등)을 모아서 농사일을 시키고, 제방을 쌓아 논을 만들어 나라의 곳간을 더욱 충실하게 만들고, 서로는 중국과, 서남으로는 인도, 대식(大食:대식국, 페르시아, 사라센 제국) 등의 나라들과 통상을 하여 문화도 상당히 발달하니, 대왕의 재위 기간 24년은 황금시대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조선상고사, 단재 신채호, 박기봉 옮김, 비봉출판사, 365~366쪽>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4 무령왕 조를 보면 고구려와 백제, 백제와 고구려 사이이 쟁패 과정에 대해서는 간략하게도 기록되어 있으나 위 단재 선생이 고증한 대외 관계사에 있어서 무령왕이 이룩한 혁혁한 공로와 찬란했던 백제의 융성기에 관한 언급은 단 한 자도 없다. 

 

6세기 초 국경을 접하고 있던 화하족의 나라들 뿐 아니라 멀리 인도, 현 이란의 영토 내에 있떤 페르시아. 사라센 제국 등과도 외교와 무역 거래를 했다는 사실은 당시 백제의 국력이 얼마나 대단했었는지를 알 수가 있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은 좁은 시야, 즉 조선반도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가 건국을 했고, 흥망성쇠를 했다는 사고가 위 단재 선생이 고증한 백제가 중국 뿐 아니라 서로 인도, 페르시아, 사라센제국 등과 외교, 통상을 했다는 사실과 얼마나 모순이 되는 지를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설마 조선반도 그것도 현대인들이 인식하고 있으며, 철썩 같이 믿고 있는 충청도와 전라도에 있었던 백제가 배, 그것도 노를 저어 나아가는 나룻배를 타고 동지나 남지나해를 진고 말라카해협을 지나 인도양을 항해하며 인도, 아라비아의 나라들과 외교를 하고 통상을 했다고 믿는다면 그처럼 비과학적,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인 사고는 없을 것이다. 위 인용문에서 단재 선생이 고증한 <대식국-사라센제국>은 현 이란의 땅에서 고대에 강대국으로 위력을 떨친 나라였다.

 

백제 뿐 아니라, 현 중앙아시아 나라들에는 고구려와 외교, 교역을 했다는 기록과 자료들이 많다. 또 이집트에도 신라와 교류를 했다는 기록과 흔적이 남아있다. 삼국사기, 다국시기의 나라들이 화하족의 나라들 뿐 아니라 동남아시아 나라들, 중앙아시아 나라들, 아라비아 나라들과 교류를 했다는 자료와 흔적들은 수도 없이 많다. 만약 고구려, 백제, 신라가 현 조선반도와 만주라는 지역에서만 그 흥망성쇠를 했다면 과연 그게 가능하겠는가에 대해 우리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사고하면서 당시 우리 조상들의 빛나는 발자취를 되찾아야 할 것이다.

- 계속

 

2017년 11월 28일

서울구치소에서 이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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